호텔 바비즌 - 여성의 독립와 야망, 연대와 해방의 불꽃이 되다
폴리나 브렌 지음, 홍한별 옮김 / 니케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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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1929년 출간된 수필집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에서 여성이 사회적 역량을 발휘하려면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하며 자기만의 독립적 공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자기만의 방』이 출간되기 1년 전부터 1981년까지 53년 동안 오직 여성들에게만 자기만의 방을 제공한 여성 전용 호텔이 있었다. 『호텔 바비즌』은 뉴욕에서 여성 전용 숙박 시설로 명성이 높았던 ‘호텔 바비즌’과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들, 그들을 둘러싼 시대를 망라하는 역사책이다.

호텔 바비즌이 문을 열었던 1920년대는 미국이 1차 세계대전의 전쟁 특수로 경제적 번영을 누렸던 호황기였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많은 여성들이 일하기 위해 대도시로 몰려왔다. 도시로 나간 딸이 여성 전용 호텔에서 묵는다고 하면 부모들은 안심했고, 도시로 온 여성 본인도 여성 전용 호텔에서는 안전한 자기만의 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수요 때문에 대도시에는 여성 전용 호텔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호텔 바비즌도 그중 하나였다. 시대적 상황이 변화하면서 다른 여성 전용 호텔들은 하나둘 문을 닫았지만, 호텔 바비즌은 50여 년 동안이나 여성 전용 호텔로 건재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여성 전용 숙박 시설로 존재할 수 있었을까? 호텔 바비즌은 젊고 매력적인 여성들이 머무는 공간이라는 이미지 때문이었다. 젊은 여성들은 독립을 향한 열망과 더 빛나는 존재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뉴욕으로 올라와 바비즌에 머물렀다. 배우 그레이스 켈리부터 타이태닉호 사고 생존자이자 여성 참정권 운동가인 몰리 브라운, 작가 실비아 플라스까지 한 시대를 빛낸 유명 여성 인사들이 한때 바비즌에서 살았다. 결국 이름을 널리 알리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각자의 꿈을 품고 뉴욕으로 왔던 수많은 여성들도 바비즌에 머물렀다. 저자는 투숙객 한 명 한 명의 일상부터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 시대적 상황까지, 미시사와 거시사를 넘나들며 20세기 미국 여성들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이 책은 바비즌에 도착해서 프런트 데스크를 통과해 자기 방에 들어가는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 뒤로 각자 다른 야망을 품었지만 같은 희망을 품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누군가의 딸이나 아내, 어머니로 머무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이 이곳에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다. 비서학교의 학생들부터 모델, 배우, 여성 잡지의 객원 편집자들까지 호텔 바비즌에 머물렀던 여성들은 각자의 분야에 자리 잡는 것을 넘어서 더 큰 명성과 성공을 얻기 위해 분투한다. 각자 분투하는 것을 넘어서, 고민을 들어주고, 성공을 축하하고, 실패를 위로하며 연대한다. 감정적인 연대를 넘어서서 일자리를 찾아주거나 함께 사업체를 세우며 실질적으로 힘을 더해준다. 부제 그대로 호텔 바비즌에서 일어났던 ‘여성의 독립과 야망, 연대와 해방’의 드라마가 독자들의 눈앞에 다시 펼쳐진다.

그러나 저자는 호텔 바비즌에 머물렀던 여성들의 희망만을 그리지 않는다. 희망만을 이야기하기에는 그녀들을 둘러싼 현실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경제 대공황 시기(1929년~1939년)에는 여성들이 남성 가장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며 눈총을 받았고, 1950년대에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백인 남성들이 권력을 휘두르면서 결국 여성의 종착지는 가정이라고 압박했다. 여성들의 평균 혼인 연령은 낮아졌고, 여성들 자신도 결혼이 안정적인 삶을 보장하는 길이라 믿었다. 바비즌의 투숙객 중에도 바비즌에 머물면서 자기 일을 하는 시기를 단지 결혼생활 전의 과도기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자신의 삶에서 가장 빛나던 시기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결혼하고 나서 다시 가정에 얽매이고 야망이 꺾인 투숙객들의 후일담은 독자들을 슬프게 한다. 저자는 그렇게 시대의 구속과 한계에 부딪히고 좌절해야 했던 여성들을 기리는 데 한 챕터를 할애한다. 이 챕터에서 그녀들을 향한 저자의 깊은 애정과 슬픔이 느껴진다.

책 속의 여성들이 시대의 한계에 부딪혔다면, 저자는 호텔 바비즌 자체의 한계에 부딪힌다. 호텔 바비즌은 여성 운동 단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업 시설이었기 때문에, ‘젊고 매력적인 백인 중산층 여성’을 주 고객으로 삼고 그중에서도 성공한 유명인사들로 호텔을 홍보했다. 그러니 이 책에서 다루는 여성 중 대부분이 젊은 백인 중산층 여성일 수밖에 없다. 그 한계를 넘기 위해 저자는 젊지 않거나 백인이 아니거나 가난한 투숙객들의 삶도 적은 분량으로나마 다루고 있다. 여성지 『마드무아젤』의 객원 편집자 공모전 지원자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스펙을 지니고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선발되지 못할 뻔했고, 선발되고 나서도 미묘한 차별을 겪어야 했던 바버라 체이스의 사례를 통해 미국 역사 속에서 지워진 비백인 여성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호텔의 이름을 빛낸 유명 투숙객들과 달리 혼자 쓸쓸히 방 안에서 자살한 투숙객들과, 어떤 성취도 이루지 못하고 노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구석의 작은 객실에 머무는 투숙객들은 호텔 바비즌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희망도 야망도 잃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투숙객들처럼 호텔 바비즌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쇠락했다. 새로운 여성 운동은 여성을 격리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여성 전용’은 낡은 개념이 되어 1981년부터 남성 투숙객을 받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 들어 바비즌은 콘도미니엄으로 재개장했지만 바비즌이 상징했던 한 시대는 분명히 끝났다. 호텔 바비즌은 지금 ‘여성 전용 숙박 시설’로서의 정체성을 잃었고, 가장 빛나던 시기에도 (주로) 백인 여성에게만 자기만의 방을 내어주었다는 한계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여성들이 자기만의 방을 갖고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주도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여전히 여성들에게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기에, 호텔 바비즌은 여성이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의 좋은 선례로 기억되고 후대의 여성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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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영원의 시계방 초월 2
김희선 지음 / 허블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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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극작가 로드 설링은 “SF(Science Fiction)는 믿기 힘들지만 가능한 것을 그리며, 사이언스 판타지(Science Fantasy)는 믿기 힘들면서 불가능한 것을 그린다”고 정의했다. 그런 점에서 김희선의 SF 단편집 『빛과 영원의 시계방』은 사이언스 픽션보다는 사이언스 판타지에 가깝다.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 미래에는 저런 일도 일어날 수 있겠지’라고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들도 있지만, 불가능하면서도 믿기 힘든, 아니,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 본문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현실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루하고 답답하고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견고하기 때문에 우리가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견고하게만 보였던 현실에 난 균열을 발견한다. 그 균열을 추적하다 보면 발밑을 단단하게 받치고 있던 현실 자체가 뒤집힌다. 비로소 알게 된 진실은 모르는 게 더 나았겠다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고 경악스럽다. 내가 단편 속 주인공들이라면 내가 잘못 본 거라고 무시해 버리거나 잊어버리고 현상 유지만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느 게 진실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 호기심에 손을 뻗어볼 것이다. 이런 공포와 매혹이 책 전반을 지배한다. 가가린이나 월명사처럼 유명한 실존 인물, 독재 정권 시절을 힘겹게 살아가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 같은 현실적인 요소들은, 이 기묘한 이야기들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그래서 ‘뭐 어차피 다 지어낸 이야기인데’ 하고 안전한 현실로 돌아오려는 독자들의 발목을 붙잡는다.


  그러니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떤 진실이 드러날지 두려우면서도 궁금해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소설을 읽게 된다. 그런데 책 속 단편들 중 대부분이 뭔가 더 일어날 것 같은 데서 끝난다. 누군가 ‘쌀 한 바가지를 쏟았는데 다 냉장고 밑으로 들어가 버린 것 같은 느낌’이라고 이 책을 평했는데, 그 표현이 딱 맞는다고 느꼈다. 진실의 전모를 밝히지 않아 더 많은 상상과 공포, 신비감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뒤로 이야기를 더 풀어갔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장편으로 발전시키면 좋지 않을까 싶은 단편들도 있다. 이야기 자체는 흥미롭게 전개되지만, 정작 발단 부분에서 멈춘 느낌이라 호불호는 갈릴 것 같다.


  이런 아쉬움 때문인지 각 단편들을 연결해 보게 된다. 각기 다른 곳에 실렸던 단편들을 다시 모은 단편집이라, 각 단편들이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현실,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가 믿고 있는 것만큼이나 확고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작가의 태도는 모든 단편을 관통한다. 그런 데다 같은 등장인물(로 보이는 인물)이 화자로 등장하거나 소재가 겹치거나 비슷한 상황이 일어나는 단편들이 있으니, 책 속 단편들 모두가 작가가 만든 거대한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아예 연작으로 만들거나 연결 고리를 조금만 더 넣었어도 흥미롭지 않았을까 한다. 몇몇 단편들의 공통된 화자인 ‘민간조사관(외국에서는 사립 탐정이라고 한다)’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를 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작가가 그렇게 못다 푼 이야기를 마저 풀어주지 않는다 해도, 각 단편에서 미처 다 풀리지 않은 이야기들은 ‘공간 서점’ 밑바닥에 숨은 진실처럼 책 속 어딘가에 숨어 자기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P. S. 1. 「꿈의 귀환」에서 가가린과 몰로디노프가 서로의 이름에 부칭을 붙여서 부르는데, 러시아인들의 언어 습관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다. 러시아인의 이름과 성 사이에는 누구의 아들/딸임을 나타내는 호칭인 ‘부칭(父稱)’이 붙는데, 아버지의 이름이 ‘알렉산드르’인 남자는 ‘알렉산드로비치’, 여자는 ‘알렉산드로브나’, 아버지의 이름이 ‘니콜라이’인 남자는 ‘니콜라예비치’, 여자는 ‘니콜라예브나’인 식이다. 서로 예의를 차려야 하는 사이인 사람이나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대할 때, 상대방의 이름에 부칭을 붙여 상대방을 부른다(예: 유리 알렉세예비치, 소피아 세묘노브나). 가가린과 몰로디노프는 피실험자와 실험자로서 공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처럼 부칭을 붙여서 상대방을 부르는 것이 맞다. 예전에 한 미국 작가의 단편에서 소련 정보요원이 상관을 부를 때 부칭을 붙이지 않는 것을 보고 몰입이 깨졌으니, 이런 디테일을 신경 쓰는 편이 좋다.

그런데 「오리진」에서 『고백록』의 저자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라고 하는데, 『고백록』의 저자는 고대 로마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다. 저자가 혼동한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명백히 틀린 정보를 적은 것인지 모르겠다.


P. S. 2. 뒤표지에 실린 각 단편의 한 줄 소개에 스포일러가 있다. 뒤표지는 본문을 읽은 다음에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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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여행 - 들뢰즈 철학으로 읽는 헬레니즘
김숙경 지음 / 그린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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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할 때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영국 화가와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철학 이론을 접목해 과제를 작성했었다. 내 과제 발표를 보고 나서 교수님은 ‘너 이거 이해 못 했구나’라고 말씀하셨다. 교수님 말씀대로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짜깁기했을 뿐이었고, 결국 주제를 바꿔서 과제를 다시 작성해야 했다. 그 이후로는 들뢰즈라면 겁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은 들뢰즈의 이론으로 헬레니즘 미술과 실크로드 미술을 바라본다고 한다. 그래도 미술사는 내 전공이고 고대 문명도 내가 좋아하는 분야니, 그 둘을 당의정으로 삼는다면 들뢰즈라는 쓴 약도 소화해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1부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로와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유입된 그리스 신들의 변신을 살펴보고, 2부에서는 1부의 내용을 들뢰즈 철학의 관점으로 다시 읽는다고 했다. 그럼 적어도 1부는 이해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랬으니, 한 문단, 한 페이지를 읽을 때마다 ‘그래, 이건 이해했어’라고 마음속으로 확인한 뒤 다음 문단,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다행히 1부의 내용은 무난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려는 본론은 2부지만 사실 1부가 이 책의 3분의 2를 차지하니, 3분의 2는 일단 확보했다. 1부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 원정을 시작할 때부터 한중일 3국에 불교가 전해질 때까지, 그리스 신들이 헬레니즘 미술과 실크로드 미술, 둘에 영향을 받은 유라시아 각 나라의 미술 속에서 어떻게 변화했는지 정리한 것이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처럼 당시 역사와 문화의 흐름을 간결하면서도 명쾌하게 설명하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스 신들의 원형과 헬레니즘, 실크로드, 유라시아 각 지역에서 변형된 모습을 나란히 배치했다(도판의 화질이 떨어지고 도판 설명도 글씨가 너무 작은 것은 아쉽지만). 그런 데다 그리스의 어떤 신은 부처를 호위하는 부하로 전락했고, 어떤 신은 날개가 있어 천산산맥 너머 동쪽으로 멀리 날아갔다는 식으로 의인화하니 설명하는 내용이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사실 중요한 건 2부인데 들뢰즈 이야기는 2부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니 1부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 읽었다. 저자가 말하는 들뢰즈 철학의 개념과 용어 들은 낯설었다. 하지만 저자가 유목 민족과 정주 민족, 그리스 신들과 그들이 헬레니즘 미술과 실크로드 미술, 유라시아 각 지역의 미술 속에서 변화한 모습을 예시로 들고, 비유를 들면서 반복해서 설명하니 이해할 수 있었다. 찬찬히 읽어보니, 저자가 헬레니즘 미술과 실크로드 미술 속에서 변화해 간 그리스 신들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바는 단순하고 명쾌했다. 들뢰즈는 모든 존재를 끊임없이 변화하며 새로운 것을 생성해 내는 존재로 보았다는 것. 그리스 신화의 신들도 불교라는 거대한 중심 뿌리의 위계질서에 붙잡혀서든, 타림 분지 내로 흘러들어 온 다양한 문화와 자유롭게 접속해서든, 겉모습도 본질도 부단히 변화했다는 것. 그러니 문화 또한 한 가지 원형으로 굳어버린 유산이 아니라 무한히 변화해 가는 생명이라는 것. 이렇게 2부도 무사히 내 나름대로 소화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들뢰즈의 개념들은 들뢰즈의 철학 이론 중 일부지만, 그래도 이 책 덕분에 그 일부는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다. 헬레니즘 문명과 실크로드 문명은 중학교 때부터 알고 있던 것들이었지만 들뢰즈의 철학적 개념과 용어로 다시 보니 신선하게 느껴졌고. 들뢰즈 철학 쪽으로나 문명사, 미술사 쪽으로나 아주 깊이 들어가진 않지만, 에로스의 날개나 보레아스의 바람을 타고 그리스로부터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여행한 기분이다. 찬찬히 읽으며 책 전체를 소화하고 나니 그 여행을 무사히 마친 것 같아 안도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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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운 역사 콘서트 - 역사가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 50
그레그 제너 지음, 서종민 옮김 / 상상스퀘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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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책의 제목이 왜 『경이로운 역사 콘서트』일까요?

A왜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 정확한 이유는 한국어판 편집자와 번역자와 출판사가 알겠지만, 저는 짐작이라도 해보겠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역사학자에게 물어보세요(Ask a Historian)』입니다. 부제는 '역사가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 50'으로 영어 부제 '당신이 알고 싶었던 것에 대한 50개의 놀라운 답(50 Surprising Answers to Things You Always Wanted to Know)'과 비슷합니다. 부제로 이 책의 정체를 알 수 있죠. 영국의 대중 역사가인 저자가 사람들에게 받은 역사 관련 질문 중 50개를 가려서, 그에 대한 답변들을 모아 책으로 만든 겁니다. 사실 원제에도 '콘서트'라는 단어는 없고 딱히 '콘서트'라는 단어를 넣을 이유도 없는데 제목을 'ㅁㅁ 콘서트'로 짓는 책들이 너무 많다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전작의 북 콘서트를 열려다 코로나 팬데믹이 오는 바람에 취소하고, 온라인 설문으로 받은 질문들을 토대로 이 책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북 콘서트 대신 만든 책이니 '역사 콘서트'라는 제목을 붙이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Q. 이 책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A무엇보다 재밌다는 겁니다. 내용이 흥미로운 거냐, 그 내용을 전달하는 저자의 입담이 좋은 거냐, 묻는다면 둘 다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후자가 가장 큰 매력이자 강점입니다. 저는 제가 영미권 유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걸어다니는 어원 사전』과 『이상한 나라의 여행기』에 이어 이 책에서도 저자가 웃으라고 쓴 문장마다 빵빵 터졌으니 사실은 제가 영미권 유머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니면 머나먼 한국까지 번역 출간될 정도면 자국에서부터 책을 꽤 많이 판 저자일 테니, 저자의 글 솜씨와 유머 감각이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을 정도로 뛰어나다고 봐야겠죠. 다른 번역자가 번역한 전작 『소소한 일상의 대단한 역사』(와이즈베리, 2017)는 한국인 독자들로부터 '쓸데없는 농담'에 '영국인만 웃길 것 같은 유머'라는 평을 얻었는데, 저자의 유머 감각이 몇 년 사이에 일취월장했거나 이 책의 번역자의 센스가 좋은 것 같습니다. 전작과 달리 이 책은 이야기하는 듯한 경어체로 번역돼서 문화적 차이로 생기는 이질감을 완화해 준 것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반말로 하면 불쾌할 이야기도 정중한 말투로 하면 좀 나으니까요. 사적인 얘기도 꽤 많이 하는 편인데(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어머님이 프랑스인이고 저자의 사춘기 시절 중2병 때문에 꽤 고생하셨다는 것과 저자의 어린 딸이 유인원처럼 음식을 바닥에 내리쳐 먹는 걸 좋아한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자가 멜 깁슨을 무척이나 싫어한다는 것도요) 그게 꽤 웃긴 데다가 역사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거슬리지 않습니다. 남의 애 얘기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는 저에게도 거슬리지 않았지만,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을 것 같긴 합니다. 일단 저는 호입니다.

웃기는 책이어서 흥미 위주의 엽기적이고 선정적인 일화들만 모아놓은 책일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알찹니다. '시대 이름은 누가 정하나요?'라는 질문에서는 역사학의 방법론에 대해 꽤 진지하게 고찰하고, '영화 속에서 역사적으로 잘못된 점이 보이면 짜증이 나시나요?'라는 질문에는 "정확성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대중 문화를 검열해서는 안 되지만, 백인 우월주의와 신나치주의 같은 해악을 낳을 수 있는 위험한 역사 왜곡은 경계해야 된다"는 균형 잡힌 답변을 제시합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들 중 가장 부자였던 사람은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에는 당시의 재화 가치뿐 아니라 당시 개인의 평균 수입, 국가 전체 GDP에서 그 사람의 재산이 차지했던 비율 등 다양한 기준으로 재산을 추정해 보는 등, 신중하고 꼼꼼하게 답변을 도출해 내고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영국사와 서양사 위주로 답변하고, 잘 모르는 동양사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 자세도 좋다고 봅니다. 공자님도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과거에 사람들이 어떤 억양으로 말했는지 알 방법이 있나요?'에 대한 답변에서는 영어의 변천사를 꽤 훌륭하게 요약 정리했습니다. 제1세계의 백인 남성, 대영 제국의 후예치고는 자국과 유럽 국가들이 저지른 과실도 여과 없이 드러내고 비난하고, 정치적 올바름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맘 편히 읽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죠.

Q. 이 책의 아쉬운 점은 무엇인가요?

A많이 거슬린다기보다 '이건 좀'이라고 느낀 부분이 몇 군데 있습니다. 하나는 일본의 '오하구로(이를 검게 물들이는 풍습)'를 이야기하는 부분인데, "게이샤를 비롯한 특권층 여성이 하얗게 칠한 얼굴과 검게 물들인 눈썹, 붉게 칠한 뺨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게이샤를 비롯한 특권층 여성"이라뇨. "게이샤와 특권층 여성들"이겠지요. 일본의 게이샤나 한국의 기생이나 사회에서는 특권층은커녕 낮은 계층이었지만 남성들을 접대하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특권층 여성들만큼이나 화려하게 치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관한 글을 쓸 때는 전치사 하나도 조심해서 써야 합니다.

그리고 봉화는 사실상 직접 불을 질러 울리는 화재 경보기나 다름없었고, 봉화로는 한 가지 소식밖에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 후한 시대에는 불의 개수에 따라 5단계로 적의 수와 현재 위치를 알렸고, 조선의 봉수 체계에서도 1개부터 5개까지 불의 개수로 평상시/적군 출현/적군 국경 접근/적군 국경 침입/적군과 교전 중이라는 다섯 가지 상황을 알렸습니다. 동양사여서 저자가 잘 몰랐다고 하기에는 서양에서도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플리비오스가 알파벳을 보낼 수 있는 봉화 체계를 만든 예가 있습니다. 저자나 이 책을 감수한 다른 역사학자들이나 이 점을 놓친 것 같은데, 신도 책의 모든 오류를 잡아낼 수는 없다니 이해는 합니다.

번역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로마 제국의 황후들이었던 아그리피나와 메살리나를 '황후'로 번역해야 하는데 '여제'로 번역한 부분, 무게 단위 '그레인'(1그레인=약 64.8mg)을 '밀알'로 번역한 것 같은 부분, 메리 1세가 다섯 명의 양어머니들을 거쳐야 했다는데 '계모'가 더 적절해 보이는 부분, '재산을 마 단위로 전시한다', '비밀 붉은 막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저자의 유머 감각을 대체로 잘 살렸으니 이런 소소한 오류들은 넘어갈 만합니다.

Q.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질문은 무엇인가요?

A '가장 고증이 잘된 역사 영화는 무엇인가요? 영화 속에서 역사적으로 잘못된 점이 보이면 짜증이 나시나요?'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역사학자들에게 하는 흔한 질문이긴 한데, 좋아하는 역사 드라마들이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일 때마다 고민했던 지점들을 저자가 명확하게 짚어줬거든요. 과거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영화가 <몬티 파이튼의 성배>라는 저자의 답변도 기가 막혔습니다. 중세 영국이 배경인데 살인마 토끼가 등장하고 평범한 농민이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논하는 황당한 영화인데, 저자는 일부러 틀린 이야기를 하려면 그에 앞서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영국인다운 유머 감각이 드러나는 선정이라고 느꼈습니다. 이런 멋진 답변을 이끌어 낸 질문이어서 마음에 듭니다.

Q. 이 책에서 가장 황당했던 질문은 무엇인가요?

A '앤 불린은 정말 유두가 세 개였나요?'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질문자의 역사 선생님이 이런 이유로 앤 불린이 재판에서 마녀 선고를 받았다고 했답니다. 아마 초중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이었을 텐데 아이들에게 이런 선정적이고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건가요. 저자는 확실히 앤 불린의 유두는 세 개가 아니었고, 살아생전 마녀로 몰린 적이 없다며, 앤 불린에 대한 편견과 낭설들을 반박하고 더 공정한 시각으로 그녀를 바라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칭기즈 칸은 정말 가는 데마다 나무를 심었나요?'라는 질문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듣고 한 질문인가 했는데, '칭기즈 칸은 친환경 군주'라는 농담을 듣고 오해한 것 같습니다. 칭기즈 칸은 나무를 심어서가 아니라 환경 파괴의 주범인 인간들을 수없이 죽여 '친환경 군주'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의 호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칭기즈 칸이 죽인 사람 수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칭기즈 칸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는 요소 하나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칭기즈 칸의 방식이 지구를 구하는 최선의 방법은 아닐 거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Q. 이 책에서 가장 유용했던 답변은 무엇인가요?

A'최초의 석기는 단순한 돌멩이와 어떻게 구분하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습니다. 저자는 석기가 돌멩이와 구분되는 특징을 여섯 가지로 정리해 주었습니다. 제가 고고학자는 아니지만 예전부터 저도 알고 싶었던 것이라 알게 되니 후련했습니다. 다음에 박물관에 갔을 때는 이 특징들이 석기에서 보이는지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Q. 저자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 있다면?

A "가족들과 이야기하다 역사에 관해 논쟁이 일어날 때 어떻게 해결하시나요?"입니다. 본문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했고, 사춘기 시절 아쟁쿠르 전투(백년전쟁 당시의 유명한 전투)를 놓고 어머니와 신경전을 벌였다고 했습니다. 아마 심정적으로는 영국 쪽에 기울어져 있는 거 같은데, 지금은 역사에 대해 어머니와 이야기할 때 어떻게 논쟁을 해결하는지 궁금합니다. 원만한 해결법이 있다면 한국과 일본 혼혈 가정처럼 역사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다문화 가정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 독자들을 위한 Q & A

이 책에 실린 질문들을 한국 버전으로 수정했고, 답변은 제가 자료를 찾아서 작성했습니다.

Q.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월요일은 언제였나요?

A요일로서의 월요일이라면 갑오개혁으로 태양력과 요일제가 도입된 1896년 1월 7일(1896년 1월 1일 수요일로 태양력과 요일제를 시작했습니다)이지만, 한 주기의 출근 첫 날로 따지자면 관료제가 시작된 삼국시대의 어느 하루가 아닐까 합니다. 관리 외의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 쉬었는지 알 수 없지만, 관리들은 회사원처럼 정해진 주기 동안 일하고 정해진 휴일에 쉬었으니까요. 조선시대 관료들은 매달 1, 8, 15, 23일에 쉬었다니 일주일에 한 번은 쉬었던 셈입니다.

Q. 20세기 이전의 한국 여성들은 생리를 어떻게 처리했나요?

A 조선시대에는 '개짐'이라는 천 생리대를 착용했다고 합니다. 개짐은 달거리포, 월경포로도 불리며 주로 하얀 광목 천으로 만들었습니다. 딸이 초경을 시작하면 어머니가 개짐을 물려주며 어떻게 사용하고 빨고 관리하는지 설명해 줬습니다. 그 이전에도 비슷한 생리대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한국에서 지금과 같은 형태의 일회용 생리대가 보편화된 것은 1970년대가 되어서였습니다.

Q. 한국에서 거울이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인가요?

A청동기 시대에 청동 거울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유리 거울은 1883년 인천에 판유리 공장이 설립되면서부터 사용되었습니다.

Q. 한국에서 청각장애인들이 수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인가요?

A이전에도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하긴 했지만 수어를 사용해 대화를 하기 시작한 건 1909년 최초의 농학교인 평양맹아학교가 설립되었을 때입니다. 미국의 선교사인 로제타 셔우드 홀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농아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홀은 한국인 이익민과 그의 조카를 중국 최초의 농학교인 체후농학교에서 연수하게 했고, 이익민과 조카는 농학교를 운영하며 수어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 뒤 1913년 조선총독부가 세운 농학교 제생원에서는 일본 수어를 사용했지만 1935년에는 이창호 목사가 평양에 개교한 평양광명맹아학원에서 학생들에게 조선 수어를 가르쳤습니다. 독립 이후에는 1982년 국내 최초의 표준 수화 사전이 만들어졌고, 1991년에는 교육부에서 한글식 표준 수화를 발행했습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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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제10회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단편 수상작품집
이승훈 외 지음 / 마카롱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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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도 등단하지 않은 사람들이 주로 이 공모전에 응모할 테니 완성도를 걱정했는데,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 모두 문장과 구성이 깔끔했다. 심사평을 쓴 두 심사위원 모두 문장력이 부족한 작품들이 많았다고 지적한 것을 보면, 수천 편의 응모작 중 고르고 고른 다섯 편이기에 문장과 구성 같은 기본은 충분히 갖추었다. 작품성이 준수한 단편 드라마들을 소설로 읽는 느낌이라, 비슷한 소재의 작품끼리 묶어 옴니버스 드라마로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다. 다섯 단편에 대한 각각의 감상을 간단히 적어봤다.


이승훈-야구 규칙서 8장 '심판원에 대한 일반 지시'

  스포츠라고는 축구 A매치만 보고 야구는 전혀 모르는 문외한이라 이 단편을 이해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다행히도 야구를 잘 몰라도 줄거리와 작가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하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하지만 야구를 잘 알았다면 주인공과 FF-001이 그토록 야구를 사랑하는 이유에 더 깊이 공감하고, 마지막 승부 판정에서의 긴박감을 더 잘 느꼈을 것 같다. 이야기 전개는 전형적인데 깔끔하다. 작가가 의도한 것만큼은 결말에서 감동을 느끼지 못했는데, 내가 스포츠에 큰 애정이 없어서 잘 공감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작가가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하고 어떤 요소로 감정을 이끌어 낼지 예상이 되었고, 그 예상대로 소설이 전개되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김단한-울다

  밤바다처럼 고요하고 차분하다. 문장에는 군더더기가 없고, 물결 뒤에 물결이 이어지듯 SF와 SF가 아닌 부분이 이질감 없이 매끄럽게 이어진다. 순향과 울다의 캐릭터나 각자의 서사, 유대 관계를 담백하게 그려내면서도 여운을 남긴다. 그런데 제주도의 해녀를 소재로 한 소설이면서 제주도 방언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이 의외다. 순향은 제주가 고향이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제주에서 자랐고, 해녀 삼촌들은 제주 토박이일 텐데. 어설프게 방언을 쓰느니 아예 표준어로만 대사를 쓰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지만, 제주 방언을 살려서 대사를 썼으면 제주 특유의 분위기와 현장감을 더 잘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전반적으로는 깔끔하게 잘 빚어진 작품이다.


고반하-인간다운 여름

  SF 청춘 로맨스라고 할 수 있는데 주인공들이 겪는 현실은 만만치 않아서 씁쓸한 맛이 강하다. 이야기의 재미와 감동, 메시지를 다 갖췄는데 인간다움, 사랑, 우정 세 가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그 세 가지를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이 모두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인간으로서 인간이 아닌 이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함서경-too much love will kill you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고 난 후의 한국 사회를 꽤 현실감 있게 그리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처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겪은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디테일이다. '나'와 '앞집 남자'가 서로를 마음에 담게 되는 감정선이 섬세하게 그려져 몰입하게 됐다. '나'가 볼 수 없는 상황을 그려내기 위해 시점을 여러 번 바꾸는데, '나'의 감정과 시각에서 빠져나와 상황 자체를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에 필요한 장치였다고 생각한다. 시점이 여러 번 바뀌면 글이 산만해지기 쉬운데,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이 좋아서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피와 살점이 튀기는 이야기인데도 이렇게 고요하고 가슴 먹먹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 중 가장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강솟뿔-여보, 계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 중 유일하게 장르 소설이 아니다. 다섯 편 중 세 편이 로봇과 관련된 소설이라 이 단편에서도 주인공이 로봇 닭이라도 키우나 했는데, 나머지 네 편과 달리 일상의 단편을 뚝 떼어 온 듯한 작품이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을 그린 소설의 21세기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장기하의 노래 <싸구려 커피>의 눅눅하고 구질구질한 분위기를 소설로 그린다면 딱 이 소설 같을 것이다. 암울한 현실을 블랙코미디로 승화하는 유머 감각도 괜찮은 편이다.


그런데 심사위원 정해연 작가는 심사평에서 이 단편이 캐릭터가 살아 있는 작품이라고 했지만 그 평은 남자 캐릭터들에게만 해당한다. 이 단편에서 남자 캐릭터는 계속해서 재기를 꿈꾸지만 실패하는 영화 감독과 같은 이유로 방황하고 있기에 누구보다 그를 잘 이해하면서도 동족 혐오를 보이는 친구, 현자같이 지혜롭고 인생 경험이 많아 주인공을 도와주는 선배, 기회주의자 스타 배우까지 다양하지만 여자 캐릭터들은 그저 남자 캐릭터들의 암울한 현재와 더 암울해 보이는 미래를 참다 못해 현실을 찾아가는 여자친구들일 뿐이다. 현실의 여자가 아니라 많은 노래와 소설 속의 '나를 버리고 더 조건 좋은 남자한테 가버린 나쁜 여자'를 소설 속에 옮겨놓은 것 같다. 수십 페이지밖에 안 되는 단편이어서 어쩔 수 없다고 하기에는 바로 앞에 실린 「too much love will kill you」가 한두 장면만으로도 두 여자 캐릭터의 매력과 개성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게다가 오래 사귀었고 정이 많이 들었다는 이유로, 미래에 대한 대책이 전혀 없는 남자친구와 결혼하겠다고 (임신하려고) 콘돔도 없이 관계를 가지려고 먼저 달려드는 여자친구 캐릭터는 비현실적이다.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을 걱정하는 여성들의 현실을 생각하면, 내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고 미래도 없어도 내가 좋다고, 내 아이를 갖고 싶다고 먼저 내게 달려드는 여자는 판타지다.


반려 닭 '여보 계'와의 우정이 더 전하게 그려졌으면 좋겠다는 심사평에도 공감하지만, 이 소설에서 여보 계 자체가 주인공에게 소중했다기보다는 주인공에게 삶의 의지를 이끌어 내는 매개체였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앞에서 말한 납작한 여성 캐릭터가, 생각보다는 약한 여보 계와의 우정보다 더 큰 문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책에 실린 다섯 단편 중 가장 아쉬웠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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