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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바바라 스톡 지음, 이예원 옮김 / 미메시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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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군에게

  올해도 벌써 반이 지나가고 있어. 지난 번에는 네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게 돼서 반가웠어. 친구라면서 힘이 되어주지 못한 게 미안했고. 나 자신도 그렇게 굳건하지 못한 상태거든. 그래도 다른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

   불안하고 막막할 때 나는 반 고흐를 생각해. 늘 동생에게 신세만 지고 있고 그림은 팔리지 않아 불안해하면서도 "이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여주겠다"고 말했던 반 고흐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던 그와, 한없이 게으른 나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그에게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나 또한 보잘것없는 내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걸 펼쳐보고 싶어. 그래서 유독 반 고흐에 대한 책들에 끌려. 


 이 책도 반 고흐의 삶을 그린 만화라는 점에서 끌렸어. 화려하거나 과장된 그림체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 만화의 그림체는 단순하고 아기자기하다는 점에 더 끌렸고. 사람들은 보통 반 고흐하면 소용돌이치는 듯한 강렬한 그림체를 생각하잖아. 그래서 이 만화의 단순한 그림체가 반 고흐의 강렬함을 전달하기에는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야. 하지만 내게는 반 고흐의 강렬한 삶을 단순한 그림체로 그렸다는 것이 신선하게 느껴졌어. 단순해서 오히려 한눈에 살펴보기에 더 좋고.

  그림체는 단순하지만 색채는 반 고흐 그림 속의 색채만큼이나 밝고 화려해. 반 고흐 그림의 짧은 붓터치에서 따온 듯한 점과 짧은 선들로 반 고흐의 감정을 표현한 것도 인상적이야. 점들과 짧은 선들만으로도 반 고흐의 휘몰아치는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게 신기해.

  그리고 컷마다 숨어 있는 반 고흐의 작품들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어. 단순화되고 축소되어 만화 속에 숨은 반 고흐의 작품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실제 집을 모델로 한 인형의 집처럼 원본과 닮아 있으면서도 아기자기해. 실제 작품이 컷 옆에 있었다면 비교해 볼 수 있어서 더 좋았겠지만. 

  이 만화는 그림체뿐만 아니라 내용도 간결해. 반 고흐가 가장 강렬하게 빛나는 그림들을 그렸던 아를 시기부터 생레미의 정신병원에서 지내며 그림을 그리던 시기, 오베르에서 마지막 그림들을 그리던 시기, 이 세 시기만을 다루고 있거든. 반 고흐에 대한 지식을 쌓으려고 이 만화를 본다면 아쉬울 거야. 하지만 나는 이 만화가 반 고흐의 삶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는 반 고흐의 인생에서 가장 강렬했던 순간들을 포착한 만화라고 생각해. 반 고흐가 기뻐하고 슬퍼했던 순간들을 단순히 그림과 글로 옮겼다기보다는 자기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재해석했다는 게 마음에 들어. 반 고흐의 팬으로서 옆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펼쳐보고 싶은, 사랑스러운 만화 평전이야. 

  그리고 반 고흐를 다룬 다른 책들이 그렇듯 이 만화 또한 내게 위안이 돼. 네가 뿌리 없는 나무를 그렸었던 걸 기억해. 의사는 그 나무 그림을 보고 네가 지금 뿌리내리지 못한 나무처럼 불안한 상태라고 했었어. 나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돌고 있어. 다른 사람들한테는 뿌리내리고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이 이토록 자연스러운데, 우리한테는 왜 그리 어려운 일일까. 빈센트도 우리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어. 그런 빈센트에게 만화 속 테오가 한 말이 기억에 남아.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우리는 쟁기를 끌 거야.
그리고 함께 경이에 찬 눈을 돌려 데이지꽃과 
새로이 갈아엎은 흙덩이와 
봄에 싹 틔우는 관목 가지를, 
청명한 하늘의 고요한 푸른빛을,
가을의 뭉게구름을, 겨울의 헐벗은 나무를, 
저 태양과 달과 별을 바라보자.

앞날은 예측 못할지언정, 
그것만큼은 온전히 우리 몫으로 남을 테니. p. 132.


오베르의 언덕에 함께 서 있는 테오(왼쪽)와 빈센트(오른쪽)


  쟁기를 끄는 건 아니지만, 우리도 숨이 다할 때까지 우리의 일을 하겠지. 그리고 때로는 눈을 들어 꽃과 나무, 뭉게구름과 태양, 달, 별을 바라보자. 우리 또한 우리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지만, 그것만큼은 온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을 거야. 그렇게 한 순간 한 순간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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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 프로젝트 - 남자들만 모르는 성폭력과 새로운 페미니즘 푸른지식 그래픽로직 5
토마 마티외 지음, 맹슬기 옮김, 권김현영 외 / 푸른지식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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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 사회 전반에서 미투(#MeToo)’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SNS에서 미투 해시태그(#MeToo)를 달고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는 미투 운동은흑인 여성 사회운동가 타라나 버크(Tarana Burke)가 2006년 시작한 캠페인이다처음에는 성범죄에 취약한 유색인종 여성과 청소년을 위해 시작된 운동이었지만, 2017년 10월 헐리우드의 유명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 행각이 폭로되면서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우리나라에서도 지난 1월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의 성폭력 실상을 고발하면서 미투 운동이 사회 전 영역으로 번져나갔다그만큼 사회 전반적으로 성폭력이 만연해 있다는 이야기다살아가면서 성폭력을 한 번도 당하지 않은 여성이 얼마나 있을까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여러 번 있다프랑스의 만화가 토마 마티외가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성폭력과 성차별을 적나라하게 그린 만화 악어 프로젝트』 는 이런 시점에서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만화 속에서 악어로 그려지는 가해 남성들. 인간이 아닌 악어로 그려져 더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악어 프로젝트』 의 가장 특이한 점은 성폭력을 휘두르는 남성들이 모두 악어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다 흑백의 만화에서 악어 남성들만 초록색으로 그려져 더 두드러져 보인다작가는 왜 남성들을 악어로 그렸을까작가는 말한다그림으로 옮기고 싶었던 것은 바로 여성의 관점에서 본 현실이라고작가 자신은 남성이지만 여성 지인들과 여성 네티즌들에게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성차별과 성폭력에 관한 경험담을 들려달라고 부탁했고그 경험담을 그림으로 담았다악어는 남성 개인이 아닌 남성우월주의성차별남성의 어긋난 성적 욕망성폭력을 휘두르는 남성에게서 여성이 느끼는 두려움이다독자는 사람의 모습으로 그려진 여성에게 감정이입하며 여성이 악어들에게서 느끼는 두려움과 분노즉 성폭력으로 인해 느끼는 고통을 체험하게 된다. 


<악어 프로젝트>에서는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성폭력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독자들이 피해자의 수치심과 분노, 고통을 함께 느끼게 한다.


  이 만화에서는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성폭력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여성들은 길거리에서 남성들의 시선에 노출되고성적으로 수치심을 주는 말을 듣는다수영장 탈의실에는 몰래 훔쳐보는 남자들이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는 몰래카메라가 숨어 있다대중교통에 함께 타고 있는 승객에게 성추행당하고직장에서는 성관계를 가지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는 말을 듣는다가장 가까운 존재인 연인마저 데이트 강간을 한다그 모든 폭력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져 만화를 보는 나까지도 치가 떨릴 정도였다이렇게 실제 상황에서 오가는 욕설과 성적 행위들을 있는 그대로 그렸기 때문에 이 만화는 2014년 프랑스 툴루즈에서 개최된 세계 여성 폭력 추방의 날’ 기념 전시회에 초청되었다 취소되기도 했고프랑스의 한 정치인에게 저속하고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그러나 저속하고 비도덕적인 것은 이 만화가 아니라 이 만화가 그려지게 만든 현실현실 속의 악어들이다. 


<악어 프로젝트>에서는 성폭력에 대응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만화로 설명한다.


 작가는 단순히 성폭력 피해 경험담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성폭력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 방법들을 만화로 친절하게 설명한다. 가해자에게 자신의 행동이 성폭력임을 빨리 인지시키는 것폭언과 위협을 할 때 경찰에 신고하는 것사소한 성폭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경험이 더 큰 위험이 닥쳤을 때 잘 극복할 수 있는 거름이 된다는 것무엇보다 이렇게 대응하지 못했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는 없다는 것모든 잘못은 가해자에게 있으니그리고 우리가 성폭력에 대해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지 이야기하는 페미니스트들의 글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단순한 고발에 그치지 않고어떻게 성폭력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독자들에게 고민할 단초를 던지는 것이다

악어 탈을 스스로 벗는 남성과, 남성이 악어 탈을 벗을 수 있도록 돕는 여성.


  이 만화의 마지막 장면은 남성이 스스로 악어 탈을 벗고여성이 악어 탈을 벗는 것을 도와주는 장면이다이 마지막 장면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우리가 바라는 것은 다른 성별을 적대시하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고악어들이 아닌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려는 것이라고. 번역 후기에서 번역자가 말했듯이 이 만화는 적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통합에 대한 이야기이다. 


* 더 읽어볼 만한 글:  한국판 악어 프로젝트 시리즈 기사
(http://www.womennews.co.kr/news/97744)

  여성신문과 작가 토마 마티외가 2016년 8월 29일부터 함께 진행했던 ‘한국판 악어 프로젝트'로 모집된 사연들을 정리한 기사이다. 프랑스가 아닌 바로 이곳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겪는 성차별과 성폭력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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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진 1. 보온 - 세상 모든 것의 기원 오리진 시리즈 1
윤태호 지음, 이정모 교양 글, 김진화 교양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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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생의 윤태호 작가가 4년 만에 신작을 내놓았다이번에는 교양 만화다그것도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모든 것의 기원(오리진)’을 100권의 만화로 그려내겠다는 거대한 시리즈다한 권에 한 주제씩을 다룰 예정이라는데첫 번째 권의 주제는 보온이다왜 수많은 주제 중에서 보온을 첫 번째 주제로 삼았을까?


  윤태호 작가와 함께 첫 번째 권을 맡은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은 보온이 세상 모든 것의 기원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인간을 비롯한 생명은 열이 있는 곳에서 기원했고일정한 온도 범위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다른 누군가가 보살피고 온도를 유지해 주었기 때문에인간을 비롯한 생명들이 지금까지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윤태호 작가와 이정모 관장에게 보온은 다른 누군가를 보살피는 마음, 즉 인간다움이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미래에서 보내진 로봇 '봉투'


  작가는 1권에서 보온을 통해  인간다움’을 이야기하려 한다. 먼 미래에 과학기술의 발달로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되면서 사람들은 오히려 삶의 의미를 잃게 된다삶의 의미를 다시 찾기 위해 미래에서 21세기로 파견된 로봇 봉투시공간의 경계를 넘을 때의 충격으로 연민이라는 인간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봉투가 처음 보여준 인간적인 행동은 추위에 떠는 길고양이들과 과학자들을 따뜻하게 해준 것이었다그리고 인간에 가까워지기 위해 자신이 버틸 수 있는 온도를 인간이 버틸 수 있는 온도로 맞춘다.(“같은 따스함이면 너와 같아질 수 있을까.”(p. 198.)) 이렇게 인간 못지않게 인간적인 봉투는 사랑스럽고 따뜻한 캐릭터이다캐릭터 디자인 또한 독자들의 마음을 끌 만큼 귀엽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인 메시지와 봉투 캐릭터의 매력 외에다른 교양 만화와는 차별되는 장점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윤태호 작가는 이 책에서 지식과 정보는 수단일 뿐이라고 했지만 1권에서의 지식의 깊이는 너무 얕다. 봉투와 과학자들이정모 관장이 전달하는 지식은 초등학생 대상 교양서적 수준의 지식이다. 또한 윤태호 작가의 만화와 이정모 관장의 설명은 아예 분리되어 있어 만화 부분과 설명 부분은 서로 다른 책처럼 느껴진다. 이정모 관장의 설명이 만화 중간 중간에 들어가서 만화와 설명이 더 자연스럽게 섞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그리고 보온을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도 다른 인간들뿐 아니라 지구의 온도를 지켜서 지구 위의 모든 생명과 함께 살아가자는 것인데수많은 환경 관련 서적들이 이야기하는 메시지와 다르지 않다한 권이라는 분량의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좀 더 신선하거나 깊이 있는 성찰이 필요하다.


 이야기의 신선도나 재미 측면도 아직은 뛰어나지 않다. 주인공이 자신의 후손이 보낸 로봇과 만나면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는 설정은 일본 만화 <도라에몽>을 연상시키고, 일종의 작동 오류로 인간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된 로봇이라는 설정도 <A.I>, <바이센테니얼 맨등의 영화에서 쓰여 익숙한 설정이다. 그냥 지식, 정보만 나열하기보다 하나의 서사를 중심으로 말하고 하는 바를 풀어나가는 것은 좋은 전략이지만, 봉투와 인간들이 펼치는 이야기가 아직은 그렇게 흥미롭지 않다. 봉투 외의 다른 인간 캐릭터들의 매력이나 캐릭터들의 관계가 빚어내는 케미스트리와 드라마도 아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시리즈의 시작이라기에 『오리진』 1권은 조금 아쉬운 시작이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뚜렷이 정했으니,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더욱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제 시작이니 모든 것의 기원에 대한 더 깊이 있고 신선한 성찰들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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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페르세폴리스 1~2 세트 - 전2권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김대중.최주현 옮김 / 새만화책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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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일러 포함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위용을 보여주는 유적 페르세폴리스에서 볼 수 있듯이, 이란은 페르시아 제국이라는 화려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대륙의 길목에 위치한 탓에 숱한 침략과 전쟁을 겪었고, 현대에 들어서는 강대국들의 간섭과 국왕의 독재에 시달렸다. 1979년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세력의 혁명으로 독재 왕정은 물러났지만, 이듬해 이란의 혁명에 위기감을 느낀 이라크가 침략해 8년 동안이나 전쟁이 계속되었다. 혁명을 주도했던 이슬람 세력은 독재와 이슬람 근본주의로 사람들을 억압했다. 이란 출신의 만화가 마르잔 사트라피는 이런 혼란스러운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만화로 그린 그녀의 성장기가 이 책 『페르세폴리스』이다.


마르잔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하는 신과 마르크스


  지식인 부모님을 둔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마르크스의 책을 읽어온 마르잔은 마르크스의 열렬한 신봉자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이 무함마드의 뒤를 잇는 신의 마지막 예언자라고 믿고, "모든 사람들이 좋은 태도를 갖고, 고운 말을 쓰고, 좋은 행동을 하며, 가난한 사람도 매일 통닭 한 마리씩을 먹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는다. 어린 나이에 자신을 빛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꿈을 가진 마르잔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가난한 사람들도 매일 통닭을 먹을 수 있어야 하고, 어느 할머니도 절대 아프지 말아야 한다는" 소망은 어린아이다워서 귀여웠다. 

아누쉬 삼촌의 감방으로 면회를 온 마르잔.


  그러나 순수했던 마르잔의 삶도 이란의 현실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마르잔을 유난히 예뻐했던 혁명가 아누쉬 삼촌은 반정부 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다. 아누쉬 삼촌이 처형된 뒤로 마르잔은 신에 대한 믿음도, 신의 마지막 예언자가 되겠다는 포부도 버린다. 이렇게 마르잔의 순수했던 어린 시절은 지나가 버린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복장이 이슬람 규율에 맞는지 검사하는 종교위원회. 그들에게 걸린 마르잔.


현실에서 억압당하며 받은 스트레스를 펑크 음악으로 푸는 마르잔.


 독재 왕정을 몰아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줄 알았던 이슬람 세력은 이슬람 근본주의와 독재로 사람들을 숨막히게 억압한다. 특히 여성은 히잡 밖으로 머리카락이 조금만 삐져 나와도 제재를 받는 등 일상생활에서도 억압을 받는다. 저항 정신이 강한 마르잔으로서는 더더욱 견디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마르잔은 외국의 펑크 음악을 통해 답답한 마음을 푼다. 사우디아라비아 영화 '와즈다'에서도 주인공 소녀 와즈다는 빡빡한 이슬람 규율 때문에 답답한 마음을 외국의 팝 음악을 들으면서 푼다. 까만 히잡과 차도르로도 자유롭게 살고 싶은 열망은 가릴 수 없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펑크 족 친구들과 어울리는 마르잔


  1권은 이렇게 마르잔이 14살 때까지 독재와 억압으로 가득한 이란의 현실 속에서 자라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2권에서 14살이 된 마르잔은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난다. 독재도 이슬람 근본주의도 없는 유럽에서 마르잔은 펑크족 친구들과 어울리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마르잔은 이방인일 뿐이었다. 마르잔은 인종차별과 그로 인한 소외감에 시달리며 방황한다. 어딜 가도 마르잔이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자유롭되 외로운 곳에 남겠는가, 자유롭지 않되 외롭지 않은 곳으로 돌아가겠는가. 마르잔은 후자를 선택한다.



  몇 년만에 돌아온 고국은 여전히 이슬람 정권의 억압 아래 있었다.  미대 실습 시간에도 이슬람 율법 때문에 누드모델을 쓰지 못하고 차도르를 뒤집어쓴 모델을 그려야 했다. 히잡 밖으로 머리카락을 조금만 보이는 것도, 검고 긴 옷소매 밖으로 팔목이 보이는 것도. 외국 음악 테이프를 갖고 다니는 것도 잡아갈 구실이 되었다. 마르잔은 깨닫는다. 일상생활의 작은 곳까지 파고드는 억압은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두려움은 사람을 마비시킨다는 것을. 그래서 두려움은 모든 독재 체제에서 억압의 원동력이 되고, 머리카락을 보이거나 화장을 하는 것 같은 작은 행동도 두려움에 맞서는 저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런 작은 저항으로 마르잔은 이슬람 정부와 사회의 억압에 맞선다.

마르잔과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


  마르잔이 이런 어두운 시기를 견뎌낼 수 있게 한 버팀목은 가족들의 따뜻한 사랑과 지지였다. 가족들 중에서도 특히 마르잔의 할머니는 어떤 상황에서도 용기와 유머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 마르잔을 격려해 준다. 마르잔이 첫 결혼에 실패하고 이혼할지 말지 고민하자, 자신도 이혼 경력이 있는 할머니는 "첫번째 결혼을 해 봤으니 두번째 결혼은 더 잘 할 수 있다"며 마르잔을 다독여 준다. 1980년대 이슬람권에서 이혼 경력이 남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더 행복한 삶을 살도록 격려하는 여성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런 할머니가 있었기에 마르잔도 자신을 둘러싼 억압에 당당하게 맞서며 자기 삶을 자기 뜻대로 살아갈 수 있었다.

  폭력과 억압이 가득한 혼란스러운 이란의 역사 속 마르잔의 성장기는 씁쓸하다. 하지만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는 마르잔의 용기와 신랄한 유머감각은 독자들의 마음을 통쾌하게 한다. 또한 마르잔을 둘러싼 사람들의 사랑과 지지는 독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화려하게 꾸며지지 않고 흑백의 색채와 단순한 선만으로 이루어진 담백하고 날카로운 그림체만으로도, 작가는 신랄한 유머와 날카로운 비판, 따뜻한 인간애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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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예루살렘
기 들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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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예루살렘에 갔을 때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은 내가 상상했던 예루살렘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아래 사진처럼 바위돔 사원의 거대한 황금색 돔이 보이는 예루살렘 성의 모습이다. 실제로 예루살렘에 가면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이 풍경이 예루살렘의 전부는 아니다. 



건너편에서 바라다 본 예루살렘 성벽 안 구시가지. 이슬람의 성지 중 하나인 바위돔 사원의 황금색 돔이 보인다. 성벽 아래에는 수많은 무덤들이 있는데, 유대교의 전승에 따르면 메시아가 오는 날에 성벽 아래 무덤들에 묻힌 사람들이 모두 부활한다고 한다.


  내가 묵고 있던 숙소가 있는 동예루살렘의 풍경은 이 두 번째 사진에 더 가까웠다.  이것이 사람들이 익숙하게 아는 예루살렘의 또 다른 모습이다. 다닥다닥 붙은 낡고 허름한 건물들, 길가에 아무렇게나 널린 쓰레기들과 건축자재들. 예루살렘이라기보다는 아랍권 국가의 한 가난한 동네로 보이는 황량한 풍경.


이 책의 작가 기 들릴도 국경 없는 의사회의 행정직원인 아내를 따라 동예루살렘에 왔을 때, 자신의 상상과는 다른 동예루살렘의  황량한 모습에 놀랐다. 내가, 그리고 그와 그의 가족들이 머물렀던 동예루살렘은 원래 아랍인들의 영역이었지만, 1967년 전쟁으로 이스라엘에 합병된 곳이다. 국제사회에서는 이곳이 팔레스타인의 서안 지구에 속한다고 보고, 이곳의 주민들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이스라엘 영토라고 주장한다.  가난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사는 황량한 동예루살렘의 모습은, 중동이라기보다는 유럽의 도시처럼 보일 정도로 번화하고 깨끗한 서예루살렘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저자는 1년 동안 예루살렘에 머무르면서 이런 예루살렘의 다양한 모습을 만화로 기록했다. 그 기록이 이 책 『굿모닝 예루살렘』이다.

분리장벽 앞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주민의 모습. 이처럼 예루살렘에는 억압과 일상이 공존한다.


  이 책에서 작가는 예루살렘에서의 일상을 담담하게, 하지만 세밀하게 기록한다. 그가 본 예루살렘은 폭력과 일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공존하는 곳이다. 검문소에서 누군가 돌을 던지자 검문소를 지키던 이스라엘 군인들은 최루탄을 쏘아서 아수라장이 된다. 그 와중에도 빵 장수는 참깨빵을 팔겠다고 군중들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닌다. 작가는 유대인들의 불법 정착촌에 있는 대형마트에서 물건을 사려다 '정착촌에서 물건을 사는 것은 이스라엘의 점령을 인정하고 부추기는 행위'라는 국경 없는 의사회 직원의 말을 떠올리고 쇼핑을 포기한다. 그런데 막상 쇼핑을 포기하고 나오니, 정작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그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정착촌의 유대인 가족은 총을 메고 동물원 나들이를 한다. 너무나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폭력과 일상이 공존해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예루살렘의 일상을 작가는 유머러스하게 풀어간다. 


기 들릴이 작업실로 사용했던 아우구스타 빅토리아 병원 구내의 예수승천교회의 사진(위)과 만화에서 그려진 교회(아래). 그는 이 교회 목사의 양해를 구해 교회 안의 작은 방에서 이 만화를 그렸다.


 작가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과 억압을 목소리 높여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폭력과 억압 속에서도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논평하는 대신, 그곳 사람들이 그런 일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접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가 보여주는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사람들의 모습은 내가 머물고 있을 때와 그렇게 달라지지 않아, 읽으면서 반갑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다.  그는 내가 머물고 있던 아우구스타 빅토리아 병원의 게스트하우스와 같은 구내에 있는 예수승천교회에서 이 만화를 그리고 있었다. 내가 예루살렘을 여행한 뒤 몇 년 뒤의 모습인데도, 만화 속 교회를 포함한 예루살렘 곳곳은 그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분리장벽과 검문소, 정착촌, 그 때문에 고통 받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그때와 같아 나를 슬프게 했다. 내가 예루살렘을 떠난 지 몇 년이 지난 뒤에도 예루살렘은 전과 같은 모습이었고, 그가 예루살렘을 떠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예루살렘은 전과 같은 모습일 것이다. 

 지금도 때때로 이 책을 보면서 예루살렘을 기억한다. 머물고 있으면서도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기도 하고,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들을 보게 되기도 한다. 예루살렘에 갔던 사람들에게나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나, 이 책은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사람들, 그들이 겪는 폭력과 일상을 기억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망각과 무관심에서 벗어나 폭력 속에서도 일상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기억할 때,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사람들의 현실은 조금씩이라도 변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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