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 그람시 산문선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김종법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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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시는 누구인가


"위험천만한 그람시. 우리는 이자가 앞으로 20년 동안 두뇌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치해야 할 것이다."


  1928년 이탈리아의 한 공안검사가 불법정당 활동 혐의로 기소된 정치인 안토니오 그람시 Antonio Gramsci 에 대해 한 말이다. 그의 말대로 그람시는 20년형을 선고받았고, 그 형량을 다 채우기도 전에 감옥 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람시가 어떤 인물이기에 이렇게까지 경계하고 무거운 처벌을 내렸을까?


안토니오 그람시의 사진. 그람시는 온화한 인상을 가졌으나 단호하고 신념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람시는 파시스트 정부의 지배 아래 있던 20세기 초의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에 맞서 싸웠던 지식인이자 정치인이었다. 그는 1913년 이탈리아 사회당에 입당하면서 사회주의 운동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회당이 파시스트 정당의 행태를 방관하자 당에서 나와 1921년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립하고, 활발하게 반파시즘 운동을 펼쳐 왔다. 사회주의 계열 인쇄물에 기고한 글은 검열을 받아야 하는 현실 속에서도 그는 쉬지 않고 자신의 사상을 담은 글을 기고했다.(이 책에서도 검열로 삭제된 부분들이 자주 눈에 띈다.) 그람시는 온화한 인상을 가졌으나 단호하고 신념이 강한 인물이었고, 여당인 파시스트 정당 의원들의 의사 진행 방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회에서 무솔리니 총리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결국 무솔리니 정부는 파시스트 국민당 이외의 모든 정당을 불법단체로 규정한 새 법안을 통과시켰고, 불법정당 활동 혐의로 그람시에게 20년형을 내렸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도 그람시는 역사와 현실 정치에 대해 노트 30권에 이르는 글을 썼다. 그는 죽을 때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은 시대의 양심이었다


그람시의 시대 비판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는 그람시가 당시, 즉 1910년대에서 20년대 이탈리아의 시대 상황과 변화에 대해 쓴 글들을 모은 책이다. 100여 년 전의 이탈리아 이야기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의 출간 시점이 힌트가 될 수 있다. 이 책은 2016년 3월, 최순실의 국정 농단 사태가 폭로되기 전에 출간되었다. 그 때 한국 사회는 또 한 번 민주주의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정부에 비판적인 성향을 가진 예술가들이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특정 대기업에 정부 차원의 혜택이 쏟아졌다. 


  그 때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국정을 농단했던 세력들을 몰아내어 민주주의의 승리를 이루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갈 길이 멀다. 부는 소수의 특정 계층에만 집중되어 있고, 서민들을 위한 정책이 의회에서 통과되기 쉽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경계하지 않는다면 독재 권력은 또 다시 우리를 장악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람시의 날카로운 시대 비판을 들을 필요가 있다. 


  그람시는 "무관심한 사람들을 증오한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1920년대 초반 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의 타격으로 의식주를 영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극심한 경제난을 겪게 되었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어떤 체제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때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들은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달콤한 약속을 했고, 국민들은 현혹되었다. 그들은 먹고사는 문제 외의 것에 무관심했던 것의 대가로 파시즘 독재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그람시는 자신의 무관심 때문에 다른 무고한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었는데도 반성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시민일 수밖에 없으며, 무언가를 지지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무관심은 무기력이고 기생적인 것이며 비겁함일 뿐 진정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무관심한 사람들을 증오한다."


  무관심한 사람들은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나 존재해 왔고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도 역시 존재한다. 당장 우리 부모님만 해도 박근혜가 탄핵당하지 않았다면 계엄령이 내려졌을 거라는 뉴스를 듣고 "계엄령이 뭐가 대수냐"는 반응을 보이셨다. 그런 무관심이 또 한 번 독재를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그람시가 지적했듯이 무관심은 우리가 늘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나는 살아 있고 삶에 참여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나는 삶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증오하며, 무관심한 사람을 증오한다." 그의 말처럼 지금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 있는지, 삶에 참여하고 있는지 늘 되돌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또 한 가지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그람시는 자본주의에 해악을 미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이탈리아 사회의 부르주아 조직이라고 말한다.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환경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부르주아들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만 열중하는 무능함과 부패, 이기심이 자본주의의 위기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그는 폭주하는 부르주아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계층이 프롤레타리아라고 믿는다. 사회주의자들은 경제 체제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폐해를 개선함으로써 경제 체제를 개선시키려는 것이고, 가족 관계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더 평등한 사회에서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람시에게 사회주의자는 기존 사회의 파괴자가 아니라 기존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존재였다. 사회주의를 궁극적인 해결책으로 보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많겠지만, 자본주의가 폭주하지 않도록 제어해야 한다는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책은 1925년 5월 16일 그람시와 무솔리니가 참석했던 하원 의회의 대화록으로 끝맺는다. 의회가 진행되기 몇 달 전인 1월 12일, 비밀결사에 반하는 법안 초안이 하원에 상정되었다. 공공의 안녕이라는 명목 아래 모든 결사체에 대해 강령과 규정, 목적 등에 대한 모든 사항을 제출하도록 강제하는 법안이었다. 여당인 파시스트 정당 의원들이 의사 진행을 방해하고, 총리 무솔리니는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공산주의자들의 폐해로 말을 돌리는 와중에도 그람시는 그 법령이 조직체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정면으로 비판한다. 같은 소리를 반복하지 말라는 의장의 말에 그람시는 대답한다. "아닙니다. 오히려 계속 반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혐오스러워할 때까지 계속해서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용기와 비판 정신은 10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의 우리에게, 진정 살아 있는 인간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준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


  각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설명이 너무 부족하다. 번역자는 당시 사건과 사실, 이탈리아의 수많은 인물들을 평가하면서 써 내려간 글이기에 한국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번역자의 시각과 이해를 바탕으로 많은 부분 재해석한 문장이 많다고 했다. 그렇다면 문장을 재해석하는 게 아니라 당시 사건과 사실, 인물들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해야 했다. 그람시 연구자라고 하니 충분히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번역자가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면 출판사가 더 자세히 설명하게 요청해야 했다. 그래서 더 자세한 설명이 있는 그람시의 책들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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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에 충실한 나라, 독일에서 배운다
양돈선 지음 / 미래의창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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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국정농단 사태가 드러났을 때, 사람들은 "이게 나라냐"고 한탄했다. 그리고 새 정부는 "나라다운 나라"를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개혁에 나섰다. 하지만 여전히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 깊이 뿌리내린 적폐를 청산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게다가 우리 머리 위에는 북한이라는 큰 위험 요소가 있다. 최근 들어 남북간의 긴장이 조금은 풀렸지만 통일까지 가는 길은 아직도 멀다. 적폐를 청산하고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며, 통일까지 이루어내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기본에 충실한 나라 독일이 우리에게 좋은 지침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정치적인 면에서 독일에게서 본받을 만한 점은, 독일 정치인이 전문성과 리더십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독일의 정치인들은 20대 시절부터 오랜 기간 동안 정치 교육을 받으며 전문성과 리더십을 기른다. 그리고 중앙정부로 진출하기 전 주 의회 의원, 주지사 등 지역에서 정치 활동을 하며 현장 감각을 기른다. 그 덕분에 독일 정치인들은 독일 공영방송에서 선정하는 '최고의 독일인 100인'의 상위권 순위에 들 정도로 독일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또한 집권 정당이 바뀌더라도 지난 정권의 정책들을 유지하며, 좌우와 보수, 진보의 틀에 갇히지 않고 포용과 수용의 정치를 펼친다.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이 갑자기 정치인의 길에 들어서고, 여야 갈등 속에 좋은 정책들도 통과하지 못하는 사태가 빈번한 우리의 모습과 대조된다.


  우리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체제를 답습하면서 경제적 불균형이라는 신자유주의의 폐해 또한 답습하고 있다. 반면 독일은 경쟁에 기반을 둔 시장 경제와 사회적 균등성 두 가지를 원칙으로 사회적 시장 경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1930년대 세계대공황으로 인해 실업난과 빈곤,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그리고 나치 정권의 계획 경제로 시장이 위축되는 실패도 경험했다. 대기업이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독일에서는 중소기업들이 자신이 전문으로 하는 분야에서 활약하며 대기업 못지않게 국가 경제에 기여한다. 또한 지역 간의 균형 발전도 이루어져 지역간, 동서독간 경제력 격차도 크지 않다. 자유경쟁과 형평성 모두 해내고 있는 것이다. 


 경제에서 사회적 균등성을 원칙으로 하는 만큼 사회 보장 제도도 잘 구축되어 있다. 실업 급여와 연금 등 복지 안전망이 잘 작동되고 있고, 실업 상태일 때도 최소한의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TV 시청료 면제, 연간 2회 오페라 관람, 4회 박물관 관람을 보장하는 정책적 배려까지 갖추고 있다. 주택 정책은 주택을 소유해 이익을 내는 것보다 임차인 보호에 맞춰져 있어, 임차료 상승률이 연간 3퍼센트를 넘지 않는다. 사회 보장 정책이 포퓰리즘으로 치부되기 일쑤이고, 재계약을 할 때마다 집주인이 50%, 100%, 200%까지도 임차료를 올릴 수 있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 보면 부럽게 느껴진다. 


 통일에 있어 우리가 독일에서 배워야 할 점은, 독일이 통일을 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는 것이다. 독일은 적국이었던 다른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통일되면 독일이 다시 유럽의 평화를 해칠 것이다'라는 유럽 국가들의 불안을 불식시켰다. 그리고 소련,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과도 적극적으로 관계를 개선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동독과의 교류를 꾸준히 추진하며, 동독 경제를 일으키기 위한 경제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준비들 덕분에 통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통일 이후 드는 엄청난 통일 비용 때문에 경제적인 타격을 입었을 때는, 사회 복지 지출을 줄이는 경제 개혁을 단행했다. 경제 개혁의 효과는 시간이 지나면서 드러나, 통일로 인해 타격을 입었던 독일 경제의 경쟁력이 회복되었다. 통일 전과 통일 후의 치밀한 대비책은, 통일을 중요한 과제로 두고 있는 우리들이 참고할 만하다. 


 이 책은 우리와 독일의 역사와 체제가 다르기에, 독일의 제도를 우리가 그대로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독일을 무조건 예찬하지만 하지 않고, 독일에게서 배울 점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미국식 정치, 사회, 경제 체제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독일은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하는 좋은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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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페미니스트 - 아이를 페미니스트로 키우는 열다섯 가지 방법 쏜살 문고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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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이에게

  하은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니 기뻐. 네 결혼식에 갔던 게 엊그제 같은데 네가 딸을 낳고 키우고 있다니, 실감나지 않아. 아이를 키워보지도 않은 내가 너에게 충고하는 게 우스울 거라는 거 알아. 하지만 이 험하고 복잡한 세상 속에서 하은이가 더 잘 살아가게 하려면, 페미니즘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너에게 『엄마는 페미니스트』라는 책을 소개하려고 해.  

  이 책은 지금 내가 너에게 쓰는 편지처럼, 지은이가 딸을 가진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어. 나이지리아 출신 페미니스트인 작가는, 친구 한 명이 자기 딸을 페미니스트로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물음을 받고 친구에게 몇 가지 제안을 편지로 써서 보냈대. 이 책은 그 편지들을 조금 수정한 거고. 너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 책에 나온 제안 열다섯 가지를 알려줄게. 


첫 번째 제안. 충만한 사람이 될 것.
두 번째 제안. 같이할 것.
세 번째 제안. '성 역할'은 완벽한 헛소리라고 가르칠 것.
네 번째 제안. '유사 페미니즘'의 위험성에 주의할 것.
다섯 번째 제안. 독서를 가르칠 것.
여섯 번째 제안. 흔히 쓰이는 표현에 의구심을 갖도록 가르칠 것.
일곱 번째 제안. 결혼을 업적처럼 이야기하지 말 것.
여덟 번째 제안. 호감형 되기를 거부하도록 가르칠 것.
아홉 번째 제안. 민족적 정체성을 가르칠 것.
열 번째 제안. 아이의 일, 특히 외모와 관련된 일에 신중해질 것. 
열한 번째 제안. 우리 문화가 사회규범에 대한 '근거'를 들 때 선택적으로 생물학을 사용하는 것에 의구심을 갖도록 가르칠 것.
열두 번째 제안. 일찍부터 성교육을 할 것.
열세 번째 제안. 사랑이 반드시 찾아올 테니 응원해 줄 것. 
열네 번째 제안. 억압에 대해 가르칠 때 억압당하는 사람을 성자로 만들지 않도록 조심할 것. 
열다섯 번째 제안. 차이에 대해 가르칠 것.



 이 중에서 몇 가지에 대해 더 자세히 얘기하고 싶어. 우선, 충만한 사람이 될 것. "엄마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 멋진 선물이지만 엄마라는 말로만 자신을 정의해서는 안 돼."(p. 17.) 나도 네가 '하은이 엄마'로만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넌 진선이고, 네가 하는 일들이 있잖아. 네가 하는 일과 엄마 노릇 모두 해내기 쉽지 않겠지만, 그 둘 다 완벽히 해내지 못한다고 자책하는 일이 없었으면 해. "우리는 여자가 '만능'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바깥일과 집안일을 병행하는 부모들을 지원하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해."(p. 20.) 제도적인 지원도 없이 엄마에게만 만능을 강요하는 건 가혹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같이 할 것. "'도움'이라는 표현은 거부"(p. 23.)해야 해. 네 남편이 "아이 돌보는 거 도와줄게."라고 말한다면, 그건 자기 일이 아닌 일을 도와준다는 뜻이야. 육아는 엄마만의 일이 아니라 엄마 아빠 모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 얼마 전 아이를 서툴게 돌보는 아빠들을 그린 공익광고가 나왔었지. 그 공익광고에선 아빠들이 아이들을 돌봐줄 때 서툰 걸 너그럽게 봐 달라고 해. 경험이 없으니까. 하지만 경험이 없는 게 아빠뿐이겠어? 아이를 처음 낳았을 때 엄마도 경험이 없고 육아에 서툴러. 그 광고에는 '육아는 당연히 엄마의 일이니까 엄마는 육아에 능숙할 것이다.'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거지. 네가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세 번째로는, 성 역할은 완벽한 헛소리라고 가르칠 것. 성경에는 '여자의 머리는 남편이다', '여자는 예배당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성차별적인 구절들이 있어. 그런 구절들을 이야기하면서 여자의 성 역할을 한정짓는 사람도 있고. '여자는 당연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해. 하나님이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라, 라고 하셨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 네 결혼식 때 주례를 선 목사님이, "아이를 둘 이상 낳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주례 서 주지 않겠다고 말했었다."라고 했던 걸 아직도 기억해. 하지만 네 딸이 결혼할 때 그렇게 말하는 목사님이 있다면 "주례 서 주시지 않아도 돼요."라고 거절해 버려. 사도 바울도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도 있다고 했잖아. 너에게 서운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하은이에게는 결혼을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고, 아이를 낳고 싶지 않으면 낳지 않아도 될 권리가 있어. 성 역할에 하은이를 제한하지 말고, 하은이가 정말 바라는 걸 하게 해줘. 

  무엇보다 내가 바라는 건, 차이에 대해서 가르치는 거야. "아이에게 차이에 대해 가르침으로써...다양성의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거야."(p. 102.) "아이에게 어떤 사람들은 동성애자이고 어떤 사람은 동성애자가 아니라고 가르쳐. 어떤 애는 아빠가 둘이기도 하고 엄마가 둘이기도 해. 그냥 그런 사람들이 있어. ... 어떤 사람들은 모스크에 가고,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가고, 어떤 사람들은 또 다른 숭배의 장소에 가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무것도 숭배하지 않는다고 말해줘. 그냥 그게 그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라고."(p. 102.) 기독교인인 너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말일 거야. 하지만 나는 기독교가 다양성에 대해 너무 닫혀 있다고 생각해. 다른 건 비정상적인 게 아니고, 자신의 기준이나 기독교의 기준에 모든 사람을 끼워맞출 순 없어. 난 하은이가 관대하고 마음이 열려 있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어. 

 이 모든 이야기들을 돌아보니, 아이가 있는 부모뿐만 아니라 아이가 없는 사람에게도, 아이가 아닌 나 자신에게도 필요한 이야기들이구나. 하은이와 너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한 사람으로서 온전히 내 삶을 살기 위해.  하은이가 더 평등한 세상에서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너 또한 그러길 바라.

사랑을 담아, 
네 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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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정의, 판사 - 폭풍 속을 나는 새를 위하여
양삼승 지음 / 까치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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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로운 법조인이 되고 싶어 하던 친구가 있었다그 친구는 학교 축제에서 부패한 법조인들을 풍자하는 퍼포먼스를 기획할 정도로 정의감이 강했다하지만 그 친구는 졸업을 하고 로펌에서 몇 년 일한 뒤세상은 썩어빠졌고 변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회의감에 빠진 모습을 보였다그 친구는 법조계에서 어떤 일들을 보고 듣고 겪어왔기에 그렇게 변했을까종종 뉴스에 나오는 법조계의 비리 이야기를 통해 짐작할 뿐이었다.

 

  우리나라 법조계사법부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구체적으로 어떤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 걸까평생을 법조인으로 살아온 양삼승의 저서권력정의판사를 읽으면서 뉴스로만 짐작했던 법조계의 맨얼굴을 보게 되었다저자는 이 책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최근까지 한국 사법부 역사상 의미 있는 판례 10개를 살펴본다한국 사법부가 처음으로 구성된 이래 사법부는 정치권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저자는 사법부의 판결에 간섭하고 때로는 특정한 판결을 유도하며 사법부의 독립을 침해하는 정치권력을 비판한다. 1979년 김재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했을 때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가 김재규에게 내란 목적의 살인죄를 뒤집어씌우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판사들에게는 인사상의 불이익을 주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저자는 사법부를 억압한 정치권력뿐만 아니라정치권력에 굴복해 옳지 못한 판결들을 내렸던 사법부의 모습도 비판한다정치권력의 억압이 너무 심해서였다는 핑계는 그에게 통하지 않는다자기 자리까지 내려놓으면서 정의를 위해 싸웠던 법조인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그는 지금의 법조인들이 권력자의 이해관계와 아무 상관없는 개인 간의 분쟁 해결에만 힘을 쏟으며 사소한 정의에 만족하는 것을 비판한다저자는 자신이 바꿀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고민하는 것은 진정한 개혁이 아니라 현실도피일 뿐이라는 쓴 소리도 서슴지 않는다.

 

  또한 그는 실질적인 정의와 절차적 정의’ 모두가 지켜져야 함을 강조한다. 2006당시 제주도 도지사가 차기 도지사 선거를 준비하기 위해 제주도 소속 공무원들을 사적으로 부렸던 것이 적발되었다검찰이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되었는데그 중 한 검사가 해당 사건에 연루된 공무원이 아닌 다른 공무원에게 영장과 검사 신분증을 제시하지도 않고강제로 그가 갖고 있는 서류를 압수했다그런데 그 서류에서 제주도 도지사가 선거법을 어겼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었다그러나 증거를 모으는 과정에서의 적법성이 문제가 되어 그 증거는 재판에서 인정받지 못했고제주도 도지사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도지사의 잘못이 명백한데도 절차의 적법성 문제 때문에 도지사를 처벌하지 못한 것이 일반적인 상식으로서는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절차의 적법성이 지켜지지 않는다면마구잡이로 사람들을 검거하고 법에 어긋나는 조사 방법을 쓰는 일들까지 허용되고인권은 보호되지 못할 것이다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실질적 정의와 죄의 유무를 따지는 절차에서 원칙을 지키는 절차적 정의 사이의 균형을 잡기는 어렵다그 두 가지의 균형을 잡으면서 정의를 지켜가는 것이 법조인들이 할 일일 것이다.

 

  70대의 법조인이 쓴 글답게 다소 딱딱한 문체이고대중 교양서적보다는 학술서적에 가깝게 느껴지는 서술과 편집이다그래서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하지만 이 땅의 법조인들이 권력에 굴하지 않고 정의를 지키길 바라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법조인들뿐만 아니라 법과 상관없이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법을 통해 정의가 지켜져야 살아갈 수 있는 우리들 또한 이 책의 이야기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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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지음 / 동녘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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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편한 이야기 좀 해 보겠다아버지는 엄마나 내가 아프거나 바쁠 때도 둘 중 한 명이 밥을 차려줘야 식사를 하시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면접을 보러 가는 날에도 정장을 입고 화장을 한 채로 아버지 밥을 차려드리고 집을 나섰다. 요즘 들어 혼자 밥을 차려드시고 반찬을 치우는 것까지는 하신다. 아직까지 아버지가 먹고 버린 과자 봉지를 치우는 것도, 물 마신 컵 하나 씻는 것도 여전히 엄마와 내 몫이다. 그리고 한 번은 아버지가 갑자기 고향 친구 분들을 우리 집에 초대했는데하필이면 그분들이 오는 날이 내가 속한 동호회의 정모 날짜와 겹쳤다나는 당연히 동호회 정모에 가고 싶었지만혼자 일할 엄마가 눈에 밟혀 집에 남아 엄마를 도왔다아니나 다를까즐겁게 웃고 떠들고 노는 것은 아버지와 친구 분들의 몫산더미처럼 쌓인 그릇들과 음식 쓰레기를 치우는 것은 엄마와 내 몫이었다우리를 도와준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아버지 친구 분과 함께 온 부인이었다그분 또한 손님이었는데도

  홍승은의 페미니즘 에세이집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를 읽으면서 나 자신의 이런 불편한 경험들이 떠올랐다저자가 일상에서 겪은 불편한 경험들이 나의 불편한 경험들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도 이런 경험을 했구나로 그치지 않고나만이 불편하게 느낀 것이 아니구나뭔가 잘못된 거구나하고 깨닫게 되었다왜 아버지는 밥을 챙김 받아야’ 하는지 의문을 품는 내가 불효자식인가하고 생각했던 나는이 책을 통해서 그것이 나만 겪은 일이 아니라는 것일상에 뿌리 내린 차별적 관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밥을 차리는 일뿐만이 아니었다일상 속에 수많은 차별과 폭력이 숨어 있었다

  이런 불편한 경험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저 개인적인 불평으로 여겨질 수 있다더 큰 대의를 위해서 그런 사소한 불편함은 참아야 한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왔다해일이 밀려오는데 조개를 줍고 있을 수는 없다고하지만 개인의 고통을 무시하고 이룬 대의가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개인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이 사회인데게다가 여성을 포함한 소수자의 불편함은만족해하는 다수의 목소리에 가려지기 쉽다불편해하는 소수만 무시하면 불편함 자체가 없는 것처럼 보이니까그러나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고불편해하는 것이 잘못된 것처럼아무 문제도 없는데 분란을 일으키는 것처럼 여기는 무신경함 자체가 거대한 폭력이다그 폭력은 일상의 작은 곳까지 뿌리 내리고 있고폭력으로 여겨지지 않아서 더 위험하다

  그 거대하고도 미세한 폭력에 대한 저항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드러나지 않은 존재가 스스로 목소리 낼 때세상은 딸꾹질 한다.”(p. 15.) 그 목소리는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옳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밝히고다른 목소리를 부른다불편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불평쟁이다프로불편러다라는 비난을 받을까 두렵다그러나 함께 불편함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들이 있고불편한 이야기가 세상의 고통을 줄이고 우리를 좀 더 자유롭게 할 수 있음을 믿을 때 용기를 얻는다그래서 나 또한 저자와 함께 소망한다. “나는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다그래서 함께 자유로우면 좋겠다.”(p.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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