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의 민주주의 - 새로운 혁명을 위하여 프리즘 총서 26
진태원 지음 / 그린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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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들 중 대다수가 스스로를 ‘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세입자로서 집주인에게 을이고, 직원으로서 고용주에게 을이며, 하청업체 직원으로서 원청업체에게 을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헌법 1조는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사회적 약자인 ‘을’과 대한민국의 주인. 이 둘 사이의 괴리감이 너무나 크다. 우리 자신에게 당장 피부로 와 닿는 것은 우리가 대한민국의 주인이라는 것보다는 을이라는 것이다. 눈앞의 ‘갑질’조차 이겨내지 못하는 우리 을들이 대한민국의 주인, 민주주의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철학자 진태원의『을의 민주주의』는 이 질문에 해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이 질문을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주체에 대한 고민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헌법에서는 국민이 주권자, 민주주의의 주체라고 명시하지만, ‘주권자로서의 국민’이라는 개념은 그 안에 갑의 위치에 있는 1퍼센트의 국민과 을의 위치에 있는 99퍼센트의 국민이 있다는 것을 감춘다. 게다가 난민처럼 국민이라는 범주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독일의 철학자이자 정치 사상가 한나 아렌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 아닌 이들로 배제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약자, 피해자, 주변으로 밀려난 자, 배제된 이들을 ‘(자기) 몫(이) 없는 이들’이라고 부른다.


  민주주의가 성립되는 과정, 자유와 평등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도 누군가는 늘 배제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에서는 노예와 여성이, 프랑스 혁명에서는 가난한 농민들, 노동자들이 배제되었고, 여성은 20세기가 되어서야 참정권을 손에 넣었다. 프랑스 인권 선언에서는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지니고 태어난다고 했지만, 어떤 조건도 없이(남성이거나, 백인이거나, 세금을 일정 금액 이상 낼 수 있는 사람이거나 등등) 사람이라는 것 자체만으로 자유와 평등,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개념은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려는 사람들, 서로의 평등을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정치 공동체의 토대로 인정하는 사람들의 집단행동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민주주의는 자기 몫이 없던 사람들이 자기 몫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발전해 왔다. 민주주의도, 민주주의의 주체로서의 권리도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고민과 질문, 실천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민주주의다운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자기 몫이 없는 사람들이 자기 몫을 찾으며 민주주의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에티엔 발리바르, 한나 아렌트, 자크 랑시에르,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등 서양의 정치 사상가들의 사상을 검토하면서 이런 질문들에 대해 고민한다. 그러면서 명쾌한 해법을 찾아가기보다는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주체로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겪는 문제와 위기, 모순을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려 한다. ‘대화법을 통해 문제를 탐구하는 도중에 부딪치게 되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 해결하지 못하는 것으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이나 관점에서 새로이 탐구하는 출발점이 되는 문제’를 ‘아포리아 aporia’라고 하는데, 이 책은 해답 대신 아포리아들을 제시한다. 


  저자는 우리 사회의 을들이 연대하기보다는 또 다른 을들, 을 아래의 병, 병 아래의 정을 거느린다고 말한다. 갑과 을 사이, 을과 병, 정 사이의 위계화된 관계를 어떻게 평등한 민주주의적 관계로 바꿀 수 있을까? 을이 새로운 갑, 새로운 지배자가 아닌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이 ‘을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야 할 근본적인 과제이고, 우리에게 주어진 아포리아이다. 책을 덮은 뒤에도 이 질문들은 우리에게 더 나은 민주주의를 향해 가는 여정의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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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MB재산답사기 - 안원구의 쇼미더머니 시즌1 도곡동 땅, 다스 그리고 BBK
안원구.구영식 지음 / 비아북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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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특이한 제목의 책이다. 이 책은 어떤 책인가. 

B: 이명박 전 대통령(MB)은 평생 편법과 불법으로 부를 축적해 왔고, 국가기관이나 공기업까지 개인 재산을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 부정 축재 은닉 재산을 되찾기 위해 만든 '국민 재산 되찾기 운동 본부'의 집행위원장인 안원구와 인터넷 언론 「오마이뉴스」의 구영식 기자가 자신들이 보고 듣고 취재한 것, 시민들로부터 제보 받은 것을 토대로 이명박의 부정 축재 행각의 전말을 정리한 책이다. 


A: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B:  어렸을 때부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즐겨 읽어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패러디한 제목에 끌렸다...는 농담이고, 내가 시사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다스는 누구 겁니까?",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같은 MB 관련 유행어들은 많이 들어봤지만 정작 그 속뜻은 모르고 있었다. MB가 올해 3월에 구속된 것은 알고 있었어도 MB의 죄상들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지는 못했다.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이 나라에 무슨 적폐가 있었는지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A: 안원구는 어떻게 이명박의 부정 축재를 뒤쫓는 일을 시작하게 됐는가. 

B: 안원구는 30년이 넘게 국세청 공무원으로 일해 온 사람이다. 그는 대구 지방 국세청장으로 있을 때 포스코건설 세무조사를 하다 우연히 '도곡동 땅 실소유주 문건'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명박 정권에게 찍혀 2년 동안 억울한 옥고를 치러야 했다. 


A: 이명박 정부는 왜 안원구를 구속시키면서까지 도곡동 땅의 실소유주를  숨기려 했는가.

B: 이명박은 서울 강남구 도곡동 163-4번지(266평), 164-1번지(657평), 164-2번지(295평), 169-4번지(93평) 네 곳의 (현재는 164-6번지로 통합됨) 땅을 처남 김재정과 형 이상은의 명의로 사들였다가 비싼 가격에 되팔아, 시세 차익으로 248억 원을 벌었다. 그 중 190억 원이 김재정의 명의로 설립한 회사 다스로 들어갔다. 다스는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회사로 현대자동차의 협력 업체였다. 이 돈은 이명박의 수족 노릇을 했던 재미교포 출신의 금융인 김경준을 대표로 내세운 투자 자문 회사 BBK로 흘러들어가 주가 조작 자금으로 쓰였다. 즉, 도곡동 땅의 실소유주가 이명박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부동산 투기와 주가 조작에 이명박이 개입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니 이명박 정부로서는 도곡동 땅의 실소유주를 숨기려고 할 수밖에 없다. 


A: 이명박은 왜 도곡동 땅도, 다스도, BBK도 다른 사람 명의로 해 놓았는가.

B: 이명박은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었는데, 현대건설 땅과 그 주변의 땅이었던 도곡동 네 곳의 땅을 자신의 소유로 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명박의 차명 인생이 시작되었다. 다수의 현대그룹 계열사 사장이었던 이명박이 본인 명의로 현대의 협력업체를 세우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다스도 김재정의 명의로 설립했다. 이명박은 다른 사람들의 명의 뒤에 숨어 천문학적인 액수의 금액을 불투명하게 처리하고 거기에서 이익을 얻었다. 적발돼도 명의를 빌려준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그만이다.


A: 이명박과 그 일당의 편법 행위로 인해 어떤 사람들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가. 

B: 이명박의 아들 이시형은 협력업체들을 인수하기 전 협력업체에 주던 일감을 줄여 적자가 나고 재정이 어려워지게 만든 뒤 싼 가격에 그 업체들을 사들였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사들일 때 자주 쓰는 악랄한 수법이다. 이로 인해 많은 중소기업들은 헐값에 회사를 내어주어야 했다. 그리고 MB와 김경준, 김경준의 누나 에리카 김의 주가 조작으로 1000여 명의 개인 투자자들이 1000억여 원의 손해를 입었다. 그 중에는 가정이 파탄나거나 심지어 자살까지 한 사람도 있었다. 무엇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명박이 온갖 편법과 불법으로 쌓아 온 재산의 일부가 국민의 혈세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세금이 이명박의 배를 불리는 데 쓰인 것이다. 


A: 김경준과 에리카 김을 예전에도 알고 있었나?

B: 알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나를 모르지만(웃음). 에리카 김이 쓴 에세이집 『나는 언제나 한국인』이 어렸을 때 집에 있어서 읽어 보았다. 그 책이 지금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에리카 김의 책에서 김경준은 성미가 불 같지만 타향살이의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며 살아온 든든한 남동생으로 묘사되었다. 읽으면서  참 애틋한 가족애라고 생각했는데, 둘이 수많은 사람들의 가정을 파탄냈다는 걸 알게 되니 배신감이 든다. 


A: 이 책을 읽으면서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

B: 수많은 경제 용어들이다. 고등학교 때 사회탐구 과목를 경제로 선택했다면 난 대학에 못 갔을 것이다. 모르는 경제 용어는 일일이 네이버 사전 앱으로 검색해 가면서 읽었다. 게다가 MB와 관련된 기업이 줄기에 달린 고구마마냥 줄줄이 나와서 사실관계를 머릿속에 정리하기 쉽지 않았다. 


A: MB는 결국 구속되었다. 지난 번 특검과는 다르게 MB가 제대로 단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B: 지난 2007년 검찰 조사, 2008년 특검에서는 도곡동 땅, 다스, BBK의 실소유주가 이명박이라는 수많은 증거들이 나왔는데도 이명박이 실소유주가 아니라는 결론을 성급하게 내렸다. 대통령 당선자 신분인 이명박을 건드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우리는 촛불을 들어서 박근혜를 물러나게 했다. 저자가 그랬듯이 나도 우리 국민의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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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사워드 지음, 강정인.이석희 옮김 / 까치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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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할 때 가장 처음 던져야 할 질문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의미만 옳다고 여겼다가는, 민주주의가 품을 수 있는 다양한 의미들을 놓쳐버릴 수 있다. 반면, 민주주의의 의미를 너무 활짝 열어놓았다가는, 민주주의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까지 민주주의로 둔갑할 수 있다. 박정희가 장기 독재 체제인 유신 체제를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로 포장했던 것만 보아도, 우리는 민주주의가 아닌 것이 민주주의라는 명목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실감할 수 있다. 그래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학자 마이클 사워드 교수는 저서『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서 민주주의의 의미를 끈질기게 탐색한다. 


  이 책에서는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두 가지 이론을 소개한다. 하나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가 정의하는 민주주의다. 슘페터에게 민주주의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다. 시장에서 개인들이 서로 더 큰 이익을 얻으려고 경쟁하듯이, 정치에서도 엘리트 정치인들은 리더로서의 자리를 얻기 위해 경쟁한다. 그들은 정책 묶음을 소비자, 즉 유권자에게 판매하고 유권자들은 자신에게 이득이 될 만한 정책 묶음을 제시하는 정치인에게 투표한다. 엘리트 정치인들이나 평범한 유권자들이나 자신의 이득을 위해 민주주의 제도를 활용한다. 하지만 평범한 시민 유권자들은 정치인들의 조작된 메시지에 쉽게 속고,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일이라면 이성을 잃어버리고 그 밖의 현안에는 무지하다. 슘페터가 말하는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의 역할은 그저 투표로 지도자들을 선출하는 것으로 축소된다.


  다른 한편에는 슘페터의 민주주의 정의를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다른 목표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표이자 이상이다. 슘페터의 민주주의가 오직 국가 단위에서의 선거나 정치 제도, 정치 운영에 관한 것인 반면, 이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국가뿐만 아니라 학교, 직장, 지역 공동체, 국가를 넘어선 국제 공동체까지 다양한 공간과 장소에서 실행될 수 있고 실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시민들은 투표로 지도자들을 선출하는 역할에만 머무르지 않고, 정치에 더 많이 관심을 가지고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스스로의 역량과 자신감을 키워나간다. 


  개인적으로는 어느 한 쪽을 지지할 수도 있겠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둘 중 어느 쪽도 지지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그저 각각의 이론이 어떤 역사를 거쳐 형성되었고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지 소개할 뿐이다. 독자들은 두 이론을 비교해 보면서,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사람에 따라 얼마나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는지 깨닫고 각자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의미를 다듬어갈 수 있다. 또한 지구화가 급속히 전개되면서 민주주의가 한 국가를 넘어 여러 국가에 걸쳐 적용될 수 있는지, 생태주의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민주주의가 인간이 아닌 생물들의 권리까지 보호해야 되는지 등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들이 더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주주의는 완성되어 더 이상 변하지 않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다듬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본문 뒤에는 간접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등 다양한 민주주의들의 용어 설명이 정리되어 있다. 독자들은 본문을 읽으면서 용어 설명을 참고할 수도 있고, 본문을 다 읽고 나서 다양한 민주주의들의 개념을 머릿속에 정리할 수도 있다. 독자들 스스로 민주주의의 개념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고 탐색하게 만드는, 간결하고 깔끔한 민주주의 입문서이다. 다만 원서가 2003년에 출간되어서 브렉시트, 난민 문제 등 최근의 정치 이슈들이 반영되지 않아 시의성이 떨어지는 것이 아쉽다. 우리나라에서 외국 학술서적의 번역 출간이 늦어지니 이런 문제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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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극장 - 막이 내리고 비로소 시작되는 아버지, 어머니의 인생 이야기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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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이 연극이라면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주인공이다. 그러나 시대라는 더 큰 무대에서 우리 중 대부분은 단역으로 그칠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주인공이 되고, 그들의 삶만이 역사로 기록된다. 무대를 떠나면 그저 잊히고 마는 평범한 사람들 중에 우리의 부모님들이 있다. 사회학자 노명우의 부모도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일제의 식민 지배와 한국전쟁, 독재 정권의 통치까지 수많은 동시대 사람들과 같은 사회적 운명을 공유했다. 그렇기 때문에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에서 시작된 부모님의 인생 복원 작업은, 부모님과 동시대인들이 살아갔던 당대의 사회상을 복원하는 것으로 확장됐다.


​  노명우의 부모는 자신에 대해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못했고, 사회학자 아들에게도 자신의 삶에 대해 그렇게 많이 이야기하지 못했다. 부모님의 삶 중 기록이나 증언으로 남겨지지 않은 공백들을 메우기 위해, 더 나아가 같은 시대를 살아갔던 수많은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기쁨과 슬픔, 소망과 절망을 알기 위해 사회학자 아들은 부모님이 살아갔던 당대의 대중영화들을 살펴보았다. 비평가들에게는 통속적이고 저속한 영화로 보이겠지만, 대중영화야말로 당대의 보통 사람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소망과 욕망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영화와 함께 당시의 뉴스 영상과 신문 기사, 사진 자료, 문학 작품과 당시 사람들의 구술 기록 등 다양한 자료들을 동원하며, 사회학자 아들은 두 사람이 살아갔던 시대의 사회상을 촘촘히 복원해 간다.


​  사회학자 아들은 수업료를 내지 못해 고민하는 조선인 학생을 그린 1940년 영화 <수업료>를 통해서, 아버지가 다니고 있던 일제강점기의 국민학교 풍경을 짐작해 본다. 1944년 일본 나고야로 강제 징병되었던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나고야에 가고, 1930, 40년대 조선 청년들의 징병을 독려하는 일본 영화들을 보면서 징병이 일본 본토 국민들과 동등한 황국신민이 될 수 있는 기회라고 홍보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읽는다. 한국전쟁 당시 어머니 또래의 서울 주민이 남긴 구술과, 당시 서울 시민들의 참담한 상황을 그린 박완서의 소설을 통해 어린 소녀였던 어머니가 전쟁을 어떻게 견뎌냈을지를 그려본다. 무작정 상경했다 양공주나 다방 레지가 되어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여주인공들이 나오는 1960, 70년대 영화들에서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미군 기지촌 다방에서 신세 한탄을 하던 양공주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렇게 개인의 인생사와 더 큰 시대의 역사, 현실의 역사와 가상의 창작물들, 에세이와 사회학, 역사학을 넘나들면서 복원한 당대의 시대상이 독자들의 눈앞에 영화처럼 펼쳐진다.


​  저자는 부모뿐만 아니라 당대라는 무대에 단역으로 올랐다 사라진 사람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들은 자신이 겪어야 했던 험난한 인생 여정을 그저 자신의 기구한 팔자라고만 생각했지, 그 뒤에 커다란 사회적,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는 일제의 식민 지배를 겪고, 광복되자마자 전쟁을 겪고,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 아래서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그들은 자신의 의지보다는 국가의 의지를 따라 살아갔다. 저자는 왜 반항도 하지 않고, 자기 의지도 없이 살아갔느냐고 그들을 비난하지 않고 국가의 강력한 연출에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들과는 다른 미래를 꿈꾼다.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부모님뿐만 아니라 시대라는 무대에서 단역으로 섰다 사라진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이자 헌사다. 그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우리는 우리의 무대에 서서 그들과는 다른 미래를 만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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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법이론의 전개 법철학연구 총서 5
윤진숙 엮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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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고이 사건을 계기로, 1999년 제정된 남녀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에 성희롱을 불법행위이자 성차별로 명시하게 되었다남성 가장인 호주(戶主)를 중심으로 호적을 정리하는 제도인 호주제는 가부장적인 가족 제도의 잔재로 양성평등에 어긋나기에 2003년 위헌 판결이 내려졌고, 2008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그리고 2017년 10, 23만 여 명의 시민들이 낙태죄 폐지 청원에 참여했고 올해 4월 11일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위헌 여부를 선고할 예정이다이렇게 우리 법은 여성의 자유와 평등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갔다이런 흐름을 따라 여성 문제페미니즘과 관련된 법학 논문들도 계속해서 나왔고이 책은 그 중 16개의 논문을 뽑아 엮은 것이다.

 

  낙태죄 위헌 여부 선고를 몇 달 앞둔 지금가장 먼저 눈이 가는 글은낙태죄 헌법소원과 여성의 목소리낙태는 1953년 형법 초안에서부터 죄로 규정되었고임신이 임산부 자신의 건강에 위해가 되거나 성폭행이나 근친상간으로 인한 임신처럼 윤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임신일 경우에만 임신중절 수술을 허용했다이미 7년 전인 2012년에 낙태죄에 대해 헌법소원이 제기되었지만헌법재판소에서는 낙태죄 조항이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을 지나치게 침해한다고 보기 어려우며이 조항으로 제한되는 사익(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조항으로 보호되는 공익(태아의 생명)에 비해 중요한다고 볼 수 없다낙태죄 조항이 헌법에 어긋나지 않다고 선고했다그러나 낙태죄가 처음 규정된 이후로 수십 년 동안 태아의 생명은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졌지만태아를 직접 몸 안에 품고 낳고 양육하는 여성들의 권리는 그보다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낙태죄 조항의 역사를 훑어본 뒤이 글은 낙태 경험에 대한 여성들의 인식 조사 결과를 보여준다. “법이 낙태를 금지한다면 원치 않은 출산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84퍼센트의 응답자들이 그래도 원치 않는 출산은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했고, “법이 낙태를 허용한다면 사람들이 좀 더 쉽게 낙태를 할까라는 질문에는 78퍼센트의 응답자들이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했다응답자들은 국가에서 법으로 낙태를 허용하거나 금지하는 것과 무관하게 출산은 개인이 선택할 문제라고 답했다또한 낙태 시술은 여성의 신체에도 유해하고 정신적으로도 아이를 죽였다는 고통을 안겨주는 것을 알면서도 낙태를 감행할 정도면 정말 절박하게 낙태를 해야 했던 것이다여성들이 낙태를 쉽게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필자는 그 동안의 낙태죄 관련 논의에 낙태를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것을 지적하고이 글을 통해 그녀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그 밖에도 성희롱성매매여성 채용 할당제 등 여성페미니즘 관련 굵직굵직한 이슈를 다룬 글들이 이 책에 담겨 있지만,동성애혼인에 대한 법적 개입의 딜레마와 가족 이데올로기 해체는 여성뿐만 아니라 성소수자에게까지 눈을 돌린 글이라 흥미롭다억압을 당한 경험이 있는 약자는 다른 약자에게 더 잘 공감할 수 있기에 여성을 넘어 또 다른 약자소수자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 본 것이다필자는 동성애가 배척되어 온 근본적인 원인이 이성애자 남녀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정상적인’ 가족에 대한 집착이라고 보고 있다성소수자들이 이성애자와 다를 것 없는 사회 구성원으로 승인되었지만아직도 동성결혼은 기존의 가족결혼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것으로 여겨져 소수의 국가들에서만 허용되고 있다자녀를 가지는 것은 허용하지 않지만 두 동성애자의 동반자 관계는 허용하는 파트너십또는 시민결합 형태로 동성결혼은 서서히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과정조차 국가에서 성소수자들의 삶을 통제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배우자로서의 권리를 갖기 위해서는 법적으로 혼인 관계를 인정받을 필요가 있지만성소수자들이 동성결혼을 허락해 달라며 국가에 매달리고이성애자들의 일부일처제를 흉내 내는 건 아닌지 의문을 품는다성소수자들마저 정상적인 가족에 집착해 국가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려고 한다는 것이다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정상적인 가족이 해체되고 있는 지금기존의 정상적인 가족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성소수자들을 '정상화'시키고 정상화되어야만 포섭하는 국가의 모순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그러나 성소수자들이 동성결혼을 하고 배우자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을 꼭 국가의 품 안에 들어가려는 발버둥이나 이성애자들의 일부일처제 흉내 내기로만 치부해야 할까결혼 자체가 인류에게 뿌리 깊이 이어져 온 하나의 제도이기는 하지만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이루고 서로의 배우자로서 떳떳하게 살아가고 싶은 욕망은 이성애자들만의 것은 아니다그러한 욕망도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주입된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사랑하는 한 사람하고만 결혼 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성소수자에게 왜 이성애자 흉내를 내고 그래그냥 자유롭게 살아가면 되지.”라고 말하는 것도 이성애자의 또 다른 오만이라고 생각한다동성결혼에 대한 고찰은 흥미로웠지만그 결론에는 공감할 수 없었다.


  그 점에서는 아쉽지만이 책에서는 법 집행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면서 정작 당사자인 약자소수자들의 목소리보다는 엘리트 법조인들의 판단이 더 중요시된다는 점을 계속해서 지적하고 있다이 책에 실린 마지막 논문로여링을 통한 맥락 추론에서는 소수자가 처한 맥락을 추론하면서 변호 업무를 실습하는 교육을 소개하고 있다. ‘로여링lawyering’은 변호사처럼 생각하는 훈련으로 미국의 로스쿨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변호사 실습 교육이다학생들은 의뢰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의뢰인이 어떤 경험을 했고그 경험이 어떻게 법적 문제가 되었는지그 경험이 의뢰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등 의뢰인이 처한 맥락을 추론한다그 과정에서 법의 합리성이나 중립성이라는 명목으로 가려져 있던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듣는다그리고 사회복지사심리학자 등 다른 분야 종사자들과의 협동을 통해 법률적인 면과 법률 외적인 면 양면으로 의뢰인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이런 제도가 국내에도 도입된다면당사자인 여성이나 다른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법 집행에 반영되기 힘든 현실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앞으로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의 문제를 법 집행에서 다룰 법조인이나 법 전공 학생들에게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법조인은 아니지만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은 일반 독자들도 읽어 볼 가치가 있다법학 논문이지만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고생각보다 이해하기 쉽게 쓰여진 글들도 있다.


  다만 교열 상태가 좋지 않다주술 관계가 맞지 않고 조사가 잘못 쓰인 문장들이 많고오탈자도 많다논문 사이트에서 논문 자체를 그대로 가져오고 다듬지 않은 느낌이다그리고 본문에서 언급하는 날짜들로 보아 2000년대 초반에 쓰여진 논문들도 여러 편 있는데, 10여 년 전 상황을 근거로 이야기하고 있어 시의성이 떨어진다이미 폐지된 호주제와 동성동본 혼인 금지법을 비판하는 논문이 그 대표적인 예다논문을 썼을 당시의 법이 뿌리 깊은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현재의 법이 그때 이후로 어떻게 변했는지는 보여주지 못한다작년 11월에 출간된 책이라면 지금의 흐름을 좀 더 많이 담고 있어야 했는데논문 선정이 아쉽다이러한 점들이 이 책의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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