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세계
고정기 지음 / 페이퍼로드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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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지니어스>에서 콜린 퍼스가 연기한 주인공은 20세기 초 미국의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다그는 뉴욕의 유명 출판사 스크리브너스의 전설적인 편집자로스콧 피츠제럴드어니스트 헤밍웨이토머스 울프 등 미국 문학계의 쟁쟁한 작가들을 발굴하고 그들이 걸작을 써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편집자의 세계는 그를 비롯한 15명의 미국 편집자들의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이들의 활동 시기는 191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로, 20세기 전반의 미국 문화는 그들의 노력으로 찬란하게 빛나게 되었다위대한 개츠비분노의 포도』 등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과 에스콰이어코스모폴리탄리더스 다이제스트』 등 미국인의 패션과 라이프 스타일문화를 선도했던 잡지들의 뒤에 그들이 있었다.


  20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미국 편집자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 독자에게 멀게 느껴질 수 있다하지만 편집자라는 직업의 큰 틀은 21세기가 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덕분에 100여 년 전에서 수십 년 전에 활동했던 이들 미국 편집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도편집자에 대해 잘 몰랐던 독자들은 편집자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게 된다편집자가 단순히 원고의 오탈자만 잡는 사람이 아니라 저자와 함께 책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라는 것을편집자는 원고를 읽으면서 그 원고가 작품성과 시장성을 얼마나 갖추었는지 판단하고 그 원고의 출판 여부를 결정한다편집자는 저자와 논의하면서 초고를 더 완성도 있게트렌드에 맞게 재구성하고 다듬어간다책의 제본 방식표지 디자인에도 관여하며 책 제작 전반을 지휘한다출판사 판매 회의에서 자신이 편집한 책의 판매 전망을 설명하고책이 출간된 이후에는 그 책이 벌어들인 수입과 그 책에 대한 서평들을 살펴보며 그 책의 성과를 점검한다다른 출판사들과의 경쟁에서도 살아남아야 한다이렇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속으로는 치열하고 분주한 편집자의 세계를 책 한 권으로 엿볼 수 있게 된다.


  편집자인 사람들은 지금 자신들이 하는 일과 고민을 백 년 전수십 년 전의 편집자들도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깊이 공감할 것이다출판사에 들어오는 수많은 원고들 중에서 옥석을 가려내야 한다이 책을 출간할지 말지출간한다면 어떤 방향으로 만들어갈지어떻게 홍보할지를 놓고 저자동료상사와 끊임없이 의논하고 갈등도 겪는다유명 작가의 원고를 출판하기 위해 다른 출판사들과 경쟁하고 선인세인세 등 저자와의 돈 문제도 처리해야 하며 때로는 출판사의 처사에 불만스러워하는 저자의 항의를 받는다편집자의 세계는 그런 문제들을 척척 해결하고 만드는 책마다 베스트셀러로 만들어내는 왕도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전설적인 편집자들이라고 해도 출판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독자가 원하는 것을 포착하는 것을 평생 동안 어려워했다편집하는 책들을 모두 베스트셀러로 만들지는 못했고 출판 시장에서 실패하기도 했다좋은 원고를 알아보지 못하고 놓치기도 했다윌리엄 포크너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작가로 성장하도록 든든하게 지원해 줬던 편집자 삭스 코민스도존 오하라라는 다른 작가와는 원고 수정 문제로 갈등을 겪다 아예 그와 함께 작업하지 않게 됐다그들은 그저 그러한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어도 계속 자기 일을 사랑하며 그 일에 열정을 쏟았을 뿐이다그들이 넘어설 수 없는 전설이 아니라자신처럼 늘 고민하고 노력했던 한 편집자였을 뿐이라는 것이 지금의 편집자들에게는 용기와 위안을 줄 것이다.


  편집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편집자의 세계를 알게 하고편집자인 사람들에게는 수십 년 전 먼 나라의 선배들이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며 분투했다는 것을 알게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의의일 것이다그런데 2020년대에 나온 책이라기에는 좀 오래됐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문체도 그렇고지금의 외래어 표기법에 맞지 않거나 표기법이 일관되지 않은 고유 명사들이 자주 보인다. ‘처녀작’, ‘여류’ 등 최근의 성 중립적 단어를 사용하는 추세에는 맞지 않는 단어들도 자주 쓰이고, ‘여성 편집자들은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원고에 너무 안이하게 공감한다남성 편집자만이 목적의식과 특수한 시장 감각을 가지고 평가할 수 있는 책들이 있다는 윌리엄 타그의 편견 어린 발언을 별다른 비판 없이 그대로 싣고 있다. 2001년에 이미 폐간된 잡지 마드무아젤이 지금도 계속 간행되고 있는 것처럼 서술되고휴 헤프너가 올해’ 32세가 되는 딸 크리스티 헤프너에게 플레이보이의 회장직을 물려줬다고 서술하고 있다크리스티 헤프너가 플레이보이의 회장이 된 것은 1984년의 일이고, 2009년에 이미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이렇게 시대에 맞지 않는 모습이 보이는 이유가 있다이 책이 1986(인터넷 서점에서는 1991년에 출간된 것으로 나와 있지만 본문 뒤의 해설에서는 1986년 출간되었다고 하므로 후자를 따랐다)에 출간된 책을 재출간한 책이기 때문이다게다가 저자분은 이미 고인이 되었기 때문에 저자의 원고에 손을 대기 어려웠을 것이다하지만 오탈자나 비문(오탈자와 비문이 눈에 많이 띈다)최근의 외래어 표기법에 맞지 않는 표기는 바로잡고현재 변화한 상황은 주석이나 보충 설명 페이지로 보충했다면 이러한 단점이 보완됐을 것이다저자분이 인터넷도 없는 시절에 미국 대학 도서관의 자료까지 찾아가며 이 책을 완성했는데지금 어떻게 상황이 변화했는지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덧붙이는 수고를 더했다면 2020년대에 읽기 더 좋은 책이 되지 않았을까이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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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없는 판타지 -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화사
오혜진 외 지음, 오혜진 기획 / 후마니타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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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없는 판타지’. 이 제목만으로는 이 책이 어떤 책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그럼 부제를 보자.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화사’. 이제야 어떤 책인지 알 것 같다. 그런데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화사’가 어떻게 ‘원본 없는 판타지’와 연결이 되는 걸까. 이 둘의 관계를 알려면 이 책에서 말하는 ‘원본’과 ‘판타지’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이자 엮은이인 오혜진은 ‘판타지’, 즉 환상이 현실을 반영하며 현실로 인해 만들어지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을 만들어내는 힘을 지닌 것으로 본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을 받고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일하는 것은 과거에는 환상이었겠지만 그 환상을 새로운 현실을 만들 동력으로 삼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 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은 현실이 되지 않았는가. 오혜진은 문학이든 미술이든 영화든, 그 어떤 것으로든 그런 환상을 만들고자 하는 모든 의지와 실천을 문화로 본다.

그런데 단순히 남자와 여자, 이성애자와 성소수자의 위치를 바꾸는 것으로 젠더 간의 모든 불평등과 차별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남성 권력자의 시선으로 기록되었다는 이유로 지금의 역사를 모두 부정하고 그것과는 아예 무관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야 할까? 그것이 페미니스트로서 오랜 성차별과 억압을 이길 수 있는 새로운 판타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최선의 방법인지, 오혜진은 의문을 제기한다. 남성 중심적, 이성애 중심적, 가부장적 질서 등 기존의 지배 질서와 전통을 ‘원본’으로 삼고 단순히 그것을 정반대로 뒤집는 것에도, 지금까지의 역사와 문화적 흐름에서 아예 벗어나 아무 맥락 없는 ‘원본’을 만드는 것도 진정한 해결책은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단순히 기존의 지배 질서를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의 역사와 문화라는 맥락과 무관한 것도 아니지만, 지금까지 정상적인 것으로 규정되어 온 것들을 이탈하려는 시도들. 그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원본 없는 판타지’, 현실과 무관하지 않고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지만,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낼 힘을 품고 있는 판타지를 만들어내려는 시도일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그러한 시도들과 존재 자체로 그러한 시도였던 사람들, 그들이 만들어낸 사건들이다. 가수 이선희가 데뷔하던 1980년대에는 여성 가수가 긴 머리에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하는 것이 정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선희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왜 치마를 입지 않느냐’고 묻고 ‘여자답게’ 차려입을 것을 권해도 짧은 머리와 안경, 바지를 고수했다. 남성은 ‘남성답게’, 여성은 ‘여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이분법적 사고가 만연한 사회에서 그저 ‘자기다움’을 지키면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페미니즘적 실천일 것이다. 1980년대 당시에는 ‘보이시한’ 여성 가수의 옷차림이 성별 규범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는 ‘남자를 모르는 건전한 소녀’로 비춰졌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중성적인 패션과 외모를 고수하는 여성 가수들에게 성별이나 성 정체성 논란이 일어날 정도로 우리 사회의 이분법적 성별 규범은 집요하지만. 한편 1980년대까지도 여성들은 책을 읽지 않거나, 가볍고 감상적인 책만 읽는다는 편견이 뿌리깊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여성들이 읽어 온 책들의 목록을 조사하면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사회과학 서적, 철학, 과학 이론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언론들이 ‘후진적인’ 독서라고 말했던 여성 수필, 로맨스 소설, 여성 잡지 읽기를 통해 여성들은 나름대로의 독서 문화를 형성했고 문학적 소양을 키웠다. 순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당대의 여성지, TV 드라마까지 온갖 장르의 문화 예술을 섭렵했던 박완서는 문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성장하며 한국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될 수 있었다.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여성은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규정하거나 여성은 남성 같은 역량을 갖추고 문화를 창조해 낼 수 없을 거라고 한계를 짓는 사회의 억압 속에서도 이런 실천과 시도는 계속되어 왔다.

이런 시도는 기존의 문화사의 언어나 방법론으로는 포착되거나 해석되기 어렵기에이 책의 저자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그것을 재구성하고 해석한다이 책의 대표 저자이자 엮은이인 오혜진은 스스로 이 책이 정연한 문화사라기보다는 문화사의 언어와 규범으로 쉽게 포착해석되지 않는 존재사건실천들의 흔적이 보관된 작은 서랍장에 가깝다고 말한다그 말대로 이 책에 실린 14편의 글은 소재도 스타일도 글의 난이도도 제각각이다하지만 그 14편의 글 전체를 관통하는 공통점이었다기존의 남성이성애 중심적가부장적 역사가 들여다보지 않은 곳을 들여다보고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시도하고 실천했던 사람들을 조명하며 그들의 존재를 지우는 기존의 질서를 비판한다는 것그럼으로써 저자들은 페미니스트의 관점으로 문화사를 보는 것을 넘어서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을 실천하고 있다독자들은 이들이 서랍장에 모아놓은 이야기들을 보며 기존의 역사문화사에서 걸러졌던 존재들실천들사건들을 발견하고 그들에게서 새로운 판타지새로운 문화문화사의 가능성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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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이어 말한다 - 잃어버린 말을 되찾고 새로운 물결을 만드는 글쓰기, 말하기, 연대하기
이길보라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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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 청각장애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라는 단어 자체를 올해 개봉한 영화 <코다>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영화는 프랑스 영화 <미라클 벨리에>(2014)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 것인데, 청각장애인 가족들을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과 꿈을 좇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코다 소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이길보라 감독도 코다이다. 저자는 청각장애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비장애인 자녀로서 장애인이 경험하는 세계와 비장애인이 경험하는 세계의 사이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장애라는 주제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성별, 젠더, 성정체성, 장애 유무, 인종, 민족, 계급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며 그 사람의 삶과 경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정체성만으로 그 사람의 삶과 그 사람만의 고유한 세계를 다 이야기할 수는 없다. 저자는 코다이면서 여성으로서, 지금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30대 청년으로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질문을 던지고 목소리를 낸다.

나와 다른 정체성을 지니고 그로 인해 다른 경험을 쌓아온 사람을 통해 내가 몰랐던 세계를 알게 된다. 비장애인 가족들과 살아온 비장애인인 나는 코다인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청각장애인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을 ‘청인(聽人)’이라고 하고 소리를 듣지 못하는 대신 자신들만의 고유한 언어(수어)와 문화(농(聾)문화)를 지닌 사람을 ‘농인(聾人)’이라고 한다(저자는 이렇게 ‘농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인식하는 사람들을 ‘청각장애인’ 대신 ‘농인’으로 지칭한다. 이런 용어 사용에서부터 그들을 ‘장애’를 가진 결핍된 존재로 정의하지 않으려는 저자의 의도가 보인다). 청인들은 모든 농인들이 간절히 소리를 듣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농인 부모는 이런 고정관념을 깬다. 그들은 아름다운 음악 소리, 새 소리, 물소리가 궁금하긴 하지만 자신이 농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다시 태어나도 농인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오만하게도 나도 청인으로서 농인들이 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고, 그들만의 문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내 머릿속의 편견 하나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TV 뉴스나 정부의 코로나 관련 정책 브리핑에 수어 통역사가 나올 때는 그저 ‘청각장애인들에게도 보도 내용이 잘 전달되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어 통역사가 나오는 삽입 화면이 너무 작거나, 수어 통역의 질이 좋지 못해 정작 농인들은 뉴스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다. 수어에서는 손동작뿐만 아니라 얼굴 표정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손동작과 얼굴 표정이 모두 잘 보이도록 해야 하는데, 뉴스에 삽입되는 수어 통역 화면은 그 둘을 알아보기에 너무 작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수어에는 음성 언어의 문법과 어순을 그대로 따르는 ‘수지한국어’와 농인들만의 문법으로 구성된 ‘한국수어’가 있는데(예를 들어 ‘짧게 수어 얼굴 표정 사용 좋아’라는 한국수어는 음성 언어로 옮기면 ‘수어와 얼굴 표정을 사용하면 짧게 말할 수 있어 좋아’라는 뜻이다.) 수어를 늦게 배웠거나 평소에 음성 언어로 말하는 농인들에게는 수지한국어가 내용 전달에 유리하지만 그렇지 않은 농인들은 수지한국어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뉴스 보도의 수어 통역에서는 둘 중 어느 것을 사용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 게다가 수어를 모르는 사람은 알아채지 못하지만 수어를 아는 저자의 눈에는 수어 통역의 질이 들쭉날쭉한 것이 보인다. 저자는 청인들이 ‘장애인을 배려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수어 통역을 농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가 아니라 청인이 베푸는 ‘혜택’으로 생각하고, 정작 그들에게 필요하고 마땅히 누려야 할, 국민으로서의 알 권리는 외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저자의 이런 문제 제기를 통해 세상에는 내가 당연히 누리고 있기에 그것을 누릴 수 없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와 다른 정체성을 지닌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내가 몰랐던 다른 세계를 알게 된다면, 나와 같은 정체성을 지닌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는 내 정체성으로 인해 직면하는 문제에 함께 공감하고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책에서 저자가 자신의 경험과 그에 관련된 사회 문제를 이야기하는 주요 키워드 중 하나는 페미니즘인데, 같은 여성으로서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이다. 저자가 성인이 되기도 전부터 겪은 성추행과 성희롱은 나도 오래전부터 겪어온 것이다. 저자는 딸이라는 이유로 할머니가 지우라고 한 아이였다는데, 내 할머니는 지우라고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딸이라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낙태를 해본 경험도 없고 처음에는 낙태를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원하지 않는 임신을 했을지도 몰라 두려워하다 임신이 아닌 것을 알고 안도하는 친구를 보면서 낙태를 반대했던 신념을 버리게 되었다. 나는 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나의 경험을 저자의 경험과 겹쳐 보고 저자에게 공감한다. 누군가가 저자에게 “임신중지나 몰카, 페미니즘 말고 가벼운 글을 쓰면 좋겠다.”고 했다지만, 계속해서 말하고 쓰고 투쟁하겠다는 저자의 결심을 응원하고 동참하려 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주제 중 마음 깊이 공감한 또 한 가지는 청년들의 불안정한 삶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청년들은 자기 집을 마련하기는커녕 고시원과 고시원만큼이나 좁은 집을 전전하며 소득의 상당 부분을 월세로 써야 한다. 청년을 위한 공공주택들이 지어지고 있지만, 저자는 공공주택의 입주자 자격을 얻기 위해 가난을 증명하고 경쟁해야 하는 현실에 분노한다. 자기 몸 하나 뉠 집이 없어 불안한데, 자기 몸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 한국에서는 개인이 보험설계사와 논의하면서 보험을 직접 설계하는데, 네덜란드에서는 국가에서 의료 시스템의 품질을 책임지고 개인의 소득에 따라 보험 보조금을 지급한다고 한다. 네덜란드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는 저자의 친구는 “왜 개인이 보험을 들고 그 세부 내용을 선택해야 하느냐. 그건 국가와 사회가 보장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저축과 연금만으로는 노후를 대비하기 어려운 세상이기에 시세 차익으로 돈을 버는 투자가 열풍을 일으키고 있지만, 그러면서 집값과 전세 가격은 올라가고, 실제로 살기 위해 집을 사려는 사람, 전세 집을 구하려는 사람의 형편은 더 어려워진다. 또한 저자는 부동산과 주식 투자에 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없거나 투자를 할 종잣돈조차 없는 사람들이 이러한 투자 열풍 속에서 소외될 것을 우려한다. 모두 국가가 개인이 기본적인 삶의 조건을 안정적으로 누리고 살 수 있도록 보호해 주지 못하기에 생겨난 풍경들이다. 이러한 현실에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안정적으로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과 기본 소득은 어떻게 가능할까? 내 몸은 국가와 사회가 지켜주어야 하지 않을까? 주식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정치권력이 없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질문을 던지는 것, 작게나마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헌법에서 보장한 기본권 보장에 어긋나는 법안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국민 청원을 올리는 것, 성범죄에 부당한 판결을 내린 판사의 대법관 후보 자격을 박탈하라는 국민 청원에 동의하는 것, 성 평등을 위한 법안을 추진하는 국회의원에게 응원 문자를 보내는 것, 블로그나 다른 SNS를 통해서 성 불평등과 성범죄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글로 적는 것. ‘나보다 앞서 간 사람들이 해온 말과 행동 위에 내가 있고, 내가 하는 말과 행동 위에 나보다 나중에 오는 이가 서게 될 것이기에’, 저자는 먼저 용기 있게 말했던 사람, 당신을 이어 말한다고 선언한다. 나는 이 서평을 씀으로써 짧게나마 저자를 이어 말한다. 누군가가 이 책을 읽거나 이 서평을 읽고 이어 말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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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이게 다 인권 문제라고요? - 새로운 인권 감수성으로 만나는 청소년, 디지털, 기후위기, 젠더, 장애, 난민 이야기, 2021년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도서, 2021년 (사)행복한아침독서 추천도서 곰곰문고 6
김도현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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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 청소년을 위한이라는 말이 들어간 책을 읽기에는 쑥스러운 나이가 되었지만, 청소년 책들을 살펴보면 어른이 읽어도 좋은 책들이 보인다. ‘이런 책이 내가 청소년일 때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한탄이 나올 정도다. 잠깐! 이게 다 인권 문제라고요?도 그런 책이다.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춰 집필되고 편집되었지만, 어른들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는 책. 인권 문제에 나름대로 관심이 많다고 생각했는데도 살아가면서 지나쳤던 인권 관련 이슈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첫 챕터인 청소년 인권 문제부터 내가 평소에 의식하지 않고 있는 부분이었다. 이 챕터를 읽으면서 내가 청소년 시절에 겪어온 것들이 인권 침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간 자율학습이라고 했지만 예체능계가 아니면 무조건 밤 열 시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해야 했고, 점심시간에도 자율 학습을 해야 했다. 성인 노동자에게는 식사 시간을 포함한 휴식 시간을 보장해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져 있는데, 미성년자인 학생은 휴식할 권리도 없단 말인가. ‘생활 지도라는 명목으로 교사가 학생에게 감정을 실어 체벌을 할 때가 많았고, 수업 시간에 학생에게 네 가슴 사이즈는 A컵쯤 되겠네하고 성희롱을 하는 교사도 있었다. 이렇게 자기 권리가 침해되는데도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이유로 교사의 통제를 따르며 입시 준비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학교 풍경을 바꾸기 위해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학생 인권조례에는 나와 내 또래 사람들이 학창 시절에 겪었던 인권 침해들을 방지할 수 있는 조항들이 있었다. 학생의 쉴 권리와 모든 종류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개성을 추구할 권리도 보장하고 있었다. 저자는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학생들 스스로가 문제 제기를 하고 자신의 권리와 평등을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대화의 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나도 청소년이었던 사람이고 지금의 청소년들이 겪었던 억압과 인권 침해를 경험했으면서 그 모든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소년 자신이 자신의 인권을 놓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도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저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면 청소년들의 인권이 좀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을 뿐. 청소년들을 학생인권조례의 시혜 대상으로만 생각했을 뿐 그들을 그들 자신의 인권을 스스로 지키는 주체로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내가 겪고 있지 않은 인권 문제에 무심했을 뿐 아니라 나 자신이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기도 했다는 것도 깨달았다. 인터넷을 하다 좋아하는 연예인의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사람이 그 연예인의 고등학교 졸업 사진을 올린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같은 팬들이 보면 좋아하겠다 싶어 그 졸업 사진을 팬 사이트에 올리고 고등학교 때는 이랬네하고 웃고 떠들었다. 내 행동은 명백히 그 연예인의 초상권과 사생활을 침해하는 행동이었다. 이 책에서는 너무 많은 사람이 사생활을 침해하면 그 행위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고 지적했는데, 내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인터넷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정보가 올라와 있기 때문에 누구나 검색해서 볼 수 있는 것누구나 마음대로 사용해도 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는데, 나도 그런 착각에 빠져 있었다.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고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얼마나 안일하고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무심히 지나쳤던 인권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인권 관련 이슈에 대해 대답하기 난감했던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힌트도 얻게 되었다. 우선 남자만 군대에 가는 것은 역차별이 아니냐는 질문. 이 책에서는 남자만 군대에 가는 것이 역차별이 아닌 이유를 조목조목 밝힌다. 역차별은 부당한 차별을 받는 쪽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한 제도나 장치가 너무 강해 오히려 반대편이 차별을 받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남성만 군인으로 징집하는 제도가 여성을 보호하고 우대하기 위한 것일까? 이 책은 국방부에서는 남성만 징집하는 것이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특정 연령대의 남성만으로도 필요한 군인 수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국방의 의무에는 병역뿐만 아니라 군 작전에 협조하거나 전시 근로 동원에 응하는 의무도 있기에 군대를 가지 않는다고 해서 국방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 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헌법재판소에서는 여러 차례 병역 부과 대상을 남성으로 한정한 병역법이 합헌이라고 판결했고, 징병제가 있는 70여 개 국가들 중에 여성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하는 국가는 극히 일부이며 남성 중심의 현 군 조직에서 여성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했을 때 상명하복과 권력관계를 이용한 성희롱 등의 범죄가 일어날 우려가 있다고, 남성의 병역 의무는 역차별, 평등권 침해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물론 여성이든 남성이든 모든 국민이 군 복무를 하는 것으로 병역법이 바뀔 수 있지만 그 전에 여성이 평등하고 안전하게 군 복무를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이 책은 이야기한다. 남성만 징집하는 한국 병역법이 역차별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이야기할 근거를 정확히 알지 못했는데, 이렇게 근거를 조목조목 설명해 주니 막혔던 가슴이 트이는 것 같았다.


  또 한 가지 나를 난감하게 만드는 질문은 혐오 표현도 표현이니 표현의 자유를 인정해야 되지 않느냐는 것.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이들 중에서는 교회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설교를 해도 처벌받는 것이 아니냐며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책에서는 동성애가 싫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자신이 이성애자임을 과시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동성애가 싫다는 말은 이성애자로서 차별당하지 않는 안전한 위치에 있으면서 동성애자라는 소수자는 불안에 떨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혐오 표현은 특정한 조건을 지닌 사람들을 무시하고 비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계속 쓰다 보면 그 말에 담긴 증오에 물들어, 그 대상을 진심으로 증오하게 되고 폭력도 서슴없이 가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혐오 표현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근거를 들어도 이해가 안 된다면 역지사지를 하게 하면 된다. 외국에 나갔을 때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백인 우월주의자에게 코로나 바이러스를 옮기는 동양인은 싫어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어떤 논리적 근거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역지사지의 태도를 취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한 신문 기사를 보고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시내 지하철역 엘리베이터 설치 예산이 삭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애인들이 이동권을 보장해 달라며 시위를 했는데, 시민들은 그들을 조롱하고 경찰이 그들을 끌어내자 환호했다는 것이다. 더 슬프고 답답했던 것은 그 기사에서조차 장애인들을 조롱한 시민들을 비판하기는커녕, ‘자기 권리를 찾겠다고 다른 사람의 이동까지 방해해서야 되겠냐며 장애인들을 비난하는 댓글들이 달린 것이었다. 청소년들이 지금 당장 내가 불편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인권을 생각하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사는 게 벅차다며 다른 사람의 인권까지 챙기기는 힘들다는 어른이 조금씩이라도 마음을 바꾸기 위해 이런 책이 필요하다. 나와 다른 조건, 사회적 위치 때문에 인권 문제를 겪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외면한다면, 우리의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할 때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런 것도 인권 문제였구나하고 다시 한 번 돌아보고 그런 문제를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데 이 책이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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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재판의 나라에서 - 우리 사법의 우울한 풍경
정인진 지음 / 교양인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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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와 법적인 다툼을 하게 돼 재판을 치른 적은 한 번도 없다하지만 을로서 갑에게 권리를 침해당할 위기를 종종 겪었기 때문에 온라인으로 법률 상담을 한 적은 여러 번 있다그때마다 내 권리를 침해하는 사람들을 처벌하고 내 권리를 지키기에는 법이 너무 성기다고 느꼈다그들을 고발할 확실한 증거를 갖추는 것은 어려운데 그 사람들이 빠져나갈 구석은 너무 많았다그저 법률 상담만 잠깐 해봐도 이렇게 막막한데 본격적으로 재판에 뛰어드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난관에 부딪혀야 할까전직 판사현직 변호사로서 저자 자신이 보아온 수많은 재판과 그 문제점을 돌아본 책이 이상한 재판의 나라에서이다.


  저자는 판사로서 재판들을 맡았을 때 자신의 한계와 무력감을 느꼈다재판정에 선 사람들은 자신의 밥그릇이 걸린 일이라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데자신은 아무리 많은 재판을 겪었어도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고 느꼈다자신의 판결이 옳은 판단이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판사 자리에서 물러나 변호사가 되고 나서는 같은 헌법과 법률을 따라 재판하면서도 판사들마다 판결이 제각각인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정성 들여 증거 자료를 준비해도 판사들이 그 자료를 제대로 검토해 보지도 않고 대충 판결을 내려버리는 모습에 허탈해하기도 했다이런 현실의 원인을 살펴보고 그 해결책을 생각해서 법이 진정으로 일반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랐기에 저자는 이 책을 썼다.


  저자가 생각하는 이상한 재판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빨리빨리대충대충 사건을 심리하는 것은 판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배당되는 사건 수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일어나는 구조적 문제다하지만 편향되거나 보통 사람들의 상식에 어긋나는 판결을 내리는 것은 판사들 자신의 문제다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판사 자신들이 오만과 아집을 버려야 한다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사법권은 독립을 보장받아야 하고 판결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법과 판사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려버리고결국 판사는 오만과 아집에 빠져버리게 된다우리나라의 형사 소송 규칙 제147조에는 재판장은 판결을 선고함에 있어 피고인에게 적절한 훈계를 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는데반면 미국의 법관 윤리에서는 판사가 법정에서 훈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정설이다재판 당사자는 판사에 비해 약자의 입장에 서 있고판사로 대표되는 국가 권력이 재판 당사자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재판 당사자에게 전체주의의 폭력을 휘두를 수 있기 때문이다실제로 판사들은 피고에게 훈계를 늘어놓기도 하고 때로는 재판 당사자들에게 막말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저자가 법관들에게 바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자신을 과신하고 법정에서 제왕적 권한을 행사하면서 자의적 판단을 내리지 않고법의 원칙을 지키는 것하지만 법리와 판례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사실 관계와 그를 둘러싼 다양한 견해들을 꼼꼼히 살펴볼 것내가 내리는 판결이 사회적으로 어떤 결과영향을 미치는지 진지하게 검토해 볼 것원론적인 해결책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저자가 수십 년 동안 법조계에서 재판을 겪고 오랜 시간 고찰하면서 내린 결론이다간단한 결론인 것 같지만 법조계가 그동안의 관성에서 벗어나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스스로를 개혁하려면 꼭 필요한 태도이다.


  이 책에 실린 글 중 대부분이 같은 법조인더 나아가 법조계 전체를 향한 비판과 조언이지만변호사 고르기변호사 사용법은 법적 분쟁을 준비해야 하는 평범한 국민들을 위한 글이다변호사 고르기에서 저자는 무조건 이길 수 있다며 당장 기분을 좋게 해주는 변호사보다는당신의 피눈물이 묻은 권리와 이익을 무겁게 알고 지켜주는 변호사를 선택하라고 조언한다변호사 사용법에서는 어떻게 하면 변호사와 연락이 닿을 수 있는지본격적으로 재판을 준비하기 전 법률 상담은 어떻게 할 수 있는지변호사에게 사건을 맡기는 데 비용은 얼마나 드는지변호사와는 어떻게 계약하고 어떻게 함께 송사를 진행해 가야 하는지 단계별로 차근차근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평범한 사람들이 험한 세상에서 생각지 못한 위기를 맞았을 때 법적인 도움을 제대로 받을 수 있길 바라는 저자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저자의 애정은 인권 문제에 대한 저자의 단호한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그는 내 몸을 통제할 자유는 기본적 인권이고 출산을 강제하기에는 여성들이 처해 있는 사회경제적 여건이 어렵기에여성에게만 형사 책임을 지우는 낙태죄는 전면적으로 비범죄화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동성애가 자신들의 교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차별금지법 제정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개신교도들에게, ‘기독교도가 아닌 이에게 기독교의 참된 가치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존중이라며교회는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도 멀리해야 옳다고 말한다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2021년 1월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들의 손을 들어준 것을한일 분쟁이라는 틀 안에서만 보려 하지 말고 국가적 차원의 성폭력에 내린 사법적 판단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법 앞에 선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에 대해서는 이렇게 단호한 태도를 취하기에 저자를 더욱더 신뢰할 수 있다.


  2018년 우리나라의 고소 건수는 약 55만 건에 달했다. ‘소송 사회라고 해도 될 정도로 형사 소송이 빈번한 나라인데사람들은 소송이라는 비생산적인 절차에서 자신을 소모시키기만 하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한다저자는 토론과 타협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소송이 아닌 공론장에서 해결되고법이 공동체에서 정의와 연대를 이루는 데 올바르게 사용되기를 바란다단순히 이상한 재판이 일어나지 않고 좋은 재판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데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사법 환경이 조성되고 법이 공동체 전체의 정의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수많은 재판 속에서 당사자들과 법조인들이 분투하고 있을 지금 너무 먼 이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이런 이상을 향해 조금씩이라도 나아가고 변화하려 노력할 때 우리의 사법 현실은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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