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뒷골목을 읊다 - 당시唐詩에서 건져낸 고대 중국의 풍속과 물정
마오샤오원 지음, 김준연.하주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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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와 전쟁, 법으로는 볼 수 없는 역사들이 있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역사, 조정과 왕실의 역사인 정사正史는 평범한 사람들이 어떤 꿈을 꾸었고 어떤 일에 기뻐했고 슬퍼했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중국사 중에서도 가장 역동적이고 다채로웠던 시대였던 당나라는 정사만으로 그 다양한 면모를 다 알 수 없다. 그래서 중국의 작가 마오샤오원毛曉雯은 당나라의 시로 눈을 돌렸다. 시는 공식적인 역사서와 달리 국가나 군주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아도 된다. 역사서처럼 나라의 정책이나 큰 자연재해를 기록할 수도 있지만, 가족들의 일상과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 한가로울 때 마시는 차 한 모금 같은 각자의 사적인 이야기들을 기록할 수 있다. 이 사적인 이야기들이 모여 생동감 넘치는 한 시대의 실상이 된다. 저자는 당나라 사람들이 쓴 시 5만 여 편을 모은 시집 『전당시全唐詩』에 담긴 당나라 사람들의 일상을 문인들의 자기 홍보, 결혼 풍습, 꽃에 대한 사랑, 경쟁심 등 아홉 가지 주제로 정리했다. 그 책이『당나라 뒷골목을 읊다』이다. 


  당나라 사람들에게 시는 무엇이었을까?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일상 속에서 시가 워낙 다양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당나라 과거 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시험은 진사과進士科였는데, 진사과 시험은 시를 짓는 것이었다.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직무시험인데도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정책을 제안하라고 하는 대신 시를 지으라고 한다. 과거에 응시하는 선비들은 1년에 한 번 치러지는 진사과 시험만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시 중 가장 훌륭한 작품들을 골라 고관대작들에게 보여주었다. 진사과 시험에서 답안은 이름을 적어 제출했기 때문에, 시험을 보기 전에 이미 시로 명성을 얻은 응시자에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자기 뜻을 펼치고자 하는 당나라의 선비들에게 시는 자소서이자 포트폴리오였던 셈이다. 이런 실용적인 용도 말고도 시는 일종의 일기장 역할을 했다. 당나라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어떤 곳에 가서 어떤 것을 즐겼는지 사소한 일상까지도 시로 기록했다. 혼인식 날 신부를 빨리 나오라고 재촉할 때도 시를 읊었고, 연애 상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거나 이별을 고할 때도 시를 읊었다. 당나라 사람들에게 시는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배어있어 떼어낼 수 없는 것이다. 


작자 미상, <유기도遊騎圖>, 당나라. 당나라 사람들은 마구(馬球, 말을 타고 공을 막대기로 치면서 하는 스포츠), 줄다리기, 씨름, 투계 등 격렬한 경기를 즐겼다. 이 그림에도 마구를 하는 당나라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북을 두드리니 어룡희(戱, 광대들이 탈을 쓰고 물고기가 용으로 변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광대놀음)가 어지럽고, 종을 치니 씨름이 펼쳐진다."는 구절은 경기장의 열기를 전해준다. 


  저자는 시에 담긴 당나라 사람들의 호쾌하고 개방적인 성품을 사랑한다. 지체 높은 권력자에게 뵙기를 청하는 간알干謁도 당나라 사람들에게는 아부가 아니라 당당한 자기 홍보였다. 아직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선비는 조정에서 정책을 논하지 못하는 대신, 권력자에게 국가 정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또한 당나라는 유난히 승부욕이 강한 시대였다. 당나라 사람들은 서민들부터 왕족들까지 계층을 가리지 않고 두 편으로 나누어 시합하는 것을 좋아했다. 차 끓이기, 향 피우기 같은 소소한 취미에서조차 적극적으로 경쟁을 벌였다. 상대방에게 지지 않으려는 승부욕이 당나라 사람들의 역량을 끌어올렸다.


장훤, <괵국부인유춘도>, 당나라. 맨 오른쪽에서 관복을 입고 말을 탄 사람은 남성이 아니라 남장을 한 여성이다. "새로운 화장 하며 정교하게 두 눈썹을 그리고, 상주의 비치는 이마 가리개로 되는 대로 싸맸네. 바로 마주한 채 반들반들한 홀(옛날 관리가 황제를 알현할 때 손에 들었던 막대)을 몰래 문지르고, 천천히 걸으며 가볍게 무늬 부서지는 물결을 밟는다." 남자들의 관복을 입고 남장한 여인을 묘사한 이 시에서 여성들의 남장이 당나라 때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나라 여성들 또한 씩씩하고 자기 감정에 솔직했으며 자존심이 강했다. 유교에서 여성의 질투를 죄악으로 규정하는데도 남편이 첩이나 기생을 가까이 하면 질투심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남편에게 버림 받는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이별을 맞았다. 남성이 이혼할 때보다는 제약이 많았지만 여성도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다. 남편이 죽은 뒤에도 재혼할 수 있었고, 두 번, 세 번까지 결혼한 공주도 있었다. 유교 윤리에서 여성이 남장을 하는 것은 하늘이 정한 법도를 어기는 짓이었지만, 당나라 여성들은 남장을 즐겨했고 칼과 화살로 무장까지 했다. 그렇게 해서 남자들처럼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고 자기 뜻을 펼치지 못하는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달랬을 것이다. 여인들에게 남장하는 자유나마 안겨준 것은 당나라가 다른 시대에 비해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시대였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당나라와 당나라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지만 그들을 마냥 찬양하지만은 않는다. 당나라 여성 중 기생들만이 유일하게 예술을 향유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남성의 유흥을 위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방관으로 부임했다 관기와 사랑에 빠진 관리가 임기를 마쳤을 때 자신이 사랑하는 관기까지 후임 관리에게 인수인계한 일, 총애하는 기생이 자신을 정식 아내로 받아달라고 부탁하자 "진흙 속의 연꽃(기생을 비유한 말)이 더럽혀지지 않았더라도, 집의 동산으로 옮겨오면 (더러운 것이) 없지 않으리."라는 시로 응수하며 거절한 일 등을 예로 들면서, 기생의 미모와 재주를 찬양하는 당나라 시가 아무리 많았어도 기생은 남성들에게 물건이나 애완동물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한다. 사랑하는 대상의 단점을 직시하고 비판하기 쉽지 않은 일인데도 저자는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시와 연관된 옛 중국 그림들이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면서 책에 정취를 더해준다. 모두 당나라 시대의 그림은 아니고, 후대의 그림이 더 많지만, 당나라 때 쓰인 시나 당나라 때의 고사, 전통을 담고 있는 그림이라 본문에 나온 시들과 무관하지 않다. 당나라 시대의 그림들은 양이 아주 많지는 않지만, 천 년하고도 수백 년 전의 그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선명한 색채와 필치로 당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당나라 뒷골목을 읊다』의 원서 표지(위)와 한국어판 표지(아래). 노란색으로 뒤덮이고 딱딱한 글씨체를 박아넣은 원서 표지와 달리 한국어판 표지는 파스텔톤 색채들과 단아한 글씨체로 시적인 분위기를 살렸다. 


 원서 자체도 훌륭하지만 한국어판은 출판사에서 공을 들여 만든 것이 보인다. 표지 전체를 샛노란 색으로 덮고 직각에 가까운 딱딱한 글씨체로 제목을 넣은 원서 표지와 달리, 파스텔톤 색채들과 단아한 글씨체를 넣은 한국어판 표지는 시적인 분위기를 더욱 살렸다. 소단원 표지에는 청나라 화가 추일계의 그림 <도화도桃花圖>에서 따온 복숭아꽃 문양을 넣어 화사함을 더해준다. 시각적인 요소들뿐만 아니라 본문 내용에도 공을 들였다. 요즘은 주석을 본문 뒤에 넣는 미주로 처리하는 것이 대세다. 본문 자체만 페이지 위에 깔끔하게 놓기 위해서다. 이 책에서 보충 설명은 본문 페이지 아래의 각주로 넣고, 해당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 시의 제목과 저작, 출처, 한문 원문은 본문 뒤의 미주로 넣었다. 보충 설명만 읽으면 충분한 독자들은 번거롭게 본문과 미주 페이지를 왔다갔다 할 필요가 없고, 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은 독자는 미주를 보면 된다. 독자들을 배려한 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시의 출처와 제목, 저자는 원서에는 없는데, 중문학 연구자인 두 번역자가『전당시全唐詩』를 샅샅이 뒤져 300여 개에 이르는 구절의 출처와 저자, 제목을 모두 찾아내 주석으로 달았다고 한다. 원서 자체도 훌륭한데 한국어판에 들어간 공도 많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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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아내 만들기 - 피그말리온 신화부터 계몽주의 교육에 이르는 여성 혐오의 연대기 걸작 논픽션 13
웬디 무어 지음, 이진옥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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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해당 책, 희곡 <피그말리온>,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 스포일러 포함


  고대 그리스에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가 있었다. 그는 현실의 여인들에 만족하지 못하고 실물 크기의 여인상을 만들었다. 그 여인상이 얼마나 완벽했는지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조각상을 사랑하게 되었고,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자신의 조각상과 같은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달라고 빌었다. 아프로디테 여신은 그의 기도에 응답해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고, 피그말리온은 사람이 된 조각상을 아내로 맞았다. 18세기 말 영국에도 피그말리온처럼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아내를 만들려고 한 남자가 있었다. 문제는 그가 조각상이 아닌 사람을 자신의 이상에 맞는 완벽한 아내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사람은 조각상처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도 말이다.


(왼쪽) 완벽한 아내를 만들기 위한 실험을 했던 토머스 데이. (오른쪽) 토머스 데이의 실험 대상이 되었던 소녀 사브리나 시드니. 만년에 그려진 초상화다.


  토머스 데이 Thomas Day 는 18세기 영국의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 그가 친구 존 빅널과 함께 쓴 시 <죽어가는 검둥이 The Dying Negro>는 흑인 노예의 고통을 생생하게 그려, 많은 사람들이 노예제의 부당함에 공감하게 했다. 그는 노예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선거권을 위해서도 싸웠고, 동물의 권리를 보호하려고 했으며 아이들을 위한 동화도 썼다. 그러나 그가 보호하고 권익을 찾아주려고 애쓰는 대상에 여성은 포함되지 않았다. 믿고 의지하던 어머니의 재혼에 충격을 받고 연애에 몇 번이나 실패하면서 데이는 여성들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고, 여성을 의심하고 혐오하게 되었다. 


  데이는 자신이 아직 제대로 된 여성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 연애에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또 다른 사랑을 찾아나섰을 텐데, 그는 제대로 된 여성이 세상에 없다면 만들어내면 되지 않겠느냐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그가 생각하는 제대로 된 여성, 자신의 이상에 맞는 여성은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며 거친 시골 생활을 견딜 만큼 건강하고, 자신과 말이 통할 정도의 지성을 갖추면서 자신의 희망사항에 따라 완벽하게 순종하는 여성이었다. 여성도 남성과 같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면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당시의 남성으로서 진보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데이는 여성이 자신과 동등한 존재가 아닌, 자신의 완벽한 부속품이 되어주기를 원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미 교육 받고 가치관이 정립된 성인 여성이 아닌 어린 소녀를 데려와 자신에게 맞는 아내로 키우겠다고 결심했다. 


  어떤 부모도 자기 딸이 미래의 남편의 손에 넘어가 그의 뜻대로 양육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데이 자신도 자신이 하는 일이 떳떳하지 않음을 알았던지, 아무 연고도 없는 고아 소녀를 고아원에서 데려왔다. '미래의 내 아내로 키우기 위해 데려갑니다.'라고 말하면 고아원에서도 당연히 아이를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데이는 소녀를 하녀로 데려간다고 거짓말했고, 고아원은 아무 의심 하지 않고 흔쾌히 소녀를 내어주었다. 그는 예비용으로 소녀 한 명을 더 데려왔다. 둘 중 자신의 마음에 드는 소녀를 아내로 맞을 생각이었다. 나중에 꼬리를 밟히지 않기 위해 데이는 소녀들의 이름까지 바꾸었다. 앤 킹스턴에게는 사브리나 시드니라는 이름이, 도카스 카에게는 루크레티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데이는 소녀들에게조차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지 않고, 아무런 설명 없이 두 소녀에게 교육 실험을 했다. 자신과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지성을 갖추게 하기 위해 소녀들에게 지리학과 물리학, 천문학을 가르쳤고, 사치스러운 풍조에 물들지 않도록 외출할 때도 화장을 하지 않고 검소한 옷을 입게 했다. 사교계가 겉치레만 하고 헛되다고 경멸했기 때문에 사교를 위해 악기 연주나 춤을 배우지도 못하게 했다. 집안일은 하인들이 아닌 아내가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집안일을 두 소녀에게 모두 맡겼다. 좀 더 발랄하고 활발한 루크레티아를 내친 뒤 사브리나에게 실험을 집중하게 되면서, 실험은 상식의 수준을 벗어나게 되었다. 데이는 고통을 초연하게 견뎌내야 한다면서 사브리나를 연못 깊은 곳에 던졌고, 사브리나의 피부 위에 끓는 밀랍 덩어리를 부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고아원에서 꺼내주고 먹여주고 입혀주는 데이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했던 사브리나도,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하고 고통당하게 되자 데이에게 반항했다. 


 놀랍게도 데이의 친구들과 지인들은 데이에게 완벽한 아내를 만들겠다는 계획 이야기를 들었고,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방관하거나 심지어는 협조했다. 어떤 친구는 고아 소녀를 데려오는 데 자신의 명의를 빌려주었고, 어떤 친구는 데이와 함께 직접 고아 소녀를 골랐다. 데이의 계획이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 지인까지 있었다. 데이의 실험이 점점 더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고 실험을 중지하라고 당부한 지인들도 있었지만, 그들조차 실험으로 고통 받는 소녀보다는 실험을 하면서 광기에 사로잡혀가고 실험이 발각되었을 때 비난을 받을 데이를 더 걱정했다. 


  지인들에게 그렇게 무모한 실험을 하느니 다시 연애를 하라는 충고를 받고, 소녀들이 자신의 뜻대로 따라와 주지 않는 것에 절망한 데이는 소녀들을 내버려두고 연애를 몇 번 더 했다. 그러나 한 연인은 아내가 완벽히 자신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데이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부부의 행복은 두 사람의 평등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하며 데이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 뒤에 사귄 연인에게는 푹 빠져 있었는지, 웬일로 자신을 바꿔볼 생각을 했다. 아내에게는 온갖 조건을 요구하면서 지저분하고 매너도 없는 자신의 모습은 고칠 생각도 안 하던 위인이 말이다. 연인의 마음에 드는 멀끔한 신사가 되기 위해 1년 동안 수업까지 받았지만, 오히려 더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그 모습에 경악한 연인에게 차인 뒤, 데이는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사브리나에게 눈을 돌렸다. 자신의 아내 후보에서 밀어낸 뒤 시골의 기숙학교에 보내놓고 몇 년 동안 신경도 쓰지 않다, 연인에게 차이고 나서야 사브리나를 다시 아내 후보로 생각한 것이다. 사브리나는 자신의 후원자라고만 생각했던 데이가 자신을 아내 후보로 여기고 있다는 것에 경악했고, 당연히 데이의 청혼을 거절했다. 데이도 사브리나의 반항적인 모습을 보고 사브리나를 아내로 맞으려는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데이의 혹독한 실험을 겪었지만 사브리나는 사람이었고,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처럼 호락호락하게 조물주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 인간이 평생 결혼하지 않기를 바랐건만, 안타깝게도 데이는 결국 결혼을 했다. 데이의 높은 이상에 반한 에스터 밀네스라는 여성이 데이가 연애에 실패하고, 사브리나에게 한 청혼도 실패하는 과정까지 모두 지켜보면서 끝까지 그를 기다렸다. 연애도 아내 만들기 실험도 실패한 데이는 자신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에스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에스터는 데이 못지않은 지성에 데이보다 훨씬 훌륭한 인품을 지녔는데도, 데이의 뜻대로 제일 가까운 이웃과도 십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외딴 시골집에서 남편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했다. 인내심 강한 에스터조차 데이의 독재를 견뎌내지 못하고 종종 데이와 부부싸움을하고 가출했지만, 매번 자신이 다 잘못한 거라고 사과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데이가 41세의 젊은 나이에 낙마 사고로 사망했을 때 (나는 속이 시원했지만) 에스터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에 데이를 따르듯 세상을 떠났다.


 에스터는 데이의 죽음(또는 자신의 죽음)으로 데이가 씌워놓은 굴레에서 해방되었지만, 사브리나는 데이의 아내 후보에서 탈락된 이후로도, 심지어 데이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도 고통 받았다. 데이는 사브리나의 삶에 계속 간섭해, 성실한 젊은 약사가 사브리나에게 청혼했을 때도 사브리나 대신 그에게 거절하는 답장을 보냈다. 그러면서 정작 사브리나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브리나는 그 약사 대신 데이의 친구인 빅널과 결혼했지만, 빅널은 무절제하고 방탕하게 살다 빚과 두 아들만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사브리나는 주변 지인들의 호의 덕분에 어느 사립학교의 관리인이 되었고, 수십 년 동안 성실히 일하면서 학생들과 아들들 모두를 훌륭하게 키워냈다. 그러나 데이의 친구들이 회고록을 출간하고, 그 회고록들에 사브리나의 이야기가 실리면서 사브리나는 만년에 남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물론 이런 비인간적인 실험을 한 데이도 큰 비난을 받았지만, 사브리나는 아무 잘못도 없이 남 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안줏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사브리나는 끝까지 자신의 존엄을 잃지 않고 가족들과 학교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살다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완벽한 아내를 만들겠다는 데이의 실화에서 영감을 받은 문학 작품들이 나왔다. 그 중에서도 아일랜드의 희곡 작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은 오드리 헵번 주연의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로 영화화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피그말리온>의 주인공 일라이저는 자신을 우아한 숙녀로 교육시킨 히긴스 교수가 자신을 실험대상으로만 대하는 것에 반발해, 다른 사람과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마이 페어 레이디>는 일라이저가 히긴스 교수와 맺어지는 것으로 결말을 바꾸어, 피조물이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가는 당당한 결말에서 한참이나 퇴보했다. 그리고 피그말리온 신화가 낳은 환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1990년대 많은 인기를 얻었던 게임 <프린세스 메이커>는 아버지로 설정된 이용자가 여자아이를 입양해서 한 사람의 성인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기본 설정인데, 경악스럽게도 딸이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와 결혼하는 결말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결말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게임을 진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는 이러한 결말이 이루어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한다. "완벽한 아내를 창조하겠다는 것은 이루지 못할 목표다. 물론 갈라테이아(후대 사람들이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에 붙인 이름이다.)도 신비의 존재일 따름이다."


  우리는 완벽한 상대방을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약자를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것 자체를 경계해야 한다. 데이가 완벽한 아내를 만들겠다는 이유로 사브리나에게 비인간적인 실험을 했는데도, 데이는 부유한 귀족에다 지식인 남성이라는 이유로 친구와 지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비호를 받았다. 데이의 친구들은 사브리나에게 연민을 가졌지만 데이가 사브리나에게 비인간적인 실험을 하고 사브리나의 삶을 통제하는 것을 방관하고 있었다. 사브리나는 고아, 가난한 사람, 여성이라는 삼중의 굴레를 쓰고 있는 약자였기에 보호받지 못했고, 피해자였는데도 온갖 소문에 시달렸다. 자신의 뜻과는 상관 없이 실험 대상이 되고 고통 당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개척한 사브리나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게임이나 문학 작품 속 캐릭터가 아닌 실제 사람에게 자신의 환상을 투영하고 자신의 뜻대로 통제하려는 일이 또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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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모델, 미국 - 미국의 인종법은 어떻게 나치에 영향을 미쳤는가
제임스 Q. 위트먼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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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이 히틀러의 모델이라니, 선뜻 납득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스스로를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의 수호자, 세계 모든 민족에게 개방된 땅으로 자부해 왔다. 히틀러에게 미국은 최대의 적이었고,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은 미국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인 민주주의와 평등을 혐오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이 책은 나치 독일이 반유대주의 법인 '뉘른베르크 법'(1935년 발표)을 제정할 때 미국의 인종 차별적인 법들을 참고했다고 이야기한다. 미국의 법학자인 저자는 미국이 겉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을 역사의 어두운 면을 파헤친다. 


  수많은 인종이 섞여 있는 미국이지만 건국 당시부터 인종주의(인종의 생리학적 특징에 따라 민족 사이의 불평등과 억압을 합리화하는 비과학적인 사고방식)는 미국 법에 스며들어 있었다. 미국 초대 의회에서 제정된 법 중 1790년의 귀화법은 "자유로운 백인 외국인"에게만 귀화를 허용했다.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도에서 해방된 흑인들에게 미국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1868년에는 "미국 영토에서 태어난 사람은 부모의 시민권 여부와 관계 없이 미국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 받는다"는 수정헌법 14조가 헌법에 추가되었다. 그러나 문맹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법, 노예 해방 이전에 조상이 투표권을 가졌을 경우에만 투표권을 주는 "조부조항" 등 흑인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으려는 교묘한 인종 차별법들이 생겨났다. 1898년 미국이 스페인에게서 필리핀의 식민 지배권을 넘겨받았을 때 필리핀 사람들은 법적 권리를 가진 미국 시민이 아니라 단순한 "비(非)시민 국적자"가 되었다. 


 나치의 법조인들과 입법자들은 이러한 미국의 인종차별적인 사례들을 꼼꼼히 검토하고 연구했다. 독일에서는 시민권을 취득하는 것이 동호회에 가입하는 것만큼이나 쉽다고 비꼬았던 히틀러가 미국의 인종차별적인 꼼수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나치 독일은 뉘른베르크법에서 유대인의 국적과 참정권을 박탈해 단순한 체류자로 전락하게 했다. 나치 법률가들은 미국인들의 출중한 법적, 정치적 재능과 교양을 보여준다며 미국의 인종차별적인 법들을 찬양하기까지 했다. 


 '인종의 순수성'을 지키는 점에서도 나치 독일은 미국을 모범사례로 보았다. 나치 독일에게 미국은 게르만 족의 친족이자 아리아인의 한 갈래인 노르딕 인종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세운 국가였다. "백인과 흑인의 혼인, 백인과 위로 3대 이내에 흑인 조상이 있는 자의 혼인, 또는 백인과 말레이 인종의 혼인, 또는 흑인과 말레이 인종의 혼인은 영구히 금지되며 무효다. 이 조항의 규정을 위반하는 자는 18개월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메릴랜드 주의 혼혈금지법, 한 방울만 흑인의 피가 섞여 있어도 흑인으로 간주한다는 "한 방울 법칙(one drop rule)"은 나치 법조인들조차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진저리 치게 만들었다. 다만 미국이 유대인을 백인으로 취급하는 것만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혈통이나 배우자의 인종, 과거의 노예 신분 등 다양한 기준으로 인종을 규정했던 미국의 법들을 참조해, 뉘른베르크법에서는 조부모 중 두 명이 유대인이고 유대인과 혼인하거나 유대교 공동체의 일원인 사람을 유대인으로 규정했다. 


 나치가 뉘른베르크법을 제정할 때 미국의 영향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은 독일 외에 인종주의를 법에 적용했던 유일한 나라였고, 그러한 나라가 세계에서 강대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 나치를 자극했다. 미국이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독일에 맞서게 되면서 둘은 완전히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고,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서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데 크게 공헌한 것도 사실이다. "이게 다 미국의 잘못입니다. 미국을 탓하세요."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의 과거에는 우리(미국인)가 잊고 싶어하는 측면도 담겨 있고, 그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계 인종주의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위치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국인 학자인 저자나 미국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뼈 아프게 다가올 것이다. 게다가 현재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는 2016년 대선 출마 당시 출생시민권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올해 10월 30일에도 "외국인이 미국에 들어와서 아이를 낳으면 시민으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모든 혜택을 주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미국뿐"이라며, 출생시민권을 반드시 폐지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는 미국에 들어오는 다양한 국가 출신의 이민자들에게 인종차별 발언을 일삼고 있고, 백인우월주의 단체 KKK의 대표였던 극우 인종주의자 데이비드 듀크는 그런 트럼프를 지지한다. 인종주의의 역사가 다시 반복되려는 이 시기가, 미국인들이 교묘한 인종차별법을 최근까지도 시행하고 있었던 자국의 역사를 되돌아봐야 할 때다.


 그런데 이것이 미국의 문제라고만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다양한 인종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고, 인종주의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될 수 있다. 우리는 동양인으로서 인종차별과 인종혐오 범죄의 희생양이 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에 들어오려는 이민자와 난민들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 나치는 이 세상에서 유일무의한 극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극악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보다 선하다고 자신하면서 자신 안의 악을 직시하지 못할 때 나치의 유대인 학살 같은 비극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또한 읽고 되새겨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참고 기사: "트럼프 '출생시민권' 폐지 발언에 수정헌법 14조 논란 격화"(2018.12.31.뉴시스)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81031_0000459692&cID=10101&pID=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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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1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2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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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나라부터 현대까지 3천여 년의 중국사를 살펴보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정치사, 경제사, 사회사, 문화사 등 각 분야로 나누어서 보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중국사를 이끌어간 주요 인물들을 통해 살펴보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시안, 뤄양, 카이펑, 항저우, 난징, 베이징 등 중국 역사에서의 주요 도읍지 여섯 곳을 통해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다. 

  이 여섯 도읍지들은 여러 왕조의 중심지였던 만큼 여러 시대의 역사가 겹겹이 쌓여 있다. 특히 1129년 동안 열세 개 왕조의 도읍지였던 시안은 책 전체 분량의 4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고대 상나라 유적지부터 20세기에 공산당이 새로 지은 성문, 최근 시진핑 주석이 내놓은 '일대일로(一帶一路, 21세기에 실크로드 경제벨트를 부활시키려는 프로젝트)' 프로젝트까지 시안에는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중국이 오롯이 쌓여 있다. 수천 개의 석굴과 10만 개의 불상으로 이루어진 용문석굴이 있는 뤄양은 북위와 당나라 시대의 화려한 불교미술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송나라의 수도였던 카이펑은 강과 가까운 평지 지형이기 때문에 수십 번 수몰되었지만 그때마다 다시 복구되어 번영을 이루었다. 카이펑의 지하에는 지금도 각 시대의 유적이 겹겹이 쌓여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북방의 이민족 국가인 금나라에게 중국 북부를 빼앗긴 송나라는 남쪽 저장성의 항저우로 천도했다. 영토 수복을 꿈꾸던 송나라에게 항저우는 변방의 임시 수도였지만, 아름다운 호수 서호와 비극적인 연인들, 의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혁명가들의 이야기를 품은 도읍지이다. 난징은 난징 대학살이라는 아픈 역사를 통해 역사를 왜,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정주민들의 세계와 유목민들의 세계의 접경지였던 베이징은 정주 민족과 유목 민족, 과거와 현재의 역사를 아우르며 현재 중국의 수도로서 중국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풍부한 이야기들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저자의 필력이 뛰어나다.

 각 도읍지마다, 도읍지의 장소들마다 서려 있는 풍부한 이야기도 장점이지만, 단순히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자신의 시각을 가지고 여섯 도읍에 얽힌 중국사를 논평하는 것도 장점이다. 저자는 시안 일대의 유적지를 중심으로 하, 상, 주 삼대의 정확한 역사 연대를 고증해 내려는 프로젝트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大工程'이 고대의 다양한 민족의 역사를 중화민족의 역사라는 단일한 역사 프레임 안에 가두려는 행보라고 생각하고 이를 경계한다. 한편 하, 상, 주 삼대는 하나같이 나라를 어지럽힐 정도의 미모를 지닌 여인들과 그녀들에게 미혹되어 나라를 망친 폭군들 때문에 멸망했다고 기록된다. 저자는 남성 중심 사회, 승자가 곧 정의라는 프레임 때문에 여성과 패자는 역사의 타자이자 희생양이 된다고 지적한다. 올해 나온 책인 만큼 최근의 중국 정세와 고대의 역사를 함께 살펴보며 고대의 역사가 지금의 중국, 미래의 중국에 미치는 영향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책의 속표지에는 중국에서의 여섯 도읍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가, 각 챕터 앞에는 각 도읍지 안의 유적지 위치를 표시한 지도들이 있어, 어느 위치에 각 도읍지와 유적지가 위치해 있었는지, 그 위치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다만 사진 자료가 모두 흑백이고 크기가 작은 것이 아쉽다. 이런 단점이 있지만,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중심지였던 도읍지들을 통해 중국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더 폭넓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 책을 들고 여섯 도읍지를 여행하면서 역사의 흔적과 중국의 오늘을 직접 볼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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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식사의 문화사 Breakfast
헤더 안트 앤더슨 지음, 이상원 옮김 / 니케북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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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터를 얹은 노릇노릇한 토스트가 하얀 바탕 위에 놓여 있는 표지부터 눈길을 끌었다. 책을 펼쳐 보니 맛있어 보이는 음식 사진들과 아침식사에 대한 온갖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읽게 되었다. 언제부터 아침식사를 먹게 되었는지, 아침식사 메뉴로 어떤 음식들을 먹었는지 등등, 너무 일상적이어서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아침식사 속에는 우리가 몰랐던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다. 


소박한 빵과 음료로 간단하게 식사를 하는 중세시대 농민들, 14세기 프랑스의 『모뒤스 왕과 라티오 왕비의 책』에 실린 삽화다.


  근대 이전 동양에서 하루 식사는 아침과 저녁, 두 끼였다. 점심을 정식 식사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근대 이전까지 아침식사를 먹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다고 한다. 모든 쾌락이 억압되었던 중세시대에 교회에서는 아침식사를 하는 것을 탐식의 죄로 여겼다. 가벼운 점심과 그보다 더 든든히 먹는 저녁 두 끼면 하루 식사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농민이나 육체노동자, 어린이나 병자 같이 몸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아침식사를 먹는 것이 허용되었다. 아침식사는 신분 낮은 육체노동자들이나 병자, 어린아이들이나 먹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일반인들은 아침식사를 한다는 사실을 숨겼다. 그러나 15세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상류층 사람들은 아침식사를 금기시하는 관습을 신경쓰지 않고 아침식사를 했다는 기록을 남겼고, 17세기 신대륙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낡은 옛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다. 18세기 중반에는 아침식사의 인기가 높아져 부유한 사람들은 집에 아침식사를 위한 전용공간까지 마련했다. 교회가 아침식사를 허용하지 않았던 또 한 가지 이유는 아침식사를 할 때 술을 함께 마시는 사람들이 많아서였는데, 사람들이 해외무역을 통해 들어온 커피와 차를 술 대신 아침식사 때 마시자 교회는 아침식사를 금지할 이유가 없어졌다. 이렇게 아침식사는 하층민들이 먹는 천박한 끼니가 아니라 사회 모든 계층이 누리는 합리적인 식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사탄이 마녀들을 위해 차린 식사'는 수프와 오트밀, 빵, 우유, 치즈였다. 참 소박하고 가정적이다. 


  그럼 아침식사로 무엇을 어떻게 먹었을까? 죽은 비교적 저렴하고 만들기도 쉽고, 아침에 먹어도 소화하기 힘들지 않아 전세계에서 사랑 받아온 아침식사 메뉴다. 심지어 17세기 말 스웨덴에서 열린 사탄의 파티에서도 사탄이 마녀들을 위해 손수  수프와 오트밀을 차렸다고 한다. 사탄의 파티 음식 치고는 참 소박하고 가정적인 음식이다. 이웃끼리 같이 먹고 마시는 소박한 식사까지도 사탄과 마녀의 파티로 몰아붙인 것은 아닌가 싶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베이컨과 달걀, 팬케이크로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 왔지만 19세기 후반 도덕적이고 건강한 삶을 살자는 '클린 리빙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아침 식단을 단순한 곡물 중심으로 대체하자고 주장했고, 식탁에서 바로 먹을 수 있는 혼합 곡물 시리얼이 개발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시리얼을 오래 보관하고, 시리얼의 주된 고객인 어린이들의 입맛을 겨냥하기 위해 시리얼에는 많은 양의 설탕이 들어가게 되었으니 사실상 건강식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럼에도 시리얼은 여전히 건강식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최초의 전기 토스터인 제너럴 일렉트릭 사의 토스터 D-12. 1909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전기 토스터는 번거로운 토스트 굽기를 간편하게 만들어주면서 아침 식탁에 혁명을 불러왔다.


  한편 아침식사의 변화를 통해 변화해 가는 시대상도 엿볼 수 있다. 전기가 널리 보급되고 아침식사를 위한 가전제품들이 부엌에 자리잡으면서 아침의 주방 풍경은 크게 변화했다. 전기 토스터가 생기기 전 토스트의 양면을 적당히 노릇노릇하게 굽는 것은 꽤 까다로운 일이어서 여성의 살림 솜씨를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전인 1909년 최초의 전기 토스터가 출시되고, 1926년에는 빵이 다 구워지면 자동으로 툭 튀어 오르는 토스터가 최초로 출시되었다. 커피메이커, 토스터, 달걀과 소시지를 굽는 전기팬까지 20세기 전반기 동안 아침식사를 편하게 하는 각종 가전제품들이 등장했다. 부모의 도움 없이 아이 혼자 우유에 타먹을 수 있는 시리얼, 인스턴트 커피, 팬케이크 믹스 등도 아침 식사를 만들 때 수고를 덜어주었다. 그러나 어머니날 선물로 아침식사 준비에 필요한 주방 기기를 추천하는 1950년대의 광고들, 1세기 전과 다름없이 "여성은 밝고 예쁜 모습으로 아침식사를 차려서 가족, 특히 남편을 즐겁게 해야 한다"는 조언을 답습하는 1950년대의 요리책들을 보면 아침식사 준비 같은 가사노동은 여성의 일이라는 고정관념을 강화시키는 것이 보여 씁쓸해진다. 


 작가가 미국인이다 보니 유럽과 미국에서의 아침 식사를 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서양 외 다른 지역의 아침식사에 대해서도 언급되지만 다소 뭉뚱그려져 나온 것이 아쉽다. 특히 아시아에서 수억 명이 먹고 있는 밥은 소단원 하나로 다뤄질 가치가 있는데 아침 식사 메뉴의 이야기에 곁다리로 나오는 것이 아쉽다.(원서에서는 다른 제목이었겠지만, 밥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는 '밥 죽 빵'이라는 소단원 제목은 얼마나 기만적인가.) 그리고 작가가 역사가가 아닌 음식 전문 저술가이다 보니 큰 흐름을 잡고 역사책을 쓰는 데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내용들이 500여 페이지에 걸쳐 단순나열되는 느낌이라 읽다 보면 좀 지칠 수 있다. 하지만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의 선명한 사진들과 아침식사에 관련된 온갖 사소한 이야기들을 보고 있으면 아침을 거르는 사람이라도 아침을 먹고 싶어질 것이다. 아침을 먹으면서 보기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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