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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의 역사 - 파란색은 어떻게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는가
미셸 파스투로 지음, 고봉만.김연실 옮김 / 민음사 / 2017년 3월
평점 :
나는 파랑을 좋아한다. 비 개인 하늘의 옅은 파란색부터 정장 재킷의 짙은 남색까지 내 주위의 다양한 파란색들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러니『파랑의 역사』를 처음 봤을 때, “파랑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칩니다”라는 홍보 문구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홍보 문구에 걸맞게 『파랑의 역사』 는 파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에 따르면, 파란색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사랑 받는 색이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파랑은 안정과 평화의 색이다. 그리고 자유와 꿈의 색이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도 파랑을 그런 색으로 생각했을까?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까지, 저자는 사람들이 파랑에 부여한 의미와 위상이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를 살펴본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파랑의 역사’는 사람들이 파랑에 부여한 의미와 위상의 역사이다.
영화 <킹 아더>(2004)의 한 장면. 유럽의 북방 민족인 켈트 족의 전사 기네비어(키이라 나이틀리)는 적들에게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 얼굴과 몸에 푸른색을 칠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파란색은, 정확히 파란색 하나만을 가리키는 단어가 없을 정도로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파란색이 오늘날 안정과 평화의 색으로 인식되는 것과 달리, 고대 로마 사람들에게 파란색은 공포의 색이었다. 로마를 위협하던 북방의 게르만 족과 켈트 족이 적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파란색을 몸에 칠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전형적인 백인 미남미녀의 조건으로 꼽히는 파란색 눈도, 고대 로마에서는 추하다는 취급을 받았다.(책에서는 설명되지 않았지만, 파란색 눈도 게르만 족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후 12세기까지 천여 년 동안이나 파란색은 유럽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위) 영국 왕 리처드 2세를 위해 그려진 두 폭 패널화(1395년경) 중 오른쪽. 성모가 파란색 옷을 입고 있다.
(아래) 장 푸케, <필립 4세에게 충성 서약을 하는 영국 왕 에드워드 1세>(1460년경). 왕좌에 앉아 있는 프랑스 왕 필립 4세는 파란색 겉옷을 입었다.
그러나 12세기 들어 성모 마리아의 옷이 푸른색으로 그려지면서 푸른색의 위상은 높아졌다. 중세 성화에서 성모는 아들 예수의 죽음을 슬퍼하는 뜻으로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상복의 색깔이었던 파란색은 성모의 슬픔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색이었다. 성모 마리아를 수호성인으로 삼고 있었던 프랑스 왕은 성모를 따라 푸른색 옷을 입었고, 뒤이어 서양 사회 대부분의 왕들이 푸른 옷을 입었다. 문장(紋章, 국가나 단체 또는 집안 따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는 상징적인 표식)에 푸른색을 넣는 왕가나 귀족 가문들도 많아졌다. 파란색의 수요가 많아지면서 대청과 인디고를 이용한 파란색 염색 기술도 발전했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의 삽화. 주인공 베르테르가 입었던 재킷의 파란색은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색이 되었다.
14세기에서 15세기 사이 유럽 각국에 사치 단속법이 시행되고, 16세기 말 종교 개혁이 시작되면서 빨간색, 노란색 등의 화려한 색채들은 탄압을 받고 검은색이 유행했다. 하지만 파란색, 특히 어두운 파란색은 검은색과 비슷한 색인 덕분에 관대한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18세기에서 19세기 유럽 전역에서 낭만주의가 유행하면서, 파란색은 사랑과 이상 세계에 대한 동경을 상징하는 색이 되었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주인공 베르테르가 입었던 재킷도 파란색이었고, 또 다른 낭만주의의 대표 소설 『하인리히 폰 오터프딩엔』 의 주인공이 찾아 헤매는 것도 푸른 꽃이었기 때문이다.
미군 장교의 제복(위)과 청바지를 입은 이란의 젊은 여성들(아래). 이처럼 파랑은 절제의 색으로도, 자유와 해방의 색으로도 쓰인다.
파랑은 현대에 들어서도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검은색과 비슷한 절제의 색이라는 점에서 짙은 남색은 제복의 색으로 널리 쓰인다. 반면 공산국가와 개발도상국, 이슬람 국가들에서 청바지가 서양을 향한 개방과 자유의 상징이 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파랑은 자유의 색이기도 하다. 또한 중립과 평화, 안정을 상징하는 색이 되어 국제연합의 상징색으로 쓰이기도 한다.
파랑은 상징적으로 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도 않고, 빨강처럼 강렬하거나 공격적이지 않다. 파랑은 가장 투명한 색이다. 인간들이 그 투명함에 다양한 의미들을 부여해 왔을 뿐이다. 파랑을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파랑에 대한 우리의 선호나 감정, 이미지는 사회와 역사에서 영향을 받아 온 것이라고 이 책은 이야기한다. 저자의 전공이 유럽사이기 때문에 서구 세계 밖에서의 파랑의 역사를 살펴보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파랑에 투영된 인간의 정서와 문화, 경제, 사회는 우리에게 흥미롭게 다가온다.
P. S. 각 단원과 소단원의 제목, 인용문, 페이지 숫자, 각주 숫자를 보랏빛이 도는 파란색으로 표기한 덕분에 파랑이라는 주제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양한 푸른색을 담은 도판들 덕분에 보는 즐거움도 컸다. 그러나 베르메르의 푸른색 사용법에 대한 설명은 188페이지에 나오는데, 설명에 해당하는 도판은 193페이지에 있는 등, 설명과 그 설명에 해당하는 도판이 서로 떨어져 있어 보기에 불편했다. 이 점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