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요석이 그리는 한복 이야기
우나영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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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책들을 고르다 서가 선반에서 툭 튀어나온 길쭉하고 판판한 책이 눈에 띄었다. 제목은 『흑요석이 그리는 한복 이야기』. 아름다운 한복 일러스트를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 '흑요석(닉네임, 본명은 우나영)'이 몇 년 전 한복을 설명하는 일러스트집을 낸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게 생각났다. 홍보 글을 보고 참 예쁜 책일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사보지는 않았었는데, 그 책이 눈앞에 있었다. 표지와 몇 페이지만 들여다봐도 예쁘고 흥미로워 보여서 끝까지 정독하고 싶어졌다. 읽어야 할 책이 여러 권 있었지만 이 책을 제자리에 다시 놓지 못하고 빌려왔다.

한복에 대한 책들 중에는 너무 학술적이고 전문적이어서 일반 독자가 바로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많다. 책 속의 설명을 읽다 보면 한자로 된 어려운 용어가 툭툭 튀어나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일반 독자들을 위해 『흑요석이 그리는 한복 이야기』의 작가는 처음부터 용어를 하나하나 설명한다. '아청색', '청현색', '홍람색', '담자색' 같은 색깔 이름은 직접 그 색깔들을 보여주고, 앞으로 계속 언급될 한복의 각 구조의 명칭을 미리 설명한다. 한복의 배색과 기본 구조, 기본 의상을 미리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한복이 어떤 옷인지 큰 줄기를 파악하게 하고, 각각의 한복이 어떤 옷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나간다. 이렇게 체계적이고 친절한 설명 덕분에 한복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독자라도 책을 읽고 나면 한복이 어떤 옷인지 대강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간결한 선화로 그려 더 알아보기 쉬운 한복 저고리의 구조와 각 부분

각 시대의 여성 한복을 비교한 일러스트. 왼쪽은 19세기의 여성 한복, 오른쪽은 20세기의 여성 한복이다.


일러스트는 설명하고 싶은 부분만 더 눈에 띄게 표현하는 데 사진보다 유리하다. 『흑요석이 그리는 한복 이야기』는 이런 일러스트의 장점을 활용해서 한복의 구조와 각 부분의 명칭, 종류, 입는 법 등을 더 알기 쉽고 명쾌하게 설명한다. 간결한 선화 안에 설명하는 부분만 색채를 넣어 강조하는 방식 덕분에 사진을 볼 때보다 더 명쾌하게 설명을 이해할 수 있다. 각 시기에 따라 옷깃, 고름, 소매, 치마의 모양과 사이즈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나란히 배치해 두어서 시대가 지남에 따라 한복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시대뿐만 아니라 어느 붕당이냐에 따라서 여인들의 쪽머리와 깃 모양도 달랐다는 것이 흥미롭다.


화려하고 섬세한 한복 일러스트

이미지 출처: 우나영 그라폴리오


화려하고 섬세하고 유려한 일러스트는 알아가는 재미에 보는 재미를 더한다. 작가의 화려하고 섬세한 화풍의 장점은 한복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궁중 의상에서 특히 빛난다. 궁중 의복의 복잡한 구조를 정확하게 그려 기초를 단단하게 다진 뒤 선명하고 다채로운 색채와 화려한 무늬를 입혀 궁중 의상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곁에 두고 보고 싶을 때마다 펼쳐보고 싶게 만들 정도로 이 책은 아름답다.

한복을 알고 싶어도 관련 서적들이 너무 대략적이거나 너무 학술적이어서 만족스럽지 못했던 사람들이 한복을 알아가기에 이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여성 한복만 다루고 있다는 것과 책의 분량이 좀 더 많았으면 하는 것이다. 작가가 남자 한복을 다루는 후속편도 다루겠다고 했으니 후속편을 기다리고 있다. 도포, 중치막, 두루마기가 어떻게 다른 건지 구별할 수 없는 나이니. 여자 한복을 다룬 이 책과 남자 한복을 다루는 후속편을 합본으로 만들어서 한복 전반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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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 선언 - 서브컬처 본격 비평집
텍스트릿 엮음 / 요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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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르란 나름대로의 서사 규칙과 관습으로 굳어진 특징들이 있어누구나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그 작품을 보는 순간 그것이 어떤 종류인지 알게 되는 콘텐츠들, 그 콘텐츠들을 묶은 집단이다엘프와 마법사가 나오면 판타지하늘에 우주선이 떠다니면 SF, 중국을 배경으로 무예 실력을 겨루는 고수들이 나오면 무협이런 식으로. 2000년대 이후로는 장르가 작품의 완성도보다는 대중의 즐거움을 충족시키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콘텐츠들을 포괄하는 의미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장르 콘텐츠의 역사가 수십 년 동안 쌓여 왔고웹소설을 비롯한 장르 문학 작품대중영화대중음악게임 등의 장르 콘텐츠들이 대중들에게서 큰 인기와 수익을 얻고 있다그러나 장르 문학은 문학의 주류로 여겨지는 순문학과 비교해 비주류로 여겨지곤 하고대중성이 강한 장르 콘텐츠들은 순수 예술 작품들에 비해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취급받는다장르 콘텐츠 비평을 전문으로 하는 비평가들의 모임 텍스트릿은 장르가 주류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미학과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뜻에서, ‘비주류 선언을 한다자신들이 또 다른 주류임을 외치는 ‘B급의 주류 선언이자 ‘Be 주류 선언이다.비주류 선언은 장르가 현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고장르와 관련된 콘텐츠들을 비평하는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장르 콘텐츠를 그저 즐길 거리로만 여기고진지하게 비평하거나 깊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텍스트릿의 연구자들은 장르 콘텐츠를 연구와 비평의 대상으로 삼고우리가 장르 콘텐츠들을 즐기면서도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을 짚어낸다왜 판타지 소설들은 대부분 중세시대 서양을 배경으로 할까중세시대 서양이 한국 사회에서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가장 거리가 멀고 낯선 세계이기 때문이다한국의 판타지 문학 속 중세 서양은 실제 중세 서양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서양이 근대에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낯선 동양에 대한 환상을 키워 왔지만 그들이 재현한 동양은 실제 동양의 모습과 달랐던 것과 통하는 부분이다우리는 언제나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꿔 왔고픽션을 통해 현실을 탈출하려 했다판타지 소설 속 중세 서양은 독자들이 현실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고 욕망을 채우는 공간이라는 기능을 한다이렇게 텍스트릿은 장르 콘텐츠들에 지금의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또한 텍스트릿은 장르 콘텐츠가 한국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 왔는지를 되짚어 본다이들은 장르 콘텐츠의 내용 면에서의 변화뿐만 아니라 장르 콘텐츠가 유통되는 방법과 매체에서의 변화를 함께 살펴보고 있다. 1990년대에는 장르 문학 작가들이 PC 통신을 이용해 자신의 작품을 연재했다. 2000년대 초반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장르 문학 작품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이 시기에는 장르 문학 작품들이 주로 개인 사이트에서 연재되었다. 2000년대 후반 이후로는 문피아조아라 등 기업형 웹소설 사이트들이 등장했고스마트폰이 발명되고 보급된 이후로는 카카오페이지네이버 시리즈 등의 웹소설 플랫폼들에서 장르 문학이 더욱 흥행하고 있다작가는 웹소설 플랫폼에 소설을 직접 업로드하면서 창작자일 뿐만 아니라 출판사와 같은 출판 주체의 역할도 함께 수행하게 되었다매체에서의 변화는 내용 면에서의 변화까지 불러왔다온라인 공간에서 더 다양한 독자들과 만나게 되면서무협 소설은 어려운 무공의 개념을 좀 더 쉽게 전달하면서 여성 인권 신장 등 당대의 변화를 반영하게 되었다이 책은 이렇게 내적인 측면만 분석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까지 살펴보면서 장르를 바라보는 시야를 더 넓혀주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야기를 더 펼쳐나갈 수 있는 지점에서 논의를 마무리하는 글들이 많다한국형 판타지가 어색한 이유라는 글에서는 왜 창작자들이 한국형 판타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면서도 한국보다는 서양을 배경으로 판타지 작품을 창작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파헤쳐 보고 있다하지만 한국의 환상성이 어떤 점에서 현실의 질서와 도덕윤리와 맞닿아 있어 현실을 넘어서고 싶어 하는 독자들과 어긋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았다면 좋았을 것이다또한 결론 부분에서 잘 만든’ 한국형 판타지의 예시와 그들이 왜 성공했는지에 대한 분석이 빈약하다.로맨스와 페미니즘은 공생할 수 있을까에서 저자는 로맨스가 낭만적 사랑이라는 허울을 통해 가부장제를 뒷받침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섣부르다고 주장한다그리고 로맨스 소설에서 여성은 로맨스를 통해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얻어내며사랑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연대 정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여성들의 다양한 욕망이 로맨스 소설에 반영된다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면이다그러나 로맨스 소설에서 여성이 성취하는 것은 연애 상대인 남자주인공에게 좌우되는 것인 경우가 많다남자주인공의 사랑을 통해 얻은 것이니 그의 사랑을 잃으면 사라지는 것이다그리고 로맨스와 페미니즘이 공생하려면 로맨스 소설에 강간 판타지나 폭력적인 행동이 로맨틱한 행동으로 미화되는 것 등 여성혐오적인 면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이러한 면들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좀 더 논의를 진행할 만한데 결론을 내리는 글들을 읽으면서, 지면이나 연구 기간의 한계 때문에 논의를 더 이어가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장르에 대한 연구와 비평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지금다각적으로 장르 콘텐츠를 비평하고 장르와 지금의 우리 사회를 연결해서 탐구해 보는 시도 자체는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가 있다이 책의 부제는 서브컬처 본격 비평집이지만, ‘본격보다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시도이다이 책이 텍스트릿의 첫 번째 결과물이고대표 저자인 이융희 팀장이 다음 책에서는 좀 더 본질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으니 다음에는 더 깊이 있는 논의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참고김지혜장르문학·서브컬처에 담긴 독자적 미학경향신문, 2019.08.3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8302042005&code=9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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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의 세계사
셰저칭 지음, 김경숙 옮김 / 마음서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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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만 원권의 신사임당을 제외하면 우리나라 지폐에 실린 인물은 다 조선시대 이씨 남자라든가천 원권에 그려진 퇴계 이황 선생이 배우 소지섭을 닮았다든가 하는 사소한 이야기를 제외하면 지폐 자체에 크게 관심이 있지 않았다어린 시절 어머니가 반짇고리에 외국 주화 몇 개를 모아두어 그걸 갖고 놀긴 했지만 주화가 아닌 지폐를 수집하는 사람도 있을 줄은 몰랐다그런데 각 나라의 지폐를 수집하면서 각 지폐에 얽힌 그 나라의 역사정치문화를 살펴보는 사람이 있었다그런 점에서 지폐의 세계사는 내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지폐의 세계사는 대만의 대중 인문학자이자 여행 작가인 셰저칭이 25년간 수집해 온 외국 지폐를 통해 지폐에 얽힌 그 나라의 역사와 정치사회문화예술을 이야기하는 책이다저자는 단순히 지폐를 수집해 온 것이 아니라 지폐 디자이너를 직접 만나기도 하고 지폐의 인쇄 방식을 연구했으며 지폐 디자인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찾아다녔다고 한다이 책은 그가 97개국에서 수집한 지폐 중 42개국의 지폐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위)1968년 발행된 네덜란드의 10길더 지폐. 앞면에서는 인물의 세부적인 특징을 단순화하고, 뒷면에는 몬드리안의 추상화처럼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도형을 담았다. 

(가운데) 2002년 발행된 페로 제도의 페로크로나 지폐. 화가 하이네센이 그린 페로 제도의 풍경화를 뒷면에 담았다.

(아래) 1941년 발행된 프랑스의 50프랑 지폐. 프랑스 회화 특유의 섬세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다양한 나라의 지폐 이미지들을 컬러로 담았다책장을 넘기면서 그 나라만의 개성과 아름다움을 담은 지폐 자체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자국의 추상화가 몬드리안의 작품처럼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도형을 그려 넣은 네덜란드의 지폐수묵화 같은 발묵 기법으로 광활하고 적막한 바다 풍경을 그린 페로 제도(Færøerne, 영국과 아이슬란드 사이에 있는 덴마크의 자치령)의 지폐는 지폐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다. 1940년대에 발행된 프랑스 지폐들에 그려진 삽화들은 프랑스 회화 특유의 풍부한 색채와 섬세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해외는커녕 집 밖으로 나가기도 꺼려지는 이 상황에서 이 책은 지폐를 통해 다양한 나라의 다채로운 풍경들을 책상 앞으로 불러온다.


2005년 루마니아에서 발행한 1만 레우 지폐. 이 지폐에 그려진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 성당에는 잔혹하고도 슬픈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지폐에 얽힌 이야기들을 알아가는 재미도 크다. 2005년 발행된 루마니아 1레우 지폐에 그려진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 성당 Curtea de Arges Cathedral은 잔혹하면서도 슬픈 전설을 품고 있다. 194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70여 년 동안이나 태국의 각종 지폐의 주인공이 되어 온 라마 9세 전 국왕은 국왕과 왕실의 이미지를 신성하게 만들기 위해 태국 정부가 얼마나 오랜 시간 공을 들여왔는지를 보여준다원 제국의 전성기에 궁중 연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위해 포도주와 마유주벌꿀주를 뿜어냈다는 은 나무는 1993년 몽골에서 발행된 5천 투그릭과 만 투그릭 지폐 뒷면에 그려져 과거의 영화를 기억하고 있다지폐 곳곳에 세계사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 먼 나라들의 역사와 현재가 숨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다만 워낙 다양한 나라의 지폐들을 제한된 분량 안에서 다루다 보니 각 지폐에 대한 설명이 생각만큼 깊이 있지는 않다. 42개국의 지폐 이야기를 하는데 한국어판을 기준으로 했을 때 책의 분량이 326페이지밖에 되지 않으니스스로 지폐의 인쇄 방식을 연구했다고 하니 지폐의 인쇄 방식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었을 텐데, ‘정교한 오목판 인쇄 기술’ 정도로 언급하는 데 그친다무엇보다 지폐가 언제 어디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개관하는 서론 부분을 덧붙였다면독자들이 지폐의 세계로 들어오는 데 도움을 주면서 지폐의 세계사라는 제목에 더 걸맞은 책이 되었을 것이다이 책은 저자가 각 나라를 여행하면서 그 나라의 지폐를 설명하는 짤막한 에세이들을 모은 것이라, ‘테마로 보는 세계사보다는 인문 에세이집에 가깝다저자가 여행에서 느낀 감상 부분이 서정적이어서 좋아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지폐라는 키워드로 세계사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던 독자들로서는 아쉬울 것이다.

 

  그리고 내용 면에서 오류도 보인다프랑스 화폐 챕터에서 저자는 1870년 보불전쟁(프랑스와 프로이센이 스페인 국왕의 선출 문제를 둘러싸고 벌인 전쟁당시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들이 나라를 지키는 데 비교적 냉담했다고 설명하면서전쟁을 피해 런던이나 브뤼셀로 피신했던 인상파 화가 중 한 사람으로 반 고흐를 든다그러나 반 고흐는 애초에 프랑스인이 아니기에 보불전쟁에 참전해야 할 이유가 없었고그 당시 런던도 브뤼셀도 아닌 헤이그의 화랑에서 직원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전쟁을 피해 도망친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에서 자기 경력을 쌓고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반 고흐는 인상파가 아니라인상주의의 영향을 받되 그 영향에서 벗어나 자기 개성을 추구하려 했던 후기 인상주의에 속한다저자가 각 지폐에 얽힌 한 나라의 역사나 한 분야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기에 이런 오류를 저질렀을 것이다.


  이런 점들로 볼 때 이 책은 지폐의 역사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아쉬운 책이지만낯선 세계의 문물들을 구경하면서 현실의 시름을 잊고 상상을 펼치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만족스러운 책일 것이다예쁘고 다채로운 이미지로 기분 전환을 하고 싶은 사람들편안히 쉬면서 얕고도 넓은 지식을 쌓아가고 싶은 사람들은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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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한 끼 - 아라비아의 디저트부터 산사의 국수까지, 맛과 믿음의 음식인문학
박경은 지음 / 서해문집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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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인이지만 내 종교가 그렇게 내 식생활에 영향을 많이 미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순절(四旬節, Lent,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 전까지의 40일. 기독교인들은 이 시기 동안 예수의 고난을 기억하기 위해 속죄와 경건의 시간을 보낸다.)에 금식도 잘 하지 않는 나일론 신자여서 그렇긴 하지만. 부활절에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삶은 달걀을 먹는 것 말고는 내 식생활과 내 종교가 관련될 일은 평소에 거의 없다. 하지만 육식을 할 수 없는 불교 승려들이나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는 무슬림들처럼 식생활에서 종교의 영향을 크게 받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나와 다른 종교, 다른 문화권인 사람들은 종교 때문에 어떤 것을 먹을 수 있고 어떤 것을 먹을 수 없을까. 종교 덕분에 어떤 음식 문화를 가지게 되었을까. 이런 호기심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에는 다양한 종교와 다양한 문화권의 음식 문화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 있다. 중동 문화에 관심이 많고 이태원의 터키 제과점에서 파는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중동 이슬람 국가 사람들이 강한 단맛을 좋아하는 이유가 특히 흥미로웠다. 중동의 더위를 이겨내고 금식 기간인 라마단을 지낸 뒤 기력을 빨리 회복하는 데는 단 음식이 도움이 되기 때문에, 중동의 디저트들은 단맛이 매우 강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중동의 무슬림들이 단맛을 좋아하는 데는 이런 실용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도 있다고 한다. 무슬림들은 맛있는 식사 등 현세에서 즐기는 쾌락이 내세의 낙원에서 누리는 기쁨의 예시라고 여긴다. 화려하고 다양한 디저트는 낙원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 확인해 주는 증거다. 디저트를 즐기는 것이 믿음의 증거라는 내용은 코란에도 나와 있다고 한다. 이렇게 한 종교가 어떻게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음식 문화에 영향을 미쳤는지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이 즐거웠다. 지구 반대편 먼 곳에 대한 호기심과 지적 욕구가 채워져 갔다.



또한 기독교인인 나도 기독교가 사람들의 식생활과 음식 문화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무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독교와 관련된 음식 이야기 중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종교개혁에 버터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15~16세기, 로마 가톨릭교회는 고기와 유제품이 성욕을 부추긴다고 여겨 성직자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에게까지 사순절과 기타 금식 기간에 버터를 먹지 못하게 했다. 문제는 1년 중 버터를 먹으면 안 되는 기간이 거의 반 년은 됐다는 것이다. 그나마 올리브가 많이 나는 이탈리아, 스페인 등 남부 유럽에서는 버터보다 올리브 오일을 즐겼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육류와 버터를 주된 식량으로 삼았던 프랑스, 독일 등 중북부 유럽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왕족들과 귀족들, 부자들은 돈을 주고 사순절과 금식 기간에도 버터를 섭취할 수 있는 권리를 샀고, 교회는 버터 섭취권을 판 돈으로 화려한 성당 건물을 지었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금식 기간에 정해진 규정을 어겼다가 벌금을 내거나 채찍을 맞거나 투옥되기까지 했다. 마르틴 루터는 1520년 「독일 지역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에서 금식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 것을 비판했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이탈한 나라 중 대부분이 버터를 주된 식량으로 삼았던 북부, 중부 유럽 국가들이었다. 이렇게 버터는 종교 개혁의 불길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으며, 지금도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등 버터를 많이 먹는 지역에서는 개신교의 세가 강하다. 주 안에서는 다 같은 형제 자매라고 인간의 평등함을 주장하는 종교가, 기본적인 욕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불평등에 일조했다는 것이 씁쓸하게 남는다. 그리고 종교만이 일방적으로 인간의 식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식생활 또한 종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에 가득 실려 있는 선명하고 화려한 음식 사진들은 보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텍스트가 그 음식에 얽힌 교리나 문화를 설명하고 그 음식의 맛을 설명하고 있으면, 이미지는 그 옆에서 실제로 그 음식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면서 낯선 문화의 낯선 음식들이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와 닿게 한다.

낯섦을 설렘으로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경우 낯섦은 거부감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자신과 다른 종교, 문화를 가진 상대가 무엇을 먹는지 또는 먹지 않는지에 대해 조롱하고 공격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고 이야기한다. 그 낯섦이 배척이 되고 혐오로 번지는 상황이 너무나 많기에 이 책이 서로의 낯섦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 속 다양한 종교와 문화의 음식 문화가 주는 낯섦이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혐오가 아닌, 나를 넘어선 더 넓은 세상을 만나는 설렘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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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이브의 모든 것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정영목 옮김 / 까치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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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이브 이야기를 듣고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지 않았으면 이 세상에는 아직도 아담과 이브 두 사람만이 살고 있지 않을까이브가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는 벌을 받았기에 우리가 존재하는 게 아닐까그렇다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게 우리에게는 다행인 건데아주 단순한 이야기여서 군데군데 빈 곳이 많으니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런데 지금의 나뿐만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아담과 이브 이야기를 놓고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아담과 이브 이야기 자체에 또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는 듯하다. “세계 역사에 이렇게 오래 지속되고이렇게 널리 퍼지고이렇게 집요하게 뇌리를 사로잡을 만큼 현실감이 있었던 이야기는 거의 없다.” 아담과 이브의 모든 것은 아담과 이브 이야기가 시작되고 이야기 이상의 권력을 가질 정도로 흥했다가 다시 이야기의 위치로 내려오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그 과정 자체가 고대의 메소포타미아부터 현대의 우간다까지 수천 년의 세월과 수만 킬로미터의 거리를 넘나드는 거대한 이야기이다.


아시리아의 점토판에 새겨진 길가메시와 엔키두의 모습.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몇 가지 면에서 메소포타미아 신화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저자는 아담과 이브 이야기가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맞서는 일종의 저항 서사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아담과 이브 이야기가 담긴 창세기는 모세가 썼다고 전해지는 모세 5’ 중 첫 번째 책이고, ‘모세 5은 기원전 5세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때는 바빌로니아에게 점령당해 바빌로니아로 끌려갔던 유대인 포로들이바빌로니아를 점령한 새로운 정복자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 덕분에 유대 땅으로 돌아가던 시기였다바빌로니아에서 수십 년 동안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와 신화에 노출되어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줄 이야기가 필요했다그래서인지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메소포타미아 신화와는 몇 가지 차별점을 갖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영웅 서사시 <길가메시 이야기> 속 등장인물 엔키두처럼 아담과 이브는 신이 진흙으로 만든 존재이고, 길가메시와 엔키두처럼 서로 떼어낼 수 없는 한 쌍의 파트너가 된다. 엔키두도, 아담과 이브도 아무것도 모르는 야생의 존재에서 이성과 문명을 접하면서 변화되고, 죽음을 피해가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엔키두에게 문명인으로 변화하는 것이 축복이었던 반면, 아담과 이브에게는 그것이 저주였고, 엔키두에게 죽음이 정해진 운명이었던 반면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이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에서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와는 차별점을 만들어내면서 자신들의 서사를 완성시켰다. 

(위)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 <아담과 이브>(1504)

(아래) 얀과 후베르트 반 에이크 형제의 <헨트 제단화>(1432) 중 아담과 이브 부분.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은 인체에 대한 면밀한 연구와 뛰어난 기술을 토대로 아담과 이브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해 냈다.


이 이야기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유대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였다성경을 경전으로 삼는 기독교가 유럽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종교가 되었기 때문이다.(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는 수천 년 뒤 유럽의 고고학자들이 쐐기 문자 기록들을 다시 발견할 때까지 잊혀 있었다.) 기독교 신학의 기틀을 다진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교리를 확립한 이후기독교인들에게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자 삶의 지침이 되었다뒤러나 반에이크 같은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은 인체에 대한 면밀한 연구와 뛰어난 기술을 바탕으로 완벽하고 생생한 육체를 갖춘 아담과 이브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17세기 영국의 작가 밀턴은 자신이 이상적으로 여겼던 부부관계와 현실에서 보아온 정쟁을 반영해사탄과 하나님의 갈등아담과 이브의 복잡 미묘한 애정 관계를 생생하게 그려낸 대서사시실낙원을 완성했다이렇게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문학적으로나 시각적으로나 생생한 현실성을 갖추게 되었다.

 

문제는 아담과 이브 이야기가 이야기 이상의 권력을 갖춘 교리이자 역사적 사실의 위치에 놓이게 되면서남들을 배척하고 억압하는 수단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5세기에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와 다른 견해를 주장했던 펠라기우스가 이단으로 공격받고 추방당한 것에서부터 배척의 역사는 시작되었다신의 명령을 어겨서 에덴으로 쫓겨난 데는 아담의 책임도 있는데도많은 남성들은 이브에게만 책임을 돌리며 여성들의 악덕이 이브에게서 시작되었다고 여성 혐오적인 편견을 드러냈다근대에 들어서도 아담과 이브 이야기의 허점을 지적하거나 허구라는 암시를 한 사람들은 자객의 습격을 받거나 화형당하기까지 했다한때 외세에게 점령당해 고통 받던 유대 민족에게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수단이 되어버렸다.

 

세상에 아담과 이브그들의 자식밖에 없었다면 맏아들 가인은 왜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벌할까 두려워했을까가인이 고향을 떠나 결혼했다는 여자는 누구고가인이 만든 도시의 주민들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어떤 억압도 이런 의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성경에서 언급한 세상의 역사보다 훨씬 더 오래된 지층이 발견되고다윈의 진화론을 통해 인간이 단 한 번의 창조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서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역사적 사건이라는 절대성을 잃게 되었다


이제 아무도 아담과 이브 이야기의 허점을 지적했다는 이유로 생명을 위협받지 않는다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아담과 이브 이야기가 오히려 이야기의 위치로 돌아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그리고 아담과 이브 이야기가 다시 이야기로 돌아왔다고 해서 그것이 가치를 잃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그 이야기는 여전히 인간의 연약함과 책임의 문제인간의 성과 노동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한 이야기가 어떤 절대적인 것으로 굳어버리는 것의 위험성을 깨닫게 된다그렇게 되면 그 이야기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까지 막혀 버리면서 이야기 자체의 생명력을 잃게 된다단순히 이야기의 매력과 생명력을 잃을 뿐만 아니라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억압하고 해치는 데 이용되기까지 한다이야기를 이야기 자체로 즐길 수 있는 것 자체도 많은 사람들이 탄압당하는 것을 무릅쓰고 의문을 제기해서 얻어낸 축복이다아담과 이브 이야기의 흥망성쇠는 우리에게 이야기의 힘과 위험성가능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P. S. 이 책의 모든 도판은 책 한가운데 몰려 있다도판이 있는 페이지는 텍스트만 있는 나머지 페이지와 재질이 다른데도판이 있는 페이지들만 도판을 찍어내는 데 최적화된 재질의 종이로 해서 비용을 절감하려던 게 아닌가 싶다하지만 텍스트가 설명하는 도판이 그 텍스트 바로 옆에 있었다면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책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이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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