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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여행 - 들뢰즈 철학으로 읽는 헬레니즘
김숙경 지음 / 그린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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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할 때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영국 화가와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철학 이론을 접목해 과제를 작성했었다. 내 과제 발표를 보고 나서 교수님은 ‘너 이거 이해 못 했구나’라고 말씀하셨다. 교수님 말씀대로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짜깁기했을 뿐이었고, 결국 주제를 바꿔서 과제를 다시 작성해야 했다. 그 이후로는 들뢰즈라면 겁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은 들뢰즈의 이론으로 헬레니즘 미술과 실크로드 미술을 바라본다고 한다. 그래도 미술사는 내 전공이고 고대 문명도 내가 좋아하는 분야니, 그 둘을 당의정으로 삼는다면 들뢰즈라는 쓴 약도 소화해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1부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로와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유입된 그리스 신들의 변신을 살펴보고, 2부에서는 1부의 내용을 들뢰즈 철학의 관점으로 다시 읽는다고 했다. 그럼 적어도 1부는 이해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랬으니, 한 문단, 한 페이지를 읽을 때마다 ‘그래, 이건 이해했어’라고 마음속으로 확인한 뒤 다음 문단,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다행히 1부의 내용은 무난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려는 본론은 2부지만 사실 1부가 이 책의 3분의 2를 차지하니, 3분의 2는 일단 확보했다. 1부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 원정을 시작할 때부터 한중일 3국에 불교가 전해질 때까지, 그리스 신들이 헬레니즘 미술과 실크로드 미술, 둘에 영향을 받은 유라시아 각 나라의 미술 속에서 어떻게 변화했는지 정리한 것이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처럼 당시 역사와 문화의 흐름을 간결하면서도 명쾌하게 설명하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스 신들의 원형과 헬레니즘, 실크로드, 유라시아 각 지역에서 변형된 모습을 나란히 배치했다(도판의 화질이 떨어지고 도판 설명도 글씨가 너무 작은 것은 아쉽지만). 그런 데다 그리스의 어떤 신은 부처를 호위하는 부하로 전락했고, 어떤 신은 날개가 있어 천산산맥 너머 동쪽으로 멀리 날아갔다는 식으로 의인화하니 설명하는 내용이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사실 중요한 건 2부인데 들뢰즈 이야기는 2부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니 1부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 읽었다. 저자가 말하는 들뢰즈 철학의 개념과 용어 들은 낯설었다. 하지만 저자가 유목 민족과 정주 민족, 그리스 신들과 그들이 헬레니즘 미술과 실크로드 미술, 유라시아 각 지역의 미술 속에서 변화한 모습을 예시로 들고, 비유를 들면서 반복해서 설명하니 이해할 수 있었다. 찬찬히 읽어보니, 저자가 헬레니즘 미술과 실크로드 미술 속에서 변화해 간 그리스 신들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바는 단순하고 명쾌했다. 들뢰즈는 모든 존재를 끊임없이 변화하며 새로운 것을 생성해 내는 존재로 보았다는 것. 그리스 신화의 신들도 불교라는 거대한 중심 뿌리의 위계질서에 붙잡혀서든, 타림 분지 내로 흘러들어 온 다양한 문화와 자유롭게 접속해서든, 겉모습도 본질도 부단히 변화했다는 것. 그러니 문화 또한 한 가지 원형으로 굳어버린 유산이 아니라 무한히 변화해 가는 생명이라는 것. 이렇게 2부도 무사히 내 나름대로 소화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들뢰즈의 개념들은 들뢰즈의 철학 이론 중 일부지만, 그래도 이 책 덕분에 그 일부는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다. 헬레니즘 문명과 실크로드 문명은 중학교 때부터 알고 있던 것들이었지만 들뢰즈의 철학적 개념과 용어로 다시 보니 신선하게 느껴졌고. 들뢰즈 철학 쪽으로나 문명사, 미술사 쪽으로나 아주 깊이 들어가진 않지만, 에로스의 날개나 보레아스의 바람을 타고 그리스로부터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여행한 기분이다. 찬찬히 읽으며 책 전체를 소화하고 나니 그 여행을 무사히 마친 것 같아 안도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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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의 발견
박영수 지음 / 사람in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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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語源): 어떤 단어의 근원적인 형태. 또는 어떤 말이 생겨난 근원.

  아주 일상적인 단어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요즘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더 자주 쓰이지만 그래도 일상적으로 하는 말 ‘고맙습니다’. 이 단어의 근원적인 형태를 살펴보면, ‘남의 인격이나 행위를 높여 공경하다’라는 의미의 고유어 ‘고마’가 어근이다. 이 말은 이렇게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생긴 것이다. ‘누군가의 호의나 도움을 받아 마음이 흐뭇하고 즐겁고 감동적이다’라는 지금의 뜻으로 사용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다. 이 책은 이렇게 말의 근원적인 형태, 또는 말이 생겨난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모둠: 한 무리가 되게끔 작은 단위로 모아둔 것

  ‘모둠’은 ‘모으다’라는 뜻의 옛말 ‘모두다’에서 나온 말로, 한 무리가 되게끔 작은 단위로 모아둔 것을 가리킨다. 이 책은 우리말의 어원과 우리말 한자어의 언어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단어 하나하나들이 그 두 부분을 이루고 있다. 다양한 음식들을 모은 ‘모둠 안주’처럼 이 책에는 우리말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 우리 역사에 대한 지식까지 다양한 지식들이 담겨 있다.

  이판사판. 수리수리 마수리. 찰나. 강림. 경계. 이 단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원래 불교 용어였던 단어들이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일상 속 단어들이 불교 용어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불교가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의 언어와 문화, 삶에 영향을 미쳤는지 여기서 실감할 수 있다. ‘땡전’이란 단어에는 흥선대원군의 화폐 개혁으로 대량 발행된 당오전에 대한 반감이 녹아 있고, ‘벼슬아치’라는 단어에는 원나라와의 교류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렇게 우리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 말을 만들어낸 우리 조상들의 일상과 문화, 역사를 만나게 된다. 모둠 안주에서 다양한 음식을 하나씩 집어 먹듯 다양한 지식을 하나씩 얻는 재미가 쏠쏠하다.


감질나다: 바라는 정도에 아주 못 미쳐 애가 타다.

  ‘감질(疳疾)’이라는 병에 걸리면 땀이 나고 목이 마르며 시원한 것을 찾게 된다고 한다. 그런 증세에 빗대어 ‘어떤 일이 마음에 차지 않아서 애태우는 심정’ 또는 ‘무언가를 몹시 하고 싶어 애타는 마음’을 가리키는 말이 ‘감질나다’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느끼게 되는 감정이 바로 ‘감질나다’이다. 사실 바라는 정도에 ‘아주’ 못 미치는 것은 아니고 ‘조금’ 못 미친다. 손바닥 두 개를 합친 것보다 조금 크고, 3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책이니 크기도 작고 페이지 수도 적다. 각 단어에 배정되는 페이지는 한두 페이지뿐이니, 아주 깊이 있게 어원과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파헤치지는 않는다. 어원에 대해 더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기대했다면 감질날 것이다. 반면 한두 페이지씩 가볍고 흥미로운 지식을 읽는 것이 더 좋은 사람이라면 이 책이 안성맞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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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배 읻다 프로젝트 괄호시리즈 6
제바스티안 브란트 지음, 노성두 옮김 / 읻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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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바보들을 태우고 떠다니는 배들이 있었다는 중세시대의 기록들이 있다이런 바보배는 어떤 항구에서도 정박을 허가받지 못했기 때문에배에 탄 바보들은 하염없이 강과 바다 위를 떠돌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르네상스 시대 독일의 인문주의자 제바스티안 브란트(Sebastian Brandt, 1457-1521)에게는 세상 자체가 바보들로 가득 찬 바보배였을 것이다오스만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을 정복한 이후로 그 세력을 점점 넓혀가며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데왕들과 귀족들은 권력다툼으로 바쁘고 성직자들은 부패해 있으며 서민들도 나태함에 빠져 쾌락만 좇고 있었다하느님이 주신 지혜즉 이성을 잃어버린 채 무지와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한방향을 잃은 세상이런 당대의 세상을 바보배에 빗대어 쓴 연작시가 바보배(Das Narrenschiff, 1494).


바보배』는 시 본문과 관련된 짤막한 문구와 시 본문의 내용을 나타낸 판화, 시 본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위의 문구와 판화는 책을 열심히 사들이기만 하고 읽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바보를 풍자하는 것이다.


 『바보배는 당시 사람들에게 자신과 세상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었다권력에도 종말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 권력에 취해 있는 왕들부터 그들에게 아첨하는 아첨꾼들돈을 바라고 성직자가 되어 품성도 성경에 대한 지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성직자들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사채업자들순진한 사람들에게서 수임료나 뜯어가는 변호사들까지 당대를 살아가는 바보들이란 바보들은 다 모았다그렇게 모은 바보들의 유형은 110여 가지나 된다권력이나 부를 갖고 있다 해서 브란트의 신랄한 풍자에서 벗어날 수 없다브란트는 자기 자신마저도 풍자의 대상에서 빼놓지 않고자신 또한 바보배의 일원이라고 말한다시 한 편에 판화 하나씩 함께 실려시에서 묘사한 바보의 추태를 시각적으로 한 번 더 접하며글을 모르는 문맹 독자도 어리석은 자신과 세상을 돌아볼 수 있었다.


  『바보배에 담긴 당대 사회를 향한 서릿발 같은 비판 정신과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한 통찰력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에게 지침이 되어주었고종교 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한다아이러니하게도 브란트는 르네상스형 인간이나 종교 개혁가보다는 보수적인 중세인에 더 가까운 인물이었다바보배에서 그는 세상 만물의 이치를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인간의 이성보다는 하느님의 지혜를 중시하고가톨릭의 부패를 비판하지만 가톨릭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오히려 루터보다 먼저 새로운 교회를 꿈꾸었던 후스파(신도들을 사악한 교리를 퍼뜨리는 이단이라고 비난하고 있다바보배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실한 신자가 되라는 훈계다하지만 절대왕정을 지지했던 토머스 홉스가 사회계약설을 통해 근대 민주주의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브란트의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비판 정신은 인문주의의 발전과 종교 개혁에 주춧돌 하나를 제공했다.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거울이었던 바보배는 지금의 우리에게는 당대를 바라보는 창이 되고 있다유난히 긴 99편 시에서 브란트는 유럽 각국의 지도자들에게 자국의 이익만 찾지 말고 협력해서 이슬람 세계로부터 기독교 세계를 지키자고 호소하고 있다여기에서 당시 유럽 사람들이 이슬람 세계로 인해 느꼈던 위기감을 엿볼 수 있다브란트는 103편 시에서 인쇄업자들이 돈만 되면 어떤 글이나 다 책으로 찍어내고나라마다 대학을 앞다투어 세우는 바람에 엉터리 책엉터리 학자들이 판을 친다고 한탄한다브란트에게는 개탄스러운 일이었겠지만 그만큼 당대 사람들의 지식을 향한 열망이 컸고지식의 대중화가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시에 섞인 당시 독일의 속담들과 판화에 그려진 사람들의 의복건축물거리의 풍경은 당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지금도 바보배에 실린 다양한 어리석음은 남아 있기에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바보배는 당대를 바라보는 창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이기도 하다자식들 기를 죽이면 안 된다고 훈계하지 않아 아이를 망치는 부모싼 맛에 일꾼을 부리면서 일이 왜 그따위냐고 불평하는 직장 상사불량 제품의 겉만 그럴듯하게 꾸며 비싼 값에 파는 상인질투심분노나태오만함 등에 사로잡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들. 500여 년이 지나도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반복되고우리 중 바보배의 일원이 아닌 사람은 없다.


  『바보배는 15세기의 유럽인이 쓴 작품이기에 그 시대의 한계 또한 지니고 있다인종과 종교가 다른 외국인들을 흉측한 외모의 하느님을 믿지 않는 바보로 비하하고 권력의 허무함을 이야기하다가 뜬금없이 (브란트 자신이 속한신성로마제국은 존속할 것이라고 찬양한다여성에 대한 편견도 곳곳에서 보인다하지만 이러한 한계조차 그 시대를 더 알게 하며그 시대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멀리 나아갔는지 보여준다한편으로 바보배』 속 바보들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과 겹쳐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여기에 오늘날바보배를 읽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P. S. 읻다에서 번역 출간된 바보배(2006년 안티쿠스에서 출간된 바보배』도 같은 번역자가 번역한 것이다.)는 표지와 각 장에 실린 판화들 하나하나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본문의 앞뒤에 바보배가 집필되고 출간되게 한 사회적 배경책의 구성과 미술사적 의미 등을 해설하고 있어 작품의 이해를 돕고 있다번역자인 미술사학자 노성두 교수는 현대 한국인 독자들을 위해 브란트가 본문에서 가득 인용한 독일 속담과 고대그리스 로마사의 인물사건들그리스 로마 신화성경 이야기들을 주석으로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다그뿐만 수백 년 전의 유럽인이 쓴 글임에도 판소리 사설을 풀어놓는 듯한 구수한 말투로 번역해브란트의 거침없는 입담을 바로 앞에서 듣는 것처럼 생생히 느끼게 한다.


*참고 자료

고명섭, 「당신을 바보배로 초대합니다」, 『한겨레』, 2006.12.7.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76779.html#csidx8debc6de3192cbb93ba705378823e05

김희윤, 「세상을 읽어내는 기호로서의 바보배」, 『아시아경제』, 2016.12.14.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6121313203098010.

「바보배 이야기가 광기에 대해 주는 3가지 교훈」, 『원더풀마인드

https://wonderfulmind.co.kr/3-lessons-from-the-ship-of-fools-my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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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 다니는 어원 사전 - 모든 영어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
마크 포사이스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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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히 이 책의 서문을 읽게 된 이후부터 이 책을 읽고 싶었다. 서문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일화에서부터 저자의 범상치 않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단어의 기원, 어원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투 머치 토커가 되는 저자에게, 어느 날 한 친구가 '비스킷biscuit'의 어원이 뭐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그는 프랑스어로 '두 번 구웠다'라는 뜻의 'bi-cuit'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설명해 줬다. 문제는 그가 거기서 설명을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bisquit의 'bi'는 'bicycle(자전거)'이나 'bisexual(양성애의, 양성애자)'에 들어 있는 'bi'와 똑같은 것인데, bisexual은 1890년대에 정신과 의사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에빙이 만든 말이며, 크라프트에빙은 'masochism(성적 피학증)'이라는 단어도 만들었는데, masochism은 자허마조흐Sacher-Masoch라는 소설가의 이름을 따서 만든 말이고... 봇물이 터지듯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어원 이야기에 친구는 도망가려 했지만 저자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 몇 시간 뒤에야 친구는 저자가 단어를 설명하려고 그림을 그리는 사이에 도망쳤다. 이런 일이 거듭되자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은 정신병원 대신 책을 해결책으로 제안했고, 그렇게 쓰게 된 책이 이 책이라고 한다. 이 세 페이지짜리 서문에서부터 예감했다. 이 사람은 자기 자신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입담과 언어 지식과 유머 감각이 넘쳐 나는구나.


  본문을 읽으면서 그 예감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서문 마지막에서 저자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 말처럼 이 책의 모든 꼭지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pool the money'는 돈을 한데 모은다는 뜻인데 여기서 'pool'은 닭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다음 꼭지에서 'pool'은 닭을 갖고 했던, 중세 프랑스의 한 도박 게임 이야기로 이어진다. 중세 프랑스 사람들은 판돈을 단지에 모은 뒤, 닭 한 마리를 놓고 가장 먼저 닭을 돌로 맞히는 사람이 단지 안에 든 돈을 다 가져가는 도박을 했다. 이 도박이 '죄 드 풀jeu de poule', 즉 '닭 게임'이었다. '닭'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풀poule'은 영국에 수입되면서 철자가 'pool'로 바뀌었다. 도박꾼들이 돈을 pool하는(모으는) 이미지에 착안해 무언가 모인 것을 'pool'이라고 부르게 됐는데, 20세기에 들어서 'gene pool(유전자 풀)'이라는 말이 생겼다. 'gene pool'의 'gene(유전자)'에서 또 다른 꼭지,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놀랍게도 이 책에 실린 111개의 꼭지는 하나도 빠짐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게다가 마지막 111번째 꼭지는 자연스럽게 첫 번째 꼭지와 이어진다. 자기 꼬리를 물어 동그라미를 이룬 뱀처럼. 무슨 이야기를 해도 새로운 단어의 어원 이야기로 이어갈 수 있다는 데서 저자의 언어 지식이 얼마나 풍부한지 실감할 수 있다.


  세상의 어떤 사물도 사건도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각 단어가 생겨나고 다른 곳으로 퍼져 나가고 그곳에서 변형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세상 곳곳에 숨어 있던 다채롭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발견하게 된다. 히틀러, 하면 떠오르는 것이 나치인데, 정작 히틀러는 자신의 당을 '나치'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상한 소시지에 들어 있던 독성 물질이 지금은 미용 시술에 쓰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영어의 'black'은 원래 '검다'는 뜻으로도, '하얗다'는 뜻으로도 쓰이는 말이었다. 검은색과 하얀색은 정반대 색인데 왜 둘을 같은 단어로 말했던 것일까? 책에서 이 질문의 답들을 찾아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이야기들 말고도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거나 우리가 몰랐던 세상의 옛 이야기들을 알려주는 이야기들이 4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을 꽉꽉 채우고 있다.


  수많은 정보들을 그저 나열하기만 하면 국어사전만큼이나 지루할 텐데, 저자의 입담과 유머 감각이 모든 이야기들을 즐겁게 읽게 한다.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능구렁이 넘어가듯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데다, 영미권 유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도 읽으면서 많이 웃었을 정도로 유머 감각이 뛰어나다. "오늘날 스타벅섬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스타벅스 매장이 없지만, 무인도이니 당연합니다. 이따금 출몰하는 바다표범이 카푸치노를 살 돈이 있을 리 만무하니까요." "heckling은 한때 양털을 빗어 엉킨 부분을 풀어주는 과정을 뜻했습니다. 양이 평소 자기 털 관리를 알아서 하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으니 양털로 옷을 만들려면 우선 잘 빗어주어야 합니다." "카스토르와 폴룩스는 항상 붙어 다녔는데 어느 날 카스토르가 창에 찔려 죽고 말았습니다. ... 제우스는 두 사람을 별로 만들어 영원히 함께 있게 해주었습니다.(두 별은 사실 16광년 떨어져 있지만 너무 자세히 따지지는 맙시다.)" 어원을 진지하게 설명하는 듯하면서 이렇게 농담을 툭툭 내뱉어 공부하듯 열심히 읽던 나를 웃게 했다.


  어원을 설명하는 책이다 보니 수많은 영어 단어들뿐만 아니라, 그 단어들의 기원이 되거나 영향을 준 다양한 시대와 나라의 단어들이 등장하기에 그 모든 단어들을 정확히 번역해야 한다. 그리고 저자 특유의 능청스럽고 유머 감각이 넘치는 문체를 살려야 한다. 번역자는 이 두 가지 어려운 일을 모두 해낸다. 이야기하는 투의 경어체로 번역을 해 저자가 어원에 대해 늘어놓는 수다를 직접 듣는 듯한 느낌이 더 강해진다. 처음부터 한국어로 쓰인 것처럼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장으로 번역되어 읽기에도 편하다. 덕분에 영어 원어민이 아닌 한국인 독자들도 쉽고 재미있게 이 책을 읽을 수 있다.


  한두 챕터씩 재미로 조금씩 읽든, 내친 김에 단숨에 쭉 읽어버리든, 영어 공부를 하듯 단어 하나하나를 필기하면서 읽든 어떤 방식으로 이 책을 읽어도 상관없다. 자신에게 맞는 속도와 방법으로 즐겁게 읽으면 된다. 저자도 "보고 싶으면 언제든 펼쳐서 보고, 질릴 때는 덮으면 그만이니까요."라고 말했으니까. '이것까지 굳이 알아야 되나' 싶은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영어 단어를 익히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그런 사소한 지식을 쌓는 것도,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는 것도 즐겁다. 책 덕분에 바다 건너 사람들에게까지 어원을 가지고 수다를 떨 수 있으니 저자도 즐거울 거고. 그러니 저자에게나 저자가 사는 영국의 독자들에게나 바다 건너 독자들에게나 참 유익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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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 - 리바이어던의 탄생 문제적 인간 14
엘로이시어스 마티니치 지음, 진석용 옮김 / 교양인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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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머스 홉스'라고 했을 때 생각나는 것은 그가『리바이어던』의 저자라는 것과 "만인은 만인에게 늑대"라는 말을 했다는 것뿐이었다. 중학생 때 사회 시간에 공부했던 것들, 고등학생 때 사회탐구 과목에서 공부했던 것들을 어쩌면 이렇게 남김없이 잊어버릴 수 있을까. 지금의 내 지식 상태가 너무 심각하다 싶어, 홉스의 전기인 이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토머스 홉스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사상을 펼쳤는지, 그의 삶과 사상에 어떤 역사적, 사회적, 종교적 상황이 영향을 미쳤는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홉스는 영국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 말기(16세기 말)에 부유하지 않은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인 캐번디시 가의 가정교사이자 비서로 수십 년을 일하면서, 고용주들의 정치 활동을 옆에서 지켜보고 학문적 역량을 쌓아왔다. 왕이 모든 권력을 쥐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왕당파였기 때문에, 공화파와 왕당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을 때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10여 년 동안 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크롬웰의 공화정 시기가 끝나고 왕정이 복고된 시기에도, 자신의 사상에 대한 숱한 오해로 인해 다른 사상가들과 끊임없이 논쟁했을 뿐만 아니라 저서들이 출간 금지되기까지 했다. 이런 파란만장한 삶이 그의 사상을 만들었다.


  홉스는 왕이 모든 권력을 쥐는 전제 군주정을 옹호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근대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가 된 사회계약설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회 구성원인 개인들의 계약을 통해 국가가 형성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각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제한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 어떤 수단이든 쓸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자연 상태의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된다. 언제든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재산과 생명을 빼앗아갈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계약을 맺어 모든 권리를 주권자에게 양도하고 그의 보호를 받는다. 이렇게 계약을 맺어 주권자, 즉 정부를 세움으로써 사람들은 자연 상태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다.


  홉스는 이러한 사회계약설 외에도 정치철학, 광학, 수학, 물리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자신만의 이론들을 정립해 갔는데, 당대의 사회적, 종교적 통념과 어긋나는 부분이 있어 많은 논란을 낳았다. 저자는 사회계약설을 비롯한 홉스의 사상과 이론의 주요 내용을 설명하면서, 그의 사상 속 모순들을 논리적으로 짚어본다. 홉스는 주권자가 시민들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 독재의 위험성을 간과했다.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시민들이 모든 권리를 주권자에게 양도했더라도 여전히 자기 보존의 권리는 갖고 있기에,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을 경우 독재자에게 저항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는데 홉스는 그의 지적에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또한 모든 물체는 서로 맞닿아서 힘을 주고받으며 운동하게 된다며 물체와 물체 사이에 힘과 그 밖의 것을 전달해 줄 공기가 없는 진공 상태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당대의 명망 있는 화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로버트 보일이 공기 펌프로 진공 상태를 만들자, 홉스는 미세한 공기가 유리를 뚫고 들어갈 수 있다며 그것은 진공 상태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진공 상태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었고, 보일은 이 연구를 통해 기체의 부피와 압력 사이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는 '보일의 법칙'을 발견했다. 데카르트 등의 동시대 과학자들이 홉스는 과학자로서는 재능이 부족하다고 평가했지만, 홉스는 자신이 그들보다 뛰어난 과학자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학자로서의 자부심이 강해 때로는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학술 논쟁에서 감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저자는 이렇게 홉스의 사상 속 모순이나 인간적인 결점까지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그의 업적과 한계 모두를 짚어본다.


  저자는 홉스의 사상뿐만 아니라 홉스의 사상을 비판한 사람들의 주장과 그들의 주장에서 타당한 점, 타당하지 않은 점도 하나하나 살펴본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라이프니츠의 지적은 홉스의 사회계약론의 맹점을 제대로 짚은 예다. 홉스가 가부장 정부도 인정한 만큼, 태어났을 때부터 아이들이 가부장에게 종속되어 있다면 모두가 평등하고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는 자연 상태는 있을 수 없다는 비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홉스의 저서를 꼼꼼히 읽어보지 않고 그가 이야기하는 '자연 상태'가 힘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고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힘을 정의와 법으로 삼는 것이라고 오해했다.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방탕하게 사는 사람들은 반성문에서 자신이 '홉스주의'에 빠져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종교의 수장도 국가의 주권자가 맡아야 하며 종교 제도도 주권자가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주장에 성공회 주교들은 반발했다. 저자는 이러한 오해와 편견들이 당대 사람들의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입장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힌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홉스의 생애 전반과 정치철학, 신학, 물리학, 기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구축한 사상과 이론들, 그를 둘러싼 시대상과 논쟁들까지 꾹꾹 눌러담았다. 페이지마다 넘쳐나는 정보량이 버거울 수도 있고 홉스의 논리와 비판자들의 논리, 이 둘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 벅찰 수도 있다. 하지만 홉스와 그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이 책만큼 도움이 되는 책이 많지 않다. 원서가 1999년에 출간되었기 때문에 홉스에 대한 최신 학설들이 반영되지는 못했겠지만, 꼼꼼하고 성실하게 홉스의 삶과 사상을 정리하고 평가하고 있다. 홉스를 무조건 찬양하지만 않고 그의 학문적, 인간적 결점까지 직시하는 객관적인 태도가 이 책의 신뢰도를 높인다. 또한 비문학 연구서인데도 곳곳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유머 감각이 이 긴 책을 읽는 독자들의 발걸음을 좀 더 가볍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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