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포함

세상에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문학 작품은 많다. 그 중에는 『운명』 못지않게 훌륭한 작품들도 많다. 그런데도 『운명』 을 선택한 것은 고통을 견디는 방법을 알고 싶어서였다. 꿈도 사랑도 손에 닿지 않고, 희망도 없는 지금의 상황이 버거웠다. 일상에서 겪는 소소한 불운과 불행은 신경을 갉아먹으면서 나를 더 고통스럽게 했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끌려간 소년 죄르지가 수용소 생활에서 어떻게 고통을 견뎌내고 행복을 찾은 건지 알고 싶었다. 그의 고통과 나의 고통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정말로 고통을 견뎌내는 법을 알고 싶었다.

1944년 여름, 유대계 헝가리인 소년 죄르지는 근로봉사를 가던 길에 갑자기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 전까지 죄르지는 유대인에게 가해지는 박해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외출할 때 노란 별을 외투에 달아야 하는 것도, 통금시간을 지켜야 하는 것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한 유대인 친구가 그에게 우리 유대인이 남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을 내면에 지니고 있기에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는 무심코 반박했다. 만약 유대인 아이와 다른 평범한 아이가 병원에서 서로 바뀌었다면, 유대인 아이는 평범한 사람으로, 유대인 아이와 바뀐 아이는 유대인으로 취급받았을 거라고. 사람들은 단지 노란 별을 보고 우리를 유대인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그러자 친구는 울음을 터뜨렸다.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특별하기 때문에 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우연 때문에 이 고난을 당한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운명이 어떤 목적이나 이유에 따라 (예를 들면 신이 정한 대로) 움직이지 않고 순전히 우연에 따라 움직이며 예측할 수도 없다는 것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이런 운명의 부조리함은 아무 걱정 없이 살던 죄르지에게도 닥쳐왔다. 누가 유대인인지 결정하는 기준도 애매모호하고, 유대인이기 때문에 아무 죄 없이 죄수 취급 당하고 죽임당하는 것도 부조리하다. 그러나 죄르지는 이렇게 가혹하고 부조리한 일들을 일상으로 받아들인다. 터무니없이 적은 식량을 아껴 먹고 감시인들의 눈을 피해 요령을 부리며 체력을 비축한다. 식량이 좀 더 많이 배급되는 부헨발트로 옮겨진 것에 기뻐하고, 저녁 점호 전의 짧은 휴식시간을 즐긴다. 묵묵히 노동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상상한다. 상상은 누구도 막을 수 없으니까. 죄르지는 이렇게 수용소에서의 하루하루를 견뎌나간다.

1년쯤 지났을 때 해방의 순간이 왔다. 그 순간에도 죄르지는 자유의 몸이 된 것 못지않게 오랜만에 맛있는 고기 수프를 먹게 된 것을 기뻐한다. 죄르지에게는 자유의 몸이 되기 전 날과 자유의 몸이 된 날 모두 자신이 살아가는 삶 속의 하루이고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르지에게 수용소 생활이 지옥 같지 않았냐고 묻고, 시간이 수용소 생활을 견디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죄르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죄르지가 분노하며 자신이 겪은 고통을, 나치에게 당한 일들을 세상에 폭로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죄르지는 말한다.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으면 견디지 못했겠지만, 한 단계 한 단계를 지나면서 그 단계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완수해 나갔기에 견딜 수 있었다고.

직접 고통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죄르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죄르지가 자극적이고 구체적으로 수용소 생활의 고통을 이야기했더라도 그들은 결코 죄르지의 고통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고통을 온전히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작가 임레 케르테스는 죄르지처럼 15살에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1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1년 동안의 수용소 생활은 케르테스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고, 홀로코스트라는 주제가 그의 문학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 문학 세계의 시작인 『운명』 은 케르테스의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데뷔작인 『운명』을 쓰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쓰고 싶지 않았다. 나 자신에 대해서 쓰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통을 응시하고 기억하며 13년 동안 이 소설을 썼다. 한국어 번역판 기준으로도 300페이지가 안 되는 짧은 소설을 쓰는 데 13년이 걸렸다. 그만큼 소설을 쓰는 과정은 그에게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가 『운명』을 쓴 과정을 생각해 보면 이 말도 떠오른다. "고통스러운 경험은 말하기 힘들다. 세상에 문학이 있어 다행이다." 10대 시절부터 수년간 교사에게 상습적인 성폭행을 당했던 경험을 소설로 쓴 대만 작가 린이한이 남긴 말이다. 그녀는 결혼식 전날 밤 늦게까지 이 소설을 쓰는 데 매달렸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자신의 고통을 10년이 넘도록 들여다 보거나, 가장 행복한 날의 전날까지도 되새기면서 문학으로 남긴 걸까.

문학은 고통의 원인이나 고통 그 자체를 없애주지 못한다. 그러나 고통을 직시하고 견뎌낼 수 있게 돕는다. 사람들은 죄르지에게 과거의 고통을 잊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지만, 죄르지는 과거의 고통들까지 자신이 걸어온 삶의 한 걸음 한 걸음으로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가길 선택했다. 작가에게 과거의 고통을 직시하고 기억하는 방법은 문학이었다.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중에는 우리가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 없는 고통이 많다. 그러나 죄르지도 작가도 고통을 하루하루 견뎌내면서 앞으로 나아가길 선택했다. 나는 죄르지에게서 하루하루의 고통을 견디면서 그 안에서 작은 행복을 찾는 법을, 작가에게서 자신의 고통을 직시하고 기억하는 법을 배웠다. 삶은 고통을 견디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내 운명이 된다. 죄르지는 "운명이 있다면 자유는 없다. 자유가 있다면 운명은 없다. 이 말은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라고 말한다. 예측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으며 고통스러운 삶이라도 그 안에서 내 운명을 만들어가는 것은 나 자신이다. 이 책이 내게 이것을 알려주었기에 나는 오늘도 계속해서 걸어가고 살아간다.

P. S. 헝가리어 원서를 직역한 민음사판(유진일 역)과 독일어판을 중역한 다른우리판(박종대 · 모명숙 역)을 한 문장 한 문장 비교하면서 읽었다. 원문 없이 한국어 번역판들만 가지고 비교하는 것은 의미 없다고 하지만, 헝가리어도 독일어도 전혀 모르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 두 가지 번역판 사이에서 원문의 흔적을 더듬어 나갔다. 더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장으로 느껴지는 건 박종대 · 모명숙 역이지만 문맥을 봤을 때 유진일 역에서 오역이 바로잡힌 것이 보인다. 그리고 유진일 역이 철학적이고 깊이 있는 사유를 만연체로 풀어낸 케르테스 특유의 문체를 살리려고 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또한 수용소에서 들리는 다양한 유럽 언어들을 박종대 · 모명숙 역에서 한국어로만 표기한 것과 달리, 유진일 역에서는 원문으로 표기하고 괄호 안에 번역문을 넣었다. 그래서 다양한 언어가 오가는 수용소가 더 실감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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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틴어는 지금 실생활에서 사용되지 않고 있고, 서구권의 수많은 학생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을 정도로 문법이 어려운 언어다. 그런데도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서강대에서 진행되었던 한동일 교수의 라틴어 수업은 많은 학생들의 사랑을 받았다. 다른 학교 학생들과 일반인들까지 청강하러 올 정도였다. 그의 수업이 단순히 언어를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라틴어에 담긴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화, 사회 제도, 법, 종교, 그리고 로마를 계승한 유럽 국가들의 역사와 문화까지 다루는 종합 인문 수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강의를 정리한 책 『라틴어 수업』은 인문 분야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라틴어 수업』이 출간된 지 1년 뒤 출간된 김동섭 교수의 『라틴어 문장 수업』 은 여러 면에서 『라틴어 수업』을 벤치마킹한 흔적이 뚜렷하다. 책의 제목부터 라틴어 수업으로 사랑을 받아온 교수가 수업 내용을 정리한 책을 낸다는 기본 콘셉트, 한 챕터당 하나의 라틴어 문장을 통해 라틴어와 관련된 지식들을 전달하는 형식까지 『라틴어 문장 수업』은 『라틴어 수업』 과 닮아 있다. 하지만 진정한 벤치마킹은 벤치마킹하는 대상의 장단점을 분석해 자신의 것을 더 낫게 만드는 것. 두 책이 각각 어떤 장단점을 가지고 있는지, 그래서 각각 어떤 독자들에게 더 와 닿을지 살펴보려고 한다. 여러분이라면 누구의 라틴어 수업을 듣고 싶을까?



'나는 왜 라틴어를 공부하는가'라는 질문의 답


  라틴어를 공부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나는 왜 라틴어를 공부하는가'이다. 한동일 교수는 첫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는 엄청난 계획이나 원대한 포부가 있지 않고, 그저 '있어 보이기 위해' 라틴어를 공부하는 것처럼 유치한 이유도 많다. 그러나 처음부터 거창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면 숨이 막힐지도 모른다며, 칭찬 받고 싶고 잘난 척 하고 싶어 하는 유치함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한동일 교수는 말한다. 위대함을 만들어낼 수 있는 유치함이라는 점에서 그는 이러한 유치함을 '내 안의 위대한 유치함 Magna Puerilitas Quae est in me 마그나 푸에릴리타스 쿠에 에스트 인 메'라고 부른다. 라틴어를 공부하는 자신만의 이유를 찾을 수 있도록 학생들을 이끄는 것이다.

  반면 그 질문에 대한 김동섭 교수의 답은 보다 실용적이다. 그는 본문에 앞서 '라틴어를 배우면 좋은 열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영어 어휘의 50퍼센트 이상이 라틴어이다, 현대 학문의 용어들은 대부분 라틴어이다, 인지 능력을 향상시켜 주는 언어이다, 전 세계에 라틴어의 후예들이 있다, 등의 열 가지 이유들은 대부분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이유들이다. 라틴어를 배워서 어딘가에 써먹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명쾌하고 실용적인 이유들이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깊이 있는 사유 VS 얕고 넓은 지식


  한동일 교수의 라틴어 수업이 사랑을 받은 이유는 라틴어와 관련된 인문학적 지식과 사유의 깊이이다. '만일 신이 없더라도 Etsi Deus non daretur 에트시 데우스 논 다레투르'라는 한 문장을 통해 고대에서 현대까지 인간이 종교와 세속을 분리시켜 온 과정과 정교분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가는 내공에 감탄하고, 로마인의 음식, 놀이, 나이, 욕설, 장례문화부터 법과 제도, 역사까지 로마에 대한 흥미롭고 다양한 이야기에 빠져든다. 라틴어 문장과 관련된 지식을 자연스럽게 엮어나가는 한동일 교수의 스토리텔링 능력이 뛰어나다. 존댓말로 이야기하는 부드러운 문체가 직접 강의를 듣는 듯한 느낌을 더해준다.

  또한 『라틴어 수업』 이 다루는 라틴어 문장 중 삶의 태도와 죽음에 대한 격언이 많다 보니, 삶과 죽음에 대한 한동일 교수의 성찰도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죽음은 예정되어 있고 삶은 유한하지만,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매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라는 그의 가르침에 많은 학생들과 독자들이 위로를 받는다. 반면 뻔한 이야기를 라틴어로 포장했다, 주목적인 라틴어 공부보다 저자의 인생관 이야기가 더 많다는 비판의 목소리들도 제기된다. 

  김동섭 교수의 『라틴어 문장 수업』 이 전하는 지식은 그보다 얕고 넓다. 『라틴어 수업』 이 309페이지, 『라틴어 문장 수업』 이 303페이지로 전체 분량은 서로 비슷한데 『라틴어 수업』 에서 다루는 문장은 28개, 『라틴어 문장 수업』 이 다루는 문장은 78개로 『라틴어 수업』  이 다루는 문장 갯수의 3배에 가깝다.  『라틴어 문장 수업』 의 한 챕터가 『라틴어 수업』 의 한 챕터의 3분의 1 분량이 될 수밖에 없다. 소개하는 라틴어 문장이 더 많으니 문장과 관련된 이야기도 더 다양하지만, 『라틴어 수업』 만큼 한 문장을 깊이 파고들지는 않는다. 김동섭 교수도 라틴어 문장에 관련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지만 내용의 중심은 라틴어와 그와 관련된 지식이다. 문체도 다른 대부분의 교양 서적들과 같은 평범한 평서문이어서 더 실용적인 느낌이 든다. 라틴어 문장과 그에 관련된 지식을 엮어나가는 솜씨는 한동일 교수보다 투박하지만, 다른 누군가의 인생관 대신 다양한 지식을 듣고 싶은 독자들은 이 쪽이 더 끌릴 수 있다.


라틴어에 대한 흥미 심기 VS 라틴어 실력의 기초 쌓기


 『라틴어 수업』 의 첫 챕터에서 한동일 교수는 자신의 수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라틴어 실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라틴어에 대한 흥미를 심어주고 라틴어를 통해 사고체계의 틀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교양 수준으로 공부하는 학생들까지 라틴어 문법을 철저히 공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틴어 단어의 어원이나 문법에 대한 설명도 중간중간에 나오지만, 라틴어를 통해 본 로마와 유럽의 학문과 문화, 역사, 법 등 다채로운 면모와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호기심을 가지면 그 나라의 언어를 더 쉽게 익힐 수 있고, 새로운 지식들을 알아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김동섭 교수는 『라틴어 문장 수업』 의 서문에서 라틴어를 모르는 독자들이 문장을 순서대로 따라 읽으면서 라틴어를 독학하게 하는 것이 집필 의도라고 밝힌다. 그래서 문장마다 단어별로 분석하며, 그 문장이 문법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설명한다. 『라틴어 수업』 의 부록이 라틴어 수업을 들은 제자들의 소감인 반면, 『라틴어 문장 수업』 의 부록은 라틴어의 알파벳과 발음, 기본 문법과 라틴어 공부에 도움이 되는 웹사이트 목록, 명사와 형용사, 대명사의 곡용표다.(곡용은 명사의 격과 성, 수에 따라 명사의 형태가 변화하는 것이다.) 정말 라틴어 실력의 기초를 쌓고 싶다면 교재를 따로 사는 것이 좋겠지만, 이 라틴어 문장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해석되는지 알고 싶고 라틴어 문법을 좀 더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라틴어 문장 수업』 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로마의 희곡작가 테렌티우스Terentius의 말처럼, 사람 수만큼 생각도 다르다 Quot hominibus, tot sententiae 쿠오트 호미니부스, 토트 센텐티아이. 한동일 교수의 깊이 있는 지식과 사유를 더 사랑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고, 김동섭 교수의 다양한 지식과 자세한 라틴어 문법 설명을 더 좋아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어느 책을 읽든, *읽고 행복하시길 Utere Felix 우테레 펠릭스.  

* 로마인들이 책을 선물할 때 적어넣었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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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작품, 『전쟁과 평화』 스포일러 포함 

  「데카브리스트들」은  『전쟁과 평화』 를 쓰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시험작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전쟁과 평화』 가 이 작품을 쓰려다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톨스토이는 원래 당대 러시아의 혁명가들이었던 데카브리스트들에 대한 소설을 쓰려고 했었다. 데카브리스트들은 농노제 폐지와 입헌군주제 실시를 목표로 1825년 황제 니콜라이 1세(재위 1825~1855)에게 봉기를 일으켰다 진압당했고, 30여 년 동안 시베리아에서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데카브리스트들 중 주요 인물인 세르게이 볼콘스키, 세르게이 드루베츠코이와 먼 친척이었던(톨스토이의 어머니가 볼콘스키 가문 출신이고 외할머니가 드루베츠코이 가문 출신이었다.) 톨스토이는 어릴 때부터 데카브리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1855년 니콜라이 1세가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에 새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특별 사면령을 내려, 데카브리스트들이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로 돌아오자, 톨스토이는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려고 했다. 

  톨스토이는 데카브리스트들이 어떻게 혁명 사상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들의 젊은 시절인 1812년 나폴레옹과 러시아의 전쟁 이야기를 다루게 되었다. 젊은 귀족이었던 데카브리스트들은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지만 프랑스군을 쫓아 프랑스에 가게 되면서 프랑스의 자유주의, 민주주의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톨스토이는 이 이야기를 더 발전시켜  『전쟁과 평화』 를 썼고, 정작 쓰려고 했던 데카브리스트 이야기는 미완성으로 남겨놓았다. 그 미완성작이 바로  「데카브리스트」들이다. 우리나라에는 번역되지 않은 줄 알았는데, 2010년에 출간된  『톨스토이 중단편선』 1권에 이 단편이 실려 있어 읽어보았다. 

  이름까지 따 왔지만(안드레이의 성 볼콘스키Bolkonsky는 첫 글자만 세르게이 볼콘스키Sergei Volkonsky와 다르다.) 안드레이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죽었고, 보리스 드루베츠코이는 데카브리스트인 세르게이 드루베츠코이와 달리 권력에 영합하는 인물이다. 니콜라이 로스토프는 열렬히 황제에게 충성하고 있으니 톨스토이가 원래 의도대로 썼다면 데카브리스트가 될 인물은 피에르 베주호프밖에 없다. 에필로그에서 피에르는 비밀 정치 결사 활동을 해 니콜라이에게 의심을 받고, 피에르를 무척이나 따르는 니콜루슈카(안드레이의 아들)는 피에르와 혁명을 일으켰다 니콜라이에게 진압당하는 꿈을 꾼다.  피에르가 에필로그 시점(1820년)에서 5년 뒤 데카브리스트의 봉기에 가담할 복선이라고 볼 수 있다. 

 「데카브리스트들」 의 주인공은 1856년 새 황제의 특별 사면으로 모스크바에 돌아온 데카브리스트 표트르 이바노비치 라바조프와 그의 가족들이다.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탈리아고, 부부는 서로를 '피에르'와 '나타샤'라고 부른다. 피에르 라바조프는 『전쟁과 평화』 의 주인공 피에르 베주호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다. 모든 사람에게 다정하고 친절하지만, 자기 주장을 펼칠 때는 물러서지 않는 성품은 베주호프와 꼭 닮았다.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능력은 안드레이에게, 이미 다른 사람의 약혼녀인 나탈리아와 사랑에 빠지는 무모함은 아나톨리에게 간 것 같지만. 라바조프의 아내 나탈리아는 검은 눈의 미인에 사랑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정열적인 면, 피에르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 나타샤를 연상시킨다.  동생 라바조프와 30여 년만에 상봉하는 누나 마리아의 모습을 보면서, 베주호프의 친척 누나 카치슈가 세월이 지나면 이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카치슈는 방탕한 데다 사생아인 베주호프를 친척 동생으로 인정하지 않고 냉대했지만, 결말 부분에서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베주호프와 화해한다. 

  미완성작이다 보니 이야기는 라바조프와 가족들이 마리아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끝난다. 기승전결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하지만  『전쟁과 평화』  속 피에르가 데카브리스트가 되었다면, 피에르와 나타샤가 시베리아 유배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다면 어떤 모습이었을지 짐작하게 한다. 나탈리아는 라바조프가 시베리아 유배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 1분도 망설이지 않고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 시베리아의 라바조프에게 갔다고 한다. 시베리아의 혹독한 기후, 무거운 수감 생활을 견뎌내고 나탈리아와 라바조프는 두 남매를 낳고 수십 년 동안 행복하게 살아왔다. 나타샤도 피에르가 유배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시베리아 생활이 혹독해도 피에르와 나타샤 부부는 강인하게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다만 피에르 라바조프와 나탈리아의 아이들이 시베리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과 달리, 피에르 베주호프와 나타샤의 아이들은 데카브리스트의 봉기 이전에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고 자랐을 것이다. 에필로그 시점에 이미 아이들이 태어나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갓집인 리셰 고리에서 지내고 있었으니까.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 중에서는 아이들을 친정이나 친척집에 맡기고 남편에게 달려간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상상한 뒷이야기에서 피에르와 나타샤의 아이들은 외삼촌 니콜라이와 외숙모 마리아에게 맡겨진다. 아버지의 자유주의 사상을 이어받은 아이들은 황제에게 충성하는 외삼촌 니콜라이와 갈등을 겪고 헤어진 부모를 그리워하지만, 막상 30여 년만에 부모가 돌아오자 낯설어한다. 안타깝게도 내 필력은 30여 년에 이르는 거대한 이야기를 쓰기에 턱없이 부족하고, 톨스토이는 데카브리스트 피에르의 이야기를 끝내 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이 짧은 미완성작을 통해 피에르와 나타샤의 노년의 삶을 짐작해 볼 수 있고, 돌아온 데카브리스트들에 대한 당대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의 귀족들에 비하면 초라한 라바조프 가족의 행색을 보고 은근히 무시하던 숙박업소 사장과 직원들은, 라바조프가 데카브리스트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을 깍듯하게 대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귀족들에게는 데카브리스트들이 돌아온다는 것이 큰 뉴스이고, 라바조프를 역사의 산 증인이자 뉴스거리로 대한다. 그들을 존경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뜻을 마음 깊이 되새기기보다는 그들을 무료하고 지루한 삶의 활력소로 여긴다. 하지만 작가는 "(18)56년도에 러시아에서 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감히 말하겠다."고 말할 만큼 그들의 귀환에 큰 의미를 둔다. 이 짧은 부분만 보더라도 데카브리스트들의 귀환을 대하는 다양한 반응들을 생생하게 묘사했는데, 이야기가 완성됐으면 데카브리스트들이 혁명을 일으키고 살아남은 의미를 더 생생하게 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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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포함

  읽으면서 읽는다기보다는 그 무게를 견뎌내는 것 같이 느껴지는 책들이 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 도 내게는 그런 책들 중 하나였다. 600여 페이지니 분량이 많기는 하지만, 천 페이지가 넘어가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보다는 감당해낼 만한 분량이다. '호세 아르카디오'와 '아우렐리아노'가 무한반복되는 복잡한 가계도도, 의외로 그렇게 헷갈리지 않는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졌어도 할아버지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 아버지는 호세 아르카디오, 아들은 아르카디오라고 부르는 식으로 조금씩 다르게 부르니까. 게다가 세월이 흐르고 세대 교체가 되면서 선대 호세 아르카디오나 아우렐리아노가 퇴장하니, 누가 누구인지 헷갈릴 가능성은 더 줄어든다. 나를 압도하는 것은 많은 분량이나 무한반복되는 같은 이름이 아니라, 작품 전체에 깔려 있는 고독의 무게였다. 

  작품 속 주인공들인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에게 고독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온 나라에 이름을 떨친 전쟁 영웅도, 젊었을 때 호화로운 파티를 즐기던 사람들도, 외국 문물을 흔쾌히 받아들여 현대화된 신세대들도 예외는 아니다.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고독을 지녔고, 우르술라처럼 어떤 고난도 강인하게 이겨내며 가문을 이끈 사람도 결국에는 노쇠해지고 사람들에게서 잊혀진다. 그들 가족에게 가족애나 유대관계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각자가 지닌 고독을 뚫고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한 명씩 잊혀지고 사라진다. 


페르난도 보테로, <콜롬비아에서의 학살>, 2000.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묘사되는 콜롬비아의 잔혹한 근현대사는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고, 콜롬비아의 화가 보테로는 이 잔혹한 현실을 화폭에 담았다.


  이들의 고독에는 이들의 조국 콜롬비아의 고독이 긴밀하게 얽혀 있다. 콜롬비아의 잔혹한 근현대사 속에서 부엔디아 가문의 고독도 깊어진다. 19세기 말부터 콜롬비아에서는 보수파와 자유파가 끊임없이 정쟁을 벌여왔고, 그로 인해 벌어진 내전에서 수십만 명이 죽어갔다. 이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사람이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다. 그는 보수파가 투표를 조작해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을 목격하고 자유파의 편에서 싸우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신념보다는 자존심 때문에 전쟁을 하고, 원래도 고독하고 냉정했던 성품이 전쟁을 겪으면서 더욱 더 냉혹해진다. 대령의 조카손자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는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미국계 바나나 회사에 맞서 노동운동을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시위에서 3천 명이 정부군에게 총살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난 뒤, 그는 트라우마로 인해 남은 평생을 집안에 틀어박혀 살게 된다. 죽은 노동자들의 시체로 가득찬 열차에서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가 자신 혼자 살아있음을 깨닫고 전율하는 장면은 우리의 광주를 떠올리게 한다. 부엔디아 가문이 세운 유토피아였던 마콘도는 이렇게 내전과 외국 자본주의의 침략과 착취를 겪으며 몰락해간다. 마콘도는 콜롬비아가 근현대사에서 겪었던 비극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무대이다. 

 마르케스는 환상과 현실을 자연스럽게 뒤섞으며 남미의 현실과 남미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전한다. 신부가 코코아를 마시고 공중부양을 하고, 미녀 레메디오스가 어느 날 갑자기 이불에 싸인 채로 승천한다. 그 와중에도 레메디오스의 올케인 페르난다는 레메디오스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레메디오스가 걸치고 간 이불을 아까워한다. 비현실적인 사건들과 그 사건을 겪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심리가 자연스럽게 섞여, 어떤 일도 아무렇지 않게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라틴아메리카 특유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한다.

  환상과 현실을 뒤섞는 이런 마술적 리얼리즘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에 가려졌던 것을 보여준다.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는 수천 명이 정부군의 총에 쓰러지고, 그 시체를 실은 기차에서 탈출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아무도 시위에서 죽지 않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는 공식적인 기록 앞에서 그가 겪은 현실은 환상, 비현실로 전락한다. 약자들의 현실을 환상이나 비현실로 만들어버리는 역사의 승자들 앞에서,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린 마술적 리얼리즘은 눈에 보이는 것 이면의 진실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미처 마지막 줄을 다 읽어내기도 전에, 그는 자기가 결코 이 방에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으니, 그것은 이 거울의 도시, 아니 신기루의 도시가, 바람에 날려 없어질 터이며,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가 이 원고를 해독하게 되는 순간부터 마콘도는 인간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며, 여기에 적힌 글들은 영원히 어느 때에도 다시 되풀이될 수 없을 것이니, 그것은 100년 동안의 고독에 시달린 종족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P. 460. (안정효 역)

 600여 페이지 내내 읽는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았던 이 이야기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과 함께 사라진다. 자기가 지닌 고독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아닌 어떤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근원적인 고독과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하면서 더 깊어진 고독, 시대의 비극이 만들어낸 고독이 합쳐져, 누구도 그 무게를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마콘도와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은 한 줌 먼지가 되어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고독은 사라지지 않고 인간 자신과 시대가 만들어낸 고독의 무게를 전한다.

P. S 1. 안정효 역인 『백 년 동안의 고독』과 조구호 역인 『백 년의 고독』 을 한 문장 한 문장 비교하면서 읽었다.  두 가지 번역본을 비교하면서 읽느라 더 진이 빠졌다. 아무래도 영어판을 토대로 중역한 안정효 역보다는 스페인어 원서를 직역한 조구호 역이 더 정확한 번역일 것이다. 안정효 역은 인물들의 이름에서 오류가 보인다.(계속해서 메메를 레메로, 레나타를 레난타로 잘못 표기하고 있다. 다만 조구호 역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이사벨라 여왕으로 오역했다. 스페인 이름 이사벨라와 영어 이름 엘리자베스 모두 성녀 엘리사벳에서 유래한 이름이기 때문에 이런 오역이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조구호 역은 작품 속의 소소한 상징까지 역주로 해설해서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됐다. 다만 더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장으로 느껴지는 건 안정효 역이어서, 조구호 역의 문장이 너무 복잡해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안정효 역을 참고했다. 조구호 역은 한 문장이 몇 페이지까지 이어지는 화려한 원문 문장의 느낌을 살리려 했고, 안정효 역은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장으로 읽히게 하려고 문장을 끊었기 때문일 것이다. 

P. S 2. 영상화하기 어려운 소설이지만, 영화보다는 좀 더 긴 호흡으로 원작을 담을 수 있는 드라마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드라마 제작자나 연출자라면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드라마화하는 데 도전해 보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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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의 작가 엘레나 페란테는 195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의 나폴리를 배경으로 두 친구의 60여 년에 걸친 우정과 애증을 담은 소설 네 편을 출간했다. 두 친구의 어린 시절을 그린  첫 번째 책  『나의 눈부신 친구』, 젊은 시절을 그린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와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중년 이후의 삶을 그린『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는 '나폴리 4부작'으로 불린다. 이 네 권의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권『나의 눈부신 친구』는 주인공 레누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유명 작가인 레누는 66세가 되던 2010년, 어린 시절부터 단짝친구였던 릴라가 흔적도 없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릴라와의 평생에 걸친 우정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야기는 50여 년 전 둘이 처음 친구가 되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권은 둘이 친구가 된 이후부터 성장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네 권 중에서도 가장 분량이 적고,  둘이 짊어진 삶의 무게도 성인 시절에 비하면 가볍기에,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물론 어린 시절부터 가정과 마을에서의 폭력, 가난이 둘을 괴롭히지만, 다음 권들에서 나올 삶의 무게와 막장 드라마에 비하면 약과다.  지식에 목마르고 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분투하는 레누와, 어린 시절부터 당돌하고 거침없었던 릴라의 모습에서 이후 둘이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지 짐작할 수 있다. 



 2권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에서 레누와 릴라는 성년이 된다. 레누는 고향 나폴리를 떠나  피사의 노르말레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반면 릴라는 고향 마을을 떠나지 않지만 고향 마을에서 복잡한 애정과 원한 관계에 얽히며 자기 나름대로의 전쟁에 임한다. 이야기는 둘의 이야기를 넘어 이탈리아 전역, 유럽을 휩쓸었던 청년 운동, 정치 개혁, 페미니즘 운동으로 확장된다. '새로운 이름'은 둘이 결혼을 하면서 얻은 새로운 이름(남편의 성)일 수도, 둘이 어른이 된 이후로 보고 듣고 겪는 새로운 것들일 수도 있다. 


  3권『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에서는 레누와 릴라의 삶이 더욱 더 복잡해진다. 둘은 여성으로서 커리어, 출산, 육아, 결혼생활, 애정관계에서 끝없는 난관에 부딪친다. 막장드라마와 다를 게 없는 복잡한 상황들에 독자까지 숨이 막힐 지경이다. 레누와 릴라는 항상 현명하지 않고 어리석은 결정들도 내린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통해 각자 자기 자신을 찾아간다. 


  이제 이야기는 둘의 30대, 중년을 지나 레누가 릴라와의 우정을 회상하기 시작하던 2010년대로 돌아온다. 레누와 릴라의 이야기를 넘어 나폴리, 이 세상의 온갖 기쁨과 슬픔, 부조리함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됐던 이야기는 다시 레누와 릴라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마지막 책장을 덮은 뒤에도 둘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나폴리 4부작'의 장점은 무엇보다 재미있다는 것이다. 소설은 이야기로서의 재미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서사는 내버려두고 한없이 내면으로 가라앉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소설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남자가 주인공의 절친과 동거하고 주인공의 시누이가 주인공의 구남친과 사귀며, 주인공은 불륜에 빠져 앞뒤 안 가리는 막장드라마가 펼쳐지지만, 막장드라마만큼이나 흡인력이 뛰어나다. '나폴리 4부작'은 60여 년에 이르는 긴 이야기인 만큼 네 권의 분량을 합치면 2400여 페이지에 이른다. 그럼에도 내가 4권 모두를 읽는 데 일주일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재미있기만 하다면 이 소설이 그렇게 많은 호평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소설의 또 다른 장점은 여자들 사이의 우정을 섬세하게 그렸다는 것이다. 많은 창작물들이 여자들의 우정이 깨지는 이유가 남자 문제인 것으로 묘사한다. 레누와 릴라 사이에 남자 문제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남자 문제는 레누와 릴라 사이의 기나긴 애증의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다. 레누는 평생 동안 릴라에게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다. 릴라는 가난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무엇이든 쉽게 배우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며, 사람들을 자기가 뜻한 대로 이끄는 데 타고난 재능을 지녔다. 글재주 또한 전문 작가인 레누 못지 않다. 아니, 레누가 오히려 릴라의 타고난 글재주를 부러워할 정도이다. 레누는 릴라를 본보기로 자신을 늘 갈고 닦아 훌륭한 작가가 되지만, 늘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고 릴라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제3자인 독자의 입장에서는 릴라가 레누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지 보이는데, 정작 레누는 열등감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4권 내내 둘이 서로 멀어졌다 다시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지는 모습은 우리가 친구들과 겪었던 우정과 애증을 떠올리게 하며 깊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또한 이 소설은 둘의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당시의 시대상을 녹여낸다. 노골적으로 정치적 이념이나 역사적 사실을 독자들에게 주입하려는 소설보다, 등장인물들의 삶이 어떻게 당시 시대 상황의 영향을 받았는지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소설이 오히려 당시의 시대상을 더 와 닿게 한다.  그런 점에서 톨스토이의『전쟁과 평화』를 좋아하는데, '나폴리 4부작' 역시 후자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이탈리아는 가부장제와 남성 과시적인 문화가 강한 나라이고, 레누와 릴라도 가부장제의 폭력에서 자유롭게 못하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잘사는 북부 지방과 못하는 남부 지방의 대립이 심하며, 가난하고 낙후된 남부 지방을 대놓고 못마땅해하는 극우정당이 종종 득세하는 북부 지방과 달리, 남부 지역에서는 공산당과 좌파정당이 득세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과 주요 캐릭터들의 고향은 남부 지방인 나폴리이고,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심한 빈부격차와 사회적 모순을 목격하며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지니게 된다. 1968년 프랑스에서 시작된 청년들의 반체제 운동인 68 운동은,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 이탈리아 젊은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레누 역시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에 눈을 뜨게 된다. 대학교에서 68 운동을 접한 레누와는 달리, 공장 노동자로서 힘겹게 살아가던 릴라는 자본주의의 부조리함을 몸소 체험하며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보는 시각을 갖추게 된다. 둘의 삶을 통해 우리는 1950년대 이후부터의 나폴리, 더 나아가 유럽 사회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볼 수 있다.

 요약하자면 소설에서 재미를 기대하는 독자도, 여자들 사이의 우정을 더 섬세하게 그려주기를 기대하는 독자도, 당대의 사회상을 반영하기를 기대하는 독자들도 만족할 수 있는 소설이다. 2천 페이지가 넘는 긴 여정이 되겠지만, 여정을 마치고 나서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냥 행복하고 즐거운 여정은 아니겠지만, 두 친구와 긴 여정을 함께 하면서 많은 것들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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