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주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미래주의의 선동가이며 지도자는 시인 필리포 톰마소 마리네티(1876~1944)였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태생의 이탈리아인 마리네티는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한 후 1899년 제노바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893년 파리에 오면서 아방가르드 문학에 관심이 생겼고 상징주의에 반대하여 ‘본연주의적 naturiste’ 움직임에 동참했다. 1912년 무렵까지 거의 프랑스어로만 시를 썼다. 그는 1905년 밀라노에 거점을 둔 문학 잡지 <포에시아 Poesia>를 창간했는데, 이 문학지는 예술의 자유, 형식의 혁신, 전통의 거부를 표방했다. 마리네티는 이 잡지에 시를 발표했는데, 특히 <속도의 신>과 <자동차에 바침>(1905)에서는 자동차로 대표되는 속도에 중독되고 현대적인 것을 찬양하는 미래주의의 주요한 특징을 예고했다. 미래주의는 1909년 2월 20일 <르 피가로> 지에 마리네티가 작성한 ‘미래주의 선언문’이 게재됨으로써 출범했다.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르 피가로> 지를 수백 장 구입하여 이탈리아에 있는 예술가들에게 일일이 발송했다. 격렬한 무정부주의적 어조의 이 선언문은 매우 선동적인 언어로 새로운 문학 및 사회운동의 탄생을 알렸으며, 젊은이들에게 미래주의의 기치 아래 모일 것을 호소했다. 폭력과 투쟁이 만연한 이 선언문의 전반적인 어조 “아름다움은 오직 투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니체의 영향을 크게 반영하고 있으며, 후에 그 영향은 단절되지만 움베르토 보초니(1882~1916)와 다른 젊은 미래주의자들은 니체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마리네티는 사상의 지휘자였으며, 그의 현대성에 대한 찬미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즉각적인 지지를 얻었다.
화가이며 조각가 보초니는 1910년에 미래주의 선언문에 서명했고 그 후 미래주의 그룹에서 가장 활동적인 예술가가 되었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1912년 2월 7일자 <강경파 L'Intransigeant>에서 보초니를 미래주의 예술가 중 가장 재능 있는 화가로 평가했다. 보초니는 산업화된 밀라노와 마리네티의 사상에서 깊은 감명을 받아 “산업화된 우리 시대의 결실”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보초니, 발라, 카라, 루솔로, 세베리니가 서명한 화가들의 선언문은 1910년 2월 11일에 씌어진 것으로 3월 8일 토라노에 있는 키아렐라 극장에서 보초니에 의해 낭독되었다. “우리에게 있어서 동작은 더 이상 보편적 역동성의 멈춰진 어느 순간이 아닐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그 자체가 영원한 끊임없는 역동적 감각일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나타나듯이 이 선언문의 중심 주제는 ‘보편적 역동성’이었다. 그들이 1910년 4월 11일에 발표한 ‘미학 선언문’의 9개 조항에는 운동에 대한 강조가 담겨 있다.
1. 모방된 형태들은 무가치하며, 본래 형태들만이 찬양받아야 한다.
2. 쉽게 무너질 수 있는 렘브란트, 고야, 로댕의 도움으로부터, 그리고 지나치게 융통성 있는 표현들처럼 ‘좋은 감각’과 ‘조화’라는 말의 폭정에 근원적으로 반발해야 한다.
3. 미술평론가들은 무가치하거나 해를 입히는 사람들이다.
4. 이미 사용한 적이 있는 주제들은 우리의 무쇠, 자긍심, 열정, 그리고 속력의 소용돌이치는 인생을 표현하기 위해 깨끗이 일소되어야 한다.
5. ‘미친 놈’이라는 말로 탄압받는 모든 발명가를 우리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우러러보아야 한다.
6. 시에서 운율이 자유롭고 음악에서 대위법이 자유로운 것과 마찬가지로 회화에서도 고유한 보충적인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7. 우주적 동력주의는 회화에서의 동력적 감각처럼 묘사되어야 한다.
8. 자연을 묘사하는 방법에서 가장 근원적인 점은 성실하고 순수해야 하는 것이다.
9. 운동과 빛이 사물의 물질적인 요소들을 파괴한다.
미래주의는 2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첫 번째 단계는 1909년의 발단에서부터 1916년 보초니의 사망으로 인해 사실상 그룹이 해체될 때까지이며, 두 번째 단계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무솔리니 정권 하에서 마리네티가 시도한 재건의 시기이다. 20세기 미술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첫 번째 시기에서 예술가들은 선언문에서 제안된, 과장된 공식적 표명을 합리화할 수 있는 회화 언어를 성취하고자 했다. 그들은 가에타노 프레비아티(1852~1920)의 분할주의 기법으로 작업하면서 움직임과 변화에 대한 감각을 부여하려고 했다. 프레비아티는 쇠라나 시냐크와 마찬가지로 과학적인 색채 이론이야말로 현대 화가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며, “현대인의 사고와 감정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접합”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화가들에게 지침을 제공하기 위해 <회화 기법>(1905)과 <분할주의의 과학적 원칙>(1906)을 출간했으며, 1913년에는 <회화에 관하여: 기술과 기교>를 출간했다.
밀라노의 미래주의자들은 1911년에 8월 24일자 <라 보체> 지에 실린 소피치의 글 ‘피카소와 브라크’와 세베리니의 밀라노 방문을 통해 입체주의를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소피치는 입체주의는 인상주의 혁명의 확장이며, 인지된 사실을 보다 통합적으로 평면에 투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피카소에 대해 “대상 자체의 주위를 돌면서 그것을 모든 각도에서 시적으로 고찰하고, 여기에서 받은 연속적 인상에 충실하면서 이를 묘사한다. 결국 그는 인상주의자들이 오직 한 순간의 한 측면만을 표현한 것과 같이 자유롭게, 대상의 총체성과 감정적 영속성을 보여준다”고 했다. 미래주의자들은 이런 면은 수용하면서도 입체주의자들이 대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순수한 회화적 가치에만 관심을 둔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입체주의를 단지 은폐된 아카데미즘으로 묘사했다. 미래주의자들은 입체주의의 정물 대신 그들 특유의 이미지와 표현을 통해 현대생활의 역동적인 에너지와, 현대성 및 기계 시대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표현했다. 또한 입체주의와는 다르게 그림의 중심으로 관람자를 끌어들이고자 했다.
루솔로는 1913년 자신의 선언문 <소음 미술 L'arte dei rumori>을 출간했는데, 여기에서 음악은 전적으로 자연의 소음으로 만들어진다고 주장하여 슈토크하우젠과 존 케이지를 예견했다. 카를로 카라도 1912년 자신의 선언문 <소리, 소음, 냄새 회화 La Pittura dei suoni, rumori, odori>에서 이전의 많은 선언문들보다 격렬한 어조로 비시각적인 여러 감각들이 색채와 형태의 추상적 조합으로 표현될 수 있는 회화를 옹호했다. 한편 발라는 색채, 움직임, 소리까지도 포함하는 다양한 재료의 조각으로 이후의 키네틱 조각의 몇몇 양상을 예고했다.
이 시기 동안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점점 더 입체주의적인 언어로 움직임의 종합적 표현을 계속해서 실험했다. 그러나 이들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여 점차 분열되어 갔으며, 1914년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결속력 있는 미학 그룹을 구성한다고 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후 미래주의의 역사는 그룹의 역사라기보다는 개별적인 예술가들의 역사이며, 그룹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주된 추진력을 상실했다.
미래주의는 이탈리아의 문화현상으로 기존의 확립된 체제에 대한 공격과 이탈리아를 유럽 문화 발전의 주류 속으로 되돌려놓으려는 독창적인 개혁안을 추구했다. 미래주의는 야수주의, 입체주의와 같은 다른 혁신적인 운동과 어느 정도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민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것들과 달랐다. 또한 미래주의는 전적으로 미술과 관련된 것이 아니며, 진정한 미학적 운동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미래주의는 처음에는 문학개혁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 회화, 조각, 건축, 연극, 음악, 영화와 같은 다른 예술 분야까지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미래주의가 호전적인 민족주의 및 과도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유럽 미술에서 중요한 진보적인 운동의 하나로 평가되는 이유는 수준 높은 회화작품이 제작되었고 미래주의가 다른 예술 분야의 운동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