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하고 게으르게
문소영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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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일상이고 글 쓰기가 직업인 여자' 띠지 카피가 인상적이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서 참으로 이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구나, 처음엔 그런 막연한 생각을 했다. 작가 소개란을 보고는 이렇게 다양한 이력을 쌓았다면 분명 굉장히 부지런한 성미의 소유자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채 몇 장 넘기기도 전에 공감의 웃음이 흘러나왔고 다 읽고 난 지금에는 예술이 일상인 삶이 어떤 것인지 깨닫는다. 졸음을 쫓으려 들이키던 커피가 이젠 프랑스 화가 질베르의 「커피 한 잔」을 떠올리며 더 짙은 향과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것처럼, 미국 풍경화가 조지 이네스의 「몬트클레어, 11월」 속 나그네의 시선 너머 나의 내면을 보게되는 것처럼 삶의 감각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저자 문소영은 다양하고 폭넓은 주제를 다루면서 당연시되는 불합리함이 더 이상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꼬집어 이야기하면서도 무턱대고 할 수 있다며 등떠밀거나, 천편일률적인 조언을 하지 않는다. 그저 작가 자신의 시선과 사유하는 방식을 넌지시 보여줄 뿐이다.




아기를 낳고 돌보며 심신이 녹초가 되고 자기 시간이 따로 없게 된 한 지인은 자식을 무척 사랑하지만 때로는 자식이 자기를 파먹어 들어가는 것 같다고 했다. 그게 사실이다. 나도 그렇게 엄마를 파먹었으리라. 엄마는 끝없이 인내하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어머니가 되어갔으리라. 그래서 어머니 노릇을 하는 모든 어머니는 위대하다. 모성애가 신화에 불과하기에 더더욱 위대하다. 본능을 따라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다스리며 어머니가 되는 것이기에. p.81




나는 아직도 가끔씩 혼란스럽다. 여성의 목소리가 소거된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우스꽝스럽게도 나 자신을 착각하고 오해하는 무수한 인지부조화의 순간을 지나왔다. 듣기만 해도 두드러기가 올라올 것 같은 모성애가 하나의 예다. 신성시 되는 임신과 출산의 고통스러운 이면을 뒤늦게 알고 비출산을 결심했지만 한때는 나같이 삭막한 사람도 아이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보편적 의미의) 모성애가 발현될 것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더랬다. 그런데 위 구절을 읽으며 어딘가 찜찜했던 부분이 해결됐다. 그러니까 본래 어머니 노릇이란 난데없이 불쑥 솟아나는 게 아닌 끝없는 인내와 자신을 향한 채찍질로 이루어진 험난한 수행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문득 애잔했던 어린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나를 괴롭히던 남자아이들의 행동을 호감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시키고 내 입을 다물게 만들었던 어른들의 말말말. 그때 같이 때려주었더라면 이렇게 억울하진 않을 텐데. 억누르고 참는 건 이제 그만 하련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의 당찬 일라이자처럼 그 어떤 상황에 놓여져도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는 삶을 살고 싶다. 




일단 나부터 변해야 한다. 비교의 잔소리는 듣기 싫으면서도 은연중에 거기에 동화돼 스스로를 열등감에 가두고 남에게도 비교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이 많다. 이로써 비교의 굴레는 순환, 확장된다. 좀 벗어나 보고 싶다. p.156




번아웃 증후군으로 무기력에 빠진 현대인들과 이에 대한 반향처럼 재산 탕진의 즐거움을 누리는 그릇된 욜로족의 등장은 지금 우리 사회의 방향성이 재정립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인생의 기나긴 여정에서 지독한 번뇌에 빠지지 않고 삶을 잘 운용하기 위한 마음가짐으로 <광대하고 게으르게>는 어떨까. 우리는 의심하는 토마를 가슴에 품어 소리내어 말하고 사색적 집중 상태로 타인의 지옥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너와 나라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죽음을 인식하고 오늘을 흘려보내지 않는 광대한 시야가 절실하다. 작가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감정을 무디게 만드는 것은 수동성" 이라며 사람들에게 행동할 것을 촉구했다. 꼭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원대한 일은 아닐지라도 비교의 굴레를 벗어나는 아주 사소한 일부터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지치지 않는 게으른 몸짓으로 말이다.



독서란 본래 혼자하는 행위인데 책을 다 읽고 나니 마치 대화를 나눈 기분이다. 비슷한 취향을 지닌 이와 실컷 주고 받을때 느껴지는 그런 종류의 즐거움이었다. 그 중에서도 이미 본 영화인데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넘어간 장면이라던지 아예 다른 의미로 오해하고 있었던 표현이나 맘에 들어오는 시를 발견한 건 최고의 성과였다. 최근 덥고 습한 날씨를 핑계로 아주 게으른 독서를 하던차에 본문에 등장한 영화와 책들은 다시 움직일 원동력으로 내 마음을 들뜨게 한다. 그래서 한마디를 보태자면, 그에게 과민하단 말 대신 섬세한 감각을 지닌 사람이라 말해주고 싶다. 아름다움에서 보는 씁쓸함이야말로 진정 삶을 다채롭게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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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20주년을 맞아 눈에 띄는대로 리커버 도서들을 뽑아 인증샷을 찍어보았다.



읽을 책이 산더미라 아직도 비닐에 쌓인 장 자크 루소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그리고 아리랑.



알라딘 리커버 도서하면 단연 일러스트!

잊혀진 책들의 새단장한 모습은 독서욕을 불태우게 만든다.



가장 예쁜 리커버 도서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한때 예쁜 책 찾아 가죽 양장본 원서들을 사모으던 때가 있었는데..

                                                    역시 책은 모국어로 읽는 게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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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7-08 1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에코는 굉장히 웅장하네요. 옆면 보소.....
 
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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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물네 살의 아일린은 굉장히 불안정하고 결핍된 인물이다. 스스로를 돌볼 줄 모르고 자학적이면서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것에 흥미를 느끼고 늘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 저자 오테사 모시페그는 그동안 청소년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방황의 감정을 성장을 거부한 미성숙한 주인공을 통해 진솔하고 건조한 문체로 이야기를 뻗어나간다. 폭언을 일삼는 알콜중독자 아버지와 냉담한 직장 동료들이 인간적 교류의 전부인, 공상(空想)속에서조차 지독하게 외로운 투명인간의 삶 그리고 사랑에 구원받길 원하는 어리고 무력한 존재. 당신이 <아일린>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이것은 보편적 불행에 대한 이야기다. 내 안에서 쉼없이 몰아치며 고통을 자아내지만 입밖에 내는 순간 식상해져버리고 마는 만연한 불행에 대한 쓸쓸한 회고다.




"지옥에 떨어질 거다." 내가 손목을 그을 때 아버지가 문을 박차고 들어와 그렇게 말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두려웠다. 천국은 믿지 않았으나 지옥은 진짜 있다고 믿었다. 정말로 죽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항상 살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자살할 생각은 없었다. p.86




아일린의 페르소나는 데스마스크다. 불안과 억압된 환경에서 성장하지 못한 채 자라버린 자에게 세상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이러한 분노를 감추기 위한 그의 행동은 늘 어딘가 과장되고 어색하다. 우울증, 섭식장애, 자기혐오, 강박장애와 좀도둑질까지 온갖 문제를 끌어안은 시한폭탄과도 같은 그는 자주 딜레마에 빠져 "아버지를 죽이고 싶으면서도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진 않는다는 것"처럼 양가감정에 허우적거린다. 짝사랑하는 '랜디'를 스토킹하면서도 성적 흥분이 일면 가학적일 정도의 태도를 취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면서도 참을 수 있는 한계까지 자신의 더러움을 견디기도 하며 풍경처럼 녹아들고 싶어하지만 동시에 특별한 사람이길 원하는 마음. 난 아일린에게 깊히 공감한다. 혹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가? 누구나 모순의 시기를 지나지만 모든 것은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된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먼지로 뒤덮힌 집은 거실 한구석에 작동을 멈춘 텔레비전의 모습과 닮았다. 어디가 문제인지 알지만 손 대지 않고 방치해 케케묵어버린 것들처럼. 이러한 집안 풍경은 고장난 안락의자에서 술에 취해 죽은 듯 잠에 빠진 아버지나 집을 드나들 때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이 심장에 내리꽂히는 상상을 자연히 떠올리는 것과 더불어 죽음의 이미지를 연상케한다. 온통 어둡고 음습한 것에 "면역" 되어버린, 천국은 믿지 않지만 지옥은 있다고 믿는 아일린. 이렇듯 누군가에게 집이란 지옥일 수도 있는 것이고 때문에 비록 배기가스를 뿜어내며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차일지언정 훌쩍 사라져버릴 수 있는 달콤한 희망을 품게 하는 것이다. 




나는 간이침대에 누워 주먹으로 배를 두드리고 얼마 안 되는 허벅지 살을 꼬집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내 존재가 줄어들면 내가 겪는 문제도 적어지리라 진심으로 믿었다. 어머니의 옷을 입은 것도 아마 그런 이유였을 테다. 별로 크지 않았던 어머니의 몸집만큼도 되지 않겠다는 다짐을 게을리하지 않으려고. 말했듯이 나에겐 어머니의 인생, 여자의 인생이 철저히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당시에는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아내가 되는 일만큼 싫은 게 없었다. 물론 스물넷이라는 어린 나이에 나는 이미 아버지에게 그 두 가지가 모두 되어 있었다. p.263




아일린의 여성성에 대한 수치심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자식들을 방치하고 술을 좋아하던 어머니가 병으로 고통스러워할 때 아일린은 그 울부짖음을 피해 다락방으로 도망쳤다. 아버지와 하느님을 한데 묶어 비난을 퍼붓던 어머니보다 죽은 개 '모나'에게 더 애틋함을 느낀다. 예쁜 외모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언니 '조우니'는 어쩌면 같은 이유로 집을 나갔을지도 모르고 가끔씩 집에 오는 고모는 눈길조차 주지 않을 만큼 무관심하다. 주변 여성의 부재가 혐오감을 키웠을까. 모두가 떠난 자리에 아일린은 홀로 남아 아버지를 돌본다. 살을 에는 추위처럼 수치심과 혐오감의 정체는 또 다시 외로움으로 귀결된다. 그때 모든 편견을 깨뜨리고 "완벽하게 행복한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리베카'의 존재는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온다. 몇 마디 대화로 마음을 빼앗긴 아일린은 더 이상 랜디나 아버지에게 애정을 갈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죽은 들쥐로 맛봤던 권력의 힘은 아버지와 한몸이던 총을 손에 넣으며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을 일으키고 이는 리베카 앞에서 설렘에 들떠 허세를 부리는 아일린의 모습과 겹치며 독자로하여금 불안감을 조성한다.




나는 그 현관문을 완전히 닫았다. 그때 마치 하느님의 의지가 작용하기라도 한 듯, 마당 쪽으로 돌아서는 순간 고드름 하나가 갈라졌고, 내 볼을 향해 떨어진 그 고드름은 예리한 칼날처럼 눈에서 턱까지 길게 긋고 지나갔다. 아프지는 않았다. 약간 따끔했을 뿐이다. 피가 고이는 느낌이 나면서 한기가 유령처럼 상처로 스며들었다. (중략) 내게 그것은 언젠가 다른 사람이었다는, 탈출한 그 젊은 여자, 아일린이었다는 표시일 뿐이다. p.361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64년의 시대상은 몰입하는데 어려움을 주지 못 한다. 백여 년 전 선원들의 금주를 위한 합숙소로 지어진 지금의 무어헤드(소년 교도소)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변화를 거듭했지만 언제나 남자를 위한 공간이었다. "남자로 태어났다면 나도 아마 그곳에 갇혔을지도 모른다."는 문장은 여성으로서 겪는 억압을 은유적으로 시사한다. 남편의 권태에 자신을 탓하고 돌아온 남편의 손길에 행복한나머지 아들의 고통을 묵인한 미시즈 포크. 작중 그의 이름이 나왔던가. 그저 온기가 절실한 또 다른 아일린이었을지도. 그렇다면 왜 오십 년 후일까? x빌에서, 아버지에게서, 무력했던 자신에게서 벗어나며 이야기는 끝을 맺지만 이 소설은 노인이 된 아일린의 회고록이다. 가끔씩 어린 날의 자신을 변호하기도 하고 다른 길을 택했더라면 하는 후회의 기색도 내비치지만 그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건 아마도 이렇게 극렬히 불행했던 자신도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온전한 나로서 행복감을 얻었다는 것이 아닐까. 갑작스레 x빌을 떠나오던 길에 마주친 사슴은 서툴고 유약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상징하지만 곧이어 허벅지를 토닥이는 남자의 두툼한 손은 평탄하지 않을 앞날을 암시한다. 그날밤 리베카를 만나러 가던 길에 훔친 예수의 담요가 아일린의 혹독한 여정에 위로가 되어주었길 바란다. 늘 좌절 뿐인 크리스마스였지만 언제나 희망을 놓지 않았던 모든 아일린을 위해.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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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스토리
리처드 파워스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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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자연을 소재로한 이야기는 많다. 그 속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은 종종 숲에서 잃어버린 무언갈 되찾기도 하고, 거대한 자연 앞에 한없이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그런데 나무에 관한 이야기는 무엇이 있을까. 인간의 깨우침을 위한 도구가 아닌 진짜 나무 이야기말이다. 리처드 파워스의 <오버스토리>는 세대의 세대를 거듭하며 땅 속 깊이 연결된 9명의 등장인물을 실제 역사적 배경에 바탕한 거대하고도 독창적인 서사의 탄생이다. 이것은 사라져가는 원시림을 보존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과 계속해서 가지를 흔들고 낮은 주파수로 말을 거는 나무와의 연대를 다룬 이야기다. 여기서 우린 잠시 무리에서 벗어나 주위를 둘러볼 필요가 있다. 당신이 익숙하다고 믿는 것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눈을 감고 떠올려보라. 혜안이 필요한 때이다.




"그 사람들은 모든 답을 알아. 더 이상 어떤 것도 그들에게 해를 입힐 수 없지." p.54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간 뿌리는 인물들을 연결시킨다. 한 세기가 넘도록 기록된 밤나무의 초상은 호엘가의 유산이다. 과거 전국에 몰아친 병충해에도 굳건했던 나무는 이제 사그라졌고 곧 사라질 집에 홀로 남은 '니컬러스'는 나무의 초상을 그림으로 옮길 뿐이다. 중국계 미국인인 '미미 마'에게는 아버지의 유산인 아라한 두루마리와 뽕나무가 세공 된 옥반지가 있고, 한때는 자신의 탄생목인 단풍나무를 사랑했지만 일찍이 인류의 유해성을 깨달은 '애덤 어피치'와 반얀나무에 목숨을 빚진 '더글러스 파블리첵'은 수없이 넘어지면서도 묘목을 심는 일에 매진하고, 외출 금지를 걱정하며 마지막 풍경을 감상하던 '닐리 메타'는 나무에서 추락해 하반신이 마비되는 사고를, 청각과 언어 장애를 가진 '패트리샤 웨스터퍼드'는 나무의 소통을 발견한 최초의 과학자로, 감전사에서 되살아난 '올리비아 밴더그리프'는 죽음 너머의 존재에게서 계시를 듣게 되면서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고, 책임감이 강한 '레이 브링크먼'과 자유를 갈망하며 도피기제를 보이는 '도러시 카잘리'는 자꾸만 어긋나는 그들의 관계처럼 무언갈 심기로 했던 기념일 약속을 묻어버린 채 기억하지 못한다.




순수를 떠나온 이들은 군중 속에 섞여 나무를 잊는다. 하지만 나무와 함께 자라온 이들에겐 아주 작은 기폭제로도 그들의 감각을 일깨울 수 있다. 가령 휴식처를 빼앗겼다는 사소한 분노 혹은 원대한 계시, 아니면 그저 이끌리듯 흘러들어온 이들이 생명보호군(LDF)으로 모여든다. 비폭력을 외치는 생명보호군들은 나무에 자신의 몸을 묶고 투쟁한다. 그러나 이건 선과 악의 대결처럼 보이지 않는다. 분명 거대 자본과의 싸움이지만 권력을 쥔 이들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무를 베다 장애를 얻은 벌목꾼들이 자신들의 생업을 방해말라고 고함을 내지르는 장면은 무어라 선뜻 말을 하기 어렵다. 있는 힘을 다해 거세게 몸부림치지만 뭍에 있는 기득권자들은 눈조차 깜빡이지 않으니 힘 없는 자들끼리의 아우성이다. 상황은 점차 아비규환으로 변해가고 급기야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폭력성은 언제나 인간의 것이고 나무는 늘 그렇듯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 그들은 우리 도처에 있다. 원형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모든 형태로 존재한다. 자각하지 못해도 우리는 그들에 많은 빚을 지며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나이테가 없다는 것. "우리는 십억 년 동안 지구가 모은 유대를 현금화하고 그것을 각종 사치품에 날리며" 더욱 깊은 망각에 빠진다.




반면 전면에 나선 LDF들과 달리 각자의 자리에서 몸통을 키우고 수관을 뻗어나간 이들이 있다. 여성 과학자로서 겪는 차별을 감내하고 대중의 멸시 속에서 연구를 멈추지 않던 패트리샤는 비밀의 숲을 출판하면서 세상에 충격을 안긴다. 닐리는 나무에게서 어떠한 계시를 듣고 게임 지배를 만들고 거듭 새로운 버젼을 출시하며 사람들을 열광시키지만 가상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움직일수록 그의 욕망은 되려 공허해질 뿐이다.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고 만들었던 코드는 이제 현실의 세계를 그대로 옮겨논 것과 다를바 없다. 그의 신탁나무조차 더 이상 아무런 말이 없다. 바로 그때 패트리샤의 책이 닐리에게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지구를 통째로 옮기려는 그의 원대한 장기 프로젝트는 '플레이어'가 아닌 '학습자'라 명명하며 사람들에게 스며든다. 반면 나무와 연관없어 보이던 브링크먼 부부는 레이가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많은 변화가 생긴다. 레이의 침상에서 보이는 잊힌 그들의 정원엔 한때 전멸했던 미국밤나무가 어느덧 생명을 드리우고 도러시는 그 경이로움에 하나 하나 배워나가며 훼손하려는 자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그들의 정원엔 위대한 유산이 생겨난다.




"스무 번의 봄은 순식간이다. 가장 더운 것으로 측정된 해가 왔다가 지나간다. 그리고 또 다른 해. 그리고 열 번이 더 지나가고, 거의 모든 해가 역사상 가장 더운 해로 기록된다. 해수면이 상승한다. 한 해의 시간조차 무너진다.스무 번의 봄, 그리고 마지막 봄은 첫 해보다 2주 빨리 시작된다." p.527




또 한 번의 나무를 심기 가장 좋은 시기가 지나갔다. 자신만의 나무로 숲의 이름을 짓고 뜨겁게 저항했던 이들은 흩어졌다. 그러나 늘 그렇듯 역사는 반복된다. 사람들은 또 다시 불을 지르고 얼마 남지 않은 원시림을 지키기 위해 저항한다. 그리고 외딴 곳에서 자신만의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파수꾼, 사라지는 숲에 고통에 차 소리치는 더그전나무, 사람들을 일깨우고자 스스로 훌륭한 이야기가 된 단풍나무, 나무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치유하는 뽕나무, 그리고 노란 잎을 흔들며 어딘가에서 강인하게 자라났을 메이든헤어. 죽어가는 세상을 공포 속에 바라보는 성모를 목격한 패트리샤는 결코 독이 든 성배를 마시지 못했다. 작중 무수히 반복되는 죽음과 좌절. 인류는 나무의 세계에 막 도착한 '불법체류자'다. 터를 잃고 공항에서 살아가는 참새가 아닌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리처드 파워스는 숲이 모든 것을 자연의 일부로 포용하며 장애와 여성, 인종, 이민자를 아우르는 상생하는 삶을 우리에게 몸소 보여준다. 이야기를 읽으며 보게 된 무수한 나무의 모습은 나를 또 한 명의 학습자로, 마음에 종자가 내려앉은 듯 어딘지 뻐근한 기분을 느낀다.





자신의 앞날을 계획하는 인간을 두고 신이 비웃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런데 한낱 작고 무지한 이들이 숲을 구하겠다고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진다. 신을 살리겠다는 인간의 오만. 그러니까 이 대장정에는 사실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셈이다. 나무들의 접촉은 구조 요청이 아닌 유전자의 4분의 1을 공유한 조상이 내미는 구원의 손길이었고 곧 멸종될 종은 나무가 아닌 그들 자신이었다. 장(章)이 바뀔 때마다 화자와 시공간이 모호한 이야기가 짧게 등장한다. 나무에 관해선 문맹인 감옥에 갖힌 남자의 모습은 애덤과 더글러스를 연상시키고 지친 모습으로 소나무에 기댄 여자는 미미의 마지막 등장과 겹친다. 얼마나 무수한 종자가 반복됐을까. "신호가 말한다. 좋은 답은 무에서부터 재창조할 가치가 있어, 다시, 그리고 또 다시." 아주 찰나의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다시 말을 걸어올 것이다. 그들의 후손이 뿌리내릴 때까지 다시, 또 다시.




"그들이 그녀에게 말한다. 희망을 갖거나 절망하거나 예측하거나 깜짝 놀란 모습을 보이지 마. 절대로 굴복하지 말고, 나뉘고, 증식하고, 변화하고, 결합하고, 행하고, 참아. 기나긴 인생 전체에서 해왔던 것처럼. 불이 필요한 종자들이 있어. 얼어붙어야만 하는 종자들도 있고. 삼켜서 위산에 부식된 다음 분변으로 나와야만 하는 종자도 있지. 싹이 트기 위해서는 부숴서 열어야만 하는 종자도 있고.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해도 어디든지 갈 수 있어." p.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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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오년 : 3.1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박시백 지음 / 비아북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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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그림인데 사진 자료라도 본 듯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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