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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듣는 벽 ㅣ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마거릿 밀러 지음, 박현주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9월
평점 : 
극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두 여성이 휴가를 떠나고 그곳에서 한 사람이 죽는 사건의 발생, 살아남은 자의 석연치 않은 실종과 그녀의 남편을 향하는 의심, 마침내 범인이 드러나는 극 속의 극. 마거릿 밀러의 가정스릴러 <엿듣는 벽> 은 죽음이라는 자극적 사건을 발단으로 진행되지만 그 위로 켜켜이 쌓아올리는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관건인 소설이다. 따라서 범인을 유추해보려거든 작가가 드러낸 이야기가 아닌 장막 뒤에 가려진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가정을 벗어나 낯선 땅 멕시코로 휴가를 떠난 여자들. 설렘으로 가득해야 할 여행이지만 그들의 대화는 어딘가 묘하게 어긋나고 잔뜩 날이 서있다. 신경질적인 윌마와 친구를 다독이는 에이미, 호텔 청소부 콘수엘라. 이들 세 사람을 잇는 단서는 윌마가 제작 의뢰한 순은의 값비싼 상자로 거기엔 에이미의 남편 루퍼트를 상징하는 이니셜 R.J.K.가 새겨져 있다. 찐득한 더위, 신경을 긁는 다툼, 점차 증폭되는 갈등에 불편해질 무렵, 다음 순간 사건은 이미 일어난 직후로 목격자 콘수엘라의 입을 통해 증언될 뿐, 작가는 교묘하게 진실을 가린 채 윌마의 죽음이라는 미스터리만을 남기고 여자들을 극에서 퇴장시킨다. 그리고 여성 중심의 서스펜스답게 다채로운 욕망을 지닌 또 다른 여성들이 등장한다.
쓰러진 에이미를 데리러 멕시코로 떠났던 루퍼트가 혼자 돌아오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그녀 스스로 떠났다는 그의 말을 의심한 에이미의 오빠 길 브랜던은 수사를 위해 탐정 도드를 고용한다. 극 초반에 드러나는 루퍼트의 수상함은 독자로 하여금 그가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음을 짐작하게 하는데, 이를 테면 브랜던에게 에이미의 편지를 건내는 장면에서 ‘하지만 루퍼트는 알고 있었다. 편지의 단어 하나하나를 다 기억했다. 오류가 있지 않나 열 몇 번식 확인했다. 몇 개 찾았지만 너무 늦은 다음이었다.’ (p.83) 라고 서술되는 속마음은 섬뜩함과 동시에 의아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아니, 이렇게 빨리 범인을 알려준다고?
소설이 후반부를 향해 갈수록 루퍼트에 대한 의혹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사건의 진상에 대해 궁금증만이 몸집을 불린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는 작가의 말하지 않음에 주목해야 한다. 착한 에이미, 남편에게 잘 맞춰주는 순종적인 에이미, 거절을 못하고 남에게 잘 휩쓸리는 에이미. 사건의 중심에 있는 그녀는 장막 뒤에 가려져 오로지 주변 인물을 통해서만 묘사된다. 탐정 도드가 사건을 하나하나 파헤칠 때마다 드러나는 진실에 느껴지는 스릴러적 재미도 있었지만 이 소설은 그보다 좀더 농밀한 여성의 욕망에 대해 말한다. 호텔 청소부 신세지만 헐리우드에서 거니는 꿈을 꾸고, 친구의 남편을 떠올리며 은밀한 선물을 준비하고, 안락한 가정이 깨어질까 겁내는 그런 마음들. 사건에 불을 지핀 '은상자'는 바로 이들의 욕망을 상징한다.
남성들은 단언한다. 제 아내를 잘 알기에 그럴 리가 없다고. 그녀는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나에게 이 소설의 반전은 마지막 문장이 아니다. 작가 또한 그런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어딘지 모르게 섬뜩함을 안겨준 문장은 다음과 같다. ‘도드가 나가자 에이미는 침대에 앉은 채로 그가 한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는지. 특히 루퍼트가. 협조해야만 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많은 일들을 겼었으니까 협조해야만 해. 해야 해…….’ (p.338)
해설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이 결말이 주는 충격은 진실이 마지막에야 밝혀졌다는 쾌감과는 다르다.” 가부장적 사회에 길들여진 여성이 바로 그들의 기대에 걸맞게 ‘협조’하는 것에 진정한 공포가 숨어있다.
“나에 대한 믿음이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어요?”
“그럼.”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겠죠?”
“어떤 면으로는 그렇지. 또한 당신을 잘 알아서기도 해. 난 당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아는걸.”
“그럴까요?” (p.346)
루퍼트는 정말 아내를 사랑해서 그랬을까.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를 읽어서인지 자꾸만 떠오르는 의심을 거둘 수가 없다. 그는 지나치게 맹목적인 방식으로 에이미를 믿고 보호했다. 가부장적인 시대상을 고려했을 때 여상히 지나칠 수 있는 대목이겠지만, 혹시 윌마와 루퍼트 사이에 정말 불순한 무언가가 있었다면?
엉뚱하게도 읽는 동안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나를 찾아줘」가 떠올랐는데 해설에서도 소개되는 걸 보니 감상은 다들 비슷한가보다. 물론 단순히 주인공의 이름이 같아서만은 아니다. 사건이 일어나고 극에서 숨어버리는 에이미들처럼 여러 공통점이 있기도 하지만. <엿듣는 벽>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를 찾아줘」 속 에이미는 말 그대로 아주 ‘어메이징’하다는 것. 만약 루퍼트가 윌마와 정말 바람을 피웠고 그 사실을 에이미가 알게 되었다면? 그 먼 옛날이 아닌 지금 자기만의 방을 가진 여성이었다면? 그랬다면 그녀도 어메이징한 에이미처럼 행동하지 않았을까. 공포스럽고 어마무시한 방법으로 루퍼트를 길들이는 에이미를 상상해 보는 일은 참으로 짜릿하다.
이야기가 끝나고도 계속 곱씹어보게 만드는 소설이야말로 읽는다는 것의 가장 큰 묘미가 아닐까. 하드 보일드의 거장 로스 맥도널드의 아내가 아닌 소설가 마거릿 밀러의 이름을 제대로 각인시킨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