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변의 피크닉 스트루가츠키 형제 걸작선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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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커들이 구역에서 처음 '바로 그'를 가져왔을 때부터였다. '배터리'… 그래,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특히 '바로 그'들이 증식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부터였다. 균은 이미 평범한 균은 아닌 것으로, 심지어 균이 아니라 오히려 보물인 걸로 밝혀졌다… 또한 지금에 와서는 그게 뭔지, 균인지, 보물인지, 지옥의 유혹인지, 판도라의 상자인지, 마귀인지, 악마인지 그 누구인지도 모른다… (중략) 이런 빌어먹을! 어쨌든, 나는 이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살지는 못하겠지…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이야기 초반부에 나온 인터뷰 내용이 다인지도 모른다. 외계인의 방문에서 무엇을 발견해내느냐 가 아니라 방문 그 자체가 전부라는 것. 그 이상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 이런 아무 의미없음에 누넌과 같은 이들은 진저리를 치겠지만 정말 외계인들은 그저 지구에서 한가로이 노변의 피크닉을 즐기다 위험한 쓰레기 더미를 왕창 버리고 떠난 것일 수도 있다. 더 진보한 이들이 지구에 무관심하다는 설정은 어쩐지 납득이 된다. SF에서 늘 특별하게 다뤄졌던 지구인과 외계인과의 조우에서 벗어난 <노변의 피크닉>은 그 후의 이야기이며 비정상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배경에서도 가장 사실적으로 다가오는 SF소설이다.



어찌됐든 그들은 다녀갔고 한차례 많은 희생자를 치룬 뒤 지구인들은 발빠르게 적응을 시작한다. 과학자와 사업가는 각자 나름의 목적으로 몫숨을 내걸고 구획물을 가져올 스토커를 고용하고 자본주의는 더욱 팽배해진다. '악마의 것은 악마에게 있어야' 한다는 누군가는 구획물을 사들여 다시 구역에 파묻기도 하고, 평생 스토커 일을 하며 늘 자신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이 조차도 소원을 들어준다는 금빛 구체 앞에 당도하자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무엇이 레드릭의 진정한 소원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애초에 진정한 '앎'은 가능한 것인가. 우리는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사실에 둘러싸여 자신을 맞추며 살아간다. 우리는 절대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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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갈래 길
래티샤 콜롱바니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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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아주 작은 거짓말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아이만은 똥구덩이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남편까지 버리고 떠나오는 길 위에서, 인종도 종교도 다른 이방인을 사랑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기에, 암에 걸렸음에도 승진기회를 날릴까 두려워 스스로를 옭아매 더욱 빈틈없이 움직이는 직장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계속해서 여성들은 안밖으로 장벽을 쌓는다. 그렇게 한번 시작된 변화는 점차 커다란 균열을 만들고 용기를 낸 여성들은 마침내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자신을 만나게 된다. 



인도인 스미타는 신분제로 인해 유일하게 허락된 일감인 맨손으로 사람들의 똥을 치우는 일을 하지만 그마저도 제대로된 임금은 꿈도 꾸지 못한다. 때때로 사람들이 바닥에 던져준 음식이 전부인, 들쥐와 다를바 없는 삶. 스미타는 짐승이 아닌 인간다운 삶을 바랐을 뿐이다.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인도의 현실은 끔찍하다. 지금도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서 자행되고 있을 그저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을 대면한 기분이었다. 반면 다른 형태의 생존문제를 가진 캐나다의 사라와 시칠리아의 줄리아가 있다. 그녀들은 억압과 차별이라는 사회의 장벽에 부딪힌다. 평소엔 별 문제 없이 살다가도 여성이라면 다들 겪게 되는 보이지 않는 문제들 말이다.



사라를 강탈하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사라를 존중하는 모습을 취했다. 세련된 폭력이다.

격식을 갖춘, 스리피스 정장에 향수까지 뿌린 폭력이었다. p.233



스미타는 친척의 집으로 향하던 도중 갑작스레 향로를 바꾼다. 비슈누 신을 만나기 위해 일종의 순례길에 오른 셈이다. 신을 만나는 과정에서도 돈이 든다. 어렵사리 티루파티 사원에 도착했지만 신을 만나는 길은 녹록치 않다. <세 갈래 길>의 원제는 'La tresse'. 세 가닥을 하나로 땋아 엮은 줄이나 끈을 뜻한다. 이런 스미타의 순례는 각기 다른 나라의 사라와 줄리아 모두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의 희망과 긍지로 탄생한다. 



'지금 오는 파도는 나를 삼키고 놓아주지 않을 거야.' p.159



절망의 끝이라도 선택지는 존재한다. 아무리 높고 거친 파도일지라도 언젠간 잦아들기 마련이니. 그대가 절망의 끝에서 일어서길. 평소와 다른 아주 사소한 선택, 작은 용기에서 이미 위대한 변화는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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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의 유령들 - 제2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황여정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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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을 읽다가 '칼 마르크스 희곡'이란 키워드를 검색해본 것이 나 혼자가 아님에 우스운 안도감이 들었다. 황여정 작가의 짙은 농담에 깜빡 속아 넘어간 것이다. 그만큼 <알제리의 유령들>은 무어라 정의 내리기 힘든 소설이다. 총 4부로 구성된 이야기는 각 부마다 다른 분위기를 띄는데 '알제리의 유령들'이란 희곡을 매개체로 서로 다른 인물들이 이어져있다. 방 한구석에 세계지도 모양새로 퍼져나가는 곰팡이처럼 모호함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계속해서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이루며 팽창해 나간다.



알제리의 유령들이 용기를 얻기 위해 서로의 이름을 지어준 것처럼 부모들은 서로의 자식에게 징과 율이란 이름을 주었다. 내가 계속 나라는 존재로 살 수 있는 것은 내가 가진 모든 기억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며, 진정한 자유는 나란 존재를 벗어나야 가능하다는 문장이 있다. 징의 어머니는 과거를 잊고 자유를 얻었다. 아이들에게 용기를 주었지만, 자신을 잃었기에 결코 알제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령들처럼 그들의 비극까지 함께 안겨주었다. 살아 있다는 건 무엇입니까. 죽지 않았다는 것이지. 존재한다는 것. 무언갈 계속 해나간다는 것. 어쩌면 그것으로 모든 것은 충분하다.



우주의 손가락이 여전히 나를 가리키고 있기는 했다. 네가 꿈을 이루지 못한 건 오로지 네 탓이다. 네가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네가 천재가 아니기 때문이며, 네가 운이 나쁜 탓이다. 현실 탓을 하지 말 것. 그래, 그것도 현실이겠지.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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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친 짐승 - 잃어버린 사랑 할란 엘리슨 걸작선 3
할란 엘리슨 지음, 신해경.이수현 옮김 / 아작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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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었다. 내 인내심이 한 뼘은 자란 것 같아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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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경기문학 3
배수아 지음 / 테오리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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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하고도 쓸쓸한 고독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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