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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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에 의지해야 하는 시간,
그의 섬세한 시선에 기대어 누리는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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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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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느 날과 같이 평범하던 일상에 난데없이 어머니의 부고가 날아들었다. 그것이 정확히 어제인지 오늘인지 알 길이 없는데 주변에서는 벌써 위로가 쏟아진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회사에 휴가를 내고 덜덜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두 시간을 달려 요양원에 도착한다. 그러나 이미 입관한 뒤여서 어머니의 얼굴은 볼 수 없다. 쉽게 오갈 수 있는 거리도 아니거니와 습관처럼 울던 어머니의 모습이 싫어 발길을 끊었는데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게 언제였더라. 원한다면 못을 빼내고 관 뚜껑을 열어주겠다고 하지만 구태여 그러지 않기로 한다. 네모난 관을 앞에 두고 낯선 노인들에 둘러싸여 밤을 지새웠다. 미처 풀지 못한 피로가 노곤한 몸 위로 무게를 더해간다. 곧이어 온 세상을 녹여버릴 듯 강렬한 태양이 어머니의 마지막 길은 밝혀오고, 숨통을 조이는 불쾌한 공기와 끈적하게 흐르는 땀을 닦아내는 시선 끝에는 녹아내리는 검은 아스팔트와 느리게 굴러가는 영구차, 새카만 상복처럼 온통 죽음의 색 뿐. 핑 도는 시야에 정신이 혼미해지지만 어디에도 도망칠 곳은 없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다시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온 뒤였지만 어디를 가도 따라붙는 날카로운 태양빛이 자꾸만 신경을 거스른다. 자문을 구해오는 절망의 얼굴들, 급속도로 사랑에 빠져버린 여인의 갈망하는 눈빛, 매일같이 오가는 무의미한 말들. 언제 시작된 건지 모를 미세한 균열이 소음을 일으키며 걷잡을 수 없이 멀리 뻗어나간다. 그러니까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몇 해 전 해설집 없는 얄따란 <이방인>을 읽었는데 2023년 올해의 첫 책으로 민음사에서 나온 뫼르소를 다시 만났다. 그때에는 뫼르소라는 인물이 가진 권태로움이 깊은 잔상으로 남았다면 이번에는 방대한 분량의 해설을 읽고 소설 전반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결국, 그때에나 지금이나 이 지독하게 고독한 인물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여 위의 내용은 2부 재판장에서 다뤄지는 핵심 사건을 좀 더 직관적으로 느껴지도록 내 맘대로 정리해본 것이다. 1부 내용은 무엇 하나 직언하지 않고 뫼르소의 시선을 따르거나 이웃들과의 일화를 통해 그의 심리를 거울처럼 대변하고, 2부에서는 법조인들과 증언자들의 입을 통해 해부되므로 그의 처지에서 대변하는 감정적 호소가 필요해보였다. 물론 그의 죄를 두둔하는 것은 아니고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가 보여준 심적변화에 공감이 되었는데, 다행히도 미국판 서문에서 알베르 카뮈는 뫼르소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뫼르소는 표류물과 같은 존재는 아니다. 그는 가난하고 가식이 없는 인간이며 한 군데도 어두운 구석을 남겨 놓지 않는 태양을 사랑한다. 그에게 일체의 감수성이 결여되어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p.142

 

 

  그는 꽤나 솔직하고 체면치레를 귀찮아한다. 우리가 흔히 사회에 자연스레 섞여들기 위해 쓰는 사회적 가면이란 게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생사가 판가름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발언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뻔히 예측됨에도 그는 진실을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렇다고 그가 무심한 것도 냉소적인 것도 아니다. 요양원으로 어머니를 모신 후 휑해진 빈자리를 견디지 못해 식탁을 제 방에 욱여넣은 채 좁은 방에서 생활하기를 택하는 냉혈한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재판장에서 자신을 두둔하는 증언자들에게 깊은 애틋함을 느끼고 사람들의 날카로운 눈빛에 슬퍼한다. 그에게는 그저 상실을 피부로 깨달을 시간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다름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에서 눈물 없는 슬픔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너무 천천히 가면 더위를 먹고 서두르면 땀이 식었을 때 추위를 느낀다고, 초반부 어느 등장인물이 뙤약볕 길을 걷게 될 뫼르소에게 조언하는데 이는 사실 어느 쪽을 택하건 고통이란 뜻이다. 애도에 적정 속도가 있었다면 그가 방아쇠를 당기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불리하게 돌아가는 재판장의 기류를 읽은 뫼르소는 사형선고를 직감하지만 곧이어 항소는 불필요한 서류를 늘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말이지 지독하게도 이성적인 그는 철저하게 현재에 머무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어머니의 죽음을 비롯해 이미 일어난 많은 일들이 그에게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기에 이러나저러나 상관 없는 일인 것인다. 순순히 죄를 인정하고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은 그에게 돌아온 것은 사형, 그리고 비웃음이었다. 2부를 아우르는 이러한 재판장의 분위기는 엉성한 연극처럼 한 편의 코메디가 따로 없지만 내가 웃을 수 없는 이유는 비단 소설 속의 일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소 행동거지가 바르고 착했다는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을 넘치게 알고 있다. 판사를 앞에 두고 죄를 뉘우치며 자기연민에 휩싸인 거짓눈물로 감형 받는 자들을 질리도록 접한다. 그러니까 이 재판장에서 행해지는 부조리는 울 수도 웃을 수도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는 괴이한 연극에 가깝다.

 


  유리된 현실에서 작은 감옥으로 무대가 바뀌고 경계가 사라진 하루하루를 보내며 현재를 강탈당한 뫼르소는 그제서야 과거를 돌아보고, 고요한 새벽시간 자신을 데리러 올 죽음에 귀 기울이며 미래를 내다본다. 그리고 자신을 아버지(신부)라 부르기를 요구하는 자에게 분노를 토해낸다. 시종일관 담담하던 그가 처음으로 감정을 터뜨리는 장면은 호기심에 사형집행을 구경하러 갔다가 구역질을 했다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의 일화가 연상되면서 역설적이게도 사형을 앞둔 자의 삶에 대한 애착을 보여준다. 원치 않았던 아버지(신부)와의 반강제적 대면 장면은 거부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그의 처지와 같아서, 뫼르소는 이내 모순적 세상에 응해주듯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기를 선택한다.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p.136 홀로 가면을 쓰지 않은 그는 이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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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토노트 2 (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 열린책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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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가 구현한 제법 그럴싸한 죽음 저 너머의 영계, 를 십 년만인 2022년 끝자락에 드디어 완독. 알라딘에서 산 첫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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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1 0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eBook] 황금숲 2 (완결) 황금숲 2
윤소리 지음 / 퀸즈셀렉션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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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다.. 천재만재.. 천상이야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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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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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 쥔 손에서 비죽 튀어나온 천 조각을 마술사가 현란한 손길로 잡아 뽑는다. 숨겨진 공간이랄 것도 없는데 끊임없이 뽑혀 나오는 색색의 천을 보고 있자니 그야말로 혼이 쏙 빠지는 기분이다. 충분히 믿을 수 없이 많은 양을 선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술사는 정말이지 끝을 모르고 계속해서 천을 뽑아댔다. 뽑고 또 뽑고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당신은 대체. 이것이 472 페이지,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도록 글자가 빼곡하게 들어찬 노벨문학상 수상작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고 난 한줄평이다. 분명 난 한 권을 읽었는데 열 권은 읽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바다를 찾아나선 이들이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황무지에 '마콘도' 라는 마을을 세우며 장장 100여년의 부엔디아 가문의 흥망성쇠가 시작된다. 워낙 외진 곳이라 다른 마을과의 교류가 어려워 가난했지만 평화로웠던 마을은 집시들의 등장으로 반전된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집안의 돈을 탈탈 털어 집시에게서 희귀한 물건들을 사들이며 일명 사업병에 걸린 듯한 모습을 보였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소설에서 특별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혼자 책상 앞에 앉아서 그 진귀한 물건으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아낸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를 보았을 때는 아하, 이것이 바로 마술적 리얼리즘이구나 싶었다. 여기서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현실과 환상, 사실과 허구가 초현실주의적 수법으로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형태를" 말하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처음의 단순명쾌했던 생각은 사라지고 큰 혼란만이 남았다. 이를테면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불면증이 마을 전체로 전염병처럼 퍼져나가는가 하면, 죽어서 유령이 되어도 나이를 먹어 늙어가는 등 초반부의 이야기는 우화를 읽는 듯한 기분으로 나름의 재미를 느꼈다.

 


문제는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앞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뒤로 왔다가, 같은 말만 되풀이 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그래서 이 사람이 누구 자식이었더라같은. 이마를 짚은 손과 찌푸린 미간은 펴질 생각을 않고 한숨과 함께 잠시 책을 덮으니 표지에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있었다. 아아, 이것은 경고였구나. 읽다보면 눈치를 채겠지만 이 책은 무한 돌림노래 같은 소설이다. 중심축을 이루는 인물이 딱히 없고 저마다 장대한 사연을 지닌, 범람하는 인물들의 홍수 속에 선조의 이름을 이리저리 조합해서 후손의 이름을 지어대는 통에 중도포기를 수없이 갈등하며 완결까지 겨우 도달했다. 그러니까,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호세 아르카디오와 아우렐리아노를 낳고 문란한 아우렐리아노는 전쟁통에 17명의 아우렐리아노를 낳고 계속해서 또다른 아우렐리아노들이 나오는데 이 끝도 없는 아우렐리아노는 돌림노래의 일부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아르카디오와 우르슬라 등등 다른 버전도 넉넉하다. 이렇게 세대간에 반복되는 이름처럼 부엔디아 가문의 삶도 비슷비슷한 모양새를 취한다. 친족 간에 싹트는 음습한 욕망, 이루어지지 못하고 재가 되어버린 애끓는 사랑,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시기와 질투, 뒤늦은 속죄, 전쟁과 대량학살 속에 자행되는 잔혹한 죽음들, 그리고 삶의 빛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좌절감, 허무, 고독까지. 다소 자극적인 소재들이 실제 콜롬비아 역사와 맞물려 진행되는데 무수한 인물들이 등장함에도 각각의 특징이 뚜렷하여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지는 문장표현은 정말 환상적이다. 누가 누군지 기억하려고 애쓰지만 않는다면 술술 읽어나가기에 좋은 소설이다.


 

"밤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는 대신에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도 역시 길가로 난 문 쪽으로 가서는 행진을 벌이는 곡마단을 구경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들었다. 그는 코끼리 머리 위에 앉아 있는 황금빛 옷을 입은 여자를 보았다. 그는 구슬퍼 보이는 단봉낙타를 보았다. 그는 네덜란드 여자처럼 옷을 차려입고 음악에 맞춰서 수프 국자로 튀김판을 두드리는 곰을 보았다. 그는 행렬의 끝에서 바퀴로 재주를 피우는 어릿광대들을 보았고,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이 다 지나간 다음에 다시 뒤에 남은 비참한 고독과 마주 섰으며, 밝고 넓은 길거리는 텅 비어 있었고, 하늘에는 개미들이 날아다녔고, 길에 남은 몇몇 구경꾼들은 미지의 세계를 기웃거렸다. 그러자 그는 곡마단 생각을 하면서 밤나무 밑으로 갔고 오줌을 누면서도 곡마단 생각만 하려고 했지만, 더 이상 기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어린 병아리처럼 머리를 두 어깨 사이에 처박고 이마를 밤나무에 기대고는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튿날 아침 11시에 쓰레기를 버리려고 뒷마당으로 나갔던 산타 소피아 드 라 삐에다드는 콘도르들이 날아 내려오는 것을 보고 웬일인가 하고 둘러보다가 밤나무 밑에서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을 발견했다."  p. 298-9

 

 

서른두 번의 전쟁을 치른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우연히 마을을 지나는 곡마단을 보고 어린 시절의 향수에 잠긴다. 일찍이 부인을 잃고 서른두 번의 실패와 사형을 선고받았던 그는 무수한 죽음의 위기에서도 살아남았지만 결국 고독 앞에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이 소설이 콜롬비아 역사와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수탈 행위를 폭로하는 소설이라는데 사실 나는 세계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이 긴 이야기에서 내가 읽어낸 것이 겨우 고독이었다. 그래서 그가 그 긴 세월을 떠돌다 집으로 돌아와 방에 틀어박혀 황금물고기를 만들고 다시 녹이기를 반복하는 모습이나,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수의를 짓고 푸르기를 반복하는 여인, 남편의 죽음 후 스스로를 가두고 집을 제 무덤 삼아 천천히 죽어가는 여인이나, 정부의 은폐로 존재하지 않는 대량학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가 아무도 찾지 않는 방에서 홀로 양피지를 해독하는 모습처럼 전반에 걸쳐 스며있는 고독의 면면이 자꾸만 숨통을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모두들 하나같이 치열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 끈이 끊어진 인형처럼 고독에 잠긴다. 나는 왜 사는 걸까. 꾹꾹 눌러둔 바보 같은 질문이 또다시 고개를 쳐든다. 겨우겨우 지루한 시간을 죽이고 틈틈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결국 한낱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삶을.

 

 

그냥 그런 것이다. 오지에 마을을 세우고 외지인들이 들어오고 체제와 종교가 생기고 집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마을이 번영하고 둑을 세워 배가 오가고 기찻길로 많은 것들이 드나들고, 그렇게 이룩한 모든 것들을 사방에서 호시탐탐 달려들어 갉아먹는 개미떼와 많은 것을 휩쓸어버린 대홍수, 빗발치는 총알에 쌓여가는 시체도 태어나고 자라 겨우 찰나를 살다가 죽음을 맞는 삶처럼 잔혹해보여도 그저 세월의 흐름일 뿐이겠지. 결국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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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6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