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의 아이 노벨라이즈 정신없이 읽다가 끝나버렸다. 원래 1장씩 소개하려고 했는데 종장이다. 그래도 삼백페이지 한 권을 다 읽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영화와 노벨라이즈 차이가 보인다.
영화에선 중년형사와 리젠트머리 청년형사가 우동? 점심식사하는 장면도 있고 이름도 있는데 책에서는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는다.
나기군의 변복 탈출 장면에서 초조했다는 묘사가 더 있다. 전여친의 연상우월감도.
영화연출에서만 표현된 것은 하늘 비행 부분인데 문학적 묘사는 책쪽이 더 좋다. 특히 호다카와 히나의 목소리. 예컨대 결말의 도오카(제발!) 라든지 비가 그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라든지 성우의 목소리로 생동감있게 말해진 대사가 좋다.
각기 캐릭터의 행동 이유나 내면 심리 묘사는 책이 더 좋은데 영화쪽이 더 설득력있고 생동감있다(당연) 책에서는 인물 내면 묘사하다가 상황이 바뀌거나 화자가 교체되거나 생각에서 깨어나는 식으로 진행의 리듬감이 만들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유럽현대어의 공통 조상 라틴어에 기반한 필담으로 스웨덴부터 스페인까지 지식인들이 교류해 과학학명을 촉발시킨 편지공화국이 있었던 것처럼 동아시아에서도 높은 수준의 고전실력을 담지한 한문식자층이 일본통신사와 청사절단 등을 통해 필담으로 교유했던 초기형태의 문예공화국이 있었다.

그런데 유럽형 라틴어권 편지공화국과 한자문화권의 문예공화국은 같지 않다. 라틴어의 기원이 된 로마와 그 부근 이탈리아의 경제와 인구규모는 유럽평균치인데 중국의 그것은 압도적이기에 유럽적 평등과 호혜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프랑스와 모나코, 스페인과 안도라의 관계가 대등하지 않은 것과 같다.

이보다 더 실용적인 문제는 언어다. 로마자, 즉 알파벳은 표음문자이고 유럽 각국이 공유하는 인명과 지명은 각기 사투리로 읽는 느낌이다. 피터, 피에르, 뾰트르, 페테르, 삐에로 다 같고, 조셉, 호세, 쥬세뻬, 죠제프 다 같고, 존, 쟝, 후안, 얀, 요안 다 같다.
히브리와 헬라어에 기반한 공통 어근이 각 언어의 음운체계 와 철자규칙 안에서 재형성된 것이고 언어권의 소리 풍경 안에서 나름의 정체성이 부여된 것이다. 내 몸 사이즈에 맞게 다듬은 가구가 내 물리적 공간 한 켠을 차지해 심리적 기억의 일부분이 된 것과 같다. 이런 사투리는 언어적 자기화로 각자의 목소리로 세계를 부르는 방식이다. 공통의 문화적 저장고에서 멜로디를 각자에게 편한 방식으로 변주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지명은 문화적 역사적 의미가 더 부여되어 인명보다는 복합적 층위가 있다. 어떤 지역의 이름은 소리만 바뀌는데 어떤 지역의 이름은 거의 다른 존재처럼 들린다. 왜냐하면 각 언어가 그 도시를 언제,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는가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런던 론드르 론드라 파리 빠히 파리지 로마 롬 등은 언어별 악센트 차이에 불과하고 의미 손실 없이 통용된다. 그런데 뮌셴, 뮈닠, 모나코 디 바비에라(수도원 공국)라든지, 쾰른, 콜로뉴, 콜로니아(아그립빠)라든지, 플로렌스, 피렌체라든지는 어떤 언어가 유럽문화를 지배할 때 널리 알려졌는지와도 관련이 있다. 제국어의 엑소님(외명체계)이다. 그러니 뮌헨을 모나코디바비에라라고 부른다면 지정학적 거리감이 줄어들며 타국의 도시를 자신의 문화적 헤게모니 안에 끌어들인다. 중국이 교토를 찡뚜(수도 도시), 도쿄를 똥찡(동쪽 수도)라고 불렀을 때 느끼는 감각이다.

지금은 영어의 헤게모니. 코펜하겐처럼 현지인은 아예 다르게 발음하는(그러니까 원어가 손실되고 영어식 독음이 더 보편적인) 곳도 있다. 꾀뻰하웅. 괴테스버그의 현지발음은 예테보리. 빈 비엔나 수준이 아니다.

데이빗, 다윗, 다비드처럼 어떤 건 사람 이름 같고, 어떤 건 성경 이름 같고, 어떤 건 미술 조각상 같은 것도 있다. 아랍에서는 다우드, 다부드라고 부르기도. 기표는 같은데 기의는 다르다. 그러니까 표면적으로는 같은 이름처럼 보여도 기호 체계 내부에서는 서로 다른 차이의 자리를 점유하고 있으니 동일 기표의 차연으로만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혹은 기표의 공통분모는 같은데 발화될 때마다 재구성된다고 생각할 수도.

어쨌든 유럽어는 인명이나 지명을 공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투리와 악센트 차이가 있을 뿐이다. 표기법이 다른 경우는 언제 어떤 문화가 지배적이었냐에 따라 어떤 이름은 이탈리아식으로, 어떤 이름은 프랑스-라틴어식으로, 어떤 이름은 영어식으로 알려졌기 때문인데 표음문자이기에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문제가 한자문화권에서는 쉽지 않다.

언뜻 한자를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한자는 로고그램, 표의문자이기에 읽는 방법이 제각각이다. 한국의 한자읽기 방식은 당음으로, 당나라 때 행정용어, 과거제도가 들어오며 삼국시대 읽기 방식을 밀어내고 고착이 되었고 일본은 불교용어에서는 양나라 때 오음도 당음과 함께 유지하고 있다(건립-곤류 등등). 대만의 객가어(하카)는 복건성의 남송 발음을 일부 유지하고 있고(시간-시준/시진) 현대중국어는 만주의 권설음을 더한 청나라식 방식에 홍콩의 광동어는 9성의 남방 발음이다.

라틴어처럼 기계적으로 같은 의미를 공유하고 있지도 않다. 한일중 학생, 각세-, 슈에셩은 한자는 같고 의미도 배우는 자로 같지만 베트남은 학생이 아니라 생원이라고 한다. 일본 여자 이름 아스카는 한자로 명일화인데 밍뤼화라고 읽기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마츠다 세이코는 송전 성자인데 송티엔 셩즈.. 소나무 밭 성인 자식이라고 뜻을 생각하면 어지럽다. 한국의 일산에 살면서 한자의미를 생각해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나의 산, 한 뫼. 대전의 한밭처럼 잘 알려지지 않았다. 대곡역 오오타니역.. 한국도 군산이 있고 일제시절 중요도시였고 일본에도 비슷한 지명이 있고 중국에도 비슷한 지명이 있지만 그런 곳은 많지 않다. 자국에는 없는 읽기방식이 허다하다. 그리고 지명에는 오랜 역사적 의미가 있어서 타문화권의 의미장에서는 파악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각국의 역사서보다 지리지가 더 번역이 어려울 거다
그러니 로마자처럼 표음문자도 아니고 이해방식, 읽기방식, 역사적 의미도 다른 한자문화권은 일견 한자를 사용하는 듯 해도 차이가 너무 크다.

그래서 유럽 라틴어기반 문예공화국과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문예공화국은 같지 않다. 유럽보다는 아랍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아랍어가 중국어처럼 오랜 기간 깊은 문화적 개념어를 제공한다. 페르시아어는 외래어인 아랍어 개념어 명사에 자국어 동사 접목하는게 한자에 히라가나기반 용언붙이는 일본어 같다. 예컨대
하다라는 의미의 카르담(كردن)과 する를 붙인다. فکر كردن (생각+하다思考+する), استفاده كردن(사용+하다使用+する)
이런 방식으로 아랍어 명사에 쇼담شدن(되다), 더쉬탐 داشتن (가지다), 부담 بودن (이다)붙이는게 일본어에서 한자에 になる (되다), がある (가지다)붙이는 것과 비슷

한국어와 베트남어의 짬뽕이 튀르키예어 같다. 서구화되었다는게 한국과 비슷하지만 튀르키예어의 알파벳 사용은 베트남어의 쯔놈과 비슷하다. 문자가 다르면 폰트도 다르고 인쇄방식도 다른데 알파벳 사용하면 서구국가와 문서호환이 가능하다. 학교 마드라사를 메드레세라고 하는 발음차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이지리아 티브 부족에게 햄릿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각자 해석이 달랐다는 인류학 부족지 연구

Laura Bohannan, Shakespeare in the Bush (1961)

에 대한 언급을 읽으니

아라야 라스자르므언숙 작가가 태국 북부 치앙마이 농촌 여자들에게 고흐, 르누아르 등 유럽 회화를 보여주고 그 대화를 레코딩한 현대 예술 영상 작품이 생각난다.

언제봤는지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안남..

브레인스토밍해보자면..

예술 작품 감상, 일반임과 엘리트의 차이, 사회적 구성물, 상호작용, 아비투스, 문화자본, 글로벌사우스, 콜로니얼 모더니티, 영미의 유산, 서구 미술사의 계보외 정전, 소근댐의 사운드 스케이프, 신체성, 원본과 복제, 아우라, 미술관의 공간성과 작품의 아우라, 전시기획과 관객경험에 대해 다양한 생각이 든다

https://post.moma.org/araya-rasdjarmrearnsooks-relational-tableaux/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5년 전에 나온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책 <분노하라>와 영화 <원배틀애프터어나더>
엮어 읽기 + 영화와 책

1. 영화 <원배틀애프터어나더>에서 그리는 체제저항정신

2. 영화의 서사적 풍경이 시사하는 바에 대한 미국의 평론 데이비드 브룩스의 두 번째 ‘격문‘
-검색하면 전문 확인 가능

3.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제도의 기능부전과 많은 예산을 갖고도 운용에 실패하는 이유에 대한 책 <왜 그들만 부자가 되는가> 인플레이션의 효과는 자산여부에 따라 차등적이라는 말

4.그리고 15년 전 책이 생각나서 공유
프랑스 레지스탕스 정신에 대한 책
<분노하라, 앙디녜부>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이며 ‘자유 프랑스’의 투쟁 동력이었던 우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호소한다. 레지스탕스의 유산과 그 이상(理想)들을 부디 되살려달라고, 전파하라고.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총대를 넘겨받으라. 분노하라!”고.

정치계·경제계·지성계의 책임자들과 사회 구성원 전체는 맡은 바 사명을 나 몰라라 해서도 안 되며, 우리 사회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국제 금융시장의 독재에 휘둘려서도 안 된다. - 본문 15쪽

아래는 출판사 책 소개

전직 레지스탕스 투사이자, 외교관을 지냈으며 퇴직 후에도 인권과 환경 문제 등에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 저자가 프랑스 사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담아낸 책이다. 저자는 전후 프랑스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 레지스탕스 정신이 반세기만에 무너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프랑스가 처한 여러 가지 문제에 ‘분노하라’고 일갈한다. 무관심이야 말로 최악의 태도이며 인권을 위해 힘써 싸워야 한다고 뜨겁게 호소한다.
이 책의 원서는 표지 포함 34쪽의 소책자다. 저자는 2009년 ‘레지스탕스의 발언’ 연례 모임에서 “젊은이들에게 ‘분노할 의무가 있다”는 내용의 즉흥 연설을 했고, 그 자리에 있던 출판편집자들이 깊은 감명을 받아 그 내용으로 책으로 출간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소미 영화기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쉼보르스카의 서평집 서문

책을 읽는 동안 아주 잠시 동안만이라도 순간이동한다, 는 말을
하룻밤사이에 갑자기 단풍이 들기 시작한 푸릇한 산을 보며 음미해 본다

채널예스기사
-할 일이 있을 땐 그것 빼고 모두 재밌게 느껴집니다. 작업 중 특히 재밌게 본 타인의 작업은 무엇인가요?

쉼보르스카의 서평집 『읽거나 말거나』를 뒤적거립니다. 일단 제목이 좋아요. 농담마저도 온화할 듯싶은 쉼보르스카의 어조로 ‘읽거나 말거나’ 라고 이름 붙여진 책이 마음을 풀어헤쳐 주는 감이 있어요.

주간지 작업은 아무래도 정확성과 속도, 부응해야 할 격무와의 싸움일 때가 많은데요. 활자 앞에서 털을 바짝 세운 채 기세 반 허세 반 부리다가 쉼보르스카 선생이 펼친 다종다양한 독서칼럼으로 돌아서면, 마음이 한결 순연해집니다.

또 글이며 영화며 아무것도 보기 싫어지는 날에도 이 책은 어쩐지 펼칠 수 있게 돼요. 아마도 최초에 저를 사로잡았던 탁월한 서문의 영향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 대목을 여기 옮겨둘게요.

“어떤 책을 끝까지 완독하지 않아도 되고, 또 원한다면 어떤 책은 뒤에서부터 거꾸로 읽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낄낄거리면서 웃을 수도 있고, 어떤 대목에서는 평생 동안 기억하게 될 문장을 발견하고는 갑자기 멈춰 설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몽테뉴가 주장한 것처럼 독서는 다른 어떤 놀이들도 제공하지 못하는 자유, 즉 남의 말을 마음껏 엿들을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해준다.

혹은 아주 잠시 동안만이지만 중생대 지층 속으로 순간 이동할 수도 있게 해준다...”

https://ch.yes24.com/Article/Details/815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