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S/F시즌이 되면 미술계는 새 전시, 키아프, 프리즈로 북적이고 F&B는 헤이즐넛, 밤, 햅쌀, 말차 등의 다크 브라운톤의 차분하고 단정하고 묵직한 분위기를 돋우며, 영화계는 베니스와 부국제로 들썩인다. (ㅂ으로 두음이 같지만 너무 먼 거리고 v는 한글에서 기능정지된 유성 순치 마찰음이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용언에 디귿과 비읍을 활용했다)

오늘자 더코리아타임즈에서도 펼친 두 면이 문화 소식으로 빼곡할 정도


그렇지만 나는 학창시절부터 늘 이 즈음 새학기 때 공간을 감싸는 요란한 소동에 발맞추기가 힘들었다. 이맘 때 약간 커뮤니케이션 기능이 도태되어 트렌드에 동기화가 잘 안된다. 유금을 잘 쓰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다. 남들이 바깥으로 다닐 때 내면에 침잠해 공부하는 날이 더 많았다. 옛날에는 선선한 천고마비의 계절이어서, 기후위기의 폭격을 맞은 지금은 연장된 폭염에 피신하느라. 두꺼운 양서가 잘 읽힌다. 일본 2007년 드라마 화려한 일족 10화 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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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미술관 프로젝트갤러리 대만전시에 다녀왔다. 7.27에 끝났다. 흥미로웠다.


입구쪽 주황색 조명과 함께 있는 에스더 린이쥔의 작품은 타이완 북부 양밍산과 따툰 화산지대의 광물냄새에서 착안해 유황을 의인화한 여성의 곤욕스러운 일상을 다루었다. 말하자면 비인간 무기물의 시각을 탐색한 것인데 광물사 자연사의 비중이 적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테마다.


니우쥔취앙은 사후세계, DMZ, 비교문화(김치국물 묻은 티셔츠)의 모티브를 담당하고 있다. 지능은 2세지만 몸은 26세인 인도남성 이빨 및 눈흰자 클로즈업 영상, <장생>을 통해 절대시간의 자장 속에 있는 치아의 영속성에 대해 탐구한다.


전시공간 가장 안쪽에 있는 왕융안의 작품은 피부를 통한 촉각적 경험이 구성하는 몸과 정체성에 대한 아이디어로, 촉각인지 매커니즘 연작을 통해 인공지능과 생명정치라는 첨예한 두 테마를 융합했다.


AI는 어떤 피부를 가졌을까요? 라는 질문을 던지며 두뇌중심이 아닌 촉감중심 신경과학적 사고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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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뉴요커 정말 흥미로운 도서 리뷰


케이트 라일리의 데뷔소설 Ruth에 대한 맛깔나는 뉴요커풍 리뷰다.


1960년대 미시간 재세례파 공동체의 일상적이고 소소한 삶을 그려내는 이 소설은 갈등이나 드라마틱한 전개보다는 맛있는 디저트를 위트있고 화려한 문체로 묘사한다는 데 특징이 있다.


달콤한 음식과 정돈된 규율이라는 신앙 공동체의 양면적 세계를 정교하게 포착하면서 그 이면의 억압, 긴장이나 정치적 무게는 빵 속 크림처럼 감추어 두었기에 웨스 앤더스 같은 스타일의 미학을 추구했다고도 볼 수 있다. 


스타일과 질서와 매혹을 탐구하는 작품을 읽으며 다루지 않은 더 깊은 진실을 갈망하게 되는 셈. 


한국 사이비를 다룬 넷플 다큐 <나는 생존자다>나 미국 보수 기독교를 다룬 <더 패밀리>, 영화 <데어윌비블러드>와 페어링하기에 좋아보인다.


뉴요커는 문단 별로 줄을 치면서 읽고 싶을 정도로 스타일리쉬한 영어 표현이 많은데 예를 들어


insular religious community

섬 같은 (폐쇄적) 종교 공동체


irresistible pleasure of making up rules

규칙을 만드는 저항 불가능한 즐거움(규칙 제정의 기묘한 매력)


irreverent longings

불경한 동경(외부 세계에 대한 금기된 욕망)


at the behest of

~의 명령에 따라(교회 지시에 의해)


at the drop of a hat

모자를 떨어뜨리자마자(즉시, 갑자기)


inflexible vision of domesticity

융통성 없는 (경직된 가부장적) 가정상


humble escapades

소박한 소동들


effete description

기운 빠진 묘사


apotheosis of twee

귀여움의 신격화(극치)


petit-four politics

쁘티푸흐 정치(디저트 같은 소규모 정치)


shamefaced pleadings

부끄러운 호소


fleeting ancillary characters

잠깐 나타나는 보조 인물들


like ducklings marching in lockstep

오리 새끼들이 발맞춰 행진하는 것처럼 질서 정연한 움직임


풍자하는 표현 두 가지

1) hot cross bun marathon

핫 크로스 번 마라톤(공동체 이벤트인 과장된 음식행사를 풍자)


2) pies of breathtaking uniformity

숨 막힐 정도로 균일한 파이(지나친 규격화 풍자)



그리고 두운alliteration활용하는 좋은 표현 두 가지

1) familiarity without favoritism

친밀하되 편애는 없는 상태(공동체적 균형 추구)


2) This finicky, formal style coats every page of the novel with an impressively even surface

이 까다롭고 격식을 갖춘 문체가 소설의 모든 페이지를 놀라울 만큼 균질한 표면으로 덮는다


https://www.newyorker.com/books/under-review/pictures-of-life-on-a-christian-comm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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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카토르 독법이 원래 대륙 사이즈를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며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세계지도 바르게 하기 운동이 확산중이다


실제로 아프리카 대륙이 큰 것은 맞고

기존 세계지도에선 북반구 캐나다, 러시아, 특히 그린란드가 과하게 강조된 것은 사실이다.

아래 사진만 봐도 스칸디나비아가 얼마나 쪼그라들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서양중심에서 아프리카중심으로 체스판의 중심을 이동하고 싶은 것이라며 다른 나라들은 굳이 관심을 두지 않을테니

이것은 다양성을 표방하는 모든 운동의 문제점이다


주류집단이 대표적이고 보편적이지 않으며 그 집단도 전체의 한 부분집합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혁명을 일으켜 그 중심성을 옮겨오고 싶다면 과연 비주류집단 중 누가 그 주류를 차지할 것인가?


즉, 기존의 그 왕좌는 수많은 가신 중 누가 차지할 것인가?


기존에 백인 남성 서유럽미국 중심으로 짜여져있는 주류 구도를 글로벌 사우스로 옮긴다고 차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구조의 문제다


https://correctthemap.org/


https://equal-earth.com/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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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oreatimes.co.kr/lifestyle/arts-theater/20250828/frieze-2025-kim-tschang-yeul-the-painter-who-made-fleeting-waterdrops-eternal


더코리아타임즈 주말판 믿음직한 박한솔 기자의 국현미 김창열전 리뷰 기사다


우수한 영문 저널리즘에서 그러하듯이 핵심 단어인 물방울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수없이 반복하며 단어의 외연을 풍부하게 더했다. 예를 들어


A drop of water → 물 한 방울

fleeting beads → 덧없는 구슬들 / 순간적인 알갱이들

the glistening droplets → 반짝이는 물방울

they perched weightlessly~ → 물방울은 무게 없이 얹히고

slide downward~forever suspended in motion → 아래로 미끄러지다 멈춘 방울

a single bead of water → 단 하나의 물의 구슬

a single, suspended tear-like bead of water → 공중에 매달린 눈물 같은 단 하나의 물의 구슬

pearl-like drops → 진주 같은 방울들

his ephemeral beads → 그의 덧없는 구슬들


그리고 마지막 문단에서


a lifetime spent chasing these transient forms 이 덧없는 형태를 쫓았던 인생

이런 다양하고 풍부한 동의표현이 글에 원어민적 감각을 더한다.



다음은 채선생에게 좋은 문단만 일부 복붙해서 번역해잘라고 부탁한 결과다.


첫 네 문단 번역


유리 위를 미끄러져 내려가고, 땅속으로 스며들며, 공기 속으로 증발해 사라지는 물 한 방울. 김창열(1929–2021)은 이 덧없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구슬들을 붙잡아 영원으로 만들었다.


반세기 동안 그는 수도승 같은 헌신으로 반짝이는 물방울을 되풀이해 그렸다. 때로는 갓 떨어진 듯 가볍게 캔버스 위에 얹혀 있었고, 때로는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다 영원히 멈춘 것처럼 보였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극사실적 환영의 성취를 넘어선다. 김창열에게 물방울은 전쟁과 유랑의 말해지지 않은 상처의 상징이었다. 그 여린 곡선 안에는 상실의 고통과 더불어 위안의 가능성, 지워짐과 초월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물방울의 힘이 아무리 강렬하다 하더라도, 그것만을 응시하는 것은 그 뒤에 있는 사람과 그가 자신의 상징적 모티프로 나아가게 된 길고 우회적인 여정을 가려버릴 위험이 있다.


중략


그 후 10여 년 동안, 그는 자신의 고통과 절망을 음울한 앵포르멜 추상에 쏟아부었다. 다수가 「의식(Rite)」이라는 제목을 공유하는 이 초기의 어두운 색조 작품들은 거칠게 내리친 흔적과 원형의 압흔을 담고 있다. 그것들은 마치 탱크의 무한궤도와 총탄이 살을 찢는 흔적을 불러일으킨다.


중략


돈도 거의 없고 인정을 받을 뚜렷한 길도 없었던 그는 점차 새로운 양식으로 기울었다. 밝고 유동적인 형상을 불러내며 기묘한 생명력으로 고동치는 듯한 형태들 — 살아 있는 창자가 쏟아져 나오는 것 같은 형상들이었다. 그는 그것을 “창자 그림(intestine art)”이라 불렀다.


중략


그 고요한 고독 속에서 비전이 찾아왔다. 어느 새벽, 밤새 작업을 마친 뒤 그는 캔버스에 매달려 있던 단 하나의 물방울이 여명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 덧없는 광경에서 탄생한 것이 「밤의 사건(Evenement de la nuit)」(1972) — 캔버스 위에 매달린 눈물 같은 한 방울의 물이었다.


오랫동안 그의 최초의 물방울 그림으로 평가받아온 이 작품은, 서울 회고전에서 새롭게 맥락화된다. 그곳에서는 한 해 전 이미 구슬 같은 방울들이 빛나고 있던 두 점의 미공개 캔버스가 함께 전시되고있다.


중략


그는 대마 캔버스, 신문지, 그리고 한국의 전통닥나무 한지를 비롯한 다양한 지지체 위에 다시금 그 덧없는 구슬들을 불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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