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저녁에는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조금씩 느껴진다

한낮 폭염의 폭격에 풀이 죽은 아스팔트에서는 아직 달궈진 열기가 느껴지지만

바람만큼은 저 멀리 북쪽 저기압 기단에서 불어 온 듯한 아련한 가을바람이다

가을에는 항상 이 시가 생각난다

2006년에 처음 접하고 종종 다시 찾아 감상하곤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PHxAodm1EF8


풍경의 깊이/김사인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 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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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2023년 겨울호는 특히 좋았다.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 김건형의 인트로는 지금 읽어봐도 시의성 있는 명문이다.

문학으로 구미에 유학을 가서 박사를 한다는 것은 이런 글을 외국어로 읽는 것과 같을 테다


비유해보자


케이팝과 드라마로 한국어를 접하기 시작해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대학의 한국어과에 진학한 일본, 베트남 등지의 학생이 중간에 교환학생으로 서울에 와서 살아도 보고 토픽6급도 딴 후 우수한 성적으로 학부를 졸업하고 나서 한국에 있는 국문과에서 석박사를 하겠다고, 마침 문학을 공부하겠다고 온다면?


이런 글을 읽어야할 거다. 이제 이건 언어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평생 글을 읽어 온 자들과 씨름하는 지성의 영역이다. 불문학으로 독일문학으로 영문학으로 그 나라에 가서 현지인과 이런 문어체의 글을 소화하면서 살아야한다.


이 호에 실린 전기화 경기대 교수이자 평론가의 글도 좋았다. 그녀는 이 글로 올해 신동엽 평론부문상을 받았다. 한 문단을 지긋이 읽는 자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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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지리 - 다섯 가지 키워드로 보는 초예측 지정학
최준영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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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선 신용산역 2번출구와 역사로 연결되어 폭염과 폭우에도 편하게 갈 수 있는 APMA. 그 안의 가고시안 팝업이 세 번째 전시를 열었다. 마크 브래드포드 오프닝 때 갔을 때 안했어서 따로 지나가다가 들렀다. 1분만에 보고 나올정도로 특별한 전시는 아니지만 작가의 선명한 스타일이 눈에 들어온다


현대사회의 일상성과 관계성을 벽을 통해 유머스럽게 표현한 데릭 아담스가 첫 번째, 침침한 풍경과 내면을 건물 외벽을 통해 드러낸 해롤드 앵커트가 두 번째 그리고 무라카미 다카시가 세 번째다. 첫 두 명은 한국 아트신에 상당히 생소한 인물이지만 무라카미 다카시는 특이한 캐릭터와 기행과,(구)뉴진스 관심, 지원과 하니의 마츠다 세이코 푸른 산호초 콘서트 영상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요즘은 전시에 가서 사진 안 찍는다. 공식사진이 더 좋기도 하고 워낙 다른 훌륭한 전시러버들이 많이 찍어 올리는데다가, 촬영이 고요한 감상과 진중한 몰입을 방해해서다. 폰 망가져서 많이 못 찍기에 겸사겸사 디톡스다


개인적으로 나는 작년 교토교세라에서 무라카미 다카시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스레드에서 그의 예술기업론 원서를 읽길래 사서 봤다. 여기서 일본어의 기업은 어감상 창업론, 처세술, 성공학의 의미다.


오늘 수요일 더코리아타임즈에서 무라카미의 일본-서양, 고급-대중, 전통-현대, 원본-복제를 모두 융합하는 방법론인 수퍼플랫 철학을 언급하는 인터뷰를 읽었다.


20년 전도 전(2005년)에 슈퍼플랫 제안, 슈퍼플랫을 곳곳에 언급하는 예술기업론은 헤이세이 30년 초판발행(2018년)이다.

퍼스널 브랜딩 하나는 확실하고 그 뚝심은 인정할만하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당대의 비평언어가 소화할 수 있도록 전개해내는 것이 훌륭하다.


뒤샹을 효시로, 데미안 허스트가 공고히 한 예술의 한 트렌드는 작품은 공장과 어시에게 외주를 주고 자신은 중소기업 사장처럼 시스템관리체계를 만들고 자신이 지속적으로 소비될 수 있도록 마케팅하며 미학자이자 선언자로서 언어를 조탁하는 것이다. 무라카미는 성공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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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aladin.co.kr/797104119/16717761


이어서


귀멸의 칼날의 매력은 작화나 스토리, 캐릭터, 특이한 다이쇼 시대라는 여러 요소에 더해 한자음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다음 사진은 15, 16,17권의 같은 페이지를 한국어 번역본과 일본어 원서를 비교한 것이다.


암주는 불교승려를 모티프로 한 캐릭터로 15권 합동강화훈련에서 암주의 차가운 폭포수를 견디는 훈련을 받는 대원들은 불교용어인 여시아문, 일시부재, 기수급고독원 등의 한자를 마치 주문처럼 외운다. 기수급고독원은 석가모니 붓다가 불법을 펼친 곳으로 기원정사라고도 불린다. 이 음은 기쥬깃 고도쿠온이다. 정원(테-엔) 공원(코-엔)할 때 원이 일반적인 원이 아니라 온으로 읽힌다. 건립이 켄리츠가 아니라 콘류로 읽히는 것과 같다.


일본은 7세기 양조 때의 한자음(오음)이 그대로 불교에 남아있고, 한음과 당음이 학술, 행정용어에 들어와서 한자음을 읽는 방식이 여러개다. 마치 복잡한 우메다역처럼 이미 굳어진 발음은 존중하고 예외로 허용하는 것이다.

한반도도 삼국시대 때는


오음이 있었겠으나 고려시대를 거치며 하나로 통일했다. 이렇게 보면 일본은 기존의 것을 무너뜨리지 않고 존중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한편 그로 인한 시스템적 불편함은 감수하려는 것이 보인다. 한국은 하나의 프레임이 정해지면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마치 수도 서울로 중앙집권화는 것과 비슷해보인다.


당나라는 참 글로벌했다. 당나라가 체계화한 수도계획, 행정조직, 학술용어, 사회제도 등과 함께 무역루트로 인해 문화가 확산되어 당나라식 한자 읽기 방식이 주변국에 퍼졌다. 마치 로마시대를 방불케한다. 지금도 유럽은 로마가 만들어놓은 도로와 도시계획 속에 산다. 영국의 맨체스터 같이 체스터가 들어가는 지명이 로마군대의 주둔지였다는 것과 같다.


한편 베트남의 한자음은 남방계 중국어다. 그래서 한일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학생은 생원이고 학급, 공안 등등 한자계통 어휘가 있지만 한월음이라 다소 생소한 발음이 섞여있다.


어쨌든 귀칼로 돌아가서 일본의 한자음독을 생각해보자. 필살기 외칠 때 


일본한자음독을 발음하고 작화에 한자를 표시하는 그 의미와 파급력은 한국과 맥락이 다르다. 번역이 되는 순간 전혀 다른 문화지형에서 전혀 다른 의미장에서 파악된다.


한글로 표시되는 순간 그 의미가 다소 약화되고 필살기의 살상력이 다운그레이드 되는 느낌이다. 한글은 과학적이어서 가독성이 좋으나 한글 자체에서 표의문자가 지닌 반도체 웨이퍼같은 높은 지적해상도를 느낄 수 없다. 한자는 읽을 때 약간 멈칫하고 자세히 보게 된다.


비유하면 해리포터에서 라틴어 주문을 할 때와 비슷하다. 단위면적당 해상도가 다르게 느껴진다. 라틴어로 주문을 쏘아야 뭔가 살상력도 강하게 느껴진다.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천풍성시라고 했을 때 느낌이 다른 것과 비슷하다.


일본인은 처음에 쉬운 히라가나로 입말로 대화로 말을 배우다가 한자를 나중에 배운다. 한국인은 삼각관계 산카쿠칸케 같이 대충 한글로 아는 한자음과 일본한자음독이 비슷하다는 데 동질성을 느낄 것이지만 일본인은 훈독이 더 먼저다 



팔다=우루라는 구어를 귀로 먼저 듣고 売る, 즉 팔 매(매각의 매)라는 한자를 나중에 배워서 음성에 문자를 찍어넣는다는 말이다. 토토노에루 같은 조금 어려운 한자는 (정돈의 정) 整える 는 한자와 음성을 동시에 배우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한자음독으로 구성된 한자음을 들을 때 대화할 대 쓰는 구어체와 다른 문어체적인 느낌이 들 수밖에 없고 그 자체에서 오는 음성의 힘과 한자의 시각적 임팩트가이 합쳐져서 필살기의 힘이 강하게 느껴진다.


아카시의 필살기 작골염양 샷코츠엔요는 뼈를 태울 듯 강한 불의 양기라는 뜻이고 이 한자와 음독 자체에서 느껴지는 음성과 글자의 파워가 있다.


우리가 <외계+인>이나 전대물에서 필살기를 외칠 때 약간 짜치는 느낌을 받는 이유는 이런 맥락 차이에서 발생한다. 한글은 발음만 있는 느낌이기 때문. 우리는 한자를 뜯어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어는 음성을 요미가나로 한자 옆에다가 달아두었다)


키신야에신 귀심팔중심이라는 아카자의 필살기는 과거 맥락이 있다 


귀심팔중심이 도대체 뭐야? 하겠다. 우리는 이 말이 음성으로도 한자로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해가 안되고 그냥 넘어간다.


뜻은 귀심은 오니의 마음, 팔중은 불꽃놀이에서 폭죽이 여덟겹으로 퍼지는 것을 나타내는 축제용어다.

그러니 뜻은 오니인 아카자의 마음이 불꽃놀이 여덟겹 터지는 마음이라는 것이고, 광역기로서 그 화려함과 위용을 나타낸다.


그리고 회상신에서 아카자가 사랑했던 그녀와 데이트를 갔을 때 본 불꽃놀이로 필살기용어를 만들었다 생각하면 맥락이 이해가 된다. 이를 한국어로 변환하면서 오니의 마음은 불꽃놀이 퍼지듯 번쩍번쩍! 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귀심-팔중심이라고 해봤자 맥락이 안 와닿는다. 


토미오카 기유의 물의 호흡 코가라시 오로시木枯らし颪도 특별하다. 코가라시는 나무 목에 마를 고로, 늦가을-초겨울에 불어 나무를 말려죽이는 차갑고 건조한 바람을 말한다. 오호츠크해 기단에서 내려오는 푄현상으로 인해 건조해진 바람이다. 일본 하이쿠에서 많이 쓰여는 문구로 ㄹㅅ과 같은 초성으로 인해 시적 전통이 강하게 느껴진다.


아라시는 광풍이고 오로시는 산에서 내려오는 강한 산바람이다. 일본특유한자다.


아래하가 바람풍 위에 얹혀있다.颪


(우리도 '돌' 이라는 한국특유한자가 있다. 정말 무기물로 돌이 아니라 사람이름에 붙이는 돌이기 때문에 돌 석에 ㄹ 받침 대신 새 을을 붙여서 만들었다. 乭 이두 전통이다.)


토미오카 기유의 필살기 코가라시 오로시는 그의 차가운 성격과 매칭이 된다. 이를 초겨울 차가운 재넘이라고 했을 때 나름 하이쿠 전통을 살려보려고 했으나 그 한자의 파워까지는 살리지 못했다.


들이친 파도 우치시오는 그 필살기의 시각적 효과에서 방파제를 넘어 들이치는 쓰나미를 연상케한다. 한자 자체는 타격하는 물보라라는 의미이다. 물이 타격한다는 점에서 타격기로서 적절한 이름이다.


암주의 양나라 한자음 오음 불교용어

아카시의 필살기 불꽃놀이 회상신

토미오카 기유의 성격과 같은 필살기


만 살펴보았으나

이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한국어 번역본에서 느껴지지 않고 원서에서만 느껴지는 감동인데 이를 이해하는게 공부의 재미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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