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1에 다녀왔다. 어제 그리스작가 소피아 미촐라의 전시가 오픈했다


이름이 어마무시한 아리스토텔레스대학교 테살로니키 시각예술학부를 졸업하고 영국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아리스토텔레스대학교라니, 비슷한 느낌으로 우리에게 단군대학교 박혁거세대학교 이황대학교라는 이름이 가능할까?


아스트로푸들, 즉 우주댕댕이라는 제목의 전시로 알루미늄호일로 감싼 메탈릭한 느낌의 벽에 회화를 전시한 것이 특징이다. 작가는 여성의 몸을 테마로 신화조각과 일본애니의 작화를 합쳤다. 지난 신민작가의 전시는 털에 대한 식당의 혐오를 주제로 여성노동자의 위생과 강박을 보여주는, 철사로 털을 표현한 거대 설치작품이었다. P21는 작은 공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작가의 메인주제 하나에 집중해 전시함으로써 유능한 저격수마냥 깔끔하게 원샷원킬로 승부한다.


80m 떨어진 윗쪽 2관에서는 알몸으로 특정기구 밑에서 담배를 태우는 윌리엄 켄트리지풍 5분 애니가 상영되고 있다. 점화에서 끽연까지 과정 묘사가 자세하다.


https://p21.kr/artist/Sofia_Mitsola/b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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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G한남에 다녀왔다



호랑이털같은 타이거 오렌지, 붉은기가 감도는 중후한 버밀리언계열 주황색, 격렬한 붓질과 함께 발광하는 금속성 광택의 크로미 옐로우 같은 강렬한 색채가 표면에서 열정적으로 빛나면서 아래에 잔잔하게 깔린다. 마치 새벽 1시 즈음 위스키 바에서 재즈와 함께 나와 공간이 습합된 순간을 포착한 듯하다. 역삼각형 와인잔과 검은 포도주병 그리고 배경의 흐릿한 형상들은 인상주의적 재현에 그치지 않고 인생의 길을 잃고 흔들리는 감각자체로 마음에 둥실 떠오른다. 묘사의 도구가 아니라 기억의 잔광처럼 색감이 꿈틀대며 화면 위에서 파동을 만든다.


화폭이 시각적 재즈를 연주한다. 규칙 없는 붓놀림은 즉흥적이지만 어딘가 정밀하며 미처 말로 붙잡지 못한 불안과 상실의 음영들을 담아낸다. 유리잔은 투명함을 잃고 빛의 군도로 뿔뿔이 갈라진다. 사물은 존재하지만 실체는 부유한다


오지은 작가의 너의 다정함을 내게, 라는 이 시각적 에세이는 와인색의 향기 속에 우리의 시선을 잠시 멈춰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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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프린스턴대, 예일대 대학출판사 책 떨이세일할 때 산 책인데 생각난 김에 다시 읽어봅니다.


2차대전때 미국정부에 고용되어 전략사무국(OSS)에 제출한 마르쿠제, 노이만, 키르하이머 등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구성원의 업무보고서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상적 흐름 속에 위치시키고 재구성해보는 책입니다. 보고서 번역 편집본의 1차 사료이기 때문에 읽으셨을 가능성이 없지만, 2차 해석서를 쓸 때는 반드시 참조해야하는 책이죠. 역사가에게 있서 1차사료는 카페의 커피머신 같은 필수재, 공장의 기계같은 설비시설같은 역할입니다.


전쟁 중 수집된 정보분석을 하는 과정이 나치박해를 피해 망명한 독일계 유대인 학자 세 명에게 사상의 형성과 발전의 불쏘씨개 역할을 해주었다는 게 제 인상입니다. 특히 1940년대 마르쿠제의 나치 독일에 대한 분석과 이해를 읽으면 그가 이후 1960년대에 급진적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되는 과정에서 중심테마로 자리잡게 될 문제를 어떻게 선취하고 있었는지를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하버마스나 니클라스 루만 같은 이후 세대의 글에서 보이는 사회시스템 전체에 대한 구조적, 메타인지적 견해의 (지금도 별로 바뀌지 않은) 초창기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방법론과 이론이 당면한 구체적 현실분석(도표 등)과 결합되어 히틀러의 제3제국에서 자본, 기술, 군국주의, 정치, 문화, 반유대주의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나치즘을 하나의 사회경제적 체제로서 상세히 분석하고 나치즘에서 반유대주의가 수행하는 역할을 규명하며 전후 독일을 사회주의적 경제체제를 갖춘 민주주의 정치 체제로 재건하기 위한 일관된 구상을 만듭니다.


마르쿠제 등의 일원이 독일 파시즘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한 대응방안을 구체적인 제시한 이 로메테리얼들은 프랑크푸르트학파 비판이론에 대한 흥미로운 창을 열어주죠.


비단 대전중 뿐 아니라 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예컨대 탈나치화와 뉘른베르크 재판준비를 포함한 전후 연합군 정책 수립에 기여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마르쿠제와 다른 두 명의 행보가 달랐고 달랐기에 다른 독해와 평가가 가능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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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아카데미아에서 얻은 학술지 리뷰 글을 챗지피티로 요약한 버전

From Critical Theory to Psychological Warfare:

How Frankfurt School Intellectuals

Fought the Nazi Enemy

Ulrich Plass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정보기관을 재편하고 확장했다. 도노반(William J. Donovan)의 주도로 1942년 6월에 전략정보국(OSS)이 설립되었고, R&A(Research and Analysis) 부서가 중심 역할을 맡았다. 이 부서는 유럽 출신 지식인들을 포함한 학자들을 모집해 학제 간 연구를 수행했으며, 이는 전쟁 이후 미국 사회과학의 기반이 되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네우만(Franz Neumann), 마르쿠제(Herbert Marcuse), 키르히하이머(Otto Kirchheimer)는 R&A의 중부유럽 섹션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특히 네우만은 1943년부터 부서의 부책임자로서 15명 정도의 학자들과 함께 나치 점령 하 유럽의 상황 분석과 전후 재건 정책을 제안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세 명의 학자는 독일 좌파의 붕괴 이후 미국 정보기관에서 반파시즘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들의 워싱턴 근무는 프랑크푸르트 연구소의 재정 악화와 해고 등의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마르쿠제는 원래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학문적 연구를 하길 원했으나, 정보국으로부터의 채용 요청으로 인해 입사했고, 심리전 관련 문서를 작성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Laudani의 책에는 나치 독일의 패배, 반체제 가능성, 탈나치화 전략에 관한 보고서들이 포함돼 있다. 네우만과 키르히하이머는 나치 인사의 해임과 독일 행정 시스템의 개혁을 주장했으나, 일부 낙관적인 전망은 현실을 과소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마르쿠제는 독일 내부에 민주주의적 저항이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공산주의 지하 조직의 활약에 주목했다.



전후 나치 지도자들에 대한 법적 책임 문제에서 키르히하이머와 헤르츠는 구체적인 명령 없이도 정책 실행에 관여한 인물들에게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는 새로운 책임 개념을 제안했다. 이는 나치 유대인 학살과 관련된 구조적 책임을 규명하려는 시도로, 나치 정책에 기여한 모든 관리에게 책임을 묻자는 주장이었다.



마르쿠제는 22만 명 이상의 나치 관련자 명단을 제공했으나, 탈나치화가 실패하고 미국의 주적이 소련으로 바뀌자 많은 프랑크푸르트 학자들은 정책에 영향을 주지 못한 현실에 실망했다. 헤르츠는 전후의 무력감을 회고하며, 미국 정부 내 이민 지식인의 영향력이 미미했다고 밝혔다.



전후 마르쿠제는 국무부 정보연구국에서 냉전기 공산주의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는 미국이 냉철한 사실 중심의 심리전을 통해 나치의 냉소적 이데올로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상적 가치보다 구체적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는 그의 입장은 기술적 합리성을 이용해 그 자체를 무너뜨리는 전략이었다.



OSS는 보고서에서 개인의 표현을 억제하고 집단 저작물로 다뤘지만, Laudani는 이 책에서 각 보고서의 개별 저자성을 복원했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단일한 학파처럼 묘사되는 것은 오해이며, 실제로는 다양한 이론을 가진 개인들의 느슨한 네트워크였다. 보고서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정식 학문 성과로 제시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해석일 수 있다.





다음은 링크에 있는 리뷰글을 챗 지피티로 요약한 버전


https://www.historicalmaterialism.org/the-frankfurt-school-against-the-nazis/


1. ‘New Left Guru’ with a ‘Scandalous’ Past?

1960년대 후반 허버트 마르쿠제는 신좌파와 반문화의 ‘구루’, 학생운동의 ‘아버지’로 간주되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다른 이론가들과 달리 자발적이고 반권위적인 투쟁을 지지했다. 그의 저서 『에로스와 문명』(1955)과 『일차원적 인간』(1964)은 성적 자유, 해방 문화, 개인과 사회의 총체적 해방, 억압 체제에 대한 ‘위대한 거부’ 등을 강조하며 당시 젊은 급진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2. 반면에 그에 대한 평가에는 분열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를 존경했지만, 어떤 이들은 그를 ‘수정주의자’, ‘관념론자’, ‘엘리트주의자’로 비판했다. 급변하는 1960년대 급진주의 환경에서 일부는 그를 CIA 요원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3. 이러한 CIA 관련 의혹은 처음에 미국의 마오주의 단체인 진보노동당(PLP)에 의해 제기되었고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1969년 로마에서의 강연에서 다니엘 콘-벤디트는 공개적으로 마르쿠제에게 CIA와의 관계를 캐물으며 도발했다.


4. 마르쿠제는 자신이 CIA 요원이라는 주장이 거짓이며 명예훼손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오히려 CIA와 미국 외교정책의 비판자였으며, 1950년대 초부터 FBI의 감시 대상이었고, 1960년대 중반부터 그 감시는 더욱 심화되었다.


5. 그러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정부 소속으로 일한 경력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OSS(전략정보국)의 정치 분석가로 활동했으며, 1944년 나치당 해산 선언문 초안을 작성했다. 이는 1945년 5월에 발표된 공식 선언의 기초가 되었다.


6. 마르쿠제는 미국의 반히틀러 전쟁 참여를 반파시즘 투쟁으로 보았고, OSS에서의 활동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전쟁 후 OSS는 1945년 폐지되었고, 1947년에 냉전을 위해 CIA가 창설되었으며, 마르쿠제는 CIA에서 일한 적이 없었다.


7. A Place to Fight Fascism

마르쿠제의 전쟁 중 OSS 근무 경력을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미국의 반파시즘 정보기관 구성과 맥락이 중요하다. 1942년부터 미국은 OSS를 통해 체계적인 정보 분석을 시작했고, 이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와의 연관 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


8. 프란츠 노이만은 OSS에 먼저 참여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유대계 망명자였다.

그는 SPD 소속 법률 고문이자 런던과 뉴욕에서 학문 활동을 이어가다 1942년 OSS에 합류했다.


9. OSS 산하 R&A(Research and Analysis) 부서는 1943년 초 창설되었으며, 1,200명 이상의 인원을 고용했다.

그중 좌파 학자들도 다수 있었으며, 반유대주의적 편견이나 정치적 경향이 승진에는 영향을 주었으나, 채용 자체를 막진 않았다.


10. 노이만은 곧 중앙유럽부 부국장이 되었고, 마르쿠제는 1943년 3월 그 팀에 합류해 독일 분석 책임자가 되었다.

이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재정난을 완화하고자 한 결정이기도 했다. 마르쿠제는 기관을 떠나는 데 주저했지만 결국 정부 일을 선택했다.


11. 마르쿠제, 노이만, 키르히하이머는 OSS에서 비판 이론을 나치에 맞선 실천으로 적용했다.

『Secret Reports on Nazi Germany』는 이들이 작성한 30편 가까운 보고서를 수록하고 있으며, 이 자료들은 1970년대 중반에 비밀 해제되었다.


12. 이 보고서들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전쟁 시기 활동과 이후 신좌파 및 현대 비판 이론과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편집자 라파엘 라우다니는 문서들의 작성자를 분석을 통해 구분했으며, 이 자료는 기존 연구들과 상호보완적인 의미를 가진다.


13. Who Makes the Nazis?

OSS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분석가들은 나치 방송, 도서관 자료, 정보기관 보고서, 전쟁포로 심문 등 다양한 출처에 접근할 수 있었다.


14. 이들은 나치 체제 내 인물 변화, 시민 사기, 공습의 심리적 영향, 반나치 지하조직 등을 분석했다.

보고서는 이론적 언어 대신 실용적 언어로 작성되었지만, 이들은 비판적 사고에 기초하여 자료를 조직했다.


15. 그들의 보고서는 실용성과 이론을 결합해 미국 정부에 정책 제안을 했으며, 일부는 내부 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들의 급진적인 제안은 대부분 수용되지 않았다.


16. 한 예로, 마르쿠제는 나치 경제 체제에 기여한 1,800명의 기업인 목록을 작성해 경제적 전범으로 기소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단순한 정치/군사적 제거를 넘어, 나치즘의 경제적 기반까지 제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7.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전체주의적 지배 시스템을 자본주의, 스탈린주의, 자유민주주의 모두에 걸쳐 분석했으며, 독일 특수론을 거부했다.

하지만 학파 내에서는 나치 체제에 대한 해석에서 견해차가 존재했다.


18.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폴록은 나치즘을 시장이 제거되고 권력욕이 지배하는 ‘국가자본주의’로 보았다.

이들은 미국의 ‘관리자 자본주의’도 유사한 구조로 파악하며 문화적·심리적 요소의 분석도 중시했다.


19. 반면 마르쿠제, 노이만, 키르히하이머는 나치즘의 핵심을 경제적, 자본주의적 구조에서 찾았다.

이들은 파시즘이 자본주의 위기와 계급투쟁을 통제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해법이라고 보았다.


20.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전체주의 하에서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재생산이 가능하다는 모순에 주목했다.

이러한 분석은 오늘날 생태운동 등 급진적 정치 담론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


21. 나치 체제의 자본주의 분석 (노이만의 『베헤모트』)

노이만은 OSS 입직 전인 1942년에 발표한 저서 『베헤모트』에서 나치 체제를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지속 및 심화로 보았다. 그는 나치 독일이 관료제와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대중을 통제하면서도, 독점 자본주의를 강화하고 중산층과 노동계급의 지위를 약화시키며 산업 자본가의 권력을 확대했다고 분석했다.


22. 나치 경제의 구조와 대중 통합 전략

노이만은 나치가 노동조합을 파괴한 후, ‘완전고용’과 인종주의적 대중문화를 통해 독일 국민을 국가에 통합시키고, 이들을 대규모 산업체계에 맞춰 재편함으로써 국가와 독점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했다고 주장했다.


23. 반유대주의 해석에 대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내부 이견

1943년, 노이만은 나치의 반유대주의가 단지 유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더 광범위한 억압 전략의 선봉(‘spearhead’)이라고 주장하며 OSS를 설득했다. 그는 유대인의 박해가 폴란드인, 체코인, 프랑스인, 반나치 독일인 등 더 넓은 대상을 향한 박해의 전조라고 분석했다.


24. 반유대주의의 정치적 해석 문제

노이만의 분석은 유대인 대학살(Judeocide)의 고유성을 강조해야 하는지, 혹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모든 희생과 어떻게 균형 있게 다뤄야 하는지 등 논쟁적 쟁점을 건드렸다.


25. 로벤탈의 ‘희생양 이론’과 마르쿠제 설득

로벤탈은 『계몽의 변증법』의 ‘반유대주의의 요소들’ 장을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작업하며 마르쿠제에게 노이만의 분석이 문제적임을 설득했다. 그는 나치의 반유대주의는 국민의 불만과 공포를 돌리는 ‘희생양 전략’이었다고 보았다.


26. 전쟁 말기의 공통 인식과 뉘른베르크 재판 기여

프랑크푸르트 학파 내 인물들은 여전히 관점 차이는 있었지만, 나치의 반유대주의가 독일인을 나치와 동화시키거나 처벌받게 만드는 수단이었다는 점에는 공감했다. 이들은 유대인에 대한 범죄와 대학살의 증거 수집에 기여했고, 이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27. 전후 독일 재건과 정책 제안

이들은 전후 독일 붕괴를 예측하는 보고서를 다수 작성했고, 전후 재건 방향에 대해서도 논쟁에 참여했다. 마르쿠제는 1차 대전 이후의 처벌적 접근(예: 독일 농업화) 재현을 반대했다.


28. 미국 정책 비판과 소련의 영향 경고

1943년 마르쿠제는 독일인이 독립성을 유지한 채 나치를 전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은 것이 미국 심리전의 치명적 실책이라 지적했다. 그는 소련이 나치 반대 세력을 포섭할 수 있다고 경고하며,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면 소련이 독일을 지배하게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29. 경제 전범과 법조계의 면죄 문제

프랑크푸르트 학자들은 고위 정치·군사 인사뿐 아니라 경제적 협력자들도 기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반영되지 않았다. 많은 경제 전범들이 전후 독일에서 다시 요직을 맡았고, 법조계도 대부분 정화되지 않았다.


30. 네우만의 사임과 OSS의 해체

이런 좌절 속에서 네우만은 전범 연구팀 수장에서 사임했고, 이후 학계로 전향했다. OSS는 1945년 해체되었고, 마르쿠제와 키르히하이머는 국무부 산하 정보 부서로 전근되었지만 냉전이 심화되며 이 부서도 공산주의 연루 혐의로 위협받았다.


31. 마르쿠제의 실망과 전환점

마르쿠제는 아내 소피의 암 투병으로 워싱턴을 떠날 수 없었고, 국무부 내 역할도 점차 의미를 잃었다. 1949년에는 공산주의 위협이 과장되었다는 보고서를 제출했으나, 정책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32. 학계 복귀와 프랑크푸르트 학파와의 거리

1951년 소피가 사망한 후, 호르크하이머 등은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갔지만 마르쿠제는 학파의 정식 일원이 되지 못했다. 그는 미국 대학에서 일자리를 구하며 학계 활동을 시작했다.


33.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질문들과 비판 이론의 힘

이 책은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나치즘의 ‘이데올로기적’ 외양 뒤에 있는 사회적·경제적 논리를 분석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나치는 전통을 파괴하고 현대적 기술과 통제, 통합경제 체계를 동원해 목표를 달성하려 한 근대적 체제였다고 본다.


34. 이 보고서들이 제기한 중요한 이론적 질문들

저자들은 반복적으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핵심 질문들—현대 사회의 구조, 급진주의적 개입 방식, 문화·심리적 요소와 사회적 흐름의 상호작용—을 염두에 두고 분석을 수행했다.


35. 비판 이론의 실제 사례로서의 『Secret Reports』

이 책은 자본주의, 기술, 문화 지배, 억압 정치가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분석한 사례로, ‘전체 사회화(total socialisation)’라는 개념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36. 마르쿠제의 기술사회 비판과 생태정치의 선구적 통찰

비록 이 책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마르쿠제의 1941년 논문 「현대 기술의 사회적 함의」는 기술합리성이 비판적 사고를 억누르는 구조를 보여주며, 『일차원적 인간』 및 1970년대 생태정치 비판으로 이어진다. 그는 기술이 전체주의적 지배 도구가 되는 가능성을 경고했다.


37. 결론: 오늘날을 위한 교훈

오늘날 ‘파시즘’이나 ‘극단주의’라는 개념이 자주 남용되는 상황에서, 『Secret Reports』는 개념의 남용이 아니라, 철저한 비판 이론을 바탕으로 실질적 설명력을 지닌 분석과 정치적 실천을 지향해야 함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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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인간을 먹고 자란다 - 인공지능 신화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
마크 그레이엄.제임스 멀둔.캘럼 캔트 지음, 김두완 옮김 / 흐름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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