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gallerycrane.com/past/1
평창 신상 갤러리 크레인에 다녀왔다. 갤러리 鶴, 고고한 평창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가나아트센터 앞에 있다. 전시장 앞에는 하얗고 검고 검숭검숭한 학의 깃털을 닮은 설치작품도 있다. 다니는 곳은 많으나 떠다니는 생각을 다 붙잡아 정리할 시간이 없어 전시가 끝나고서야 펜을 든다.


잘그당잘그당거릴 법한 전선 구조물 뒤로 폴록풍의 거친 물감회화와 바스키아와 신표현주의 풍의 집그림이 있다. 중심의 조형물은 잘강잘강거리는 샹들리에의 형식을 차용하지만 유리 크리스탈 대신 검은 전선, 형광주황빛 필라멘트, 파손된 형광등, 고무선, 플라스틱 부속으로 대체되어 기계문명의 폐기물과 빛의 은유가 잘그랑거리며 미약하게 충돌하는 긴장감을 형성한다. 사선으로 비스듬히 윗쪽을 바라보는 방향성과 함께 유기적이면서도 혼란스러운 구조는 마치 살아 있는 학처럼 퍼덕이며 날갯짓해 하늘로 날아갈 듯한 역동성을 지니며 정돈된 형태를 의도적으로 회피하여 해체주의적 데포르메를 강조한다.

세련된 인테리어라도 천장과 벽 뒷편에는 먼지 가득한 공조시설과 어지러진 전선 케이블이 있는 법. 예술과 쓰레기도 앞뒷면의 관계다. 조각과 파편덩어리, 회화와 난잡한 물감, 드로잉과 목탄, 흑연 부스러기. 이 작품 역시 샹들리에라는 귀족적 장식이라는 형식에 산업 폐기물로 내용물을 채움으로써 그러한 작품의 경계를 지우고 미술의 순수성에 도전하며 쓰레기라는 문명의 잉여물로서 자본주의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는 것이다.
주변의 회화작품 또한 탈형식적 미학의 맥락에 동참한다. 좌측 캔버스는 거대한 수직성 드리핑 기법으로 마치 폐허가 된 도시의 실루엣이나 검은 산성비가 창문에 흘러내리는듯하며, 검은 물감이 중력에 의해 낙하하는 듯한 이미지는 서서히 무너지는 시간, 폐허와 퇴락의 감각을 효과적으로 연출한다.

우측 캔버스에는 웰컴홈welcome home이라는 문구와 함께 왜곡된 집의 이미지가 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여러 장치가 부착되고 나름의 질서대로 조립된 집처럼 보이지만 안전과 귀환의 장소로서의 집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따뜻한 고향이라는 홈의 심상과는 정반대로 왜곡되고 일그러진 집으로서의 의미를 표현해 루카치가 말한 고향없음의 감각과 현대사회의 심리적 불안을 시각화한다. 텍스트는 심리적 안정감, 이미지는 불안과 위협과 왜곡. 환대의 메시지와 비틀리고 찌그러진 집. 이렇게 이중코드화된 집을 통해 감각적 피로감과 시각적 충돌을 느끼는 관객은 귀환 불가능성에 직면해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찌그러진 집도 집인가? 돌아갈 수 있는 집이 맞는가? 내게 집이 있는가?
바스키아풍의 낙서와 겹쳐진 마티에르와 정돈되지 않은 드리즐은 의도적으로 어린아이처럼 보이게 했다. 이로써 성숙한 고급예술이라는 보수적인 미의식에 반발하고 지식권력의 공고한 계층화에 대한 도전해 예술을 천진난만한 이들의 감각적 해방의 도구로 재구성했다.
집은 피난처가 아니라 애매하고 이질적인 장소다. 그것도 인더스티얼하고 브루탈한 폐기물 들리에 앞에서.
공간에 대한 기억, 낯섦, 해체, 재구성. 고정된 장소와 정체성을 믿을 수 없는 오늘날에 친숙함과 불쾌함의 교차점을 노출시키고 불안하고 부유하며 정주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사하고 전근가고 퇴근하고 이동하는 도시인의 심리상태를 예술적 이미지로 전이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돌아가는 집이 원래 저러한 모습은 아닐까? 아무리 좋은 입지에 신축아파트라고 해도. 심리적 해체의 현장으로 초대된 관객은 환대와 소외라는 이중의 정치성에 대해 고민해보게 된다.

다른 크기의 섬유에 그린 그림을 천장에 매달고 중첩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된 원형의 수묵작품도 인상적이다. 각각의 천은 서로 어깨를 겨누듯, 프레임에 걸쳐지듯, 혹은 겹쳐지듯 배치되어 평면회화의 틀에서 탈출한다. 반복되는 원형의 드로잉은 작품 전체에 리듬감을 부여하고 공간적 밀도를 높인다.
원형은 반복, 순환, 시간, 혹은 우주의 움직임 등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는 기호학적 상징이다. 다중원의 무한반복은 일견 명상적이기도, 기계적이기도하다는 점에서 함께 전시된 작품과 결을 같이한다. 천 위에 묻어나는 들쭉날쭉한 붓질은 자동화된 알고리즘과 AI패턴생성과 대척점에 있는 노동집약적인 손의 흔적을 보여준다. 디지털시대의 감각상실에 대한 저항이자 행위의 순수한 회복이다.

겹겹이 쌓인 천과 물감이 고르게 퍼지지 않은 표면과 조잡한 측면 마감은 의도된 미완성 상태처럼 보이며, 단일 이미지로의 귀결보다는 보는 이 나름의 지층적 해석과 열린 결말을 추구한다. 본디 예술은 닫힌 결과물이 아니라 만드는 과정 그 자체인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