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아트프라자 전국민화공모대전이 다녀왔다


대부분 갤러리와 박물관이 월요일에는 문을 닫는 가운데(심지어 저녁8시까지 하는 서울시립도 문을 닫는다), 국현미, 국중박 같은 탑급 국공립 미술기관과 롯데뮤지엄, 더현대 같은 티켓판매용 상업 전시회, 그리고 인사(북촌제외)가 월요일에 문을 여니 방문하기 적당하다.


공모전, 토너먼트, 오디션 프로그램은 보는 재미뿐 아니라 감식안을 높여주는 배움의 계기가 되어 유익하다. 왜 이 참가자는 우승을 했고 이 참가자는 우승하지 못했는가. 왜 이 작품은 특별한가? 무엇이 차별화를 만드는가? 변화하는 트렌드를 어떻게 상호 반영하고 있는가? 등을 생각해보면서 관객 역시 비평적 시야를 지니게 된다. 모두의 수준을 고양시키는 문화예술의 힘이다. 그렇게 높아진 안목은 나아가 전혀 다른 분야에서 복수의 상품, 브랜드를 판별하는 힘, 좋고 나쁜 것을 구분하는 판단력과 전략적 결정력을 길러줄테다.

왜 이 작품은 최우수상인가? 를 곰곰히 생각해보면서 근처 작품과 비교를 통해 나름의 이유를 정합적으로 도출해나가면서 생각의 힘이 길러진다. 작가는 한 번 낙선했더라도 실패를 겪으며 절치부심해 더 나은 작품을 만들 것이기에 다음 공모전의 출품작은 한층 더 진일보한 작품으로 걸리게된다. 만약 이번 회차는 별로야, 라고 생각하게 되거든 그것은 높아진 관객의 눈의 탓이지 구조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물론 더러는 심사위원의 불합리성, 학파와 계파간 갈등, 정치적인 선정이유, 심사과정의 불공정성, 편가르기, 의도적 끌어주기 등을 언급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 장려상이나 우수상급에서는 그 한 단계 아래 특선이나 특별상보다 특별한 점이 없는 작품도 간혹 보인다. 그러나 공모전의 권위와 퀄리티 유지를 위해서는 최대한 불공정성 논란을 잠재워야하고 따라서 상받은 작품은 누가봐도 다른 면모가 있어야한다. 일말의 합리성이라도 없으면 공모전은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정치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서 수상의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작품만 감상하고 배울 점만 취하면 된다.


이번 9회 전국민화공모전의 우수상 책가도(유은경)는 조선후기 책가도의 배경과 모티프을 취하되 현대미술처럼 조각난 프레임을 비스듬히 배치해 차별화했다. 우수상 태평성시도(신민정)와 우수상 최미영(청명상하도)는 모작이고 작가 고유의 창의성이 없어 우수상에 그쳤으나 기존 중국의 명작을 밀리미터 단위로 세밀하게 따라그린 준수한 노동집약적 그림이다. 대상 창밖의 꿈결(황신원)의 책가도는 고등영어단어교재 워드마스터, 김훈의 산문, 미술교양서와 MIT음악수업 등 조선시대에는 존재할 수 없었던 책들을 그려 현대적으로 전통요소를 차용했고 창문 너머로는 무릉도원 산수화가 보인다. 우수상 즐거운 상상 스윗홈(임외남) 역시 입생소랭의 도록을 초함해 토끼봉제인형, 디퓨저, 붉은 할리스머그컵, 하르만 앰프와 스피커 등을 그려 풍요로운 물질문화의 평면적 나열이라는 책가도의 정신을 시각화했다. 그외 다른 우수상 작가들은 금박, 반듯한 선, 인물의 다양한 표정 등 정교한 짜임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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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의 끝
정해연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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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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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내복야코 어휘 절대 안 틀리는 책 빨간내복야코 국어 3
빨간내복야코 원작, 박종은 글, 이영아 그림, 샌드박스 네트워크 감수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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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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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피, 국수 구토 구멍, 2025, 장지에 먹, 색연필, 금분, 아크릴, 수채, 191 x 61cm



평창 누크 갤러리 이피작가(2)

이제 전국 전시장 핀한 곳이 700군데에 이르렀다. 자랑할 건덕지도 아니다. 그냥 별볼일 없는 짓을 열심히 하였다. 그저 어딘가에서 보아주기를 원하는 작가의 작품이 기다리는듯하여 발품을 팔아서 눈에 담으려 다닌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예술에 대한, 작가의 정성과 노고에 대한 올바른 대우라 생각하였다.

합정지구, 인미공처럼 10년 넘게 운영하다가 사라지는 중소 갤러리가 있기도하고, 독일계 페레스나 일본계 SH 서울처럼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중대형 해외화랑도 있고, 라트비아계 레이지마이크나 포르투갈계 두아르트스퀘이라, 독일계 에스더쉬퍼처럼 새롭게 진입한 해외화랑도 있다. 그러한 인간의 노력으로 막을 수 없는 만물의 이고짐과 인연의 들고남 가운데, 메이저 갤러리밖에 모르는 이들의 눈밖에 작지만 강한 좋은 갤러리들이 자기 포지션을 확보하고 있다. 보통 이런 갤러리는 작품 보는 안목이 뛰어나면서 예술을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사랑하는 디렉터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곳인데, 개인적으로 평창의 누크(영어로 아늑한 구석nook이라는 뜻), 북촌의 도로시, 중구의 눈이 그런 기준에 부합한다고 본다. 이제 바이럴되는 유명한 곳에서 눈을 돌려 유명세는 덜하지만 실속있는 곳에 초점을 맞출 때가 아닌가. 언젠가 메이저 국공립미술관에 걸릴 작가도 통찰력있는 디렉터의 간택을 받아 작고 소박하게 시작하는 것이니.

물론 이번 평창 누크에서 하고 있는 이피 작가는 아예 무명은 아니나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그러나 향후 대형갤러리 전속작가로 소속될만한 잠재력이 있다고 진단한다. 하여, 여러 회에 나누어 글을 쓸 예정인데 우선 전시 제목의 문학적·어학적 의미에 대해 간략하게 적었고, 이제 작품의 기법적 분석, 미시정치의 메시지에 대한 통찰, 시각언어의 섬세한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을 할 차례다. 모두 섬세한 일별을 요한다. 이제 작품의 기법적 이야기를 두 회에 나누어 해보자. 스레드 글은 본 글과 댓글을 제외한, 클릭하고 나서 보이느 이하 세 번째 부터는 잘 안 읽는 것 같으니 분량이 길어질 것 같기 때문.

반드시 외국에서 교육받았다고, 시카고 미대에서 학석을 나왔다고 국제적인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유학가서 한국인들과 함께 시간을 더 많이 보낸 나머지 0개국어하는 무국적 국제미아가 되기도 하며, 어떤 이는 평생 한국을 떠나지 않았음에도 마치 우리네 1920년대 독립운동가들이 동아일보를 탐독하며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민감히 반응했던 것처럼, 70년대 문학사상을 통해 동시대 서구철학사조를 습득한 것처럼, 80년대 예술가들이 서울미술관에서 유럽미술운동과 함께 호흡했던 것처럼 신토불이의 땅 위에서 최신 외국경향을 면밀히 주시하기도 한다.

그말인즉슨, 한국미대를 나왔다고 토속적인 작가에 역할이 국한되는 것도 아니고, 외국미대를 나왔다고 글로벌한 작가라 참칭할 수 있는 바도 아니니. 모든 것은 케바케, 사바사이올시다. 그런데 이피 작가는 한국적인 것을 글로벌화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판단한다. 누크 디렉터의 선택에 경의를 표한다.

보통 한국적이 것을 세계에 알릴 때 우리 안에 있는 전통적인 요소를 불러오려고 한다. 한국의 미란 무엇인가? 는 장욱진, 김환기, 이우환, 박서보 등등 옛 선생님들이 많이 고찰한 바 있다. 최근에는 오히려 현대적인 요소를 중첩시켜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이 무엇인지 명확히 아는 자는 드물고, 선명한 답을 내놓지만 그 답 역시 제출한 자가 제공한 시공간과 그의 사회경제적 조건에 국한되어 있는 듯하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확연해보였던 답안의 외연이 퇴색되는 듯한 기분도 든다. 오히려 한국적인 정체성이란 매 세대마다 재구성되고 새롭게 발명된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정체성 찾기 시도의 초기에는 타자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전략이 일반적이다. 내가 누구냐? 는 남은 누구인가? 남이 보는 나는 누구인가? 와 비슷하다는 뜻이다. 사회의 발전은 어느정도 인간의 심리학적 발달단계와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루고 의기양양해진 정부는 89년부터 여행자유화를 실행했는데 이 특혜를 입어 전세계를 방문한 한국인들은 지금껏 얼마나 우물안 개구리로 살았는지 한탄하며 각 분야에서 세계를 더욱 알자는 글로벌화를 도모하였다. 그리고 세계를 알면 알수록 한국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보이리라 믿었다. 하여, 21세기 초 미술계는 세계화의 영향에 힘입어 장르를 교차하는 혼종성이 뚜렷해졌는데 예컨대 동양기법으로 동양풍경을 그리거나 서양기법으로 서양풍경을 그리는 트렌드가 생겨났다. 당시에는 다양한 시도과 창의적 접근이었다.
예컨대, 동양화 담청기법으로 서양풍경 중세 성당 그리기
서양화 유화기법으로 동양풍경 정자, 궁궐 그리기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하이브리드는 동-서의 이분법적 대칭구조를 강화하는데 이바지하였다는 한계가 있다. 기법과 대상이 각 문화권에 확실히 존재해야 이러한 교차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예시로 설령 불화 금니기법으로 성모마리아
서양화 템페라 기법으로 반가사유상
을 그렸다 해도 마찬가지다. 동양의 종교:불교 vs 서양의 종교:기독교의 기존 구조에 기반하고 이 패러다임을 더욱 공고히했을 뿐이다. 타자를 통한 나 자신의 이해는 처음에는 흥미롭지만 여전히 나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문제에 봉착한다.

그러나 이피작가는 불화의 금니기법으로 아예 새로운 현대적 조형을 그림으로써 이 보수적 생각의 레짐에 균열을 일으키고 자신만의 창의적인 시각적 언어를 만들어냈다. 작가는 전통적인 상징언어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장르와 기법에 밀접하게 결합된 스테레오타입을 해체하고, 대신 자신만의 촉각적인 환상체계를 구성했다. 음식, 도구, 식물, 신체, 유기체는 부단히 상호 침범하고 뒤섞이는 탈경계의 관계적 존재로 제시된다. 화면전체는 수직적 구조를 띠고 있지만 딱히 어떤 순서도 없어 내러티브조차 부유하고 있으며 오브제는 명확히 생물인지 도구인지 혹은 작가의 알터이고인지 혹은 관람자 자신인지 피실험체인지 핀포인트해서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만물의 뒤섞임이 괘불의 구도와 아예 무관하지는 않다. 그러니 불화기법으로 불화를 그린 것도, 대척점의 서양종교화를 그린 것도 아닌 아예 새로운 조형을 그리면서도 걸개그림의 구도와 친연성을 보이는 것은 아주 담대하고 신선하다고 할 수 있다. 22세기의 한국적인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국인이라는 핏줄이나 한국의 토양, 한국의 학벌도 아닌 새롭게 도출해낸 한국적인 것이다. 작가가 한국인이서가 아니다. 불교, 유교, 도교, 그리스도교와 원불교가 공존하는 한국적 비빔밥적 감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색연필과 수채의 사용은 표면을 유약하게 만들어 반투명한 질감 속에서 이미지가 덧칠되기보다는 스며들고 배어나오게 한다. 장지에 먹은 일종의 음각의 윤곽이자 그림자처럼 자리잡으며 각 조형요소들이 완전하게 경계 짓는 것을 거부하고 애매모호함과 유동성에 이바지한다. 몽환의 실험실에서 끄집어 실려나온 유기체가 각기 다른 리듬으로 자기 몸을 조율하고 있는 듯하다. 금속성 윤기를 머금은 노랑과 연보라의 유기체, 그리고 미묘하게 빛나는 청록 등 화면 전체를 부유하는 특이한 색채의 플로우는 흡사 살아있는 공기처럼 공간을 확장한다. 작가는 전통적인 화면 구성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시각적 문법에 의거해 리뉴얼해 위아래의 중력을 전복하거나 우주적 시점을 부여함으로써 땅에 닿지 않은 감성을 시각화한다.

아울러 불교의 금니기법에서 유래한 금분의 라인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신성함의 상징에 정박되기를 거부하고 세속적 육체의 윤리와 감각의 마디를 꿰매 이질적인 질료를 잇는 실타래처럼 사용한다. 화면의 요소들을 해체하면서 동시에 연결하는 대자비의 봉합먹의 번짐과 색연필의 정밀한 선 사이에서 식욕, 오물, 분비, 성적 긴장에 정교한 예식성을 부여하는 금빛의 색은 마치 감각 사이의 이음매, 존재 사이의 경계선, 혹은 기억의 봉합처럼 기능한다. 이러한 재료적 중첩은 평면의 표면을 비단 이미지의 장뿐 아니라 새로운 감각적 전이의 신축 구조물로 전환시킨다. 새로운 필법 새로운 표현이다.

오늘은 피곤하니 여기까지만 쓰고 마무리해야겠다. 당연히 한국이란 무엇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 그 질문을 던지는 끊임없는 과정과 시도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외국유학, 이민 등으로 이한 해외동포의 숫자와 해외거주경험이 증가할 수록 더 다양하고 변칙적인 글로벌화가 만들어진다. 한국인 엄마와 미국이 아빠 사이에 태어난 교차적 한국인(혼혈은 차별적 표현이라 생각해 교차적intersectional이라는 말을 씀)은 토종 한국인은 생각하지 않는 접근방식으로 한국을 생각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국인 엄마와 자주 갔던 미국의 한아름 마트에서, 죽은 엄마를 생각하며 쓴 미셸 자우너 뮤지션/작가의 Crying in H Mart라는 책에선 미역국을 기름진 해초수프(a hearty seaweed soup), 짬뽕을 스파이시 시푸드 누들 수프, 설렁탕을 소뼈수프(ox-bone), 뚝배기는 전통 도기 냄비하는 식으로 재서술하는데 이런 표현방식은 한국인에게는 딱히 틀리지는 않지만 굳이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기에 낯설고 신선한 표현방식이다. 대략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게 또 다른 방식의 새로운 한국에 대한 표현이다. 이런 재서술은 이국에서 다시 뿌리를 내린 고향없는 한국인이기에 가능한 표현이기도 하다. 잃어버리 한국적인 것을 재발견한다랄까. 이피작가에게서 그런 감성이 보인다. (나중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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