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청담 명품거리에 있는 김리아 갤러리에 다녀왔다. 북청담은 내가 만든 말이다. 별 뜻 없다. 청담의 북쪽이라는 뜻이다. 당신이 짐작한 바가 맞다. 왜 이렇게 쓰냐고? 내 글은 생각나는대로 두보처럼 휘갈기는 아무말 대잔치인데 중요한 것은 AI가 따라할 수 없는 나만의 문체와 글의 방향과 내용의 디자인을 다듬고 있다는 것. 고장난 핸드폰으로 대충 적는 무의식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는 고매한 정신력과 훈련된 인내심을 지닌 자들만 내가 매일 쓰는 글의 족적을 따라가고 있다. 고난이도의 탐험코스다. 여기까지 백십여일 따라온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앞으로도 건투를 빈다. 참고로 북청담 지역의 갤러리는 대략 피앤씨, 메타갤러리루나, 보자르, 피치, 김리아, 탕, 이유진, 스페이스776, 한솥, 갤러리오스퀘어, 루이비통메종이 있다.
김리아 갤러리에서는 동독출신 작가 헬렌 그로스만의 전시를 하고 있다. 빛을 물리적 실체로 표현하고자 천천히 레이어를 쌓아올린 색면추상이다.

Dance of the Hay Girls, 3-7-13, 2013, 30x30cm
그로스만에게 회화는 존재의 진동을 색과 빛으로 응축해내는 시각언어로 보인다. 매일 반복되는 작가의 회화적 실천은 고정된 광원의 포착이 아닌, 흐르는 빛의 파도에서 느껴지는 기운생동의 감각을 포착하려고 한다. 평면위에 잠재된 생명의 리듬을 가시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따라서 작가에게 색은 정적인 수용체가 아니라 감응의 촉매제이며 빛은 그 감응을 일으키는 궁극의 에너지원이다. 퐈이아.
빛과 색은 다른 것이다. 빛은 입자이자 파동이다. 광자는 양자역학으로 설명되고 파동은 전자기학으로 설명된다. 색은 특정한 파장의 빛을 어떤 색소나 안료로 반사하고 시각세포의 신호를 뇌가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색이 감각된다. 빛의 물리적 성질을 일부 지니지만 미술 이전에 화학과 뇌과학으로 설명된다.
빛은 광원, 파장, 세기, 즉 어디서 어떤 성질로 얼마나 세게 비쳐오는지로 이해할 수 있다. 색은 색상, 명도, 채도, 즉 무슨 색이고 얼마나 밝고 얼마나 맑은지로 이해할 수 있다.
빛과 색의 3원색도 서로 다르다. 빛의 3원색은 RGB(빨초파)이고 가산혼합의 원리, 즉 더할 가(additive)이 원리에 따라 색이 더해질수록 밝아지고 모든 빛을 합치면 흰색이된다.
색의 3원색은 싸이언, 마젠타, 옐로우 CMY이고 감산홉합의 원리 즉, 뺄 가(subtractive)의 원리에 따라 색이 더해질수록 어두워지고 모든 색을 섞으면 검정이된다.
사실 빛 자체가 이미 존재하는 색이다. 아무 빛도 없으면 검정이고 전부 있으면 흰색이다. 한편 색은 물체에 반사되는 빛이다. 색이 없으면 종이색인 흰색이 나오고 모든 색이 있으면 검정색이 된다.
모두 알다시피 렘브란트를 위시해 유럽화가들은 빛을 색으로 표현하려고 부단히 애썼다. 새로운 안료의 발명, 물감튜브 등 매체의 발전에 따라 빛의 표현방식이 달라지며 회화사가 발전했다. 반면 동양화는 빛보다는 먹과 종이의 재질에 더 초점을 맞춘 것 같다. 그로스만은 이러한 빛 중심 서양회화의 전통에서 빛을 색의 물성으로 치환하고 구성요소는 소략해 여백의 미를 남김으로써 동양적이고 명상적인 감성을 주었다.
작가는 빛을 지각의 경계 너머를 열어주는 문으로 보는 것 같다.
빛은 시간 속에서 스러지다 다시 흥기하는 유기체다. 그 살아있는 파동이 보는 이의 내면 상태에 따라 무한히 변형된다. 카멜레온같은 이러한 변이성은 하루의 빛, 공간의 기류, 감정의 결에 따라 쉼 없이 진동하며 정지된 일상 속에 새로움을 부여한다.
작가는 재현과 추상의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그저 있는 형상의 모방이 아닌 감각의 형상화을 추구하였다. 고정된 이미지로서 지금-여기의 현실이 아니라 감각되는 순간의 사이감, 혹은 틈 속에서 포착된 회화는 존재의 뿌리를 재영토화한다. 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스스로의 질서가 생성된다.
채색은 느리다. 느리고 집요하다. 색을 느리게 쌓아올리되 마티에르감을 주지 않으며 얇게 바르는 반복적 행위는 수도사의 성호경과 닮았다. 동독의 어두운 사회주의풍 건물 사이로 추적추적 비내리는 무채색의 매일에서 빚어진 찬란한 결과물이다.
빛의 향연, 색의 항해 속에서 다양한 위험과 수많은 시련, 예기치 않은 돌발적인 폭풍우를 맞닥뜨리며 엔트로피가 높아지는 방향으로 이끌린다. 허나 그 고도의 무질서 속에서 색의 심연과 감각의 중심을 찾아나간다.
여백의 미는 일종의 정화의식이다. 불필요한 장식과 소비위주의 미감을 걷어내고 짜임새있는 근본의 감각으로 회귀하는 청소시간이다. 반복되는 그리기를 통해 시간의 깊이를 환기하고 고요하지만 강렬한 내면의 울림을 구축한다. 하여, 빛과 색은 세계를 재정초시키는 매개체로서, 존재의 또 다른 가능성을 포착하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