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일본전기미술전에 다녀왔다. 글피에 오픈했으나, 국중박은 다른 대부분의 박물관 미술관 갤러리라 닫는 월요일에도 여는 관계로 월요일에 방문계획을 짜두었다.


도쿄국립박물관의 노(가면극), 조몬토기, 칠기, 옷, 그림 등을 대여해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작품과 함께 3층에 전시했다. 꾸민 장식, 절제된 반장식, 애잔함, 자유분방이라는 네 가지 포인트로 작품을 모아두었다고 써있다.


인사이드아웃식으로 말하자면, 와 예쁘고 멋져, 으음 소박하네, 아이구 쓸쓸하고 애처롭네, 들뜨고 재밌어 보이네의 구성이다


그러나 전시장 안에서 보이는 각 섹션 도입부 설명은 이 네 테마를 재서술해, 꾸밈의 열정, 절제의 추구, 찰나의 감동, 삶의 유희이라고 써두었다. 네 가지 시선으로 전시를 구성했다는 뜻은 죠몬 야요이 고훈 아스카 나라 헤이안 가마쿠라 무로마치 에도 막말 메이지로 이어지는 일본사 연대기적 순서따라 작품을 배치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일본사를 다 훑을만한 작품 갯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완성된 연대기적 전시를 보려면 자국사를 가장 잘 전시해둔 일본 국립박물관을 가야한다. 외국에서는 한 나라의 모든 연대기를 훑은 만한 전시를 열기는 어렵고 보통 테마전을 하는게 일반적이다. 그리고 테마전은 포인트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감질거린다는 느낌은 당연히 받기 마련이다. 왜 이렇게 작품이 부족해? 라는 불평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무책임하고 나른한 비평이고, 제한된 자원을 어떤 의도로 배치했을까? 를 고민해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시계열로 배치하기에는 작품 갯수가 모자르고 일부 빠진 시대 작품도 있다면 일반적인 시대별 순서를 택하지 못하고 다른 식으로 재구성해야한다. 그에 따른 배치구도가 장식, 반장식, 애잔함과 놀이라는 것.


띠부띠부씰, 포켓몬 카드, 아이돌 굿즈 등을 모을 때도 자기 나름의 기준으로 방에 배치를 해둘텐데 갯수가 적으면 카테고리화하기에 제한이 있는 것과 같다. 커머셜 굿즈에서 희귀한 문화재로 대상이 변했다는 것만 차이일 뿐, 


가격 고하와 희소성 유무를 막론하고 다수의 물품을 배치하는데에는 선택과 결정이 수반된다. 


희소한 자원을 어떻게 분배, 배치했는가 그 결과에는 늘 결정권자의 고민의 흔적이 있고, 이 결정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느냐에 따라 권위가 따른다. 


관객은 결정이 마무리된 최종결과인 전시를 보면서 왜 네 시선이지? 각각 어떤 의미가 있지? 각 작품은 각 테마에 적절한지 아닌지 음미하면서, 컨테스트 심사위원처럼 자신의 생각을 다듬고 조탁하며 전시장을 천천히 걷는다.


화려한 장식에는 예쁜 자기, 장식문양의 조몬토기, 나전칠기, 길상무늬 이불, 찬란한 봉황 병풍을 배치하고


소박한 반장식에는 차완과 절제된 차문화를 위주로


애잔함에는 하이쿠, 겐지모노가타리 구절을


자유분방함에는 가면극 노의 물품과 에도시대 잔치가 그려진 병풍과 새 그림들을 배치했다.


이제 각자 가서 정말 배치된 작품과 테마가 일치하는지 아닌지 확인할 차례다. 이는 미시적 분석으로, 각론을 총론에 맞춰보는, 


전시출품리스트와 전시의도를 대응시켜보는 작업이다. 


더러는 장식-장식 없음-애잔함-자유분방함이라는 거시적 구조가 일본의 미술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접근방법인가? 아니면 여기 있는 작품에 몇 개를 빼고 더해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하면서 고민해볼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장식공예의 물질문화와 정신성 위주의 지배계급 문인문화라든지, 그림과 글 즉 시각문화와 텍스트문화라든지 다양한 접근방법을 시도해볼 수 있겠다. 한 벌의 카드를 숫자와 글자로 하든 컬러로 하든 다양한 방법으로 배치할 수 있듯 말이다.


참고로, 사실 지금 국중박의 전시는 방점이 4개다.


1층에 크게 특별전시 두 개 하고 있고 (조선전기미술과 오세아니아 마나모아나)


2층 왼쪽 시서화에 7.20까지 전시하고 교체되는 좋은 시서화 작품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3층 오른쪽 특별실에 6.20부터 8.10까지 일본미술 특별전을 하고 있다. 아 물론, 원래 있던 일본상설전시도 그대로 있고 추가로 하는 것이다.


전체 약 50점 중 두 점은 7.14까지만 하니 그때까지 방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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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문헌을 많이 읽은 학자는 우리가 쉬이 알 수 없는 사실과 통찰을 과거 사료로부터 꺼내준다는 큰 장점이 있지만

대개 글이 만연체에 중언부언(redundancy)하며 핵심을 찌르지(to the point) 못하고 변죽을 울린다는(beat around the bush) 큰 단점이 있다.


유대인으로서 UCLA에서 탈무드를 가르치는 이 다니엘 보야린도 그 예외가 아닌데, 사료리딩이 정확하고 탄탄하며 글맛이 있어서 어쨌든 끝까지 읽게 된다. 서문에 종교적으로 곤란한 질문을 받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아보려는 것일 뿐인걸요" 라고 학자의 마지막 수단을 취하거나, 왜 기독교와 유대교만 다루고 이슬람은 안 다루느냐는 질문에 "제 분야가 아닌걸요"라고 쉬운 길을 택한다고 하는 부분이 위트있었다.


종교 전문가가 아닌 대다수에게 필요한 인사이트는 세 가지 였다.

1) 나는 뉴 뭐시기야, 새로운 집단이야, 우리는 달라, 나는 정통!, 나는 새롭지! 하면서 젊은 쇄신이 일어나면 이에 어쨌든 기존 집단도 대응해야하는데 그러는 와중에 상호 영향을 주면서 시대와 맥락이 상호 구성된다. 


2) 아주 오랜 세월동안 정통이냐 이단이냐 등의 여러 논쟁이 있었는데 그 근거가 되는 문헌과 용어는 대부분 2-5세기 때 만들어졌다. 혐오와 배제의 언어는 그 이전에 이미 형성이 되고 있었던 것.


3) 정통과 이단의 그 사이 어딘가 그레이한 영역에 어느 편에도 들지 못한 소수 파벌이 있는데 이들도 포함해서 하나의 네러티브를 완성한다. 즉, 보이는 주류 대다수가 종교의 모든 것이 아니다라는 것. 하나의 교단이 택하지 않은 길을 톺아보는 것도 선택한 길을 톺아보는 것만큼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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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배달기사가 GTX-C를 타고 강남 뉴트리니티 섹터를 향해 가던 중 도깨비외 마주칩니다. 기후변화로 태양광발전률이 최근 20퍼 줄은 까닭에 도깨비는 배달기사를 잡아서 안드로이드 강아지에게 전력먹이로 주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배달기사는 도깨비의 피지컬 AI부하와 승부를 겨뤄 이기게 되면 자신을 놓아달라며 대신 뇌척추인터페이스를 걸겠다고 합니다. 에이아이와 포스트 휴먼 사이보그 배달기사는 ..


GTX-C를 타고 강남으로 향하던 배달기사는 포스트휴먼 사이보그. BCI를 통해 감정모듈 메시지는 블루투스로 전해진다. 사랑하는 고객님 많이 기다리고 있죠? 제가 곧 도착해영 ♡


물류는 대형은 지하화되었고 소형은 드론으로 저공비행해 배달된다. 인간을 가져가는 것은 프레시푸드와 럭셔리류. 고가다.

왕십리를 지나 한강을 지나던 중 전자 안개 발생. 디지털 도깨비 쌔비를 만난다. 쌔비는 그를 잡아 배터리부를 뜯어내 안드로이드 강아지 댕청이의 전력공급원으로 삼으려 한다.


배달기사는 제안한다.


도깨비의 피지컬 AI 부하 도래미와 대결해 이기면 자신을 풀어달라고. 작명 센스 보소. 대신 자신의 척추인터페이스를 건다. 신체 부품이 아니라 대체불가능한 감정과 기억을 담은 데이터 장치인데도.


쌔비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부하를 호출한다. 덤벨처럼 생긴 고성능 근육봇이다. 근육은 솔직히 장식이다. 인간성과 기계성의 중간쯤에서 각각을 상징하는 두 존재가 힘과 속도, 효율과 감성으로 맞붙는다.


팔씨름 아니고 발씨름, 퀀텀 배달 속도, 유연한 감정 대면. 기술적으로는 AI가 우위지만, 배달기사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감정으로 기계를 뛰어넘는다. 쌔비의 알고리즘은 정성 앞에서 오류를 일으킨다. 

정성이 뭐지? 싸고 빠르게가 전부 아닌가?

배달기사가 최종 승리. 쌔비는 패배를 인정한다. 댕청이는 충전 없이 꺼지고 배달기사는 척추를 다시 꽂은 채 열차에 올라탄다. 


그는 말한다.


기계는 배달하지만, 사람은 전달하는거야.


와 쌉 갑동.


그 뒤 쌔비는 플랫폼 귀신이 된다. 저승 배달시장에 진출하고 초하루와 윤달에는 휴무. 주3일만 사냥을 나선다. 

그리고 왕과 중세귀족 전문 CS파트를 신설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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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럽병사의 비밀 - 셀럽들의 은밀한 생로병사
KBS 셀럽병사의 비밀 제작팀 지음, 한산이가(이낙준) 감수 / 교보문고(단행본)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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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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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threads.com/@seunghojung_art/post/DLNkmERSbOK?xmt=AQF07WDVc0hjFLthZW0Nh2ieUcUqeJR8ZvP6mhXsSxYtqw



연보랏빛이 깃든 박하색이 서걱이며 표면에 번지는 가운데 해쓱한 붓자국이 한들한들거리며 청람색 물빛 위를 감아돈다. 햇살이 수면 위로 살포시 기어올라 귀를 간질이는 소리를 낼 듯하다. 


붓이 지나간 자리에 색이 아닌 기척이 남아, 팔랑팔랑, 살랑살랑, 풀잎도 아닌 것이 그림 위에서 서로를 다정히 어루만진다. 황록색 잎맥 조각들이 흩뿌려져 있는 하단과, 차분한 유백색과 갈매기회색이 뒤섞여 살짝 서로를 밀며 레몬빛의 플로우를 눌러앉힌 상단이 대조를 이룬다. 청람색이 감도는 흐릿한 터치 사이로는 레몬베이지빛이 얇게 퍼지며 똬리를 튼다. 무용수가 치마단을 들고 무대위를 움직이듯 붓끝을 살짝 들어 캔버스 위를 스쳐간 듯한, 연둣빛이 감도는 맑은 회색이 가늘게 떠 있고, 그 사이로 간혹 잘 익은 배색처럼 보이는 바나나빛과 밝은 오크색이 미세하게 배어난다.


공단과 다문화로 유명한 구로의 항동에 서울시 최초 시립수목원인 푸른수목원이 자리잡고있다. 삭막한 잿빛 콘크리트의 숲 가운데 외로이 떠있는 생태의 숲. 푸른뜨락, 내음두루, 한울터, 돌티나라 같은 낯설면서 아름다운 순우리말 이름들. 드렁허리 같은 희귀한 물고기가 사는 항동저수지를 모네의 수련 구도로 감실감실 그린 정승호 작가의 2025년 회화다.


색이 숨결처럼 번져나가며 그림의 숨구멍이 된다. 초록 한 줌, 노랑 한 자락이 툭툭 떨어지며 맴도는 물비늘처럼 화면을 가로지른다. 구체도 없고 선도 없거니와, 대신 바람에 젖은 풀잎이 흘러가는 듯한 찰랑임이 있다. 빛이 물러앉고, 어둠이 깃들며, 물감이 비비적거리며 섞인다.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서 머무른 맑은 여름빛. 색깔이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색 사이의 틈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야할지니. 그림이 보인다기보다 들리는 풍경이다.


중단에서 하단으로 내려오며 스트로크는 수면에서 캔버스 정면으로 이동한다. 진부령에서 봤던 2024년 작품들과 같은 회화적 고민의 결이다. 갈피가 없고 산란하는 자신의 존재론적 고민을 냅다 그림 위에 던졌다. 작품 앞에서 날 것 그대로의 자신을, 진실되게. 점차 채도가 짙어지고, 색은 눅진하게 겹쳐진다. 그림의 허리에선, 블루그린과 코발트 계열의 쿨톤이 눌리며 얹히고, 그 틈을 가르듯 연청색과 송홧빛이 반짝인다. 동글게 쌓인 연잎인듯, 황록, 연록, 비취 계열의 다채로운 그린들이 그림을 풍성하게 덧입히고, 붓터치가 도톰한 구획에서는 물푸레빛과 청람색이 팔레트에서 큰 붓에 의해 옮겨져 캔버스 위에 자리잡았다. 좌측 중단과 하단에는 감귤색 터치가 보이는데, 채도가 강하지 않지만 그림 전체를 깨우는 미세한 온기다. 


모네의 수련 연작을 연상시키면서도, 이 회화는 자연의 재현이라기보다 전환에 더 가까운 접근이다. 자연의 기억을 시각적 질감으로 환기시키되, 구체적 모사의 의무는 부담하지 않는다. 풍경화이면서 동시에 풍경에 대한 지긋한 명상이다. 그림에서 보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안 보이게 한 것이다. 무엇이 보이느냐와 무엇이 보이지 않느냐도 동등하게 중요하다. 이 화면에는 중심도 없고 고정된 시점도 없다. 위아래도 모호하다. 이는 의도적으로 시선의 흐름을 분산시키고, 관객이 하나의 관념적 구도나 중심에 집착하지 않도록 만든다. 위아래 관계없이 그저 흐릿한 어슴푸레함 속에 잎사귀가 퍼진다. 시선은 물속을 들여다보는 것도 아니고, 물위를 내려다보는 것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을 걷는 눈길. 단일시점과 과학적 원근법을 배제하고 또렷한 응시대신 존재의 머뭇거림을 유도하는 방식. 그것이 작가의 화두였을 것이라 짐작한다. 팔려는 그림이 아니라 살려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나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생각했다. 자기가 아닌 무언가는 그릴 수 없는 사람이기에, 오랫동안 캔버스를 바라보며 자신이 무엇인지 그림은 무엇인지 고뇌해왔다고 느꼈다. 말하자면 인상파를 따라 그리는 테크니션이 아니라 인상파의 삶을 살려고 한 사람이다. 그러한 생각의 실타래가 캔버스에서 전해져온다. 붓질은 언뜻 제멋대로처럼 보이지만, 그 불규칙이 만들어내는 일렁임이야말로 시선을 붙잡는다. 정승호 작가는 아주 오랫동안 회화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었기에 고뇌 끝에 나오는 붓질은 선명하지 않지만 확실하고 느리지만 멈추지 않는다. 시각의 확산은 감각의 해방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물속을 보는가, 수면 위를 보는가, 혹은 빛 그 자체를 응시하는가?


회화는 추상과 인상의 경계에서 붓질을 시각언어화한다. 형태의 묘사보다는 붓의 속도, 압력, 방향, 그리고 색의 겹침이 감정을 전달한다. 예컨대 아까 언급한 좌측하단의 킬링 멜로디 오렌지빛 조각들은 온기와 활기를, 그 아래의 짙은 녹청색 클러스터는 뭉근히 침잠하는 감각을 형성한다. 이외에 모든 붓질에 작가가 느낀 감정들이 스쳐가고 회화는 마치 시각적 일기장처럼 빚어진다. 그리하여 보는 이는 장면에서 서사를 독해하기보다는, 어떤 감각을 통과하거나 통과당한다. 

조화, 구도, 균형, 색채의 구성, 조직화 같은 전통적인 미의 기준을 우회하는 대신, 불균질하고 비정형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스트로크의 스타카토 리듬, 오른쪽으로 약간 쏠려있는 비대칭적 구획, 불투명과 투명이 공존하는 색배합이 밴드의 잼세션을 닮았고 시각적 재즈에 가깝다는 인상이다. 보는 이는 색을 읽기보다 색 사이를 건너뛴다는 점에서.


작가가 무엇을 그리는가, 회화는 무엇을 보여주는가보다, 회화가 어떻게 사유되는가에 대해 그림이 우리에게 재삼 질문을 던진다. 나름 답하였으되, 끈덕지게 계속 물어본다. 색채는 대상의 피부가 아니라 정신의 흔적으로 마음의 눈으로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보인다. 작가는 수면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수면과 감각 사이에 떠도는 찰나의 순간을 붙잡으므로, 보는 자는 작품의 표면 위에서 머무르지 말고, 시각적 표피를 투과해, 붓질이 남긴 지층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한꺼풀 더 보인다. 그림을 즉물적 이미지로서 소비하기보다, 자신을 던져 감각과 사유가 엇갈리는 장소로서 대우해야한다.


그런 연유로, 이건 연못이 아니다. 풀도 아니고 나뭇잎도 아니다. 항동의 자연이라기보다 우리 마음의 풍경이다. 실제를 따라하지 않은 이 회화가 우리 기억 속에 새근새근 살아숨쉬던 추억 속의 무언가를 더듬는다. 적확한 풍경을 모사하는 자는 뿌연 안개를 걷어내며 선명하게 그리지만, 이 그림은 오히려 그 안개를 머금은 채 둥둥 떠다니는 까닭이다. 모사가 아니라 모색인 것이외다. 기억의 껍질을 쓸어내며 새로운 풍경의 형상을 짓고 있다. 정지하지 않고 흐르는 꿈의 살결을 따라 미끄러지는 붓끝이 남긴 자국은 흡사 들숨과 날숨의 아름거림, 곱디고운 속삭임, 혹은 잊힌 기억의 외마디, 혹은 떠도는 감정의 자락, 혹은 빛과 물과 공기가 서로를 닮아가는 풍경. 보는 이는 보면서 안에 잠긴다. 


그림을 말로 옮길 때 비평가는 구조를 따지고, 문학가는 마음의 결을 헤아린다. 나는 그 무엇도 아니지만 형언할 수 없는 생각 속에 사로잡혀 글을 남긴다. 정승호 작가의 그림에 대한 생각은 이론와 에세이, 둘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차분한 혼란이다. 나는 이 인상을 명확히 설명할 수도 완전히 침묵할 수도 없다. 그저 회화를 바라볼 뿐. 붓이 남긴 색덩이들을 하늘하늘 따라걷다 보면, 그 끝에 말을 잃고야 만다. 그 순간, 해석과 상상이 협업하는 시가 시작된다.


그림이 나를 물가로 이끌지 않고, 물속으로 자빠뜨린다. 일반적인 그림 감상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감각과 감정, 언어와 무언이 뒤섞인 하나의 인상체험이다. 그림은 풍경의 외피가 아니라 내면의 풍경, 몸 안쪽에 자리한 꿈자리 같은 것이다. 보고 싶으면, 보지 말고, 눈을 감고 느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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