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은 뜨겁게 달아오른 구리빛으로 출렁이며, 오렌지와 진홍, 자줏빛 양떼구름은 두터운 감정을 동여매고 먼 바다를 향해 먼 길을 떠난다. 얼마 전까지 서촌 미앤갤러리에서 했던 오병욱 개인전의 300x200cm 작품들이다.

불타는 노을빛으로, 갸름한 구름들이 융단처럼 깔린다. 풍경화는 기후를 반영한다. 습기가 많은 우리땅의 하늘은 빛이 공기 중에 산란되어 풍경화에 유럽의 건조한 여름처럼 쨍한 컬러감이 드물다. 채도 높은 쨍한 색감의 유화는 바르셀로나, 남부 이탈리아 같은 건조한 남유럽으로 갈수록 더 뚜렷해지는 현상이다. 예외는 그네들의 축축한 겨울과 북유럽의 아침 안개인데, 현대 인상파전에서 봤던 조지 이네스의 숲 속 웅덩이(1892)에서 보이는 운무가 대표적이다. 흡사 물긋물긋한 수풀이 우리네 수묵화같이 느껴진다.


하여, 오병욱 작가의 석양빛은 얇은 OHP필름을 투과한 듯 뭉근하고 따스하다. 그런데 붓자국은 마치 점토를 빚은 손자국 같이 굵고, 거칠게 긁어낸 듯한 표면감이 보여 혹 칼끝으로 긁은 캔버스 위의 고통처럼도 보인다. 감귤빛과 분홍빛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군청색의 구름은 화면의 중앙을 가로지르며 알로록달로록 폭발한다. 그 하늘가 왼편에서 나뭇가지가 검게 울부짖으며 아직 머물러 있는 검푸른빛의 낮하늘을 가르며 솟아오른다. 마치 단단한 말줄임표처럼. 붉은빛과 자줏빛, 그리고 푸른 잔광들이 서로 밀고 당기며 하늘을 채색한다. 그 어딘가 아래 빌딩숲이 적막하니 얇고 긴 나무들처럼 서로를 향해 뒤엉켜 울고 있다.
빛과 그림자가 서로를 사랑해 함께 물들어가며 황혼의 감성을 빚어낼 때 그 색의 조합은 설명보다 강력하다. 선명한 윤곽과 구체적인 형상을 넘어선 색채의 다가옴. 더 깊은 차원의 감동. 망막에 맺힌 시각정보 이상의 울림이다. 붓질의 문제나 명도 대비의 문제가 아니다. 작가노트에서 "색채는 음악처럼 이성을 통하지 않고 가슴으로 직접 전해져서 마음의 거문고,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이다"라고 썼다. 마음의 거문고가 소리없이 둥둥 격렬하게 울린다. 심장의 쿵쿵과 같은 박자로. 바라보는 이는 소리없는 색채의 연주를 듣는다. 붓의 결이 선명하게 드러난 캔버스 위의 격렬한 터치를. 그 매무새를 여미는 어떤 생각의 두께를. 너무 많은 말을 삼킨 날의 끝자락에, 저런 하늘은 침묵보다 더 명확하다.
작가노트 출처:
http://www.miandgallery.com/module/board/read_form.html?bid=tPtMFH&aid=4Rarqv&pn=class

백색의 바탕 위에서 명확히 대비되는 팝아트적 색이 아니라 거의 사라질 듯 미세한 차이로 조율되면서 거센 리듬으로 발라진 색채. 하늘은 언어가 되지 못한 감정으로 채색되고 나무만이 그 모든 색의 향연을 뚫고 오롯이 서 있다. 여명과 황혼 사이 혹은 그 둘 다, 어느 이름도 붙이기 어려운 시간. 아무도 뚜렷하게 존재하지 않는 순간을 그림이 품고있다. 그늘은 어둠이라기보다 시간의 잔상이고, 빛무리는 명확한 방향이 없으되, 매우 느린 시선으로 내 마음에까지 흘러다가온다. 홀대한 내 마음 속 복잡하게 얽혀있는 감정과 동시에 존재하는 시간선을 그대로 수평 층위를 눕혀놓은 듯, 저무는 하루가 구름을 타고 위도 아래도 없이 속절없이 흘러간다. 백천지수의 세월불사인이여. 강물은 흐르고, 세월은 인간을 기다려주지 않으니, 자연은 무심하고 무상하도다. 일엽부지수상이니, 물 위에 떠 있는 하나의 나뭇잎처럼, 인생은 떠다니는 것일 뿐이외다.
나뭇가지는 하루의 말미에 실루엣만을 남긴다. 낮의 끝. 어둠이 완전히 오기 전. 삶의 모든 경계가 흐려지는 그 몇 분의 기억이 슬로우모션으로 재생된다. 백색, 회색, 연노랑과 칠흑빛 군청색으로 노래하는 하늘은 오래된 LP판처럼 색이 바랬다. 오래되어서 잊힌 것이 아니다. 바랬지만, 더 깊숙이 간직되어 버린 색이다. 간절한 바램을 연필로 꾹꾹 눌러 적은 편지처럼.

빠른 필획의 리듬이 강조되는 그림에서 스트로크의 끄트머리 여운을 결정짓는 것은 색의 농담이다. 먹의 농담을 중요시한 선조들은 #000000 하나에서 #121212와 #202020의 농담을 구분할 수 있는 세심한 감미안이 있었다. 물감의 발전과 함께 흑백에서 컬러의 시대가 되니 버라이에이션은 무한히 큰 폭으로 다변화되었다. 작품의 정서를 결정짓는 핵심축으로서 색채의 역할은 무궁무진하다. 한 점의 회화를 보는 자가 어떤 장면에서 어떤 감동을 얻었는지 자연과학자처럼 역추적하면, 형태나 구조보다 색에서 비롯된 감각의 여운이 더 크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통념과 대치되는 사실은 아니다.
나는 그저 이 색감의 잔향과 정서의 여운을 색의 스펙트럼만큼이나 방대한 언어로 묘사하며 어휘력의 부족함을 통탄한다. 대개 이미지가 음성보다 빠른 법. 반사된 빛이 망막에 도달하는 속도가 음파가 공기를 통해 전달되는 속도보다 더 빠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어쩐지 이미지가 아닌 음성의 속도로 한꺼풀 느리게 전해지는 듯하다.

하늘은 부서진 문장. 고요하게 찢겨 나간 어떤 생각의 흔적. 노랑과 보라, 분홍과 회색이 격렬하게 엉기지 않고 되려 순하게 뭉개져 있다. 대류권을 살짝 빗대어 스쳐가는 적운처럼 감정이 상층을 지나지 않고, 그 아래 하층에서 미묘하게 스며 나온다. 몽골초원을 이동하는 소떼처럼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구름을 통해서만 시간이 실체화된다. 이곳엔 낮과 밤이 섞이고, 빛과 그림자가 버무려지고, 언어와 침묵이 어우러지며, 기억과 예감이 맞닿는다. 그 아래로 하늘과 땅 사이를 가르는 검은 산등성이. 산은 아주 낮게 깔려있다. 강줄기인지 시간의 균열인지 모를 애매한 실루엣이 있다. 색의 끄트머리에서 흔연히 일어나는 반향같다. 이 장면을 지켜보는 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색채를 느끼고 색채는 심장을 누빈다. 그 색채와 정취가 내 마음을 아름답게 그려주는 시간을. 기다린다.
진정되면서도 꺼지지 않는 잔불과 같은 절정 이후의 차분한 감정이 느껴진다. 마치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버티다가 다다른 하루의 끝자락. 그 사이로 떠 있는 짙은 먹빛 구름은 기상관측기록이라기보다 말문을 닫은 채 생각을 품은 살아 숨쉬는 존재처럼 보인다. 바닥에 이르러 물 위로 반사된 빛은 두 번 타는 노을이리니.. 위에서 한 번, 아래에서 다시 한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