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 G 갤러리에 다녀왔다. 글래드스톤, 청화랑, 스페이스라드 등이 위치한 삼성로 인근이다. 그 삼성로 안쪽에는 다들 잘 모르는 큰 청담공원이 있다. 꽤 괜찮은 산책로다. 서울의 미니어쳐 센트럴파크라고 말하기엔 언덕이 많다. 한국 산책로에 언덕이 없는 경우는 일산이나 송도 같은 계획도시를 제외하곤 거의 보지 못했다. 그 언덕길을 어떤 외국사람들은 등산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정도다. 산악의 민족 한국인, 메트로폴리탄 수도에도 급경사의 산맥을 품고 있어 일상이 등산이다. 신체적으로는 등산, 건물에서는 계단, 사회적으로도는 출세와 승진. 수직적 사고에 익숙한 한국인. 참고로 이제 37회차에 달하는 매일 일본어로 쓰고 있는 포스팅에서는 이에 대해 자세히 풀어설명한 적있다. 일본어로 적어서 한 번 완결된 글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다고 생각하면, 다시 한국어에 맞춰서 보정하는게 골치아파서 번역은 읽고 싶은 사람이 파파고로 돌려서 읽도록 맡기고 있다.


맑은 연못, 청담에선 전반적으로 길이 널찍하고 뭔가 사통팔달의 호쾌한 기세가 느껴진다. 이 지역에 오마카세와 파인다이닝 맛집의 핀이 더 많이 꽃혀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유명 파인다이닝 전문 더들리랄지. 그렇지만 그런 고급레스토랑은 서양과 일식 둘 중에 하나다. 밍글스처럼 모던한식다이닝을 하는 곳도 생겼지만 소수다. 한국인이 한식을 1인 한 끼에 40만원 주고 먹기엔 마음이 쉽지 않다. 그 돈이면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대체재가 많기에 왠만큼 스페셜하지 않아선 욕만먹기 십상이다. 본토에서 본토요리를 가장 잘 대접해줘야하는데, 한국인만 한국에 유난히도 매섭고 잣대가 높다. 나도 송은에서 내려가다가 냉부로 유명해진 쵸이닷의 최현석 셰프를 길가에서 본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 연예인은 인생에 한 번 공연장에서 만날 사람이지만, 송은 근처의 삼남매 설렁탕 직원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객으로 유명 연예인을 많이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이컬쳐는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 뒷받침하는게 현실이다. 7만9천원에 된장찌개 룸서비스를 시켜먹는 사람들은 7만900원을 7900원이기 때문에 쓴다. 물론 1300원짜리 삼각김밥을 먹는 사람들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고 열등감과 시기질투를 낳겠다. 그러기에 그런 재력가들은 돈을 함부로 자랑하지 않고 쓰임새를 굳이 드러내지 않으며 일을 한다. 돈을 많이 벌고 좋은 파인다이닝을 다니면서 섬세하게 맛을 구별하고 좋은 와인과 재료를 감별하고 세계의 다른 파인다이닝과 비교도 해보고 피드백도 주면서 하나의 미식문화를 가꿔가는 것이다. 세상에는 또한 재력가와 하이컬쳐가 담당해야하는 분야도 있는 법. 시간이 흘러 그들이 가꾼 문화가 어떤 형태로 나왔는지 그 결과물을 보고 판단할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흘러흘러 G 갤러리에 도착. 아니 이럴 수가. 안국역 금호미술관 올해 상반기에 했던 금호영아티스트의 이해반 작가의 작품이 보인다.


금호미술관 2층에서 봤던 대형 유화 원형의 이중주도 보이고, 기억이 정확하다면 소형 작품 하나도 그때 봤던 작품이다. 커튼과 함께 목제 의자 위에 있던 작품. 


금호미술관에 다녀 온 다음 다른 여러 작품과 스트로크를 비교했던 3개월 전 4월 3일 포스팅에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


"이해반 작가는 동양화 베이스에 네덜란드에 유학했다. 서양화의 치밀한 구도와 인도네시아적 색채감이 더해져 전통적이면서 이국적인 리듬을 만들어낸다. 일월오봉도에 열대우림의 색채감이 묘하게 조합돼있다"


"서양화의 원경과 원근법이 정확히 반영되어 있다. 색감은 동양적인데 짜임새 있는 구도."


https://blog.aladin.co.kr/797104119/16354786


지금과는 사뭇 다른 짧은 단상이다. 3개월만에 글을 매일 이렇게 길게 쓸 수 있게 되다니. 그리고 다양한 문체로도 쓸 수 있게 되다니. 읽어주시는 독자에게도 새삼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자 그럼 도착했으니 이제 문체를 바꿔서 그림 묘사를 하러 가보실까.

같은 제목의 작품 두 점이 어깨를 겨누고 배치되어 있다.


좌측 패널은 이해반, 배틀그라운드 Ⅲ Nr.01: 오, 디어, oil, acrylic on canvas, 160x120cm, 2024 이고

우측 패널은 이해반, 배틀그라운드 Ⅱ Nr.01, oil, acrylic on canvas, 160x120cm, 2024 이다.


제목이 전투지대라는 심각하고 험한 느낌인데 색감은 따뜻하고 평화롭다는.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를 통한 시각적 교란이다. 자연과 식물은 언뜻 보기엔 목가적이지만 내부에는 미생물과 생물들의 죽고 죽이는 서바이벌 경쟁이 있다는 의미이리라 생각한다.


우선 왼쪽 그림은 바닷속 초록 산맥이 일렁이며 숨을 쉬는 듯한 풍경인데, 주된 색조로 황록색이 돋보인다. 반짝이는 금사 뿌린 듯한 화면에 물감을 머금고 흘러내리는 섬유질감의 흐름이 인상적이다. 구불구불한 능선은 해조류나 산호처럼 유기적이며 곡선적인 형상을 띄고 있고 그 이음매에 연분홍 진주를 닮은 둥근 점이 꿈틀거리는 생명체처럼 산란되어있다. 좌측상단 끄트머리의 하늘은 청보라에서 연보라로 그라데이션되고 아래로 점성있는 물이 폭포처럼 튀기고 아래로 갈 수록 선이 조밀해진다.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별이 점점이 흩뿌려진 무지갯빛 구름이 하늘이 아닌 물에 구현되어있다. 전체적인 인상은 수묵담채화의 구도를 서양화식으로 재구성한듯하다. 주변을 감싸는 펄빛 바이올렛, 라일락, 담청색은 모두 한 톤이 아니라 매우 섬세한 그라데이션이 구현되어 있어 마치 한지에 서로 다른 농담의 먹물이 번지는 듯한 잔향이 느껴진다. 


같은 배틀그라운드인데 "오 디어"가 빠진 오른쪽 그림은 금가루가 화면의 중앙에 연못의 윤슬을 따라 퍼져있는 것과는 달리, 바람처럼 자유롭게 휘날리고 있다. 그 황금선의 선로를 따라 별빛이 타고 이동한다. 황금선이 흐드러지는 듯한 곡선의 장식형태는 마치 디즈니 영화 소울의 카운슬러(모두 이름이 제리)의 무심한 선으로 이루어진 캐릭터 디자인을 닮았다. 


중앙에는 폭포처럼 솟구치는 채도 높은 청록색이 진한 보라색의 하늘과 대조와 함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위로 심홍색과 자줏빛으로 뒤엉켜 뭉게뭉게 피어올라가는 퍼플버블구름. 그 너머에 청보라 밤하늘에 탱글탱글 떠오른 금황색 작은 달이 걸려있다. 양 옆으로는 생동감있는 짙은 청색 활엽수 잎맥이 있다. 


에메랄드빛을 머금은 코발트 블루의 물줄기가이 계곡에서 콸콸 흐르고 그 양측 보랏빛과 핑크빛이 감도는 비단 운무를 비집고 비취청자빛깔의 물보라가 사방으로 흩어지다 다시 일곱 블루톤의 물줄기 일곱개로 뭉텅뭉텅 모여 아래로 쏴아아 낙하하고 있다. 물살 사이사이로 노란빛 별무리가 아지랑이처럼 춤춘다.


좌우의 식물은 실루엣으로 표현된 검푸른 솔잎형 나무들. 구도는 동아시아 산수화의 수목 표현을 연상시키되, 잎의 실루엣은 열대식물의 윤곽, 예컨대 몬스테라 혹은 빅토리아 수련의 잎맥 같은 형상이다. 작가의 유학시절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의 풀잎에서 영감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두 그림 모두 구도상으로 중앙의 물과 계곡이 깊이감과 원근감을 만들어내고, 아득한 산맥이 안개에 묻히듯 흐릿하게 뒤로 물러나, 동양화 특유의 기운생동과 서양화적 입체감이 공존한다.


크레용팝의 빠빠빠처럼 점핑점핑하고 있는 작품 네 점도 있다. 그중 음따음따, 약강약강 박자의 2, 4번째 키 큰 아이들을 자세히 눈여겨보자.



참고로 오른쪽에서 세 번째 작품이 금호에서 보았던 작품이다. 커튼 사이 목재 의자 위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해반, 대지와 스펙트럼의 조각들 Nr.05, oil, acrylic on canvas, 91x120cm, 2025

이해반, 대지와 스펙트럼의 조각들 Nr.04, oil, acrylic on canvas, 72.8x91cm, 2025

편의상 5번, 4번이라 칭하자.


5번의 형태적 느낌은 성게나 불가사리 같은 극피동물, 개불같은 환형동물 같고, 색감은 나전칠기장이다. 소용돌이 사이로 빨려들어갈 것만같은 몽환적인 느낌과 용솟음치는 폭발적 느낌이 공존한다. 산맥의 근원, 지구의 심장부처럼 보이는 지형의 소리없는 터뜨려짐. 색채는 샛노란 황토빛을 바탕으로 하여, 진한 올리브그린과 산호빛 핑크, 부식된 쇠색과 자색의 잔결이 결정을 맺듯 얽혀 있다. 전복, 조개 등의 껍데기를 얇게 갈아 여러 가지 무늬로 오려낸 듯한 나전형 문양이 물결에 구현되었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으나 한지 위에 안료가 번지는 듯한 결이 전체를 구성한다. 작가의 동양화적 기법이 분명 보인다. 중앙에서 위와 오른쪽으로 분출하는 형태는 나무 뿌리 같기도 하고 꽃봉오리가 폭발하듯 펼쳐지는 환상 식물처럼 보이는데, 이는 열대식생을 상상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읽힌다. 동양화의 필법, 담묵으로 감아 겹겹이 겹친 산수표현을 연상시키기 때문. 허나 분명히 서양화의 시점샷, 특히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항공적 시선도 보인다. 동양화 베이스에 서양적 표현을 묘하게 버무린 스페셜한 작품이다.


4번은 존재하지 않는 내면의 풍경이다. 감각적 환상의 시각적 구현에 가깝다. 작가는 동양화에서 익힌 번짐과 여백의 미를 자연의 카오스와 무질서 속의 질서를 모티프와 융합했다. 네덜란드 유학에서 익힌 명확한 구도, 빛의 각도와 색면 분할에 능숙하다. 식물을 기반으로 한 생태적 감각도 보이는데, 식생이 한반도에는 없는 과장되고 율동적인 열대성 식물이다.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 식민지에서 도입하고 학습한 식물적 표현이다. 식민적 식생의 상흔, 혹은 기후가 기억하는 식민주의의 유령이다.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동양화와 유럽유학, 생태와 추상, 이런 것들은 양극단의 스펙트럼에 있는 말들로 서로 무관한 듯 보이지만 이해반 작가는 회화 안에서 버무려내 경계를 넘나드는 하이브리드 식물추상으로 빚어냈다.


화면 구성은 동양화에서 배우되, 동양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해체하여 새로운 시각언어로 재구성했다. 원경은 뿌옇게 흐릿하지만 동시에 광학적으로 날카롭고 산맥의 부벽준은 버블감과 점막으로, 세필화의 우점준은 필법이 아닌 색채의 그라데이션으로 재탄생했다. 산은 어쩐지 스스로 흐르고 나무는 전자적 정맥처럼 진동한다. 전통동양화가 여백과 먹으로 비어 있음의 충만함을 추구했다면 이해반 작가는 그 여백마저 미세입자로 쪼개어 떠다니는 성운 상태의 색감으로 대체해 많이 채웠으되 비어있는 감각을 보여주었다. 현명하고 정교하다. 감각의 덩어리가 생성되고 한 세대의 시각적 언어가 진화한다.


작가의 작품에서 일관된 화두가 있다. 캔버스 위에 정렬되어있는 결과물에서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지 오랫동안 고민한 흔적이 느껴진다. 빛은 파스텔톤으로 서서히 번지며 은하수처럼 부유하는데 형태는 자꾸 꿈틀거리고 번지는 듯하다. 특이하다. 살구빛, 연지빛, 청연색, 노을빛, 펄빛 자주, 비취빛, 바랜 철색같은 색의 조합이 익숙한 듯 낯설다. 펼쳐진 화면에 동양적 명상을 느끼기엔 조형이 너무 많아 번잡하고, 서양적 구성이라기엔 또 오브제가 너무 없고 여백의 미가 느껴진다. 이러한 동서양 융합의 실험을 하며 작가는 자신만의 환상적인 제3의 풍경을 구성하고 있다. 


4번 작품에서 물결은 산이 되었고 산은 다시 증기로 솟구친다. 기후적 회화, 회화의 호흡을 상상하게 만드는 기체적 구성물. 전통회화로 포섭할 수도 표현할 수 없다. 풍경이 아닌 풍경 되기 전의 덩어리. 무정형의 압력을 채집하고 응축시킨 시트지. 무지개가 일렁이는 수묵화, 입체적 각도의 진경산수화, 바람의 무게, 수증기의 어깻죽지, 식물의 마디마디에서 삐져나온 희귀한 생장소리. 말랑하고 느슨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반적 기법이 아닌 나만의 기법. 색채는 이질적 감각들이 경계 없이 접혀 있는 지층이다. 그 지층, 자색 바위 틈에서 솟는 전류 같은 황로색, 연보랏빛 안개 속에 가라앉은 기계적인 철록색, 뱀비늘처럼 겹쳐진 올리브색 음영 위로 톱니처럼 박힌 별빛 입자. 이런 조합은 채도가 아니라 촉각적 불협화, 아니면 지각의 무게 중심이 흐트러지는 낯선 압력이다. 꽃잎에 입맞춰본 자만이 알리라. 눈으로 보는 비유가 아닌 실제의 감각을 호명한다.


형상은 명확하지 않으나 모호하지도 않다. 뿌연 경계 안에 있는 조형은 기억을 잃기 직전의 체언, 혹은 이름 붙이기 직전의 존재다. 회화의 고정관념은 대개 "그릴 수 있어야 존재한다"거나 "형상이 있어야 감상이 가능하다"는 말로 축약가능하다. 이에 용감하게 도전한 결과 이해반의 회화는 무엇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보게 만들며 그것을 어떻게 보았는지 자신에게 다시금 질문하게 한다. 말하자면 감각기관이 이미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감각기관을 휘감는 방식을 스스로 경험하게 만드는 셈이다.


그러니 이러한 그림은 사실적 재현의 회화라기보다는 하나의 기상현상, 혹은 시각적으로 관측 가능한 정서적 기후라고 표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익숙한 언어로 부를 수 없는 것들을 굳이 그리는 이 프로젝트는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려는 기획이면서 아직 무엇인지 아닌지조차 규정할 수 없는 것에 색을 입히는 무모하고 용기 있는 회화의 선전포고다. 오렌지 사이렌과 함께 전쟁의 소리가 들린다. 진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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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과 한국미술사학회가 주최한 <동아시아 왕실문화와 미술> 학술대회가 하버드 옌칭연구소의 후원을 받아 오늘열렸다. 내일까지 이틀간 진행된다.


국가유산청장, 국립고궁박물관장, 한국미술사학회장의 축사에서 정말로 전통과 옛문화를 사랑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의 말과 분위기에서 옛 것을 향한 떳떳한 마음가짐이 느껴진다. 이후 이어진 교수들의 강연에서도 학자의 윤리적 태도가 전해졌다. 내가 연구하고 밝혀내지 않으면 누구도 이 작품을 알지 못할거야, 하는 어떤 결의의 태도.


사실 아무리 같은 분야 연구자들이 모여있어도 자기의 말을 다 이해할 사람은 많지 않다. 학문분과가 미세하고 오랜 훈련과 깊은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제가 박막처럼 얇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자는 학술대회에 10명이 앉아있건 100명이 앉아있건 그냥 무대 위 연기자처럼 독백을 한다. 옛 문헌을 내가 읽고 정치한 글로 써내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고, 모두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큰 상관하지 않는 눈치다. 대중 전달력은 다소 희생하고 엄격한 사료리딩과 역사적 정확도에 초점을 맞춘다. 프랑스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공쿠르상 수상 소설가 앙드레 말로는 오랫동안 꿈을 그리면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고 했는데, 연구자는 자기가 연구하는 것과 닮아있는 것 같기도하다.



하버드대 일본미술사 교수이자 동아시아문명학과장인 멜리사 맥콜믹의 기조연설에서 한국미술사학회의 열정과 노고를 칭찬을 하는데, 약간 으잉 하는 의문스러운 말이 있었다. 점심을 먹으며 유익한 토론을 했는데, 맛있다고 말할 수 없는 맛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이었다. 블랙유머일 수도 있지만 불필요한 표현인 것 같다. 나름 위트를 주려고 한 것일 수도 있지만 기조연설에서 하기엔 적절하지 않다. 한국의 에브리타임격이라고 말할 수 있는 미국의 교수 평가 사이트 ratemyprofessors의 멜리사 맥콜믹에 대한 평가에 한 유저가 she is not an ice queen(새침데기 아니예요, 콧대 높은 여왕님 아니예요)라고 썼는데, 이 부분이 옛날에 인상깊었던 것이 생각나서 스크린샷 캡쳐올린다. 사실 ratemyprofessors의 수익구조는 평판에 민감한 교수들이 안좋은 댓글을 막아달라고 돈을 지불하는 것이라고 암암리에 알려져있다. 우리나라의 댓글알바와 비슷한 느낌이다. 아예 안좋은 평도 아예 좋기만한 평도 다 의미없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그냥 중간정도의 평에 뜬금없이 not an ice queen이라고 어떤 정보를 준다면 그건 눈 여겨봐야할만한 사실이다. 실제로 그런 말이 있으니까 맥락없이 갑자기 근데 그런 사람은 아니예요 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 그때는 그냥 그런가 했는데, 홍상수 영화에서 늘 등장하는, 생각 없이 말을 약간 밉게 하는 캐릭터가 하는 대사같은 느낌의 말을 들으니까 문득 옛날에 봤던 정보가 생각이 났다. "맛 없었어요"라고 심플하게 하거나, 사적인 자리에서 "내 취향이 아니었으니까 다음에는 다른데가요"라고 해결을 보면 될텐데. 공적 연설에서 "결코 맛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던 레스토랑이었으나.."같이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냥 심플하게 나중에 맛있는 거 먹으러가면 되지, 이런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하는게 무슨 의도가 있는지




강연은 별관 강당에서 들을 수도 있고 유투브로도 들을 수 있다. 한영일중 4개국어로 통역이 제공된다. 오전에는 컴퓨터 유투브로 보다가 전시회 보러 오후부터 나가 늦은 오후에는 이동 중에 핸드폰 유투브로 조금씩 들었다. 종료시간이 되니까 아예 꺼져서 뒷부분은 듣지 못했다. 물론 학술대회 특성상 발표집에 논문과 토론문까지 모두 있다. 강연자도 설명을 한다기 보다 문어체의 논문을 읽고, 토론자도 토론문을 그냥 읽고, 토론의 답변이 유의미했다면 언젠가 나중에 다시 논문으로 나오기 때문에 구두발표를 놓쳐도 큰 상관은 없다. 발표집은 온라인에서 pdf로 배포되어있다.


첫 날인 오늘은 조선4개, 일본3개, 청나라2개 발표가 있었다.


조선4개: 조선 궁중회화, 조선중기 태항아리와 후기 어진에 대한 연구

조선 말기(1900년)에 지방 화원에서 어진 화사로 변한 채용신의 인물 연구


일본3개: 쇼무 천황과 쇼소인 보물, 류쿠 국왕 초상화, 일본 궁정의 물질문화


그리고 청나라 2개: 집경조갑, 청 고종 황제의 소상에 대한 연구

여기서 특이한 것은 청나라 연구자 2명 모두 대륙중국이 아니라 대만 타이베이고궁박물원 연사였다는 점.


특히 집경조갑 연구에서 백십건은 상자형 구조의 보물함으로 일본과 유럽의 외래물품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를 청대 다보격과 무엇이 다른가를 비교했다. 토론자는 조선 후기 유행했던 책가도의 형식적 기원이 청대 다보격에서 찾을 수 있는데, 다보격이 아니라 백십건아니냐를 질문했다.


그런데 이런 훌륭하고 흥미로운 주제임에도 현장참석자나 시청자는 대단히 많지는 않았다.



라이브 시청자는 오전, 오후 기준

한국어125, 142명

영어 7, 4명

중국어 2, 11명

일본어 9명, 11명이다.


오전에 컴퓨터로 접속해서 들었으니 오전 중국어 시청자는 나를 제외하면 1명이었던 셈. 현장에서 통역자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정작 시청자보다 통역자의 숫자가 더 많은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왜 그럴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너무 전문적

2) 너무 옛 주제

3) 홍보 부족

이라는 모두 생각할 수 있는 당연한 이유는 차치하고서라도

한국에서 왕실문화가 인기없는 까닭이 하나있지 않나 싶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인물들은 친일논란을 피할 수가 없고 독립과 건국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나라가 망했는데 위정자는 무엇을 했느냐는 인민들의 분노가 있었다.


이조가 망했다는 공통된 인식하에, 독립운동은 건국이었던 셈이다.


이승만은 왕가혈통으로 알려져있으나 몰락했고 윗대에 벼슬을 하지못했다고 한다. 이승만 정부는 영친왕의 귀국도 막았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니 정통왕가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인한 일본제국의 항복으로 광복은 기적처럼 주어졌고, 강대국의 패권다툼과 내분 속에 건국이 되고, 다시 냉전구도에 내전을 겪었다. 전쟁터는 한반도였는데 전쟁의 종식은 강대국의 힘으로 이루어졌는데, 종전 후 폐허를 재건하며 먹고사니즘에 바쁘다보니 전통에 대한 관심은 뒷전이었다. 가치를 아는 사람도 많이 죽고, 잘 모르는데 일단 배고프니 문화재이든 아니든 그냥 일본에 팔아버린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군부독재와 싸우고 민주화를 이루어내고 세계화까지 숨가쁘게 달려왔는데, 문득 먹고 살만해져 생각해보니 왕실은 너무 오래 전 일이고, 왕가의 후손이 이런 역사의 분기점에 기여한 바가 없다. 그렇게 왕실문화는 대중의 뇌리에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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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간 한국에서 HS코드 9701.10 품목 ("완전히 손으로 그린 그림, 소묘 및 파스텔") 가장 많이 나간 나라가 미국-베네주엘라-홍콩 순이다. 베네주엘라는 왜? 7위는 이스라엘이다.


성북 반디앤트라소 갤러리에 어쩐지 베네수엘라 직원이 데스크 보고 계시더라니... 

관장님이 남미에서 일하셨다는 것을 누가 알려주었는데


그래도 한국 그림이 미국 다음으로 베네수엘라에 많이 팔렸다니. 통념과 달리 중국 일본이 아니라


그러니까 수익은 친분과 관련이 없다

개인관계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그렇다

잘 안다고 익숙하다고 많이 사는 게 아니다

오히려 보기만 하고 안 살 수도

모든 굿즈나 제품에 적용 가능


그리고 개인적 생각에 돈을 한창 벌고 새로운 시장 개척하는 사람은 너무 바쁘고 뭐가 뭔지 정리할 시간이 없고 밀려오는 일을 쳐내기 바빠서 그 노하우를 공유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언론에 노출도 잘 안되고 인구에 회자도 잘 안된다.

시간에 쫓기고 있는데 자기 일의 형태에 대해 앉아서 분석할 시간이 없지 않을까?


기껏해야 커피타임 술타임만 가능하고 그래서 물이 오른 시장에 대한 알짜정보는 구두로만 전해진다

누군가가 미디어에 나와 비즈니스를 소개하기 시작했다면 벌만큼 벌었거나 투자가 필요해서다

다른 사람이나 돈을 앉히고 자기는 엑싯하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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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수영의 평생 레시피 - 죽을 때까지 나를 먹여 살릴 ‘어남선생’의 쉽고 맛있는 집밥
류수영 지음 / 세미콜론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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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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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지역 공업사들이 밀집해있는 곳에 하나둘씩 소규모 갤러리가 생기고 있다. 코소, 소소, 엔에이, 스페이스유닛4와 상업화랑, PS센터 그리고 형 등. 영국 서더크지역의 버려진 화력발전소를 재활용한 테이트모던이나 중국 베이징의 798예술구 같이 젠트리피케이션된 동네에 젊은 예술가가 진입하는 좋은 사례다. 다만, 한국의 이 갤러리는 모두 엘베없는 건물의 3-5층을 올라가야한다는 것이 특징.


이 지역 갤러리는 이런 식의 계단을 올라가야한다.


개인적으로는 더소소가 가장 가기 어려웠는데 입구를 도저히 찾을 수 없어서 두 바퀴를 뱅글뱅글 돌았다. 그렇지만 콘크리트로 그림을 그렸다니 흥미가 아니돋을 수가. 올라가서는 예상 외로 탁 트인 전망에 감동했다. 세운상가 근처를 대대적으로 재개발하고 공원화한다는 계획을 들었던 적이 있는데, 그 흔적인가보다. 방배의 마지막 거대개발 현대 디에이치, 부산 해운대 신사가지, 반포재건축 등 우리도 일본의 토라노몬힐즈나 아자부다이힐즈 못지 않게 권역 전체를 커뮤니티 시스템화하고 뒤집어 엎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진행 중이다. 국제정세가 요동쳐서 건축자재가 비싸져서 수익실현하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말이다.




외부 경관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그림으로 눈길을 돌린다. 배종헌 작가는 골목의 콘크리트 벽, 시멘트 잔재, 조각상 표면의 풍화흔적 같이 도시의 피부에 주목한다. 어쩌면 도시의 씹창나 피부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콘크리트. 그러나 아무도 관리해주지 않은 버려진 도시의 생얼굴. 그 민낯 위에 축적된 물성과 자국에 주목하는 작가는 인간이 구축한 문명의 표면에서 배제되고 망각된 흔적들을 드러낸다. 관찰의 시선이 일상에 뿌리박기에 가능한 일이다. 전시주제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럼에도 그곳에 있는 상태"라고 하였듯, 그러한 도가적 무용과 무위가 콘크리트에서 발견될 수 있을까?


작가는 장소성과 행위성의 부재 속에서도 여전히 작동하는 존재의 잔향을 탐구한다. 일상에서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크랙투성이 벽, 노후한 건물의 질감, 조각의 뒷면 등에서 새로운 풍경을 발굴해 회화에 옮겨와 번역한다. 그리하여 시선의 위계와 문화적 판별 기준을 교란하려는 조형적 저항을 추구한다. 보는 이는 마치 자연과학자가 외견상의 결과물만을 통해 보이지 않는 원리와 생태를 역추적하듯, 미술작품이라는 최종결과물을 보고 작가의 감춰진 생각을 거슬러 오른다. 곰곰히 생각하면서 눈으로 찬찬히 뜯어보면서 전시장을 나직히 걸으면서.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왜 이 형상을 선택했는가?"

"왜 이 재료를 썼는가? 그리고 이 형상에 이 재료가 적합한가?"

"이 작품 배치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 세 가지는 각각 미시적 차원의 조형 분석, 소재 분석, 거시적 기획 분석으로 나뉘며, 이 셋의 교차점에서 배종헌 작업의 의미망이 형성된다.


가장 눈에 띄는 〈비너스의 등〉은 작가의 생각을 가장 잘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다. 루브르 박물관의 대표 조각상인 〈밀로의 비너스〉는 부단히 모방되고 유통되는 전형적 미의 표상이나 대부분의 이미지 소비자는 그 조각의 전면만을 소비한다. 뒷모습은 전시 공간 내에서도 조명에서조차 배제되기 일쑤다. 그런데 배종헌은 이 소외된 뒷면에 주목한다. 조각을 한 바퀴 빙 둘러서 걷다가 그가 시선의 사각지대에서 포착한 비너스의 등은 고대 조형미에 가려진 무용성의 공간이다. 그 무용한 공간은 동시에 미술제도와 시각권력이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지워내는지를 증언한다. 무엇을 실제로 보았는가?, 라는 행위자의 주체성이 관람의 핵심인데, 선택된 작품의 선택된 표면은 누군가의 취사선택이라는 점에서 관객의 주체성이 탈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등은 신체의 일부라기보다는, 미술제도의 뒷면,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진 것들의 표면을 시각화한 것이다. 거기엔 묘한 고요와 동시에 강한 현실감이 함께 공존한다. 앞부분의 이상화된 신화가 만들어낸 절대적 미의 규범과는 달리, 뒷면은 그 규범에서 이탈한 감각, 곧 대체되지 않는 우연성과 비표준의 정서, 심지어 비애감마저 품고 있다. 강하게 긁힌 듯한 등, 그러나 피나 뜯긴 생물의 흔적보다는 콘크리트의 파열같은 느낌이다. 이는 조형으로 그 콘크리트의 느낌을 전한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비너스의 등은 시멘트를 사용한 작품은 아니다.


그 앞의 다른 작품은 아예 시멘트라는 산업적이고 무기질적인 물질을 소재로 사용했다. 



창동표착일록- 무명산순례 Étape 06_ 콘크리트 바닥의 줄눈흔, 균열, 도시먼지, 2023-2024, 자작나무패널에 시멘트와 유채, 162.2x112.1cm 




무행無行_콘크리트 균열과 페인트 박락, 도시 먼지, 2024, 목판에 유채, 31.9×27.7cm


시멘트로 지질학적 침전처럼 자연스럽게 드러난 풍경을 그려낸다. 자연을 그리지 않았는데 자연스럽다. 콘크리트는 건축물의 내장재에서 외부로 노출되기에 풍화되고 오염되며 흠집이 생기는 물성이 특이하다. 시멘트가 마르고 양생되는 것도 물감이 마르는 것과 같다는 점에서 회화적이다.


특이한 것은 시멘트를 얇게 발랐다는 점이다. 흔히 상상하는 브루탈리즘적 질감이나 육중한 물성보다는 오히려 얇고 침잠하는 회색 유화같다. 차라리 캔버스에 두텁게 쌓은 마티에르감이 더 돌출감이 있었겠다. 올드 홀랜드나 윌러엄스버그같은 입자감있는 물감에 임파스토로 볼륨감을 준다며 말이다. 배종현 작가는 석회질 성분의 박편처럼 얇은 콘크리트 표면 위에 미세한 필치로 색을 얹어서 작품 설명이 없었다면 재료가 시멘트인지 모르고 지나칠 법했다. 여기서의 콘크리트는 단순히 구조적 기반이 아니라 도시의 지층이자 기억의 단면이기 때문에 나이테처럼 미세하게 발랐으리라 생각한다. 고의적으로 마티에르를 억제한 듯한 그의 콘크리트는 단단함보다 침묵을 견고함보다 시간의 퇴적을 드러낸다. 이러한 재료적 전략은 원래 의도가 아닌 곳에 사용된, 주기능을 상실한 물질의 표면이 품을 수 있는 시적 감각을 복원하기 위함이다.


전시장에는 대형의 〈비너스의 등〉 옆에 소형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같으나 다르다. 보통 갤러리에서는 작품크기의 다양성은 상업적 목적과 직결된다. 즉, 고가의 대형과, 가성비의 소형, 이러한 가격대 다양화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의 배열은 상업적 기획을 넘어 주제의 변주와 반복, 비교분석을 위한 배치같은 느낌이 강했다.


작품의 크기를 달리함으로써 관람자는 단일 시점에서 벗어나 시차적 시야를 갖게된고 다채로운 감각적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대형 작품은 관객을 압도하는 존재감을 통해 비너스의 등이 가지는 사회적 맥락을 환기시키고 소형 작품은 마치 스케치처럼 비공식적이고 친밀한 감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크기 대비는 흡사 마이크로필름과 대형 지도로 구성된 고고학적 전시로 비유해볼 수도 있겠다. 비너스의 등이라는 조형 요소를 탐색하는 두 개의 상이한 관점과 시간을 함께 전시한다. 그리고 되묻는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믿는 것, 정도라 여기는 것, 아름답다고 정의한 것들은 과연 무엇인가? 그 반대편, 소외되고 무용하다고 간주된 것들은 왜 그렇게 되었는가? 조각의 뒷면, 콘크리트의 자국, 시멘트의 잔흔, 상처 입은 표면은 미적 가능성이 없는가?


그러한 생각의 실타래 속에서 보는 이는 무심코 지나쳤던 풍경 속을 다시 응시할 수 있는 힘을 기른다. 침묵하는 재료의 물성을 매개로 감각의 권력 구조와 가치의 위계를 비평할 수 있게된다. 미를 재정의하자, 라는 현대예술의 선언은 시시하다. 무엇을 어떻게? 라는 팔로우업 퀘스쳔이 없다면 진부한 외침이다. 우리는 이제 존재의 조건으로서의 보잘것없음, 무용함, 비가시성을 주목해보자. 배종현이 그린 비너스의 망가진 콘크리트풍 뒷모습과 시멘트 소재로 그린 도시의 지층회화를 보면서


또한 그 시선에 끝에 걸린 도시의 재개발 풍경을 보면서. 도시의 민낯. 씹창난 피부. 콘크리트. 풍화, 부식, 침식, 파열을 보면서. 생얼굴을 사랑할 수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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