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담 화이트큐브에 다녀왔다. 후난성출신으로 광저우미대졸업 후 프랑스에서 8년 활동하다가 다시 광저우로 귀국해 활동하는 저우리 작가의 전시가 그저께 열렸다. 전시는 보기 편하고 직관적인 추상계열인데, 둔황의 석굴과 폼페이의 프레스코화가 묻어나는 벽화풍이라 특이하다. 바랜 꽃 그림을 통해 시간의 변화와 메타모포시스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참고로 화이트로 시작하는 갤러리는 이렇게 외우자.
서울역 ㅅ→화이트스톤 ㅅ, 청담의 ㅁ(네모)→화이트큐브(cube), 헤이리 화이트블럭(예술인마을=커뮤니티블럭)
급변하는 시대에 회화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회화는 다른 리듬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해준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무한한 양의 이미지와 텍스트를 소비하는 우리들. 정보가 경이로운 속도로 눈앞을 스쳐 지나가지만 대부분은 무용지물이다. 우리의 몸속으로 스며들지도 못하고, 기억 속에 자리잡지도 못하고, 감정과도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러나 회화는 다르다. 그것은 느린 예술이다. 그 평면을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 걸어야하고, 걷다가 멈추어야 하고, 온전히 응시해야 하며, 느끼고 체험해야 한다. 회화는 다시금 우리에게 신체의 존재를 자각하게 하고 정신의 질서를 회복하게 한다.
화이트큐브의 전시장을 거닐며 저우리의 작품을 보는 경험은 마치 봄의 흐드러진 벚꽃축제, 한여름밤을 수놓는 불꽃놀이, 가을의 애잔한 단풍과 어둑한 겨울하늘에 빛나는 LED 드론쇼를 보는 경험과 닮았다. 춤추는 듯 흩날리는 화면을 볼 때의 흥분, 경탄과 바로 이어지는 무상함. 한순간의 시각적 향연에 눈에 멀다가 이내 집에 돌아가면 망막에 맺힌 그 장면이 잊혀지는 것 같은 화려함의 무상함. 각양각색의 불빛과 다채로운 꽃잎이 하늘을 가르며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지만 눈부신 순간을 남긴 뒤엔 아무것도 머무르지 않는다. 특별한 감흥은 분명히 있으나 다시 되돌아갈 수 없다. 돌아갈 수 없는 젊음, 첫사랑의 짜릿함과도 같은 것. 어떤 아름다운 광경을 볼 때는 심지어 카메라를 꺼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완전히 몰입해 주변의 환호는 백색소음이 되고 눈은 붙박이마냥 좀처럼 떼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당연하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기분.

푸른 것 중 하나, 즉, 밤하늘은 형언할 수 없는 허구다. 특별한 리듬도, 서사도, 가늠할 수 없는 깊이에, 유의미한 공간관계도 없이, 마치 모든 모퉁이가 보이지 않고, 빛의 궤적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리하여 인간은 그 사이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도 없다. 밤하늘의 특별함은 고요함과 불안이 공존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저우리는 그 밤하늘의 고요한 리듬을 캐치해냈다. 우리는 그 고즈넉한 화면에서 무엇을 응시하게될까? 저우리는 우리와 함께, 혹은 우리의 이전에 무엇을 응시하고 있었을까?
날아다니는 선과 떠도는 꽃은 구체적인 조형이나 선명한 사물보다는 어떤 감정으로 연결되는 미로다. 희망, 동경, 감정, 그리고 작가가 우주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사적인 감정으로 얽힌 미로같다. 거대한 스케일은 세밀한 필치를 뒤흔들고 외향적인 구도는 내향적인 감정을 전달하며 화면은 작은데서 붕괴되어 큰 울림의 진폭으로 나아간다. 내면의 정신적인 명상이 색면의 덩어리라기보다 잘게 부서지고 다듬은 선으로 잘린다. 감정이 편린으로 절단되고 전체적인 정서는 수축하다가 어느 순간 관객에게 직설적으로 말을 건내며 대폭발한다. 안과 밖, 크고 작음, 전체와 부분은 이렇게 하나에서 만난다.
이러한 화면 속에서 추상과 비어있음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저우리의 회화는 추상적인 도식이나 일관적인 패턴을 형성하려는 시도는 아닌 것 같다. 형태를 추출하거나 조합하여 만들어진 인위적 추상도 아니고, 현실의 사물에서 분리되어 압축된 구조적 표현도 아니다. 외려 거침없는 필치로 호쾌히 그린 기운생동의 공간에서 직관적으로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외, 그리지 않음으로서 그리는 도교적 화면이다. 비어있음을 붓끝으로 밀어내고 시간성의 흐름을 만든다. 구상의 소거이고 조형의 제거라고 함직하다. 서양 추상표현주의의 부정적 공간이나 전통 산수화의 여백의 시적 공간도 아니다. 선과 조형을 그리되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공간에는 기운과 움직임과 펼쳐짐과 주름, 여밈과 스밈, 구름과 감정, 거대하고 만질 수 없는 격류, 말로 서술할 수는 없으나 침묵으로 감각될 수 있는 정신적 차원이 있다.

당대의 시각적언어가 보여주어야 할 하나의 상태로 저우리는 뚜벅뚜벅 나아간다. 겉으로는 빈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관객이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을 자각하게 하여 회화의 존재 방식이 부단히 변화하고 있음을 느끼도록한다. 회화의 에너지는 동기감응의 흐름이자 정신적이며 신체적인 합일, 언어이자 무언, 감정이자 이성이다. 푸른색은 흐르고, 번지고, 스며들고, 분홍색은 분출하고, 타오르고, 폭발하며, 흰색은 증발하고, 확산되고, 떠오른다. 서양적 맥락에서와 같이, 고정되어 포집할 수 있는 색의 레이어가 아니라 감각될 수 있는 존재 자체다. 하여, 회화는 시대를 관통하며 정신의 심연으로 뻗어나가 전생과 후생의 우리 모두와 대화한다.
회화가 정신적인 것이라고 믿어왔다. 회화는 쓸모 있는 것, 수익을 창출하는 것만이 아니다. 회화는 우리 존재의 증거이자 감정의 그릇이고, 의식의 투영인 한편 신체의 연장이다. 이러한 특성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저우리의 캔버스는 묘사하기보다 기록한다. 몸과 감정의 움직임이며, 그 너풀너풀 흐르는 궤적이며, 잊고있었던 호흡의 흐름과 에너지의 번뜩임같은 것들을 말이다. 우리는 터렐의 간츠필드의 중국적 현현, 오래 그 자리에 존재하며 풍화되는 벽화풍 회화를 보기 위해 저우리가 있는 화이트큐브로 발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