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계 역사학자이자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니샤 맥 스위니(Naoíse Mac Sweeney) 책이 번역되었다. 펭귄에서 2023년에 나왔는데 10-20년 후 번역되는 케이스도 많은 역사학분야에서 이례적으로 빨리 번역되었다.

아일랜드계 이름이라 나오이스가 아니라 니샤로 읽는다. 작은 아씨, 레이드버드 등으로 유명한 시어샤 로난(Saoirse Ronan)도 이렇게 읽는다. ao합쳐서 이로 읽는다.


서양은 단일하지 않다. 목적에 의해 만들어졌고, 후대에 구성되었고, 필요에 의해 발명되었다, 라는 주장은 이미 학계에서도 검증되고 대중에게도 널리 퍼져있는 주장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에드워드 사이드, 블랙 아테나를 쓴 마틴 버널, 폼페이의 메리 비어드가 이미 서양은 단일한 문명체가 아니며, 그리스로마 중심주의, 르네상스의 재해석, 계몽주의적 전통 모두역사적으로 구성되었다고 수차례 일갈했다. 고인물이다 못해 화석이 된 이야기다. 그런데 무엇이 특별한가?


인종주의와 제국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서양이라는 오래된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은 아닌가?

특별한 점은 기존 비판이 제국사 비판, 지성사적 접근으로 거시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이 책은 14명의 개별 인물의 생애를 통해 퀼트형 전기적 역사서술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인도 동양, 아프리카의 경계를 명확하게 긋지 않았다는 익숙한 헤도로도토스로 시작했다가 특히 사피예 술탄이나 기독교 개종한 앙골라의 은징가나 남성 교양인의 전유물 시를 짓는 여성노예 필리스 휘틀리 같은 여러 여성, 소수자를 발굴해서 작은 인물을 통해 거대 담론을 드러냈다.


또한 서양성이라는 개념이 상속된다는 점을 제기했는데, 이 상속은 선택적이다. 아까 말한 필립스 모리스는 고전과 시에 정통했지만 "노예화된 유명인 enslaved celebrity"였고 백인 주류 사회는 진정한 서양의 후예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서삼경, 전서와 초서에 정통하고 국악을 전공한 동남아시아인, 흑인, 인도인이 있다면 우리도 진정한 우리문화의 후예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역으로 할 수 있다. 과연 주류가 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이 책의 이야기는 서양을 케이스스터디한 것일 뿐, 서양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문화가 다 문화적으로는 개방적인 듯 보이나, 인종, 계급, 성별에 따라 배제적으로 작동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펭귄에서 출판되었는데 읽기 쉬운 편이다. 영어 원서를 보면 조금 더 알 수 있다. 기존 탈서양 비판은 대중적이지 않았다. 술술 읽기 어려웠고 고매한 학술 언어에 갖혀있었다. 각주도 많았고 다른 인접분야 이론과 학자명이 수없이 튀어나왔다. 박식한 빌 브라이슨이 튀는 문체로 종횡무진 역사를 서술한 것이 가독성이 좋으나 스펙트럼이 넓은 책의 예외다. (우리나라에는 고 남경태 선생이 있었다)



원서는 영국 12파운드, 미국 17달러, 약 2만1천원선의 400페이지짜리 책이다. 펭귄은 100% 친환경 재생지라 가벼워 들고 다니기 좋다. 물론 재질 냄새는 어쩔 수 없지만. 그리고 친환경이라고 홍보하고 사실 비용절감이 목적이다.


한국은 3만2천원(10% 할인 후 2만9700원)이다. 종이재질이 더 좋고 더 무거워 들고다니기 어렵다. 사실상 소장용이다. 한국인은 이런 고급스러운 인문학분야는 양장이 아니면 사질 않는다. 문고본 인문학책은 팔리지 않는다.


이 책에서 다룬 14명 목록은 이렇다

제1장 순수성을 거부하다: 헤로도토스

제2장 아시아계 유럽인: 리빌라

제3장 고대 세계의 국제적 계승자: 알킨디

제4장 재등장한 아시아계 유럽인: 비테르보의 고프레도

제5장 기독교 세계라는 환상: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

제6장 고대를 재상상하다: 툴리아 다라고나

제7장 미답의 길: 사피예 술탄

제8장 서양과 지식: 프랜시스 베이컨

제9장 서양과 제국주의: 앙골라의 은징가

제10장 서양과 정치: 조지프 워런

제11장 서양과 인종: 필리스 휘틀리

제12장 서양과 근대성: 윌리엄 글래드스턴

제13장 서양과 그 비판자들: 에드워드 사이드

제14장 서양과 그 적수들: 캐리 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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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 화이트큐브에 다녀왔다. 후난성출신으로 광저우미대졸업 후 프랑스에서 8년 활동하다가 다시 광저우로 귀국해 활동하는 저우리 작가의 전시가 그저께 열렸다. 전시는 보기 편하고 직관적인 추상계열인데, 둔황의 석굴과 폼페이의 프레스코화가 묻어나는 벽화풍이라 특이하다. 바랜 꽃 그림을 통해 시간의 변화와 메타모포시스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참고로 화이트로 시작하는 갤러리는 이렇게 외우자. 

서울역 ㅅ→화이트스톤 ㅅ, 청담의 ㅁ(네모)→화이트큐브(cube), 헤이리 화이트블럭(예술인마을=커뮤니티블럭)


급변하는 시대에 회화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회화는 다른 리듬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해준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무한한 양의 이미지와 텍스트를 소비하는 우리들. 정보가 경이로운 속도로 눈앞을 스쳐 지나가지만 대부분은 무용지물이다. 우리의 몸속으로 스며들지도 못하고, 기억 속에 자리잡지도 못하고, 감정과도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러나 회화는 다르다. 그것은 느린 예술이다. 그 평면을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 걸어야하고, 걷다가 멈추어야 하고, 온전히 응시해야 하며, 느끼고 체험해야 한다. 회화는 다시금 우리에게 신체의 존재를 자각하게 하고 정신의 질서를 회복하게 한다.


화이트큐브의 전시장을 거닐며 저우리의 작품을 보는 경험은 마치 봄의 흐드러진 벚꽃축제, 한여름밤을 수놓는 불꽃놀이, 가을의 애잔한 단풍과 어둑한 겨울하늘에 빛나는 LED 드론쇼를 보는 경험과 닮았다. 춤추는 듯 흩날리는 화면을 볼 때의 흥분, 경탄과 바로 이어지는 무상함. 한순간의 시각적 향연에 눈에 멀다가 이내 집에 돌아가면 망막에 맺힌 그 장면이 잊혀지는 것 같은 화려함의 무상함. 각양각색의 불빛과 다채로운 꽃잎이 하늘을 가르며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지만 눈부신 순간을 남긴 뒤엔 아무것도 머무르지 않는다. 특별한 감흥은 분명히 있으나 다시 되돌아갈 수 없다. 돌아갈 수 없는 젊음, 첫사랑의 짜릿함과도 같은 것. 어떤 아름다운 광경을 볼 때는 심지어 카메라를 꺼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완전히 몰입해 주변의 환호는 백색소음이 되고 눈은 붙박이마냥 좀처럼 떼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당연하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기분.


푸른 것 중 하나, 즉, 밤하늘은 형언할 수 없는 허구다. 특별한 리듬도, 서사도, 가늠할 수 없는 깊이에, 유의미한 공간관계도 없이, 마치 모든 모퉁이가 보이지 않고, 빛의 궤적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리하여 인간은 그 사이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도 없다. 밤하늘의 특별함은 고요함과 불안이 공존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저우리는 그 밤하늘의 고요한 리듬을 캐치해냈다. 우리는 그 고즈넉한 화면에서 무엇을 응시하게될까? 저우리는 우리와 함께, 혹은 우리의 이전에 무엇을 응시하고 있었을까?


날아다니는 선과 떠도는 꽃은 구체적인 조형이나 선명한 사물보다는 어떤 감정으로 연결되는 미로다. 희망, 동경, 감정, 그리고 작가가 우주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사적인 감정으로 얽힌 미로같다. 거대한 스케일은 세밀한 필치를 뒤흔들고 외향적인 구도는 내향적인 감정을 전달하며 화면은 작은데서 붕괴되어 큰 울림의 진폭으로 나아간다. 내면의 정신적인 명상이 색면의 덩어리라기보다 잘게 부서지고 다듬은 선으로 잘린다. 감정이 편린으로 절단되고 전체적인 정서는 수축하다가 어느 순간 관객에게 직설적으로 말을 건내며 대폭발한다. 안과 밖, 크고 작음, 전체와 부분은 이렇게 하나에서 만난다.


이러한 화면 속에서 추상과 비어있음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저우리의 회화는 추상적인 도식이나 일관적인 패턴을 형성하려는 시도는 아닌 것 같다. 형태를 추출하거나 조합하여 만들어진 인위적 추상도 아니고, 현실의 사물에서 분리되어 압축된 구조적 표현도 아니다. 외려 거침없는 필치로 호쾌히 그린 기운생동의 공간에서 직관적으로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외, 그리지 않음으로서 그리는 도교적 화면이다. 비어있음을 붓끝으로 밀어내고 시간성의 흐름을 만든다. 구상의 소거이고 조형의 제거라고 함직하다. 서양 추상표현주의의 부정적 공간이나 전통 산수화의 여백의 시적 공간도 아니다. 선과 조형을 그리되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공간에는 기운과 움직임과 펼쳐짐과 주름, 여밈과 스밈, 구름과 감정,  거대하고 만질 수 없는 격류, 말로 서술할 수는 없으나 침묵으로 감각될 수 있는 정신적 차원이 있다.


당대의 시각적언어가 보여주어야 할 하나의 상태로 저우리는 뚜벅뚜벅 나아간다. 겉으로는 빈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관객이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을 자각하게 하여 회화의 존재 방식이 부단히 변화하고 있음을 느끼도록한다. 회화의 에너지는 동기감응의 흐름이자 정신적이며 신체적인 합일, 언어이자 무언, 감정이자 이성이다. 푸른색은 흐르고, 번지고, 스며들고, 분홍색은 분출하고, 타오르고, 폭발하며, 흰색은 증발하고, 확산되고, 떠오른다. 서양적 맥락에서와 같이, 고정되어 포집할 수 있는 색의 레이어가 아니라 감각될 수 있는 존재 자체다. 하여, 회화는 시대를 관통하며 정신의 심연으로 뻗어나가 전생과 후생의 우리 모두와 대화한다.


회화가 정신적인 것이라고 믿어왔다. 회화는 쓸모 있는 것, 수익을 창출하는 것만이 아니다. 회화는 우리 존재의 증거이자 감정의 그릇이고, 의식의 투영인 한편 신체의 연장이다. 이러한 특성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저우리의 캔버스는 묘사하기보다 기록한다. 몸과 감정의 움직임이며, 그 너풀너풀 흐르는 궤적이며, 잊고있었던 호흡의 흐름과 에너지의 번뜩임같은 것들을 말이다. 우리는 터렐의 간츠필드의 중국적 현현, 오래 그 자리에 존재하며 풍화되는 벽화풍 회화를 보기 위해 저우리가 있는 화이트큐브로 발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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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딩때는 입시가 지상과제였지만

대학교에서는 이제 전공가지고 무엇을 할지 막막하다

미대는 안그라픽스의 "미대 나와서 무엇을 할까"

미술사는 혜화1117의 최열 대담을 보면 좋다

솔직한 업계의 이야기

이 바닥에서 어떤 지식을 생산하고 어떻게 공부하고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이야기

즉, 입시의 허들을 넘기 위한, 확실한 목표인 자격증을 얻기위한, 한 번의 공부로 평생의 공부를 종료하기 위한 공부가 아닌

평생 살아가면서 과정으로서 공부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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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레드에 올라온 이 책 리뷰.


https://www.threads.com/@galim_arch/post/DLbZV4_PLRP?xmt=AQF0NE49mFhBmu4KKfv04aj8zRb7GWIsEfauPWnLDJLMlA


나도 이 책 재밌었다.


투시도, 모델, 기계제도 있는 부분이요 저는 그보다 예시 부분에 폼페이와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 부분도 재밌었어요 서양의 투시도에 따른 원근법이전에도 중국도 나름 깊이감을 주었던 기법이 있었는데 특히 건축도에서 많이 드러났다고.. 비잔틴 말하면서 신앙의 세계가 쇠락한다는 경계심으로 모자이크가 점점 더 벽 아래로, 평민을 향해 내려온다는 통찰도 재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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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게임 시즌3 보았다.

1. 10년이면 금수강산도 변하고
권불십년이라고 했으니 옛말엔 틀린 게 없어라
넷플 최대 히트작도 4년을 못 버텼다

2. 네러티브가 힘을 잃었고, 따라서 설득력이 없다. 주인공 성기훈도, 서브캐릭 두 명 황형사(외부에서 침투)와 노을(내부에서 혁파)도, VIP의 관음증과 장기말 연출의 희화화도, 임산부와 아이의 핍진성도, 결말도 모두 아쉽다. 연출, 설정과 서사에서 모두 맥아리가 없다.

우선 주인공이 힘이 없다. 구조를 바꾸고자 하는 반란(시즌2)이 실패한 결과 성기훈은 시즌3내내 침울하고 개인의 도덕만이라도 지켜보려하는데 그의 수수방관적 태도는 설득력이 없다. 특히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성기훈이 먼저 공격하지 않지만 게임법칙상 누군가는 죽어야해서 부작위로 이긴다. 성기훈은 유일하게 강대호를 공격하는데 반란 실패의 탓을 해서다. 그러나 실패의 원인을 한 사람에게 전가함으로써 희생양을 삼으면 애써 빌드업한 성기훈의 특별한 면모가 사라지고 도덕적 편리주의를 택하게 된다. 이 사람만 아니었다면 달라졌을텐데하는 남탓, 혹은 책임전가 과연 그렇게 모두를 지키려고 했던 성기훈의 마음이 지향할 바로 적절할까


모두가 서로 죽고 죽이는 아수라 속에 혼자 양심을 지키겠다고 남에게 먼저 칼을 꽃지 않아 주변이 내분을 일으키거나, 실수로 죽거나, 결과적으로 두 명은 자살하게 만든다. 이것이 과연 도덕적 성기훈의 말로가 맞을까? 심지어 마스터가 살 방법을 알려줘도 쓰지 않는데, 마스터(이병헌)와는 달리 적이라 해도 자고 있을 때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심적인 루트를 택하는 것 같지만 결국 적이든 주변인 중 누군가는 죽어야한다는 점에서 그가 선택한 방향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아무런 적극적 행동도 안하는 것 같아 무책임하고 수수방관적 자세만 취하는 것 같이 보인다.

탄창 안 갖다준 해병대 사칭범을 내란 실패의 이유를 물어 죽이고 싶은 기훈. 그를 노려보며 "너 때문이야"라고 책임전가하는데 대호를 타겟삼고 도덕적 편리주의를 택하면 시즌1,2에서 빌드업했던 성기훈의 캐릭터가 무너진다. 다른 면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도 감정의 지배를 받는 인물이었구나.


이 모든 것이 맥아리가 없는 이유는 성기훈이 주인공인 이상 게임 끝까지 데려가기 위해 그에게 덤비는 캐릭터가 모두 부작위로 죽기 때문이다. 성기훈은 손대지 않고 코를 푼다는 뜻. 남들은 다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죽고 죽이는데 성기훈에게 덤비는 인물은 모두 죽는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도덕과 양심을 지키려고 했던 성기훈이 후대(딸 성가영)에게 남기는 유산이 도덕과 양심이 아니라 돈(카드)라는 점이다. 그래서 결론도 힘이 없다. 내부개혁은 실패, 캐릭터도 힘이 없어, 도덕과 양심은 실패한 것. 그래서 주인공은 연출적으로도 설정상으로도 맥아리가 없다.

주인공이 안으로부터 개혁을 도모한다면 밖에서 지원하는 세력도 있어 양쪽에서 게임의 구조를 변혁하려는 것이 시즌2의 묘미였다. 그런데 황형사 역시 힘이 없다.

서브 캐릭 황형사 역시 시나리오면에서, 교훈적인면에서도 모두 맥아리가 없다. 일단 빙빙 돌다가 침투는 실패한다. 들어갔다가 아무 성과없이 돌아온다. 보조해주는 대원도 죽는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최이사와 프로젝트 하나 같이 했다고 불법 도박, 절도, 사기 등 전과9+1범인 자를 교도소 복역 6개월 이후 마중나간다는 점이다. 범죄도시3와 킹덤에서 활약한 전석호 배우가 서글서글한 캐릭터를 잘 연기했지만, 연기와 별도로 최이사의 범죄경력과 황형사의 경찰의 양심은 같이 가면 안된다. 그래서 황형사도 무너졌다.

또 하나의 서브 캐릭은 노을이다. 황형사가 물리적으로 밖에서 침투하려고 한다면, 노을은 관계자의 입장에서 구조를 무너뜨리려고 한다. 그러나 노을도 실패한다. 노을이 화가를 도와주는 것은 게임 바깥에서 들고 온 개인적인 친분(그것도 자기만 알고 상대는 모르는)때문이다. 그닥 잘 설득되지 않는 이유다. 딸아이가 아프다는. 그래서 그 한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다른 수많은 젊은이들을 죽인다. 선택적 사랑이고 차별적인 편의주의다. 모르는 익명의 존재는 그냥 죽여도 되는가? 장기 적출 비리 요원을 포함해서 수많은 이들을?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노을에 의해 무너지는 구조가 여럿있다. 노을은 화가를 병정으로 손쉽게 둔갑해서 내부 요원 꼭두각시를 만든다. 그리고 원하는 탈출 보트를 협상을 통해 얻어낸다. 다시 돌아가 환풍기를 통해 외부에서 침투해 부대장실까지 잠입하고 손쉽게 제압한다. 내외부 침투가 모두 뜻대로 잘 이루어졌기 때문에 게임 진행 요원의 권력이 무너진다. 너무 잘 뚫려서 힘이 없어 보인다. 스타워즈 제국군, 스톰트루퍼처럼.

이에 더해 시즌1에는 그렇게도 마스크를 벗지 않던 요원들이 너무 자주 쉽게 벗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엔데믹 이후에 변화된 풍습이라고 느슨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요원의 신비주의가 너무 쉽게 무너지면 그들의 권력도 무너지기 때문이다.

VIP는 꼭 영어에 능숙한 중년 백인 남성이어야하는가? 물론 젊은 중국계 여성이 등장하긴 했지만, 여전히 중년 백인 남성이 다수이고, 그들의 단합에 금을 내는 메기라기보다는 그들에게 화이트워싱된 한 패거리같다. 굳이 그 멀리서 헬리콥터 타고 와서 참가자들이 투표하는 것을 지켜보고 15분씩 머뭇거리는 것을 루페로 관찰하는 것이 재밌을까? 그런데 그들이 관중석에서 지켜보는 장면에서 불편함이 느껴진다. 참가자들에게는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두고 하는 처절한 생존투쟁이 희화화되는 것이다. 물론 시즌1에서도 그런 면모는 있었다. 그런데 시즌3에서 사람이 죽을 때 장기말을 치는 연출을 함으로써 생명의 죽음을 너무 단순화하고 희화화하고 게임으로 축소화하는데, 조롱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결말에 이르러 딱지맨은 여전히 건재해서 게임은 지속된다.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다. 도덕과 양심이 실패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각자도생, 서바이벌 게임과 배금주의는 태평양을 건너서도 다른 나라에서도 지속된다. 딱지맨 도깨비에서 딱지우먼 갈라드리엘로 바뀌 것일 뿐. 그렇다면 구조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허탈하다.

3. 감독이 어디에서 트위스트를 넣어 색다른 면모를 주려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캐릭터를 언제 창의적으로 퇴장시킬지 계산한 것이 보인다. 열쇠의 비밀, 조현주, 남규, 타노스 등장, 줄넘기 방해꾼, 새벽, 도시락과 그의 결말, 명기의 돌변 등등.

4. 배우 연기는 준수한 편. 각본도 수차례 다듬은 것 같은데 연출과 방향성이 이를 다 살리지 못했다.

노재원의 일진연기와 고소공포증연기, 이다윗의 찐따연기와 환각연기 성가영의 아파탓 대사, 최재섭의 북한억양, 강하늘의 책임회피와 분노조절장애연기 같은 훌륭한 부분이 있다. 강애심의 대사전달과 감정연기도 일품. 물론 이정재와 이병헌배우의 눈으로만 말하는 표정연기도 압권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욕을 먹을, 비겁하고 돈에 멀고 권력지향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중년 남성 5인조도 캐릭터는 잘 살렸다. 큰소리만 치는 송영창 배우나 무식하다는 말에 벌컥하는 최귀화 배우 등등.

그런데 이들의 그 중년 남성 빌런 캐릭터를 잘 살려서 의미가 있으면 연기도 칭찬을 받을텐데 전혀 아니어서 아쉽다. 이 중년 남성들의 비겁함을 부각시킨 이유는 성기훈의 도덕과 양심을 상대적으로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다. 이들이 협잡해서 성기훈을 몰아세우는 부분은 화면에서 삼각형 위에서 몰아세우는 연출로 잘 표현이 되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성기훈은 명기를 포함한 이 꼴불견 남성 6인조의 내분과 배신 등 새옹지마로 이기게되니 빌런에게 연출의 방점을 준 이유가 없어진다. 빌런의 묘사가 많아져서 아우라를 강화하는 이유는 오직 메인 캐릭터가 그들을 깨부셨을 때의 카타르시스를 위함인데, 메인 캐릭터는 그들을 직접적으로 깨부신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고구마대사, 분노유발 꼰대대사로 관객의 불편함만 더할 뿐이다.

5. 이미 임산부가 게임에 참가했다는 점에서 예상한 것들이 있다.
임산부 캐릭터는 시놉시스상으로는 매력적이었겠지만 안 하느니만 못한 계륵이 되었다. 특히 임산부 연출은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동양인은 아이를 낳고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없다. 자기 배가 아파서 난 아이라면 남에게 선뜻 넘겨줄 수 없고, 아이를 두고 극단적 선택을 할 수 없다. 먹은 것도 없는 데 모유를 줄 수도 없고, 게임을 할 수도 없다. 갓 태어난 아이가 시끄럽게 우는데 술래가 바로 와야하지 않을까? 30분 게임시간 중 10분만에 분만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2시간도 안되어 깨서 우는 갓난쟁이의 기저귀를 언제 갈아주는가? 어린 조유리 배우가 경험해보지 않은 임산부 연기를 한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어색함과 CG의 어색함은 차치하고서라도.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총 쏘아 수많은 참가자 생명을 앗아간 병정이 베이비에게 우유를 먹이는 장면이다. 이것은 용납할 수 없다. 같은 손으로 생명을 박탈하다가 다시 생명을 보살핀다는 연출은 설득이 안된다.


6. 출연료에 광고에 제다이 출연(디즈니 드라마)에 글로벌 인지도까지, 456억원 어치를 번 사람은 현생에서도 이정재 배우

7. 왜 시즌3 6시간을 함께 공개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으나 아마 VFX 후반작업때문이었을 것 같다.
베이비신, 보트추격전, 마지막 게임 기둥 브릿지 등에서 CG티가 너무 난다.

몰입감이 깨진다.

8. 시즌3은 난파했다.
전국민의 숙제(시즌1이 흥행한 작품이었으므로 평소 대화소재가 되니까), 해외거주 한국인의 필수교양(외국인과 대화에서 아이스브레이킹용 단골소재가 되니까)인데 정말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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