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제도사, 일러스트레이터, 판화가, 화가(draughtsman, illustrator, lithographer and painter)인 레온 스필리에르트(1881-1946)


독특한 연출, 구도, 색처리, 표정, 선, 조형

보통 한 작가에게 함께 있지 않은 조합들. 공부할만한 가치가 있는 작가


사진1. Femme Au Lévrier (1917) 그레이 하운드 사냥개 옆의 여자


사진2. Vertigo (1908)


사진3. Les Serres Chaudes 9 (1918)


Léon Spilliaert (Belgian, 1881-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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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에서 장어도시락이 우후죽순 등장했다.


작년 5월 7월에 세븐일레븐에서 한끼연구소 훈제오리&민물장어도시락, 정호영카덴 장어도시락을 내놓은 후 제품반응이 긍정적이고 세일즈 퍼포먼스가 좋았던 모양인지 올해는 GS 혜자, CU 보양, 이마트24 최현석 브랜드로도 등장했다.


(위 사진 2개는 작년 세븐일레븐 제품)


이마트24 최현석은 작년 세븐 정호영 카덴처럼 오리와 장어를 함께 판다.


둘 다 첩첩가중의 기름판이다. 중국식 표현으로 유상가유, 기름 유 위에 기름을 또 끼얹는 격이다. 정말 찌아요우! 다. 오리기름에 장어기름. 따라서 기름기를 씻어줄 초생강이나 락교가 필수적이다.


가격대는 만원대다. 5-6천원에 형성되어있는 가성비 도시락 시장에 한 번 쯤 도전해볼만한 메뉴다. 테스트배드용 일회성 제품이다. 그러니 잠깐 나왔다가 재고 소모하면 곧 없어질 것이다. 초생강이나 락교나 밥, 플라스틱 커버야 얼마든지 공급이 가능하겠지만 장어는 대량 양식을 하고 시장수요를 가늠해 일정분량만 공급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곧 없어져야 시즌한정이라고 홍보해 FOMO심리를 자극해 소비를 진작시키기에도 좋다. 재고도 금방 빠지니 재고비용도 상쇄된다. 좋은 제품을 꾸준히 공급하는 것보다 단발성으로 치고 빠지는 전략이 더 우세한 트렌드다.




앞으로 이런 식의 팝업형 메뉴가 많아질 것이고 이런 시장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은 스테디셀러보다는 바이럴된 메뉴, 남들 다 먹었다고 하고 SNS에서도 보이니까 한 번 쯤 먹어보는 메뉴, 시즌 때 잠깐 나왔다가 곧 없어질 메뉴에 대해 민감해질 것이다.


즉, 프로모션, SNS바이럴, FOMO(Fear Of Missing Out, 나만 뒤쳐지는 듯한 공포), 시즌한정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여기서 띄워주면 우루루 몰려갔다가 저기서 띄워주면 우루루 몰려가면서 소비하게 될 것이다. 피리 부는 소년에게 이끌리는 쥐떼처럼. 아울러 한 제품을 실험적으로 런칭했다가 판매 성과가 괜찮고 적절하게 히트상품이 되면 근처 역내 경쟁자가 다 카피할 것이다. 이런 예시는 무수하다. 컨테이너선 운송에서 유통까지 타임라인을 정확히 재서 유통기한 내에 일본의 저지푸딩을 공급한 기획에서도 보이고, 연세빵이 이 치즈, 저 치즈, 요런맛 저런맛, 콜라보, 맘모스 등 온갖 크림과 빵 조합으로 메뉴를 내놓는 점에서도 보인다. 


담당자는 성공한 전례를 들어 기획서가 통과되거나 투자 받기도 괜찮다. 6시그마로 성공한 아이템이 시장을 키워놓고 사람들을 길들여두었기 때문에 손쉽게 무임승차할 수 있다. 유투브도 어떤 한 포맷의 채널이 성공하면 비슷한 스타일의 채널이 무더기로 난립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 채널의 스타일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알고리즘에 자신의 카피캣 채널도 덩달아 올라올 것이기 때문이다. 영상편집 시간을 고려할 때 마켓 리더가 매일 같이 콘텐츠를 공급할 수 없고 시간 제약상 모든 아이템을 다 터치할 수 없기 때문에 스타일은 모방하되 다른 주제로 승부하면 2위로서 얼마든지 재미를 볼 수 있다. 스타일에 대한 저작권 의식이 희박하기 때문인데, 아일릿이 뉴진스의 스타일을 베꼈다고 주장했다가 다른 여러 이유에 의해 몰락했기 때문에 문화에서 스타일 저작권에 대한 논의는 저편으로 물러갔다. 앞으로도 이런 스타일 카핑 전략은 지속될 기세다. 장점은 기업도 이익을 보고 소비자도 여러 괜찮은 스타일을 맛볼 수 있다는 점, 단점은 새로운 스타일을 개발하려는 사람들에게 핸섬한 인센티브가 돌아가지 않고 어차피 다들 베낄 것이라는 생각에 장기적 동기 부여가 되지 않아 시장 전체가 하향평준화되리라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롯데리아가 여러 실험적 괴식을 지속적으로 내놓는 것은 참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한 나라 사람의 입맛에는 한계가 있어서 다양성에는 한계가 있고 하루 평균적 3끼의 트라이가 보장되어 있는 F&B기업과는 달리 영화, 영상, 패션, 음악, 게임, 만화, 웹툰, 도서 등 콘텐츠 업계는 이런 스타일 베끼기가 만연해져서는 곤란하다. F&B는 장어를 대량 양식하고, 메론을 대량으로 들어와 박리다매로 원가를 낮춰 공급할 수 있다. 오직 문제는 수요창출일 뿐이다. 그러나 콘텐츠는 카핑전략이 시장 전체의 수준을 낮추고 동력을 잃게 한다. 같은 전략을 구사해서는 안된다. 케데헌이 성공했다고 그런 비슷한 작품이 폭증하면 춘추전국시대 다운그레이드된 군웅들이 할거하다 모두 전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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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 갤러리 실버팁에 다녀왔다. 개인적으로 큐레이션이 좋다고 생각하는 ina12.24의 관심을 받은 곳이다. 팔로워는 적은데 다 일당백이다. 팔로워숫자에 허수가 있으며 현생을 온당히 반영하지 않는 것일테다


위치는 금호 언덕길에 있다. 3호선 금호의 역사구조가 조금 특이한데 계단으로 올라가지 않고 입구로 연결된 구조가 있다. 한국의 경사지대를 반영한 것으로 아래 내리막길에 연결된 입구다. 금호동의 사회지리적 배경도 인상깊지만 갤러리와는 관계가 없으니 패스


막 오픈한 갤러리의 첫 전시 제목은 <0+3-3=0>이다. 당연한 말이고 특이한 것이 없는 항등식이다. 그러나 무를 상징하는 0에서 식이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굳이 쓰지 않아도 될 0에서 시작했다. 시작하는 자는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유를 만든다는 의미일 수 있다. 또한 0은 절대적인 공허가 아니라 무언가가 들어올 수 있는 자리, 즉 가능성의 자리라고 이해해볼 수 있다. 그런 0에 3이 들어왔다가 다시 빠져나간다


사실 대수적으로 분석하면 이 항등식은 자명한 자기동형성을 표현한 것이다. 좌변과 우변이 당연히 같다는 말이다.

0은 덧셈에 대한 항등원이고 a+(-a)=0은 가역성을 표현하는데, 이 좌변과 우변은 곧 자기 정체성이 그대로 보존되는 것이니, 불변성과 자가동일성을 표현한 것이다.


식을 함수적으로 바꾸면 입력과 출력을 전혀 변형하지 않는 단순하고 핵심 함수구조가 보인다.

f(x)=x+3-3=x다.

즉, f(x)=x와 같다.

그러므로 f(x)=x는 모든 ∈R에 대해 f(x)=x를 만족하는 함수로 변형이 없는 연산구조다.

수학적으로는 항등식, 자기동형성, 불변성, 자기 정체성 보존, 자가동일성이라는 열쇠어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수학적으로 <0+3-3=0>이라는 단순한 식의 계산상 결과는 없음일지 몰라도 예술적으로 말하면 그 안에 담긴 과정, 변화와 흔적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점을 읽어낼 수 있다.

결국 0을 말하고자 하면 0+0=0라고 쓸 수 있을 것을,

혹은 그냥 0이라고 하면 되는 것을 그 과정을 보는 이에게 보여줬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그럼 두 식 모두 결과는 0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서사가 담겨 있다. 무엇이 보일까?


물리적으로는 아무것도 없지만 그 자리는 이미 한 번 채워졌던 자리다. 경험된 무 또는 지나간 존재의 그림자다. 0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지만 주어진 식은 무언가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0)에서 아무 것도 없는 또 다른 상태(0)가 더해진 게 아니라 어떤 감정, 사람, 사건(3)을 받아들이고 다시 시간이 지나 그것을 떠나보낸다(-3)

그리고 다시 0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 0은 처음의 0과는 분명 다르다.


경험된 0과 지나간 시간의 0. 즉 비어 있지만 비어 있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여행 갔다 온 나는 같은 나이고, 여행에서의 순간과 경험은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아니지만 과연 없어지고 만 것일까? 사랑하고 이별한 후의 나에게 그 모든 순간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일까?


무언가가 왔고 사라졌으나 변화의 과정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므로 전시제목<0+3-3=0>은 지나간 존재의 시간을 보여준 것이고 휘발 이전에 분명히 존재했던 어떤 소멸된 존재와 배움의 과정 전체를 보여준 것이다.


전시장의 작품은 그 전시제목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흔적과 자국을 통해서 잔상을 보여줌으로써 아이디어를 구현하고 있다.

이준학, 바람구멍, 나무판 위 페이트, 2025

이주학, 반 쪽, 황동, 7.2x7cm, 2025


전시장 양쪽 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무판 위의 흰색 페인트 작업 <바람구멍>은 작게 새긴 자국 사이로 바람의 흔적을 보인다. 도자 위 유약을 발라 구운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는 둘둘 말려있던 카펫의 끄트머리에 보이는 반원형태처럼 살짝 말려감겨있는데 박물관에서 보이는 깨진 벽화같아보인다. 모서리의 벽에 실제 벽화를 그렸기도 하고 종이 위 먹지에 레진으로 그린 그림도 눈에 띈다. 황동으로 만든 설치품은 반 쪽이라고 한다.

이준학,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도자 위 유약, 2025


이준학, sweetom, 유화, 91x91cm, 2025.


<sweetom>이라는 이름의 유화는 보풀인 일어난듯, 페인트 가벽의 낙서인듯한 표면감에

쨍한 햇빛 아래의 선명한 녹색평원 위 동화같은 집이라기보다 아이가 끄적인 집 윤곽에 긁히고 구겨진 풍경처럼 보인다. 판타지보다는 더 판타지적이다. 모두 흩어질 것, 잔상, 흔적을 표현하고 있다.

이준학, 페이스트리, 도자, 2025

이준학, 세 개, 도자, 종이 위 먹지, 2025



0+0=0이었다면 그리는 자는 아무 것도 그릴 필요가 없다. 허무의 이론을 탐닉하는 자는 아무 일도 애써 할 필요가 없다. 지나간 세월의 굴곡과 아픔을 부정하며 우울한 자나 비극 앞에 체념하는 자는 0+3에서 머물러 있거나 0+3-3 다음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자기 자신의 시작점도 알고 사람이 몰고 온 사건과 그 사건 속 감정 세 가지에 얽힌 중간과정을 모두 포용한 후, 내일로 나아가는 자만이 0+3-3=0이라는 항등식을 도출할 수 있게 된다.


하여 전시 관람 전과 후의 나는 같지만 같지 않으며,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되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가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 된다. 사람의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의미가 있고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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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에 냉전 종식이 되고 더이상 체제 경쟁을 할 필요가 없어 내부 단속을 할 이유를 상실한 정부가 92년에 여행 자유화를 단행한 이후, 그동안 대우상사나 외교관만 접하던 세계의 실상을 직접 육안으로 체험을 하고 우리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세계화, 글로벌 리더, 국제교육을 부르짖으며 유학을 보냈다. 말하자면 현대판 영선사, 보빙사 같은 것이다. 물론 유길준처럼 직접 현지 여행과 학습을 겸한 답사를 하는게 적절한 현장체험형 교육도 있고 외국교사를 국내에 초빙해 가르치는 육영공원같은 현지교육형 케이스도 있다.


국제화도 좋지만 한창 감성이 예민한 청소년 아이들을 문화도 낯설고 아침밥도 챙겨줄 수 없는 먼나라에 홀로 보낼 수 없어 고교 졸업 전까지는 데리고 있어야한다고 생각한 부모들을 위해 지자체가 저마다 외고를 우후죽순 세운지 어언 20년. 이는 한국인 입장의 이야기다. 우리를 외국에 파견, 방출, 발산하는 관점과는 반대로 외국이 우리에 들어온 영입, 토착, 수렴의 관점도 있다.


우리도 초반에는 외국에 일부만 서광범, 유길준, 박정양, 김옥균 등 파견한다. 일본의 경우도 나쓰메 소세키가 영국 유학을 경험했고 극히 일부만 외국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경우도 소수다. 한국 현지 경험을 한 일부가 고국(미국)에 돌아가 한국의 문화를 알린다. 익히 알다시피 미국의 한국학 1세대는 5-60년대 평화봉사단 혹은 미군파병을 통해 한국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의 한국천주교사 권위자 도날드 베이커(황사영 백서 번역)도 1971년에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왔고 인디애나의 한국근대사 연구자 마이클 로빈슨이나 전라도 광주에서 체류한 클라크 쇠렌슨은 워싱턴대 한국학센터 소장이다. 그보다 더 전 시기인 하버드의 카터 에커트와 워싱턴대의 제임스 팔레는 미군, 미군통역장교 출신이다. UCLA의 로버트 버스웰은 아예 한국 사찰에서 출가경험을 했다.


한국이 외국에 가는 경우 육영사, 보빙사 등 정부지원 프로그램이다. 외국이 한국에 오는 경우 국제정세에 의한 정책과 제도다. 개화기 정부초청 교사, 미군과 케네디의 평화봉사단.


초기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 그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환경이 변한다. 누구도 미국이 한국에게 이렇게 중요하게 되고 밀접한 나라가 될지, 한국문화가 전세계에 이렇게 퍼질지 알지 못했다.


이제는 보빙사, 육영공원, 평화봉사단, 던컨의 조선사, 커밍스의 한국전쟁사를 몰라도 다른 경로로 한국에 관심을 갖고 한국에 들어온다. 학생뿐 아니라 여러 다양한 형태의 사람들이 한국에 체류한다. 비단 외교관, 주재원, 교수뿐 아니라 아주 다양한 직업, 배경의 사람들이 온다. 결혼을 통해 오는 경우도 있고, 미국식 레스토랑을 열기도하고, 출가를 하기도하고, 영어교사를 하기도한다.


마치 한국에 외고나 국제학교가 즐비한 것처럼, 이제 한국을 알고자하는 사람들이 세종학당의 문지방을 두드리니 문화는 어쩌면 상호적인 관계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초창기 경험자는 학력이 높은 엘리트출신이기에 한국이나 외국을 서술한 언어가 조탁된 학술어다. 그래서 일반인이 접하고 소화하기엔 다소 어렵다. 이에 외국의 문화는 상아탑의 이야기라고 소원해진 경향도 없지 않다. 무슨 말인가? 그러니까 한국(정확히는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외국에 파견해 외국을 경험하고 돌아 온 이들이 쓴 보고서가 한문체라서 어렵게 쓰여졌다는 말이다. 청나라 열하를 돌고 와서 북학파의 거두가 된 박지원만큼 쉽고 반짝반짝한 문체로 쓰여지지 않았다. (실제로 이로 인해 문체반정론이 일어날 정도였다. 옛날 성현들의 문체로 쓰라고. 지금으로 치면 블라인드의 커뮤니티언어로 정부보고서를 썼다고나 할까.)


반대의 경우도 미국의 학자들이 한국을 소개할 때도 논문과 단행본으로 문어체로 썼다. 유진 피터슨의 성경책 프로모션 문구처럼, 쟁기로 밭을 가는 소년도 읽을 수 있게 쉽게 쓴 게 아니다.


그런데 이제 다양한 사람들이 한국에 들어와 20년 이상 살게 되면서 음악 같은 대중문화가 아니라 역사 문화 미술 같은 하이컬쳐도 이해하게 되고 그러면서 쉽고 일반적인 문체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한국인도 조기유학이든 외고를 거쳐서든 외국에 나가 외국에 대해 이해하고 일상이야기, 브랜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쉬운 말로 SNS에 풀어낸다. 그래서 70년대 프랑스 문화를 책으로 접하던 시절과는 달리 프랑스에 대한 맹목적인 환상이 적어지고 그들도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 하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또, 몰랐던 현지 맛집도 더 알게 되고 앎이 깊어지고 다변화된다. 유투브에 여전히 피상적인 여행만 하는 해외여행 브이로그도 꾸준히 올라오지만, 현지경험이 많은 한국인이 현지에서만 알 수 있는 문화를 알려주기도 한다. 예전에는 이런 이야기는 외교관 등 고위공무원, 해외지사 경험 회사임원, 유학파 교수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그래서 그 말투가 친근한 대중말투로 전환되어 지식의 유통이 빨라진다. 밋돌세같이 미국 현지 그로서리 브랜드 계급도를 경상도 말투로 알려주기도 하고, 기묘한 케이지처럼 미국 셀레브리티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하는 채널도 있으며, 일본 철도 시스템과 지리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알려주는 이마고나 판급이 같은 사람도 있다. 


그럼 한국을 찰지게 알려주는 일반인 외국인도 있을까? 여럿있다. 우리 눈에 띄지 않을 뿐. 다 그들의 SNS와 블로그에서 유통되는 이야기라 한국인의 주파수에는 잘 잡히지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를 잘 읽어보면 표현방식에서 우리가 그렇게 바라보지 않는 식으로 접근하는게 보여 신기하고 우리에 대한 이해를 넓혀준다. 좋은 교육자료다.


예를 들어 우리문화에 대한 어떤 식의 표현방법이 흥미로운가?

오늘자 더코리아타임즈 사설에는 Joseph Bengivenni라고 하는 충청남도 서산에 살고 있는 작가 겸 사진가가 도선대사의 수도이전 관련 이야기를 풀었다. (이것도 하나 특이한 점이다. 보통 수도 혹은 거점지역(미군이 위치한 평택 의정부 왜관 혹은 일본의 경우 무역항 부산)을 중심으로 포진하다가 점점 이해관계 없는 곳으로 들어간다)


https://www.koreatimes.co.kr/opinion/20250716/will-new-president-fulfill-ancient-prophecy


이 글에서 도선이 왕건의 출생을 예견한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썼다.

"According to legend, he gave a sealed document to a couple, instructing them to pass it on to their unborn son. That child was Wang Geon, the first king and founder of Goryeo. The document reportedly guided him in locating his palace and temples — and he forbade any construction not authorized by it."

번역하면

"전설에 따르면 그는 부부에게 봉인된 문서를 건네며 태어나지 않은 아들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그 아이는 고려의 초대 왕이자 시조인 왕건이었다. 이 문서는 그가 궁궐과 사찰을 찾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전해지며 그는 이 문서에 의해 허가되지 않은 공사는 금지했다."


커플couple이라는 표현이 아주 특이하다. 왕건 아버지와 부인은 당연히 결혼한 사이이니 커플이라고 쓸 수 있지만 우리는 현대적 맥락에서만 쓰는 커플이 갑자기 옛날 고사에 들어오니 신기하다. 그러니까 원어민적 감각에서는 일반명사인데 한국말에서는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https://namu.wiki/w/%EB%8F%84%EC%84%A0

도선대사의 이야기


한국일보 칼럼에서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가 소개한 재밌는 예시가 있다. 한국말에서 한자어와 외국어가 사실 같은 의미이데 다른 맥락과 위계적 질서를 띄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70110480003223


그가 제시한 사례는

파란불-녹색등-그린라이트

찬물-냉수-콜드워터

인데


이외에도 물건-제품-아이템, 프로덕트, 굿즈가 있다.

우리말에 비해 외국어가 더 높은 위계에 있어 더 좋고 더 고급지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회사는 마케팅에서 더더욱 외국어를 쓰게 된다.


옷=의복=패션이 아니라

옷<의복<패션순으로 더 좋다고 여겨지는 것

내의<언더웨어

장신구<악세서리

구찌 장신구라고 하면 뭔가 촌스러운 느낌이 나게 된다.


그런데 이 상황이 약간 반전이 되는 흥미로운 케이스가 있는데 바로 중국 대만 등의 한자어가 들어오는 경우다.


이미 우리는 한자를 학교에서 배우지 않아 대중의 정서와도 거리감이 있고 촌스럽고 옛스럽다는 느낌이 있는데

중국이나 대만의 언어가 한국에 번역이 되거나 중국과 대만에서 영어와 중국어를 동시에 할 기회가 생기며 문화충격을 받는다. 내가 아는 그 영어가 그 영어가 아닌데 다운그레이드된 느낌을 받게 된다. 현지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인데도.


미국식가배차(메이쉬까페이)=아메리카노

신분=아이덴티티

사명=미션

계통=시스템

금융중심=파이낸스센터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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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생애
찰스 디킨스 지음, 박미경 옮김 / 북폴리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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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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