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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말하는 사람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평점 :
‘그림자’를 보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안규철 에세이,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안규철의 내 이야기로 그린 그림, 그 세 번째 이야기)(현대문학)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이라는 제목만 놓고 봤을 때는 ‘내면’과 ‘심리’를 다룬 에세이라고 생각했다. 틀렸다고 할 수 없지만, 책을 읽기 전에 떠올린 키워드는 이 책을 거대하게 아우르는 단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2025년의 시작을, 첫 에세이를 안규철 선생님의 글로 시작할 수 있어서 특별한 운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이 요란하다가 갑자기 차분해지는 순간들이 반복되는 요즘, 적절한 만남이었다.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했다. 이 책에 실린 모든 글이, 모든 문장에 밑줄을 긋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의 감정과 기분, 경험 등 내 이야기를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읽고 내 이야기를 덧붙이는 과정에서 위로받고 깨달음을 얻고, ‘그림자’의 진정한 의미를 천천히 알아갈 수 있었다. 안다는 것은 괜찮은 표현이 아닌 것 같아서 ‘그림자’라는 영역에 한 발짝 다가갔다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안규철 선생님이 들려준 일상, 삶이라는 거대한 세계의 그림자 즉, 그림자(이면)는 새삼 놀라웠다. 그림자를-과장을 보태어-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내가 못 보거나, 볼 수 있지만 무심히 지나쳤던 순간들을 쓸데없는 표현을 빼고 명징한 문장으로 보여줬다. 집 밖에서 몇 걸음만 옮겨도 볼 수 있는 것에 대해 들려주는 안규철 선생님이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의 삶에 대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어느 정도의 높낮이로 들여다봤는지 궁금했다. 선생님이 일상에서 만나는 것은 내 일상에서 충분히 만날 수 있는 것이기에 궁금증이 더 부풀었다. 안규철 선생님이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에서 들려준 이야기 중에서 ‘잡초’의 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단 한 번도 잡초의 삶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는 나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고나 할까. 매년 여름이 되면 본가에 화단이라고 보기 어렵지만 따로 붙일 이름이 없어서 화단이라고 부르는 흙이 많이 고여(?) 있는-생각보다 넓은-부분에 반갑지 않은 진한 초록빛이, 그사이에 튀는 노란색이나 분홍색을 입은 이름 모를 꽃들이 나에게 인사한다. 그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고, 삶이 꺾인 그들을 아무렇지 않게 구석에 내팽개치는 일은 언제부턴가 내 몫이 되었다. 무자비한 폭력이라는 표현에는 잡초를 향한 분노와 당장이라도 쪄 죽을 것 같은 강렬한 여름 태양 아래 혼자서 잡초와 씨름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향한 짜증이 곁들어 있다. 그런 나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나의 관심을 받기까지 햇빛과 틈틈이 쏟아지는 장마로 물을 시원하게 들이킨 잡초들은 쉽게 나의 폭력에 응하지 않는다. 한참을 씨름해야 뿌리채 뽑히거나 어떻게든 뿌리를 남겨둔 채 뽑히기도 한다. 이겼다고 보기 애매한, 싸움이라고도 볼 수 없는 아이들 다툼이랄까. 거슬리고 쓸데없는 잡초의 삶에 대해, 잡초의 삶을 통해 돌아본 내 삶을 향한 부러움을 생각하고 느낀 적은 처음이라 낯설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분법적인 경계를 나눈 채 태도와 생각을 정하고, 몸과 마음이 그렇게 실행에 옮겼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잡초는 최선을 다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며, 자신의 삶에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진한 초록색과 단단하게 박힌 뿌리와 발 디딜 틈 없이 촘촘히 자란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뽑히는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진심이기에 뿌리에 흙덩이를 쥐고 나온다. 안규철 선생님은 묻는다, ‘나는 과연 잡초처럼 매사에 진심이었을까’.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은 오랜만이다. 이 질문에 핑곗거리를 찾으려고 머리를 굴렸지만 나는 충분히 망설이지 않고 답할 수 있었다. 최선을 다했던 적은 있으나 마지막까지 흙덩이를 쥐고 나온 잡초처럼 진심이지는 않았다고. 인정하고 나니 부끄러움도 쫓기는 것 같은 느낌도 잔잔해졌다. 잡초의 삶을 가볍게 파괴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우연히 걷다가, 혹은 잡초를 뽑는 시기가 오면 ‘잡초의 삶’을 한 번이라도 생각하는 것이다. 매년 해오던 잡초를 뽑는 일은 안 할 수 없다. 아무래도 시각적으로나 환경적(?, 모기나 벌레가 끓게 되면 화단 주변에 터를 잡은 아지들의 건강이 위험하다)으로나 제거하는 것이 효과적이니까(이기적이지만 결국은 나를 위해서다). 잡초의 삶을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고, 나도 모르게 가볍게 생각했다는 사실에 미안함을 전한다. 어떤 삶이든 가벼운 삶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음 깊숙이 새기는 시간이었다.
‘잡초’처럼 우리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그것들의 이면에 대해 이야기하는 안규철 선생님은 깨달음을 넘어 ‘삶’이라는 거대하고 깊은 바닷속을 유영하고 있는 우리에게 지나간 시간에 붙들리지 말고 제자리걸음도 멈추고, 현재에 충실하며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한다. 누구나 알지만 자주 잊는 사실이며, 누군가는 계속해서 말해줘야 하는 사실을 말이다. 안규철 선생님의 에세이를 읽는 동안 안규철 선생님과 내가 닮은 점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선생님처럼 깊게 들여다보지 못하지만 남들은 무심코 지나치는 이면에 관심이 많다. 이면을 들여다보고 떠올리다 보니 현실에서 동떨어진 느낌을 받을 때가 잦다. 그래서 가끔 외로움을 느끼곤 하는데, 외로울 필요가 전혀 없다는 위로를 받은 것 같다(감히 예상하지만 안규철 선생님의 MBTI는 INFJ라고 확신한다!).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들은 하루하루 하나씩 곱씹고 필사하기 딱 좋다. 2025년에는 어떤 일들이 나에게 찾아올지 알 수 없어서 불안하고 걱정되지만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을 눈에 잘 띄는 자리에 놓고, 불안이 나를 잠식하려 들 때마다 ‘엄마 품에서만큼은 언제나 편안한 얼굴로 잠드는 아이’처럼 불안을 잠재워봐야겠다. 한 번, 두 번, 세 번 잠재우다 보면 헤어질 수 없는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나만의 방법을 터득할 수도 있을 테니까(그 방법을 꼭 찾아야만 한다.).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과 같은 책이 세상에 나와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사람들, 삶의 느린 감동과 새것이 아닌 것에 마음이 기우는 사람들의 마음을 나눌 수 있길 바란다.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이 되는 그날까지 그림자를 좇는 나의 시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이 책은 서평단 활동을 위해 ‘현대문학’에서 받았습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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