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애라니까!
쿠도 칸쿠로 지음, 오근영 옮김 / 작은사람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쿠도 칸쿠로라는 말에 이건 꼭 봐야해. 라고 외쳤다. 거기다 육아일기라고? 이 안 어울리는 조합 어쩔껴? 그 기발하고 재밌는 아저씨가 딸의 아빠가 되었다니, 그가 어떻게 변해갈지 너무너무 기대된다. 나도 아직 애라며 절규하는 쿠도의 비명에 흐믓한 미소가 삐져 나오는건 비단 나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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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콘플레이크 100개를 사면 사자를 공짜로 준단다. 그 말에 혹한 형과 나는 용돈을 올인해서 콘플레이크 100개를 산다, 는 단순한 설정에서 시작되는 동화. 사자가 공짜  라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덜컥 일을 벌려 놓은 두 형제. 과연 그 일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달콤하게만 흘러갈 것인가? 아이들의 예상과는 달리 황당하게 흘러가는 전개가 묘미로, 그런 상황에 맞춰 자신들의 욕망과 의지를 수정해나가는 아이들의 천진함이 마냥 귀엽다. 어른들이 박장대소를 하면서 읽는 책으로 나름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기도 한다. 벌려놓은 일에는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이 온다던지, 충동적으로 무언인가를 하기전에 그 일이 어떻게 벌어지게 될 것인가 생각을 하는 것이 좋다던지, 아니면 세상이 너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돌아간다고 해도 네가 어쩔 수 있는건 별로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구가 멸망하지는 않는다는걸 알게 될 거라는 정도?  무엇보다 재밌고 웃긴다.  몇 페이지 안 되는 동화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웃고 흥미진진해하면서 읽기는 오랜만인듯. 두 형제의 바보스러움에 혀를 차다가 결국은 그들에게 동화되어 버리는 동화책. 어른이 읽기에도 충분히 재밌는 책이라 몇 번이고 읽어줘도 지루하지 않다는 것이 장점이다.

  ★★★★★

 

 


​원제는 Click, Clark, Moo. Cows That Type. 원제대로 번역하자면 타자치는 소가 맞다. 우연히 타자기를 손에 넣은 브라운씨네 농장 소들이 타자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그저 단순하게 외양간에 타자기 한대 들여놨을 뿐인데, 일이 이렇게 복잡해질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기발한 상상력이나 개연성있는(?) 전개, 그리고 논리적인 소들의 대응에 내가 심사위원이었다고 해도 상을 주고 싶어했을만큼 완벽한 책이다. 이 시대의 고전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책으로, 요즘 쏟아지고 있는 좋은 책들 가운데서도 발군의 작품성을 자랑하고 있는 책이 아닐까 한다. 특히 법학 전공자인 나로써는 박장대소를 하면서 봤다. 고작 동화책에서 이토록이나 생동감 넘치는 파업의 현장을 보게 될 줄 생각지도 못했어서 말이다. 작가의 탁월한 발상에 감탄하고 말았다. 기발함에는 혀를 내두르고, 참신함은 덤이니, 현대의 고전을 읽고 싶다시는 분들에게 강추천.

 

  ★★★★☆

 

 

영리한 생쥐의 위기탈출 넘버 원을 그린 책이다. 맛있는 도토리를 찾아 숲속을 거닐던 생쥐는 여우와 올빼미와 뱀의 습격을 받는다. 믿을 것이라고는 꾀바른 머리 하나뿐인 생쥐가 어떻게 절체절명의 순간을 벗어나는가 하는 것이 이 책의 묘미로 침착하고 재치있게  위기상황을 극복해 가는 과정이 압권이다.  딱딱 아귀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 구성이 어렸을 적 들었던 전래 동화를 보는 듯 절묘하다. 영국이 자랑하는 동화작가 줄리아 도널드슨의 대표작으로 현대의 고전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지 싶다. 이 책을 원작으로 BBC에서 만든 애니도 재밌으니 한번 찾아 보시길...이 책이 재밌으셨다면 줄리아 도널드슨의 다른 작품인 < Room on the Broom>도 재밌으니 그것도 추천드린다.

 

   ★★★★☆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봐줘 보신 어른들은 제목만 봐도 안다. 이제 저 곰은 자기 글렀다는 것을 . 단짝친구 오리와 곰 시리즈의 1탄으로, 이웃간인 두 친구의 앙상블이 묘미다. 처음엔 그저 곰과 오리의, 성격이 전혀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인갑다 하면서 읽었는데,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곰에게 감정이입이 된다. 조용하고 혼자 있길 좋아하는 곰은 그저 평온한 일상을 원하지만, 그가 그러려고 할때마다 방해하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오리다. 오리의 방해가 너무도 성가시고, 귀찮고, 짜증이 나고, 그러다 못해 버럭 화를 내게 되지만서도, 그럼에도 너는 내 가장 좋은 친구라는걸 확인하게 되는데 묘하게 나와 조카의 관계를 보는 듯해서 웃음이 났다. 오리가 곰의 말을 마이동풍으로 듣고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도 어쩜 그리 비슷하던지. 아마도 작가에게 조카나 아이가 있는게 아닐까, 그런 자신의 경험을 투영해 이 책을 만든게 아닐까 추측이 된다. 하여 어른들이 보면 공감을 느끼고 아이들이 보면 자지러지면서 웃게 되는 이 책.  시리즈로 나와 있다. 그 중 나는 1탄인" 곰아, 자니?"를,  조카는 3탄인 " 곰아, 돌아와?"를 좋아했다. 아이들에게 읽어주실 것이라면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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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시사회에서 보고는 이제서야 하는 포스팅. 이런 저런 생각들이 교차해서 선뜻 리뷰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물론 영화 자체는 좋았다. 그동안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을 해서 내용이나 좋은 점들은 이미 많이들 들으셨을 것이라 생각해서 생략하고. 간단하게만 평하자면 음악도 좋았지만 난 그보다는 그림이 더 좋았다. 어떻게 이런걸 상상하고 그려내는지 입이 딱 벌어지더라. 줄거리 자체로만 보자면 지루하거나 뻔하다고 생각되기 쉽상인데도, 그럼에도 이 영화를 좋다고 말할 수 밖에는 없는 이유는...


​첫번째는, 일단 멕시코란 나라의 가장 좋은 점들만을 모아서 그려넣었다는 점이 특이했다. 한 나라를 소개하는데 이보다 더 긍정적일 수 있을까했을 만큼 멕시코가 자신이 자랑하고픈 모든 것을 화려하게 담아냈더라. 죽은 자의 날이라는 전통에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는 대가족의 잔재. 그리고 프리다 칼로의 특징적인 색채와 열정적인 음악으로 대변되는 그들만의 감성들 모두. 이 영화의 제작에 멕시코 사람들이 얼마나 투입이 되었는가는 모르겠으나, 그들 모두가 멕시코인들이었을리는 만무하니, 타국 사람들의 정서를 이토록이나 애정을 담아서 표현해냈다는 자체가 존경받을만하다. 코코를 보고있으려니 평소 멕시코 하면 떠오르던 온갖 나쁜 이미지들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더라. 이미지 세탁의 탁월한 성공사례가 아닐까 싶다. 만약 내가  멕시코 인이라면 자랑스러운 마음에 기립박수를 쳤을 것이다.

둘째는--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인-- 이 영화가 구상해낸 사후세계라는 설정이다. 지루하거나 뻔한 줄거리의 아이들 대상 애니를 보면서 정작 어른들이 줄줄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줄거리 그 너머로 정교하게 그려낸 죽은 자들의 세계가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가...사랑이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기 때문 아니겠는가. 대상은 이미 사라졌는데, 미련스럽게도 끝나지 않는 사랑을 부여잡고 절규해 본 사람들이라면 이 영화가 그린 사후세계가 얼마나 따스하고 위로가 되는지 단박에 이해할 것이다. 단 한번만이라도 만나고 싶다는 그 소망이 이뤄지는 세상이라니....그런 세상이 만약 실재한다면 우린 얼마나 마음이 편해질까.  그렇다. 이 영화는 죽은 자들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망자를 잊지 못해 애가 끓는 남겨진 자들을 위한 영화다. <코코>는 말한다. 사랑이 죽음때문에 끝이 날 필요는 없다고. 왜냐면 언젠가 우리는 죽음뒤에서 만나게 될테니까. 우리가 서로를 사랑했다는 그 기억이 있다면 말이다. 죽음이 가져다 주는 그 강력하고 무자비한 충격을,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기억하는 나로써는 이 영화의 세계관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 없었다. 아. 진짜 죽음이 저렇게 애통하지도 아프지도 않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니. 그런 현실을 송두리채 무시하고 이런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칭찬을 받을만하다. 왜냐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의도가 나쁘지 않았고. 망자를 그리워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그리움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도대체 얼마나 우리를 안도하게 하는지. 따스한 포옹을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하여 멕시코 명절이라는 죽은 자의 날이 어떻게 생겨났을지 비로서 수긍이 되더라. 멕시코인들 역시 우리들 만큼이나 죽은 자들이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참으로 많은 고민을 했겠구나 싶은. 어쩌면 전통이란, 인생을 먼저 산 선배들의 요약본 노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지는 같은 고민을 할 사람들을 위한 애정어린 조언일지도...물론 현세같이 이성이 발달한 세상에서는 그 조언이 별 소용이 없긴 하지만서도.

세째는 영화속 코코의 모습이 나의 할머니(키워주신 할머니)의 모습과 너무 닮았어서 보는 내내 마음이 미어졌다. 같은 황인종이라서 그런가 늙어가는 모습이 실사라고 해도 믿을만큼 현실적이더라. 다만 다른 점이라면 코코는 기억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가족들이 그녀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북작대는 대가족속의 그녀가 너무 부러웠다. 왜냐면 치매를 앓는 노인이 그렇게 늙어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이 멕시코의 현재 모습인가는 모르겠으나, 대가족들이 돌아가면서 할머니를 모시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내 할머니의 영화같던 코코...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었다.

하여 결론은 볼만했던 작품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열광하진 못했다. 만약 내가 죽음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대한 강한 확신만 없었더라면 난 그 자리에 앉아 펑펑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자, 이제 내가 왜 이 영화의 리뷰 쓰기가 그리 난감했는지 이해가 되시겠지. 영화를 보고 집으로 오는 내내 만약 이 영화를 20대에 봤다면 어땠을까 궁금했다. 내가 지금 아는 것이라곤 이 영화가 내겐 너무 늦게 왔다는 것이다 . 하니...그저 가족의 사랑을 특별하게 풀어낸 영화라고 생각하고 보심 되겠다 싶다. 각자의 개인사가 투영된 감상은 그들만의 것으로 남겨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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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층 나무 집 456 Book 클럽
앤디 그리피스 지음, 테리 덴톤 그림 / 시공주니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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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가 너무 기다리던 책이여요. 13층마다 올라간다는 상상의 나래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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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드런 오브 맨>

 

미래 사회를 암울하게 하지만 설득력있게 그리고 있던 작품. 별로 기대하지 않고 있다가 많은 사람들의 입소문에 힘입어 보게 된 영화인데, 그 서사에 압도 당했다. 우리의 미래가 이렇게 암울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황폐해세상. 설마 저렇게 변할 수가 있으리라고 하면서 화면을 들여다 보는데 점점 감독의 논리 전개가 수긍이 된다. 왜냐면 미래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 인간과 똑같았기 때문. 인간이 변하지 않는다면 지구는 앞으로도 가망이 없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될 즈음...어디에서도 희망이라는 것을 찾기는 힘들거라고 생각하게 될 즈음, 그 희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정말이지 탁월했다 싶다. 그 모든 것이 전혀 논리 전개에 무리가 없다는 것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암울한 미래를 만드는 것도, 희망을 만드는 것도 지금의 인간과 다르지 않은 바로 그 인간들이라는 것 말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생각했다. 저게 바로 우리가 세월호를 놓치 못하는 이유라고. 칠드런 오브 맨. 레지스탕스 1인자로 산전수전 다 겪은 줄리아(줄리안 무어역)가 단지 전남편이라는 이유로 그 중요한 임무에 테오(클리이브 오웬)을 선택했다는 것이 참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결국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된 자의 보호 본능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한가 하는 것을 말이다. 어떤 이념이나 이기심, 생존 본능보다 강한 것이 아이들을 지키고자 하는 어른들의 마음이라는 것을.

 

 

                                                                  <컨택트> 

 

 

  고통스런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걸 보기 위해 떡밥을 너무 휘향찬란하게 깔아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길이 없었던 작품. 배우들의 연기도 좋고, 줄거리도 따라가기에 무리는 없었지만서도,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외계인이 찾아와 주어야 했었을까 라는,  우주인의 지구 방문이라는 거대 사건에 비해 마무리가 조금은 초라하게 느껴졌던 작품이다. 언어가 모든 것을 아우르는 기본창구다, 이 영화가 현대판 바벨탑을 그릴려고 했었다는 다른 블러거의 말이 수긍이 가긴 했지만, 영화 자체로 보면 그닥 균형이 맞아 보이진 않았다. 뭔가 대단한 것을 기대했는데, 겨우 그거라고 라는 심정이랄까. 그래서 결론은 우리가 미래를 안다고 해도 과연 결국 같은 선택을 하겠느나고? 아마도 그럴 것이라 본다. 아니 그럴 수밖엔 없다. 인생이란게 생각보다 짧다. 진정한 사랑을 할 기회는 얼마 되지 않아. 도깨비처럼 불사가 아닌 다음에야 자신에게 온 기회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이유가 없지. 그게 바로 우리가 이 생을 살아가는 이유이고 말이다. 그 이야기를 넘 돌려서 감동적으로 하려 한 것이 아닐까 싶어서 좀 오바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다는 건 사실 그렇게 대단한것이 아닐 수도 있는데 싶어서.

 

 

 

                                                                                              <죽여주는 여자>

 

우리나라가 얼마나 남성 위주의 사회인가, 내진 거대한 마마보이들의 세상인가를 새삼 깨닫게 해준 작품. " 죽음 정도는 네가 알아서 해주지 않겠니? " 라는 물음을 냉소적으로 내뱉을 수밖엔 없었다. 왜 남자들은 여자들을 자신들의 따까리에 모든 쓰레기 같은 일들을 도맡아서 해주는 존재라고 생각하는지, 그런 사고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경악할 만한 일이구만, 더 놀라운 것은 사회성 짙은 작품이라고 해서 나름 약자에 대한 시선을 강조한 이런 영화들 속에서조차 꺼리낌없이, 그런 조잡한 생각을 만천하에 내놓는 다는 것이었다. 것도 자랑스럽게 말이지. 치매나 뇌졸증같은 병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노인들을 왜 가족들이 외면하겠는가? 그들의 고통을 몰라서? 아니 그건 그들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힐만큼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몇년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연명치료 거부 김할머니의 경우, 난 그 가족들이 그 할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본다.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분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도 명확했고.  그렇기에 그런 논란을 무릅쓰고 싸우려 한 것이다. 그렇게 가족들마저 꺼리는 존엄사를 생판 남에게 고맙다라는 말 한마디로 떠맡긴다는 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데, 그걸 박카스 할머니라는 소외된 계층이기에 덥석 받아들일 거라는 상상은 도무지 얼마나 끔찍한 일이냐. 내 손에 피묻히기 싫으니 치매 걸린 내 친구를 죽여주고, 나 혼자 죽기 싫으니 죽어가는 동안 내 곁에 있어 달라는 말을 도대체 어떻게 하는데? 얼마만큼 염치가 없으면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한평생을 살아왔으면 적어도 죽음 정도는 자신이 해야 할 몫이라는 것을 모르지도 않겠구만, 그걸 박카스 아줌마라는 이유로 편하게 떠넘기는 남자들의 작태가 경악스러웠다. 신사의 나라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냥 여자도 너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걸 생각해줄 수는 없겠니? 너희들이 싫은건 우리들도 싫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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