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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0
헤르만 헤세 지음, 황승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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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 헤르만 헤세 / 황승환 옮김 / 민음사




"죽음에 맞서는 무기는 필요없소.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요.

하지만 한 가지는 존재하지요. 바로 죽음의 공포 말이요.

우리는 이 공포를 치유할 수 있소. 

이것에 대항하는 무기가 한 가지 있소.

공포를 극복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이지요."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 클링조어는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자신을 이태백이라 생각하는 화가이다. 마흔 두 살이 되던 해에, 전부터 좋아했던 팜팜비오, 카레노, 라구노 근처의 남쪽 지방으로 가서 생애 마지막 여름을 보낸다. 그리고 자신에게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친구들과 여러 여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매일을 열정적으로 인생을 낭비하듯 지낸다. 친구와의 토론을 즐기고 편지를 쓰며 때론 강렬하게 거부하고 때론 담담히 받아들인다. 거침없이 자신의 삶을 소비하는 그는 죽음을 이겨낼 수 있을 것처럼 아니, 체념한 이처럼 마지막 열정을 다해 그림을 그린다.



또 한 편의 어려운 고전을 만났다. 헤르만 헤세가 이렇게 글을 어렵게 쓰는 작가였나? 싶은 생각이 든다.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을 통하여 독자는 무엇을 얻어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한 자도 적지를 못하겠다.


클링조어는 화가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을 중국의 시인 이태백이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의 친구인 헤르만은 두보라고 부른다. 헤르만 헤세는 중국의 시인들이 좋았나부다. 그림도 그리지만 시를 읊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사랑을 하는 클링조어는 죽음을 의식하지만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그의 문장들은 모두 죽음의 색채가 짙고 그가 굉장히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죽음을 자신으로부터 떼어놓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대체 우리가 운명을 바꿀 수 있소?

의지의 자유란 것이 존재하기나 하나요?

만일 그렇다면 점성술사 당신이 

내 별을 다른 쪽으로 돌려놓을 수 있겠소?"




책 표지를 보면 우리는 고흐를 떠올린다. 이야기 속에 루이스라는 친구가 등장하는데 그는 고갱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고흐가 마지막에 죽음을 앞두고 자화상을 완성하듯 클링조어도 그림을 그린다. 고흐의 생을 생각한다면 클링조어가 이해가 되는 듯하다. 100페이지도 되지 않는 이야기로 아주 짧지만 그 속에 클링조어의 죽음을 대하는 그만의 태도가 엿보인다. 수면제를 복용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포도주를 양껏 마시기도 하는 클링조어. 예술에 대한 집념처럼 삶에 대해서도 강한 집념을 가졌는데 마지막 그의 행보는 결단력이 돋보인다.



헤르만 헤세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낼 때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클링조어라는 인물에 자신을 투영시켰다고 한다. 이 작품을 쓸 때 헤세의 나이 마흔 두살이었고 술을 좋아했고 그림을 그렸으며 동양사상에 심취했으며 헤세 상황 또한 여러모로 힘들었다.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을 1920년에 출간했는데 1916년에 부친이 사망했고 아내와 막내아들의 병으로 신경쇠약이 발병해 심리 치료를 시작했었다. 헤세 자신을 그대로 투영시킨 인물이 죽음에 대해 부정하면서도 집념하는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누구나 죽음이 두려울 것이고 예상치 못하게 다가올 때는 더욱 그럴 것이다. 예술가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을 통해 느낄 수 있다. 클링조어는 자신을 죽음의 드디어 받아들이기로 하고 마지막 작품을 열정적으로 그려낸다. 우리는 만약 죽음이 다가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각자의 숙제로 풀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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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노예 12년 - 1892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솔로몬 노섭 지음, 원은주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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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12년 / 솔로몬 노섭/ 원은주 옮김 / 더스토리






자유인 솔로몬 노섭은 1841년 어느 날 워싱턴에 위치한 어느 서커스단에서 일하는 두 남자를 만난다. 그들은 공연에 쓸 악사를 구한다며 노섭에게 같이 일할 것을 제안하고 솔로몬은 두 남자를 따라 나섰다가 노예상에게 넘겨진다. 솔로몬은 윌리엄 포드 목사에게 플랫이라는 이름으로 팔려진다. 윌리엄 포드 목사는 흑인도 하느님의 창조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2년간 포드 밑에서 노예로 일하던 솔로몬. 하지만 삶은 솔로몬을 거친 파도로 몰아낸다. 포드 목사의 상황이 어려워지자 에드윈 엡스에게 다시 팔려졌는데 새 주인 엡스는 사악하고 고약하기 이를데 없는 이였다. 노예들을 아침부터 밤까지 목화밭에서 쉬지않고 일하게 했으며 조금이라도 작업이 느려지거나 수확량이 떨어지면 가차없이 채찍질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고도 자신이 술을 마시는 날이면 피곤한 노예들에게 억지 춤을 추게 만들고 바이올린을 켤 줄 아는 솔로몬은 그들과 어울려 억지 파티를 즐겨야했다. 먹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살림살이도 없었으며 온갖 트집을 잡아 굴욕스럽게 만들었다.


자신이 자유신분이라고 밝혀봤자 채찍질만 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솔로몬. 그 사실을 혼자 꽁공 숨긴채 살아가던 어느날. 앱스가 가족이 살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몇몇의 목수들을 고용했다. 똑똑하기도 하고 목수일도 잘하는 솔로몬은 밭일에서 제외되고 목수들의 일을 거든다. 목수 중 하나였던 배스는 남부인치고는 흑인 차별이 없었기에 솔로몬은 배스를 믿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리고 간곡히 부탁한다. 부디 자신의 지인들에게 편지를 띄워달라고. 배스는 시내로 나가 편지를 띄우고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연락이 없자 솔로몬은 낙심하지만 배스는 일이 끝나면 자신이 솔로몬의 집을 찾아가리라 마음 먹는다. 그리고 솔로몬이 의기소침해 있던 어느날 목화밭으로 낯선 신사 둘이 솔로몬을 찾아오는데.....





<노예12년>은 제목에서 알수있듯이 솔로몬이 12년간 노예로 지냈던 일을 다룬 실제 이야기이다. 자유인으로 살다가 노예로 전락한 한 남자의 너무나 억울하고 치욕스럽고 비인간적인 노예살이에 대한 외침이다. 아마 노예12년을 읽는 모든 독자는 주인공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 곳곳에 슬프고 힘없는 노예들의 아픔이 녹아있어 읽다가 분노가 치솟아 책을 덮었다가 다시 펼쳤다가를 반복, 인간이 어디까지 다른 인간을 굴욕적으로 만들 수 있는가를 알고 싶고 자신의 고통이 두려워 남의 고통을 눈감아버리는지를 알고 싶으면 <노예12>년을 읽으면 된다. <노예12년>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솔로몬이 <노예12년>을 출간한 것은 1853년, 우리가 잘 아는 <톰아저씨 오두막>은 1852년에 출간이 된다. 이 작품을 링컨이 읽고 노예제도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고 한다. 조금 더 노예에 관련된 미국의 상황을 들여다보자면 1840년대의 미국의 북부는 흑인이 자유인이었고 남부는 노예제도를 허용하고 있었다. 당시 북부는 제조업과 상공업이 중심이었고 미국노동자가 많았다. 남부는 농업위주, 면화재배가 중심이다보니 상대적으로 북부에 비해 인력이 많이 필요했으며 노예상들에게는 북부의 흑인들이 돈벌이가 될 충분한 타겟으로 보였을 수 있다.


1857년에 드레드 스콧이란 자가 자신의 자유를 위해 소송을 진행했는데 미국 대법원이 '노예로 미국에 들어온 흑인과 그 후손은 미국 헌법 아래 보호되지 않으며 법원에 제소할 권리도 없다고 결정한다. 흑인들과 옹호했던 백인들의 반발이 무척 컸으리라 생각된다. 그후 1860년에 링컨이 대통령이 되고 1861년에 그 유명한 남북전쟁이 일어난다. (남북전쟁은 단순히 노예제도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사실 흑인들이 미국 땅을 밟기 전까지는 그들은 자유인이었다. 그들이 자유를 찾기 위한 몸부림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당연한 권리를 찾기에도 이렇게 오랜 시간과 고통, 노력이 필요했으니 이 얼마나 비생산적이고 안타까운 일인가?



이야기가 다 끝난 다음에도 <노예12년>은 우리에게 충격을 안겨준다. 그것은 솔로몬이 <노예12년>을 출간하고 자신을 팔아넘겼던 노예상인들을 고소하며 백인들의 비인간적인 잔혹성을 알리는 강연이나 연설을 적극적으로 활동했는데 몇년 후 실종된다. 일간에는 납치되어 살해되었다는 설이 나돌았다고하니 사실이라면 섬뜩하고 무서운 일이다.



<노예12년>을 읽으면서 예전 어릴 적 티비드라마로 방영되었던 '뿌리'가 생각났다. 너무나 비인간적이었던 노예들의 삶을 다루었던, 특히 주인공 킨타 쿤테의 삶을 다룬 드라마가 생각나면서 <노예12년>이 바로 그 '뿌리'의 축소판이 아닌가 싶었다. 같은 인간으로서 너무나 부당함을 당한 솔로몬의 얘기에 같이 치를 덜고 분노를 느꼈던 시간이었다. 다시는 인류의 역사에서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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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 살아남았으므로 사랑하기로 했다
김현 지음 / 원너스미디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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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 김현 / 원너스미디어





"네가 살 길은 그저 없는 아이처럼 조용히 숨만 쉬는 거야. 

괜히 나대지 마라."





전쟁으로 위험해지자 외할머니는 마리아를 데리고 이모네 집으로 피신한다. 그러나 그 사이 마리아의 아버지와 가족들은 월북하고 마리아는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이모엄마에게 양육된다. 4살에 가족과 헤어지게 된 마리아는 이모를 이모엄마라 부르며 의지하지만 이모부의 바람으로 이모엄마네집도 풍파가 끊일 일이 없고 마리아는 위축되어 살아간다.


고1 시절 이모엄마는 늘 첩을 갈아치우던 이모부가 여섯 번째 첩과 그녀가 낳은 아들을 데리고 오자 이모부와의 관계를 접고 마리아와 함께 이사를 나온다. 그리고 교회목사와 같이 살게 되는데 부인이 있는 목사와 사는 이모엄마를 못마땅해 한 마리아는 이모부의 첩들과 뭐가 다르냐는 말을 꺼냈다가 이모엄마 집에서 쫓겨나 경찰서와 YWCA를 전전하다 여군이 되고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군부대에 취직한다. 그리고 새로 부임한 젊은 장교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는 미군부대에서 일을 하거나 미군부대를 오가는 여자들은 양색시라는 나쁜 이름으로 불렸는데 마리아 또한 피할 수 없었다.



미국부대에서 일하면서 이모엄마를 불러 같이 살게 된 마리아는 미국으로 건너가 첫 아이를 낳고 살면서 남편이 돈버는 일에 영 재주가 없고 여자문제로 불화가 끊이지 않아 이혼하게 된다. 혼자서 두 아들을 키우느라 바텐더로 일하며 고생하는 마리아는 그 와중에도 미네소타주립대학에 입학하여 5년만에 졸업을 한다.



무역회사를 차려 일했던 마리아는 여행사의 사장님과 좋은 사이를 이어가고 있던 차에 사장님의 인맥으로 마리아의 가족이 북한에 살아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이산가족상봉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북한으로 떠난다. 그러나 평생 그리워하고 원망했던 아버지는 이미 36살의 나이로 돌아가셨고 어머니 역시 예전의 이모엄마에게서 듣던 그런 엄마가 아님을 알게 된다. 짧은 만남을 뒤로 미국에 돌아 온 마리아는 두 번째 남편과 이혼하고 미네소타주립대학의 평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나는 이 글이 어느 성공한 여자의 인생 스토리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전쟁 중에 빨갱이로 고아가 된 한 어린 여자아이가 

어떻게 여기까지 살아남았는지를 기록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에는 다소 본인의 생각과는 맞지 않는 다소 개인적인 그녀의 생각들이 있었다. 그것은 이 도서가 자서전이며 그녀의 환경에서는 그녀의 선택이나 생각들이 어쩔 수 없었을 거란 생각을 감안하고 서평을 쓴다.



이 책은 마리아, 김현의 자서전이다. 아버지가 공산주의에 물들어 월북을 하고 혼자 남한에 남겨져 부모도 없이 이리저리 맡겨지면서도 삶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간 한 여성의 일대기를 다룬 것으로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에는 당시 한국전쟁의 연대기가 한 챕터로 수록되어있다. 당시의 중국과 미국 그리고 소련의 상황을 들어가며 6.25가 발발하게 된 배경이나 38선이 그어진 배경 등에 대해 기록하고 있어 역사를 다시 한번 일깨우게 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본인은 성공한 한 여자의 스토리가 아니라고 했지만 자신 이외에는 의지할 곳 없는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서 살아온 모습은 분명 성공한 한 여성의 이야기가 맞을 것이다. 당시의 상황이라는 것이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으로 이어져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0'의 상태였을 것이다. 물자도 인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낙인을 찍고서 의지할 곳 없이 혼자 자신의 삶을 개척하며 당당히 살아온 그녀, 이것을 어떻게 성공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또한 당시에는 그녀의 언급처럼 파독간호사 같이 나라를 위해 일한 여성들이 있었으니 그녀들의 희생에도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다. 그리고 힘들 때마다 굽히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삶에 맞서 살아갔던 그녀, 마리아에게 그동안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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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의 방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4
버지니아 울프 지음, 김정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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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의 방 / 버지니아 울프 / 김정 옮김 / 솔출판사




베티 플랜더스 부인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다. 아처와 제이콥 그리고 존. 안타깝게도 플랜더스 부인은 과부가 된지 2년이 되었다. 암을 앓고 있는 부인을 둔 바풋대령은 플랜더스 부인에게 호의를 베풀며 정기적으로 찾아온다. 그리고 목사인 플로이드가 플랜더스 부인에게 청혼을 하지만 부인은 아들을 셋이나 둔 자신이 결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시간은 흘러 제이콥은 성장한다. 제이콥은 고귀한 용모로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고 계속해서 여자가 생긴다. 순종적인 클라라와 잘 되어가는 것 같았지만 클라라는 제이콥을 떠난다. 여러 남자와 어울리는 플로린다는 제이콥과 사랑을 나누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남자와 팔짱을 끼고 연애를 즐긴다. 플로린다로 인해 제이콥은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화가 닉의 모델인 페니는 닉을 동경하지만 제이콥을 알게 되고 그를 좋아하게 된다. 여행중에 만난 산드라. 기혼녀의 그녀와 호감을 주고 받지만 그녀는 선을 넘기지 않는다.





제목이 <제이콥의 방>이다. '제이콥의 방'은 어떤 의미일까? 딱히 '제이콥의 방'이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진 않다. 그렇다면 독자는 '제이콥의 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제이콥의 방이 주는 의미를 한 번의 독서로 찾아내기는 어려울 듯 하다. 사실 버지니아 울프의 네 번째 소설을 읽으면서 이제는 그녀의 문학세계가 어렴풋하게 보여할텐데 나는 여전히 블랙홀에 빠진 듯하다. 악평을 쓰자면 그녀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잘 드러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전문가만이 알아챌 의도라면 일반독자와의 소통이 당연 힘들 것이고 많이 읽혀질 수 없을 것이 아닌가. 그녀의 작품 세계를 높다고 평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녀만의 세계라고 해야 할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저 그녀의 훌륭한 작품을 탄생시키는 과정 중에 <제이콥이 방>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제이콥이란 인물이 주는 의미가 무엇일지 고민하면서 읽었지만 찾지 못한 나는 제이콥을 둘러싼 여성들 그러니까 제이콥과 이성의 호감을 느꼈던 인물들과 플랜더스 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플랜더스 부인은 남아 셋을 둔 과부이다. 청혼을 하는 사람도 있고 청혼과 상관없이 계속해서 관심을 보이고 찾아오는 남자도 있다. 당시 영국 과부들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고 과부의 재혼율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지만 플랜더스 부인은 스스로가 재혼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지 않는다. 그것은 아이가 셋이나 딸린 과부라는 조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아이들과 함께 조용히 살아가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우리나라만 봐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여성상이다.



제이콥이 가장 숭배했던 여성은 클라라였다. 어른들을 배려하고 바흐를 연주하는 착한 심성의 여자였다.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지 않는 순종적인 여성이다. 유일하게 제이콥과 육체적 사랑을 나누지만 결국 스스로 제이콥을 떠나는 플로린다. 그녀는 연애지상주의인 사람인가? 페니 또한 닉과 제이콥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녀는 화가인 닉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의 모델이 되지만 제이콥을 보고는 제이콥에게 반해 닉과 제이콥 사이에서 갈등한다. 마지막으로 산드라는 유부녀로서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모든 걸 사랑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각자 위치가 다르고 비교가 가능한 여성을 여럿 설정 후 남자 주인공과의 연애 감정선을 들여다 보며 당시의 남성들은 어떤 여성을 선호했으며 또한 제이콥은 어떤가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세심한 연애 감정선이나 연애의 서사를 보고 싶었지만 작가의 의도는 그도 아니었나보다. 한 줄 두 줄로 표현되는 그들의 감정들이 너무 부족하다.



제이콥의 방에는 아주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인물들이 모두 우리에게 큰 의미를 주지는 않는다. 그저 우리의 이웃이고 우리의 일상 속에 언제나 있을 법한 인물들이다. 그런데 왜 버지니아 울프가 이렇게 많은 인물을 등장시켰는지 알 길이 없다. 그들이 주는 의미는 그저 제이콥을 둘러싼 인물들의 주변일 뿐이다. 우리의 일상을 보여주기 위한 소설인가? 그런데 나는 울프의 의도를 캐치하지 못하는 건가?라는 의문이 또 생긴다. 그녀의 작품은 읽을수록 미궁에 빠진다. 자신의 나라의 청년들을 살리기 위해 크레타의 미궁 속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절대 나오지 못할 미궁을 빠져나온 테세우스. 그에겐 크레타의 왕 미노스의 딸 아르아드네 공주의 도움이 있었다. 지금 내게는 아르아드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미궁을 헤치고 제이콥의 방의 주제의식을 헤아리는 데 도움을 줄.



덧. <제이콥의 방>에는 해설이 붙어있다. 해설조차 내겐 어려웠다. 분명 '제이콥의 방'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쓰여져있다. 그러나 그 해설이 내게는 와닿지 않는다. 그저 부족하지만 나의 시선으로 제이콥의 방을 이해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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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 - 설국에서 만난 극한의 허무 클래식 클라우드 10
허연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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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 ㅣ 허연 ㅣ 클래식 클라우드(아르떼)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설국의 유명한 첫 문장이다. <설국>을 읽고 아쉬운 마음에 클래식 클라우드 허연의 <가와바타 야스나리> 편을 보게 되었다. 내가 본 설국은 아쉬움이 많은 책이었는데 허연이 본 <설국과> 그 작가에 대한 해설서 같은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에서는 <설국>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어느 작가의 한 작품을 이해할 때에는 그 시대적 배경이나 작가의 생애를 들여다 보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은 작가가 살아갔던 시대적 배경이 투영되고 작가가 태어나고 자라온 환경이 작가의 성격이나 문학에 영향을 줬을 것이므로. 다시 말해 어렸을 적의 체험이나 기억들, 성장배경은 작가가 써 내려갈 문학의 밑그림이 되는 것이니까.




가와바타 야스나리 역시 자신의 삶이 <설국>과 그의 다른 작품에 녹아져있다. 나는 <설국>만을 읽었지만 <이즈의 무희>, <뼈 추리기>, <스승의 관을 어깨에 메고>, <초혼제 일경> 등 여러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들 모두 그의 자전적 이야기들이 녹아져있다. 두 살과 세 살에 걸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15살에 유일한 혈육인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신 다음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고아가 된다. 어릴 적 할아버지와 둘이 살면서 그가 보았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늘 앉아서 동쪽을 바라보는 모습이었다고 하니 유년시절 어른들의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살아야할 소년은 외로움과 고독이 친구가 되었을 듯하다. 또한 모두가 돌아가는 인생의 허무함이 그의 문학에 그대로 투영이 되었다.




교토를 사랑했던 그는 <고도>라는 소설을 통해 교토의 이야기를 썼고 영화와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고 한다. <고도>는 한국에서는 인기가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 '일본적인'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때에 '아름다운 일본의 나'라는 제목의 수상 소감문을 읽는다. 일본인의 정서와 일본의 선불교사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를 접한 서양인들은 굉장히 감탄했다고 한다. 대단한 애국심과 자국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나는 작가라 생각된다.






"결국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이야기하면 

설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설국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먼 길을 돌아간다."






역시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대표하는 작품은 <설국>이겠다. 허연조차 위의 말처럼 설국에 대해 먼저 설명하고 있다. 소설 곳곳에서 느껴지는 허무감, 아름다운 문장들 그러나 일본인들의 애매한 정서와 그것들의 표현법이 <설국>을 읽고 난 후에 내게 남겨진 것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제목에서 느껴지듯 펑펑 내리고 쌓이는 눈의 고장, 설국 그자체만이 덩그라니 남았다.

감당하지 못할 만큼 쌓이는 눈, 그러나 언젠가는 녹아져버릴 눈덩이들 속에 갇혀 사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시마무라는 거의 무위도식하는 사람으로 어떠한 것에도 열정이나 집착, 의미를 두지 않는 캐릭터로 그의 시선들이 허무감과 헛수고로 비춰져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읽고 난 후에는 허무감이 어깨까지 차오른다. 그의 평생에 걸친 '허무'라는 단어는 그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하다.






"나는 작품을 통해 죽음을 미화하고 

인간과 자연과 허무 사이의 조화를 추구했다."






<설국>을 읽으면서 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하나도 드러나 있지 않지?라는 의문을 가졌었다. 당시는 한국으로 보자면 일제강점기였고 일본으로 보자면 한참 전쟁 중이었다. 왜 시대적 배경이 드러나지 않았을까? 허연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웬만해서는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성격은 그의 작품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의 작품에는 어떠한 시대적 배경도, 옮고 그름도, 선도 악도, 승자도 패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해설을 읽고 나서야 시대적 배경뿐만이 아니라 <설국>에서의 시마무라의 행동이 이해가 된다. 설국의 마지막 부분에서 요코가 2층에서 떨어져 죽고 은하수가 몸으로 흘러든다는 식의 표현이 있는데 은하수가 내 몸으로 흘러든다는 것은 어떤 느낌을 표현하는 것일까?허연은 이것을 물아일체라고 해설하고 있다. 아름다운 표현이었지만 잘 이해되지 않는 문장이었다. 자연과 내가 일체가 된다.....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일까? 그 당시의 느끼는 감정이 '허무'였던 것이고 물아일체를 통해 허무를 표현한 것일까? 허연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은 읽는 소설이 아니라 사색하는 소설이라고 한다, 즉 깨달아야 하는 소설이라고.... 무척 어렵게 느껴진다.





스웨덴 왕립학술원이 밝힌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수상 이유는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자연과 인간의 운명이 지닌 유한한 아름다움을 우수 어린 회화적 언어로 묘사했다."와 "동양과 서양의 정신적 가교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이유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만 두 번째 이유는 나로선 납득이 어렵다. 아시아에서도 일본의 정서는 독특한 '애매함'으로 유명하다. 이런 애매함이 서양인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었을지도 의문이지만 정신적 가교를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 이유이다. 어쩌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없는 아쉬움의 발로일까?





대단히 일본스러운 <설국>, 허연의 해설로 조금은 다가간 느낌이지만 역시 '일본스러움'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인가부다. 훌륭한 해설에도 <설국>의 시마무라를 이해하기에는 우리에게 큰 장벽이 있나보다. 내가 눈의 고장으로 들어가야 하려나부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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