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 그냥 지는 전쟁은 없다 임용한의 시간순삭 전쟁사 1
임용한.조현영 지음 / 레드리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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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역사를 되볼아볼때, 문득 그 이면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단어는 아마 '비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고대의 여느 문명과 비교해볼때 한반도 속의 국가들은 강대국이 강제한 '동북아의 질서' 속에서 그 스스로의 문화를 꽃피웠다. 물론 이에 수 많은 장점이 발현되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역사 속에서 패권을 쥐고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제국의 씨앗'은 (안타깝게도) 한반도에서는 쉽사리 발아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제국이라는 기계를 돌리기 위한 연료가 수 많은 사람들의 피와 희생이였다는 것을 기억하는 동시에, 이에 현대적 관점에 비추어 정복 전쟁과는 다른 요소를 통하여 다른 어떤 것을 통해 '문명의 역동성'을 돌릴 수 있는가? 에 대한 (역사의) 해답을 찾는 것은 등은 분명 오늘날 '역사에 비추어 미래를 개척하는' 현대인의 가치를 올바르게 실현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이 병자호란을 통해 볼 수 있는 역사의 가치 또한 단순히 '약하면 치욕을 당한다' 라는 표면적인 것만이 아닌 다른 의미도 찾을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에 과연 저자는 어떠한 시선을 통하여 이 사건을 바라보는가? 어쩌면 그것을 쫒아 나름의 의미 등을 발견하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목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찰을 보내고 초병을 세우려고 하면 패기있는 자원자는 있지만 믿고 맡길 사람이 없었다.

288쪽 쌍령전투

결과적으로 병자호란에 비춘 조선의 모습은 크게 '무능'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당시 국제정치를 행하는 수준도 그리고 그 무엇보다 (방어)전쟁을 수행하는 것에도 미숙한 것을 뛰어넘어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 과거의 무능에 대한 많은 비판과 의견을 남긴다. "어째서 조선은 그렇게 약해졌는가" 이에 이 책이 정의하는 (가장 큰)주장은 당시 조선의 많은 지도자들이 신념과 명분에 집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척화파는 결코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았다. 덕분에 지금도 그들의 신념을 애국심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들이 집착하는 가치는 '명분'이다.

363쪽 조선의 영원한 딜레마

허나 당연하게도 조선은 당시 거대한 세력을 이루려는 청나라의 존재를 위협적으로 바라보았고, 또 나름의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했다. 실제로 조선이 '북방의 방어'에 공을 들이지 않았다면. 어찌 인조 스스로가 철옹성?인 남한산성에 들어가 저항??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 노력이 결과적으로 홍타이지의 침략의지를 막아낼 수 있었는가? 또는 발발한 전쟁을 보다 유리하게 수행할 수 있는 조건중 하나가 되어주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면 역시나 그 해답은 부정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청나라의 성장과 그 위협을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했고, 또 그러한 인식 등으로 발발되어진 전쟁의 흐름 뿐만이 아닌 전체적인 (전쟁)지휘와 통제에 있어서도 '지도자'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야말로 무의미한 탁상공론과 근거없는 자신감을 드러내며, 전쟁을 이어가는 와중 실질적으로 청에 저항하고 또 희생되어가는 존재는 최전선의 군인들과 힘없는 백성이였다.

때문에 결과적으로 인조 스스로가 치욕을 당하는 순간 오늘날 뿐 만이 아니라 아마 당시 많은 사람들도 이를 '인과응보'와 비슷한 감정으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심지어 이후 조선의 국가 지도자로서 인조의 역활, 그리고 전쟁과 전황을 통제하고 지휘해야 하는 조정과 군대의 역할이 청에 미치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또 그것에 비추어 '지금 조선에 가장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그들 스스로 던져 반성하거나 수정(또는 수많은 실행과 시행착오 무엇보다 경험!을 축척) 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이후 조선이 걸어온 기나긴 길을 생각해보면 과연 조선의 역동성... 아니 조선의 자주적인 성장과 발전을 저해한 최대의 요소는 주변의 강대국보다 먼저 그들 스스로 (필요이상으로) 집착한 '조선의 근본주의' 그 자체의 존재가 아니였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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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육계
김영수 지음 / 창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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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지금껏 많은 사람들은 인문학적 접근을 위하여 여러 동서양의 고전기록을 접하려고 한다. 그러나 반대로 그러한 접근 이후에 스스로가 어떻게 변화하였는가... 또는 실행활에 있어서, 고전의 지식을 얼마만큼 확용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면? 아마도 이에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이 된다.

이처럼 이 책 또한 고대의 '삼십육계'에 담겨있는 여느 교훈 등이 현대의 수 많은 경영철학에 어떻게 녹아들었는가, 또는 어떠한 성과를 이루어냈는가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담고 있다.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는 앞서 언급한 성과 뿐만이 아니라, 본래의 삼십육계의 의미를 공부한다는 의미에서 분명 유용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며,이에 나 또한 나름의 이해와 감상을 통하여 나름의 이야기를 이 글에 풀어보려 한다.

경쟁의 길에는 승리도 패배도 있다. (...) 실패에서 교훈을 잘 찾아 종합하고 분석할 줄 아는 사람만 패배를 승리로 바뀌서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

341쪽 패전계의 기조와 핵심

각설하고 나를 기준으로 생각해봐도 '삽십육계'는 상당히 낮선 개념이다. 물론 세상에는 삼십육계 줄행랑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는 하지만, 과연 그것이 본래의 삼십육계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이해는 그다지 깊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위의 삼십육계와 손자병법 또는 오자병법과 같이 고대의 군사적 개념을 정리하거나 해석하는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시나 각각의 병서가 등장하기까지의 과정과 그 해당시대의 모습과 같은 환경에 대한 지식또한 접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라 생각이 된다.

예를 들어 저자는 유명한 '삼국지연의'를 곧 잘 이 책의 예(또는 해석의 재료)로 활용한다. 이는 대중적인 인식에 비추어 '병법'어떠한 것으로 이해 되고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다. 그야말로 대중이 이해하는 책사란? 어떠한 난관을 극복하는 와중 '착실한 준비'만으로는 그 역량이 부족할 때, 이를 보충하는 역활로서 '인간의 지혜가' 큰 보조적 역활을 할 수 있다는 나름의 믿음을 상징하는 존재인 것이다.

때문에 오래도록 삼십육계가 '기만술'만을 강조한 계책으로 치부된 것도 생각해보면 표면적으로 이 내용에서 전략 전술의 '기본'을 쉽게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였을 것이다. 물론 이는 오늘날에는 상당히 수정되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책 속의 요점이 현대의 가치에 어떻게 부합될 수 있는가, 정리하자면그 어떠한 것보다 '상대'를 중점으로 성립하는 여러 계략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또 활용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가르침이 아닌가 한다.

과거 타국의 침략에 대비한다며 스스로 성벽을 쌓고, 해자를 파고, 무기를 갈고 닦는다면 물론 그것만으로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삼십육계의 의미를 더하면 결국 그 최선은 반쪽...도 아닌 무의미한 노력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 노력의 일면에는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예의 삼국지연의에서도 그러한 면면이 드러난다. 최선의 병법, 최선의 모략을 모색하는데 있어서, 곽가는 원소를 제갈량은 조조를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 이야기 속의 최선의 결과가 나타났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장사를 하고 싶으면 고객의 마음을 잡고, 거래를 하고 싶으면 상대를 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첫 삽을 뜰 수 있다. 물론 이는 당연한 말이라 할 수 있지만, 의외로 우리들은 그 교훈을 실행하는데 있어서 (나름) 어리숙한 면면을 많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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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러시아 - 러시아의 굴곡진 현대사와 독재자의 탄생
대릴 커닝엄 지음, 장선하 옮김 / 어크로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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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분명 '블라디미르 푸틴'은 매우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였다. 예를 들어 그가 젊은 시절 비밀첩보조직 KGB의 일원이였다는 것부터, 이후 러시아의 최고 지위에 올라 사실상 '독재자'로서 군림하고 있는 사실에 더해, 심지어 그의 경쟁자나 비판자를 대상으로 암암리에 암살 등의 '공작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보면분명 그는 상식적으로 두려워해야 마땅한 권력자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미쳐야 마땅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전) 일각에서는 이러한 인물을 비교적 친숙하게 받아들였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인터넷 매체 등에서 러시아의 여러 이미지를 희화와 한 콘텐츠가 돌아다니기도 했고, 심지어 한국에서도 푸틴을 '불곰국의 큰형님' 정도로 비유하며 나름 친숙함을 표시하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그야말로 실질적으로 러시아는 냉전이후에도 커다란 호전성과 군사력을 갖추었지만, 반대로 자유진형?의 수 많은 국가와 국민들은 그 위험을 외면하거나 또는 앝보았던 일면이 없지 않았다.

서구의 다른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 푸틴이 거대한 나라를 맡게 된 관료에서 과대망상에 빠진 독재자로 탈바꿈한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102쪽

물론 그러한 흐름은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으로 종식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제 많은 사람들은 지금껏 알고 있었던 여느 독재자가 실로 국가 전체의 힘을 동원하여 야심?을 이루려 할 정도의 실행력을 갖추었음을 알게되었고, 또 그 무엇보다 그 실현의 과정에서 보여지는 수 많은 피해와 희생 가운데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잔인함'을 비추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때문에 이 책은 과거 푸틴이 보여준 정치적 행보에 더해 그가 국가지도자로 군림했던 러시아 내부의 수 많은 (정치.사회적)사건들을 들여다 보며, 분명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푸틴의 '진면모' 또는 제국주의자이자 권력자로서 완성되는 과정과 결과 등을 통하여, 오늘날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음을 (뒤늦게나마) 진단하는데 그 목적을 둔다.

당신은 인간의 목숨과 자유, 문명의 가치들을 전혀 존중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85쪽 / 알렉산더 리트비넨코

실제로 오늘날 수 많은 언론과 여론은 푸틴과 러시아를 강력하게 비난한다. 그러나 푸틴은 (이미) 과거 그가 일으킨 수 많은 사건을 통해 수 번의 비판과 저항을 맞이해 그의 실질적 지위를 지켜낸 인물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푸틴을 주모자로 지목한 부패와 살인 등에 결국 러시아의 '최고 독재자'는 세계에 어떠한 불이익을 받았는가? 그리고 그의 권력을 경계하고 또는 끝장내기 위해서 국제사회가 실질적으로 행한 일은 과연 무엇이 있었는가... 이에 결과론에 따르자면 푸틴은 여전히 건재하다.

이에 이 책은 이후 러시아 내부를 비롯한 세계의 인식 가운데서, 향후 독재를 용인하는 흐름이 형성되는 것을 가장 경계하는 듯한 주장을 폈다. "민주주의와 발언의 자유" 오늘날 대한민국의 사회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체제와 가치가 어느날부터 위협을 받을 수 있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괜한 걱정인가? 그렇다면 21세기에 이르어서도 제국주의를 바탕으로 전쟁과 정복, 그리고 여전히 이러한 과정을 지지하는 국가와 국민 또는 지도자가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이 현실을 과연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그리고 어디까지나 국내의 문제, 그들의 선택으로 치부하기에는 '러시아'는 분명 크고 강력하지 않은가?

이처럼 이 책은 비록 짧고 간단한 (논픽션) 만화일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정치.외교적 가치관에 더해 보다 심각한 메시지를 얻을 수 있는 내용이 녹아있다는 감상을 준다. 앞으로 러시아의 선택을 통해 대한민국 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나라가 어떠한 길을 걷게 될 것인가. 이에 개인의 입장에서도 보다 각성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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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가 세계를 제패하는 시대는 다시 오는가? - 인류 5천 년, 세계 패권의 역사
다마키 도시아키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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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계의 패권에 도전하는 아시아의 국가가 있다고 한다면, 과연 어떤 국가가 떠오르는가? 물론 이전에는 일본이 유력한 후보였지만, 오늘날에는 쉽게 중국을 떠올릴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이 된다. 실제로 중국은 '일대일로'를 주요정책으로 삼았고, 또한 '중국몽'을 자국의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그야말로 이전 세계의 중심이라 생각했던 중화 사상의 실질적 부흥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인데, 이에 이 책은 과거 실제로 중국이 황하문명을 바탕삼아 오랜 역사 속 거대한 영향력과 부흥을 이룬 사실과 함께, 이후 '굶주린 늑대'에 불과했던 서방세계에 의해 유린되는 과정을 겪게 되기까지의 과정과 그 이유를 살펴보고, 또 그 정보를 바탕으로 국가가 크게 '정치.경제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통찰'을 얻는데 목적이 있다 여겨진다.

조공무역은 중국이 이웃 나라에 비해 압도적인 경제력을 자랑해야만 성립하는 제도였다. (...) 주변 국가가 자국 선박으로 조공을 실어오기를 기다리기만 해도 충분했으며 물류 체계가 다소 부실해도 딱히 문제 될 게 없었다.

186쪽 조공 무역의 문제점

그러나 저자는 단순히 '중국의 역사'에 멈추지 않고, 서방과 동방을 아우르는 모든 세계사를 중심으로 '무엇이 물류의 역활과 혁명을 가져왔는가' 에 대한 다양한 탐구를 계속한다. 과거 오래도록 번영을 상징하는 황하 문명과 오리엔트 문명 등이 가지는 핵심은 크게 농업의 발전이다. 각설하고 풍부한 자원과 생산량이 가져오는 정치적 안정과 영향력은 오래도록 동방이 여러가지 영역에서 서방을 크게 앞질러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지만, 이후 서방은 '상업 네트워크'를 통합하며 이를 역전시키는데 성공한다.

만약 유럽인이 유럽 선박이 아닌 아시아 선박으로 1차 상품을 수입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 이 점에서 생각해도 공업 제품 생산뿐 아니라 물류 지배 = 종속 관계가 성립한다는 사실을 이해 할 수 있다.

258쪽 지배 = 종속 관계

이처럼 현대 서방 문명이 가지는 영향력이 완성되기까지의 '역사적 사건' 들을 들여다 보면, 크게 함선과 대포가 떠오른다. 그러나 과거 대항해시대를 이어 제국주의가 형성되기까지 진정 서방세계가 추구한 것이 단순한 영토의 침략과 점령, 그리고 수탈에만 머물렀다면, 결국 이는 이후 발전하는 민족자결주의 또는 식민지의 독립 등을 기점으로 쇠퇴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수퍼파워를 자랑하는 미국을 포함하여,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여전히 유럽(서방)의 정신이다.

물론 이전 서방이 범선을 통해 형성한 바다위의 연결선을 확장하고 또 완성시키는 과정에서, 분명 수탈과 정복행위등이 빈번히 일어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후 산업혁명과 같은 또 다른 발전이 필요하게 된 이유를 따져본다면, 결국 서방이 확보한 1차 상품을 가공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또한 이후 가공한 상품을 다시 판매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 등을 사실상 독점한 사실 등이 드러난다.

패권 국가란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며 '자동'으로 이익을 획득할 수 있는 나라를 일컫는다. '일대일로'는 아무리 뜯어봐도 (...) 목적으로 한 정책으로 보이지 않는다.

271쪽 '일대일로'의 의미

물론 이전과는 달리 오늘날에는 '국가의 패권' 또는 '국가의 경제력'을 통해 모든 것을 강제하거나 독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적어도 패권 국가를 목표로 한 정책을 바탕으로 국가와 사회 시스템 사이에, 소비의 균형과 격차가 완만해지고 또 서로의 무역과 관계의 형성을 통해 안정과 번영을 약속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21세기를 넘어 미래를 위해 계승해야 하는 '과거의 유산'으로서 환영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오늘날 패권에 도전하는 강자 중국이 목표로 하는 것은 (단순히) 주변을 압도하는 것을 넘어선다.

이에 그들이 목표로 하는 것이 상대에 종속의 관계를 강요하는 것이라면, 이는 분명 21세기의 패권국이 보여야 할 모습이 아니다. 중국의 부흥, 중화민족의 우위가 상대의 종속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근현대 과거의 서방을 대신하여 군림하겠다는 의지이며, 이는 세계의 역사에 비추어, 시대의 정체를 넘어 역행할 수도 있는 커다란 갈등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때문에 이후 미래의 패권을 누가 어떠한 비전을 제시하며, 완성하는가? 는 결국 세계의 많은 국가의 미래를 좌지우지 하는 거대한 사건이 될 것이다. 이때 그 과정에서 보다 올바른 시선과 비판을 할 수 있는 척도를 제공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결과적으로 그것은 역사를 마주하며 갈고 닦은 통찰력. 그것이 최고의 무기이자 방패가 되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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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열쇠 - 역사에서 지워진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이야기
브라이언 무라레스쿠 지음, 박중서 옮김, 한동일 감수 / 흐름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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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소위 '현대인의 인식에 부합하는 종교의 모습'은 어떠한 것이 있는가? 이에 생각해보면 종교의 모습에는 크게 두가지 형태가 있다고 생각이 된다. 예를 들어 '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자격(또는 지위)을 가진 자들이 무녀와 신관 등에 한정되는 경우에는 결국 신전이라는 한정된 장소, 수행과 신탁이라는 독특한 행위 등이 신과 인간의 사이의 '신성'을 부여한다. (또는 연결점이라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기에 결국 사회의 독특한 역활을 수행하는 신분으로서 종교는 그 나름의 지위를 온전하게 누리는 하나의 세력이 될 수 있었으나, 이미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소위 전통적 종교의 모습에는 이와 같은 '관료제적 성격을 가진 종교'와는 다른 또 다른 형태가 존재해 왔다.

실제로 이 책이 탐구하고자 하는 주제는 크게 약물을 이용한 '영적 체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명한 델포이 신전의 무녀 '피티아'의 경우는 신과의 접점을 이루기 위하여 화산 가스를 흡입했다. 그러나 그 이전의 보다 원초적인 종교적 제의에 빠지지 않는 음료 '맥주와 포도주' 또한 넓은 의미에서 생각해보면 술에 취하는 행위... 또는 신체적 정신적 중독상태에 빠지는 것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것이기에, 결국 (주제인) 종교적 황홀경에 전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주제는 어디까지나 '약물을 통한 종교적 환희'다. 즉 오랜 세월동안 인류가 전통적 발효음료와 맥각과 같은 자연적 환각물질을 통해 '정신을 흐리게 한 것은' 크게 개인적 행위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신과의 만남'이다.

때문에 그들의 제의는 신성한 장소도, 또는 자격을 지닌 신관도 필요치 않다. 그저 인간의 영혼과 그에 대한 매개체(약물)만 있다면 그 장소와 집단은 커다란 무아지경 속에서 신과 죽음 모두를 아우르는 신성과 접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랜세월동안 현대인들은 과거 사람들이 이러한 '자연적 약물'이 인체에 어쩌한 영향을 미치는지 '크게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이해했다. 그야말로 인체에 미치는 중독상태를 설명할 때, 과거 인류가 크게 신비라는 종교적 해석을 부여한 것에 대하여, 그 바탕에 인간의 무지(아는 것이 없다)가 있었다고 정의한 것이다.

약리학의 진정한 비밀은 약랑학이다. (...) 이것이야말로 고전학자 루스 스코델의 말마따나 "슬픔을 억제하는 약물"일 것이다. 하지만 똑같은 성분을 더 많이 복용한다면 의료용 포도주는 금세 환각성 포도주로 변모한다(...) 그리스인이 포도주에 약물을 첨가했을 뿐 아니라 복용량에 대해서도 예리한 눈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확증이다. (...) 예수 이후로도 여러 세기 이어져 5세기 로마제국이 멸망할 때 까지 지속되었다.

321쪽 불멸의 약물

그러나 이 책은 오랜 원시 문명 뿐만이 아니라, 이집트 그리스 로마 문명으로 이어진 '약물의 종교적 사용'이 보다 약물의 높은 이해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그야말로 신비제로 이해되는 디오디소스 축제 등이 가져온 의의는 고대 특권계층이나 종교적 신비를 독점한 계층을 벗어나, 보다 대중적인 의미에서 자유로운 형태의 의례 또는 종교적 신비를 공유하는 문화가 확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과는 반대로 오늘날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저자의 주장은 크게 '역사의 주류'로 인정받지 못한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때문일까? 아니러니하게도 그 이유는 '중독'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현대인의 상식에 이 주장이 크게 부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서방문명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친 기독교는 일찍이 '약물의 환희'를 엄격히 부정하여 왔다. 그도 그럴것이 앞서 언급한 엄격한 종교적 교리와 관료적 체제를 완성한 기독교가 그밖의 종교적 의식 뿐만이 아닌, 인내와 수행을 벗어난 전통적 쾌락을 인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에 저자는 고대 무아지경에 이르는 신성과 마법, 즉 인체와 정신을 자극한 신비의 의식 등이 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을 거쳐 초기 기독교 문화의 형성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디오니소스의 생살과 피를 섭취하고 그의 환영적 포도주를 맛보았을 때 입문자들은 심오한 경험을 한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가족과 국가와 로마 사회 전반에 대한 모든 의무를 잊도록, 딱 한 잔만 마시면 불멸을 맞이할 수 있는 야외로(...) 그것이야말로 종교가 탄생하는 방식이기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종교가 번성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관료제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423쪽 영원의넥타르를 마시고

그러나 이에 만에 하나 초기 기독교가 '디오니소스의 정신' 즉 자유와 해방, 종교적 쾌락을 통해 입문자들을 늘리고 또 번성했다 할지라도, 결국 오늘날 이를 인정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실제로 이후 관료적 체제를 완성하고, 또 오늘날에도 이러지는 (새로운) 신성의 의미를 확립한 종교를 만들어내기까지... 그야말로 기독교가 과거 옛 행위를 청산하기 위해 행한 역사적 사실은 말 그대로 '약물과의 단절'이라 해도 과연이 아니다. 실제로 과거 고대의 무녀들은 환각과 쾌락 또는 고통을 멈추는 약물을 조제하고 유통하는 소위 '의학의 주체'가 되어왔지만, 이후 기독교 사회에서는 마녀로 내몰려 학살당하는 운명을 맞이하지 않았나?

이러한 종교적 행위가 이루어진 이후, 그리고 오늘날까지 해당 종교의 대의가 살아있는 현 상황에서, 기독교 또한 스스로의 신성을 증명하는 행위로서, 고대의 전통적 행위, 즉 광범위한 약물을 활용했다는 주장은 분명 불쾌하고 또 해당 종교의 신성(또는 정체성) 을 모독하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다. 허나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기독교는 고대 문화와 해당 기술(약학 등)을 단절시킨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흡수하여 독점하고 또 활용한 존재이다. 물론 현대 이러한 주장이 얼마만큼 증명되고, 또 인정받을 수 있는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역사적 연구가 꾸준히 진행되어 갈 경우, 미래의 수정된 역사의 상식선에서 보다 자유로운 종교의 해석? 을 마주할 수 있기를 내심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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