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고백 - 천재의 가장 사적인 편지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지음, 지콜론북 편집부 옮김 / 지콜론북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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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의 일생은 오늘날에도 '음악의 천재적 재능을 타고난 연주자이자 작곡가'로서의 명성에 걸맞게 상당히 잘 알려져 있다. 때문에 굳이 이 책과 같은 (당시)위인이 스스로 작성한 일기를 마주한다는 것은 어쩌면 이미 알려진 사실에 더해 보다 그의 내면의 가치 등에 다가서기 위한 시도로서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어린시절부터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를 따라 연주 여행을 다녔다. 물론 이는 모짜르트의 재능을 갈고 닦는 동시에, 장래 그를 고용해 줄 스폰서를 찾아냄으로서 그의 신분 이상의 성공을 꾀하려는 목적도 같이 있었다. 그렇기에 귀족부터 교황 또는 왕실의 일원에 이르기까지 그가 마주한 사람들은 모두 어린 연주자의 재능에 감탄하였고, 이후 성장하여 다시끔 두번째 연주 여행을 떠난 이후에 있어서도 작곡가로서도 남다른 능력을 선보이는 이 인물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던졌지만 안타깝게도 본래의 목적 중 하나인 스폰서는 좀처럼 되어주지 않았다.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 저는 시를 써서 마음을 엮어낼 수는 없습니다. (...) 하지만 소리로는, 가능합니다. 저는 음악가니까요. (...)

93쪽

각설하고 과거 영화 '배리 린든' (1975) 에서도 보여지듯이 당시 (그의 시대에) 다른 계급이 이른바 상류계급에 다가서 그들의 일원이 되는 것은 단순히 재능과 노력이 뒤따라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모짜르트가 작곡한 악보는 그를 아는 귀족들 모두가 탐냈지만 그들은 그저 순간의 찬사와 대가를 지불했을 뿐 그의 미래에 투자하는 결단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때문에 그는 그의 예술적 감각을 일깨워줄 것이라 기대한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넘어, 부유한 오스트리아 왕실에도 고용을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의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보다 예술에 큰 관심을 보일 여유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일기를 통해 스스로의 현실에 대한 한계의 답답함 등을 토해내는 동시에, 이후 스스로의 삶에 있어서도 오래부터 아버지 등이 바라던 궁중 연주자로서가 아니라, 창의를 바탕으로한 작곡가로서의 삶을 원한다는 바람을 기록하면서, 점차 스스로의 자아로 인생을 설계하는 독립적인 인물이 되어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그의 일기는 미래로서의 방향성을 잡은 시작점에서 멈추었지만, 이후 세상에 알려진 모짜르트의 모습은 일기 그대로의 (일생의)각오와 같은 '피아니스트'이자 '오페라의 거장'에 도달하였다. 물론 이후에도 상류계층의 넉넉한 원조를 받는 환경에 놓이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빈에서의 활동 등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인생의 후반 높은 명성과 부를 제 스스로의 손에 쥐었다.

다만 어째서인지 재능에 비하여 일상에서의 능력은 떨어졌는지 그는 경제적으로 현명하지 못했고, 또 오랜 구직? 생활에서의 영향 때문이였는지 그는 귀족의 삶에 맞먹는 환경과 삶의 레벨을 유지하며 (스스로) 막대한 돈을 낭비했다. 그러나 이후에 그가 35세의 젊은 날을 마치기까지 끝내 화려한 삶을 고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들은 그의 손에서 작곡된 수 많은 음악을 통해 그의 이름을 후대에도 남긴 모짜르트의 뛰어난 재능을 안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언급하였듯 보다 위인 모짜르트의 내면에 다가서도 싶었던 가치에서 생각해보면 어쩌면 막상 실제 그의 인생에서의 모습은 스스로 성공한 사실에도 만족하지 못한 나름의 '시대의 한계'그 단면을 엿보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는 이 책을 끝으로 위의 생각을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져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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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물고기 이야기 - 개정판
오치 도시유키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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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나무사이


북유럽의 바다. 이른바 북해는 흔히 '세계에서 가장 거친 바다'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여느 외국의 방송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과거를 넘어 현대에 이르러서도 바다는 언제나 그 장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업 등이 성행하는 까닭은? 결국 그 바다 자체가 매우 풍부한 자원을 품은 곳이자, 해당 바다의 식재료 등을 중심으로 한 여러 문화 또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처럼 이 책은 여느 식문화를 다루는 내용 뿐만이 아니라, 보다 세계사적인 시각을 통해서도 북해의 바다와 자원(어류)을 주제로 많은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예를 들어 기독교가 사순절 '물고기를 먹는 것을 허가했기에' 당시의 사람들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말린 대구와 청어를 자신들의 식탁에 올렸다. 그리고 해당 청어를 포획하고 말리는 가공을 통해서 해당 사회는 생산과 가공 유통이라는 하나의 산업을 구축했고, 이에 그 이익을 지키거나 독점하려는 시도에서 그 유명한 '한자동맹'이 시작되었다.

그뿐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서양의 문명과 그 발전과정을 '해양민족의 문화' 로 이해하고 있을 만큼 스스로 환경에 저항하며 만들어낸 북해의 해양 활동은 이후 단순한 어업 뿐만이 아니라, 바다의 자원과 공유... 즉 국가는 바다에서의 영향력을 얼마만큼 행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내며, 이후 네덜란드와 대영제국으로 이어지는 여러 확장의 역사를 만들어낸 사실이 있다.

어느 시대에나 대구는 '자유'를 상징하는 생선이였다. (...) 뛰어난 보존식품으로 (....) '항해의 자유'를 선사했다. (...) '종교의 자유'라는 추상적인 의미에서 자유를 보장하여 주었다. (...) 자유롭게 물고기를 잡으며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는 대구잡이 어부들의 욕망이 짙게 깔려 있었다. (...)

212쪽

때문에 이 책은 나에게 있어서 "문명은 어떠한 모습으로 성장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내 놓은 책으로 이해된다. 저자는 처음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종교와 규정 속에 놓인 환경에서도 어느새 허락된 작은 행위를 계기로 (개인) 저마다의 이익과 필요에 의하여... 또는 (공동체의) 자원 확보와 분담 등을 나누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그렇기에 역사의 큰 시각으로 바라보면 북해와 물고기는 단순히 그 장소에 살았던 사람들이 활용한 자원의 가치를 넘어서, 보다 더 나은 것을 위해 행동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준 소중한 시금석이라 생각된다.

실제로 '바다'란 자원과 교역, 그리고 이동과 분쟁의 가운데서 커다란 성과가 이루어지던 장소였다. 물론 오늘날에도 세계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필수요소로서 그 오랜 필요성이 퇴색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다. 다만 해당 바다를 마주하며 각각의 문명이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또 활용하였는가? 에 대한 차이점으로 오늘날의 국가 등의 모습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에 내가 이 책을 마주하며 깨닫게 된 것은 역사의 가운데 인간이 보다 '진취적으로 행동한 결과'와 사건 등을 통하여, 이후의 미래에서도 국가와 개인 모두가 되도록 지향하여야 하는 방향은 어디인가? 하는 그 방향성을 가늠하게 해 주는 것이 크다 라는 감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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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처럼 인생을 살아라 세계철학전집 6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지음, 이근오 엮음 / 모티브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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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철학은 오래도록 많은 시간이 지난 현대에 있어서도 더 나은 지성의 함양과 인격 소양 등을 위하여 꾸준하게 권장되어 오고 있다. 그렇기에 덩달아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등 여러 철학자의 사고방식 또한 공부가 권장되고 있지만, 각설하고 의외로 이 책의 주제이자 당시의 철학자였던 디오게네스는 나에게 있어서 해당 철학적 관점보다는 하나의 일화로 더 익숙하게 다가온다. 실제로 알렉산더 대왕이 마주한 이 이상한? 철학자는 크게 줄여서 "햇빛 가리지 말고 비켜" 라는 말로 그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에게 나름의 신선함을 선사했다.

그러나 이 일화는 정작 디오게네스의 철학적 사고 보다는 알렉산더의 깨달음이 더욱 눈길이 간다. 굳이 옛 말을 빌려오자면 '맷돌을 돌리는 노예에게도 배울 점은 있는법' 이니까. 알렉산더 자신은 만족 없이 어느덧 높은 이상을 위해 나아가는 위인이 되었지만, 누군가에게는 한 순간의 따스함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할 수도 있다.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접하기 이전까지 단순히 디오게네스의 철학을 '소유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도 그럴것이 과거 디오게네스의 삶을 닮아가려 한다면 사람은 한 순간에 태초의 삶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는 단순하게 세상 사람들에게 모두 '짐승이 되어라' 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만약 모두가 개와 같은 동물의 사고로 살아가게 된다면, 어느덧 세상은 강자의 지배 아래 서열이 나누어진 또 하나의 질서 아래서 살아갈 뿐이니 말이다.

때문에 디오게네스의 철학은 정리하자면 '쓸데없는 것을 정의하고 이를 덜어내기 위한 것' 이 아닌가 한다. 그의 생각에는 끝없이 인간을 탐구하는 사고도,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데아에 도달하기 위한 '본질의 탐구'도 속된 말로 오지랖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다만 디오게네스 스스로도 당시의 여느 그리스 철학자들의 논의와 주장 등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만약 그가 단순한 쾌락주의자였다면 "인간은 두 발로 걸어다니는 털 없는 동물"이라 주장한 플라톤을 향하여 '생닭'을 들이밀지도 않았을 것이고, "전능한 신이 한낮 신상에만 깃들었겠는가?"라며 예배 절차를 무시한 자신을 비난하는 군중을 향해 입장을 드러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제껏 세상의 질서와 선, 그리고 세상의 본질을 추구하며 이에 다다르기 위한 과정을 다져온 것은 여느 절대적 존재가 부여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의 고뇌와 행동 등이 쌓아올린 것이다. 때문에 어느날부터 해당 과정에 얽매여 이전에 스스로들이 만든 '관습과 법' 등이 인간 본연의 사고를 방해하고 또 삶 자체를 파괴한다면... 과연 그 과정은 진정 필요한 것일까? 예를 들어 과거 고대 그리스 사회도 많은 모순이 드러난다. 수 많은 폴리스(도시국가)가 똑같은 신을 모시는데도 인간의 싸움의 와중(전쟁중) 서로가 자신이 더 신의 사랑을 받는다고 말한다. 공동체에서 남보다 뛰어난 재능을 뽑낸 인물은 어느덧 알력 싸움에 휘말려 추방당하며, 오늘날 유명한 고대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또한 '사회 정의'라는 미명 아래 사실상 (아테네 사회에 의하여) 살해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은 손가락마다 서로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누군가 가운뎃 손가락을 들어 보이면 분노하지만 (...) 디오게네스가 꼬집은 것은 바로 이 불합리함, 본질을 잊은 사회 관습이였다. (...)

110쪽

그렇기에 어느 현상을 바라볼때, 그 세상의 정의와 상식의 틀을 벗어나, 처음부터 그 본질은 무엇이였나? 하는 질문을 먼저 던져보면 어떨까? "신을 경배하기 위해 굳이 왜 신전을 찾아가야 하지?" 이에 실제로 디오게네스가 던진 질문에는 당시에는 당연하고 또 인간다움이라 포장된 여러 현상에 대한 나름의 비판이 드러난다. 아마도 그것은 나름 하나의 사고에 사로잡혀 다름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사회에 대한 비판이자, 디오게네스 나름의 저항이였을 것이다. 세상의 사람들이 스스로가 바라는 행복이나 만족을 우선하지 않고, 끝없이 더 나은 외부의 무언가를 갈망하며 만들어낸 세상... 바로 그러한 세상 속에서 한 철학자는 겉으로 드러난 것 보다 마음에서 먼저 우러나온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평가와 인식보다 먼저 스스로가 행동하여 실현하는 것에서 스스로의 정의와 만족을 채우는 것이 더 나은 한 생명의 삶이라 주장하였다.

어쩌면 이것은 현대의 개인의 삶에서도 나름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누군가가 풍족한 삶을 자랑하고, 광고는 매일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최신의 제품을 쏟아내는데, 막상 스스로는 그 어느것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또 그것에 의하여 박달감을 맛본다.

이에 이 책의 교훈대로 저것은 "저딴 것을 위해서 아둥바둥 하는 꼴이란!" 이라며 외면하거나 관심을 거둘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대신 자기가 하고 싶은 마음 그대로 오늘에 충실한 하루 내일은 내일 생각하는 마음 자세로 오롯이 지금 이 시간의 나에 솔직해질 수 있는 삶을 산다면... 어쩌면 그것은 나름대로 자기 만족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장점이 될 수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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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 - 바스티유의 포성에서 나폴레옹까지 북캠퍼스 지식 포디움 시리즈 5
한스울리히 타머 지음, 나종석 옮김 / 북캠퍼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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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흔히 언급하는 정의로운 사회가 만들어지기까지, 과연 역사 속에 드러난 과정은 어떠했는가?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는 프랑스의 경우 결국 '전통적 계층'을 무너뜨린 것은 계몽과 선진화된 의식이 성장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닌, 바로 오랜기간 누적된 분노가 폭발했기 때문이였다. 때문에 결국 그 과정 또한 너무나도 잔혹하고, 또 극단적이다. 올바른 진실이 아닌, 루머가 난무했고, 피가 피를 부르는 야만이 사회를 지배했으며, 특히 극단적인 가치관을 따라, 이동된 권력을 잡기 위하여 민중이 아닌, 새로운 지식층의 새로운 형태의 싸움이 온통 나라를 혼란으로 이끌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올바른 저항의 과정으로서 이해되고 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스스로 생각하기에, 아마도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된 사회'란 두번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서 인식되기 때문일것이다. 실제로 현대인이 보기에 '귀족'은 병자나 다름이 없다. 이에 특히나 특권을 권리로 인식하며, 주변 많은 이들에게 '스스로의 잣대'를 들이댄다는 점에 있어서 만큼은 그만큼 타인에게 있어 재앙과 같은 존재로 인식될 것이 확실 할 것이다.

때문에 분명 오늘날의 '많은 국가 공동체'는 그 권력에 대한 한계를 보다 분명하게 하려 노력한다. 돈과 권력으로 만들어진 '특권'을 제한하고, 그것을 되물림하는 세습을 경계하고, 특히나 능력과 실력이 있다하여, (개인이나 단체가) 법을 초월한 존재로 성장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려고 한다. 물론 이에 어떤 이들은 이러한 부분을 마주하며 '억압'과 '불공정'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최근 많은 사람들 가운데선 과거 '프랑스혁명'이 지닌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여러 의견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도 그럴것이 과거의 체제의 붕괴 이후로 이른바 혁명 이후의 프랑스 사회는 이전의 전통과는 다른 새로운 이념과 사회질서(또는 법률) 을 대중들에게 제시해야 했다. 이에 막시밀리앙 로베르 피에르는 철저한 단절과 강압 그리고 폭력에 의지하다 스스로 실패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의 반발때문인지 이후 등장하게 되는 나폴레옹의 즉위는 문득 혁명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적어도 나폴레옹 헌법으로 불리우는 제8공화국 헌법에 녹아있는 인민의 기본권과 의무의 가치는 이후 발전되어 계승되어질 현대의 민주주의의 존재 가치에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자 이정표라 정의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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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역사 - 인류 문명을 파괴하는 ‘초극단적 재난’
최경식 지음 / 갈라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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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북스

인류는 지금도 전쟁을 지속하고 있다. 이른바 인류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그 끝임없고, 잔인한 기억을 계속해서 축척해 왔으며, 또한 오늘날의 '나' 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사회에 있어서도 그 영향력에서 완전히 배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결국 국가는 국민에 대한 의무를 지우며, 이른바 '전쟁'에 대한 (실현)가능성을 언제나 열어놓는다. 그러고보면 세상에 군대가 있는 것도, 무기의 계발에 박차를 가하는 것도, 그리고 이처럼 전쟁의 역사에 대한 지식을 쌓아올리는 것도 결국에는 전쟁에 대한 일종의 대비(준비)가 아니겠는가? 비록 전쟁이라는 것이 끔찍하고, 또 파멸에 가까운 파괴행위에 가까운 것이지만, 이미 한번 위에 언급하였다시피, 인류는 그 와중에서도 전쟁을 멈추지 않았던 매우 폭력적인 종족이였다.

그렇기에, 사실상 평화를 향유하고 있는 현실속에서도, 세세히 주변을 둘러보면, 그 전쟁의 유산은 어디에서나 드러난다. 예를 들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쟁과 갈등 또한 전쟁의 연장선이며, 무엇보다 역사, 문화, 오락에 이르는 폭넓은 분야에 있어서도, 전쟁은 매우 인기있는 소재거리가 되어주고 있다.

때문에 결국 많은 사람들은 알게모르게 전쟁의 현상과, 흐름을 학습해왔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전쟁의 본질'에 대하여는 사실상 과거의 기억에 기댄 끝임없는 (교훈의) 학습 외에는 마땅한 대비책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전쟁은 결국 사람을 죽인다. 그러나 그 살인행위의 과정에 있어서 등장한 정의와 명분, 영웅, 기술의 혁신적인 발전에 있어서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은 보다 세련되고, 또 효율적인 전쟁이론과 민족주의를 형성했고, 이에 해당 후손들은 그 혜택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오롯이 전쟁을 부정하며, 평화의 가치를 지켜 나아갈 수 있을까 하는 모순에 빠지고 만다. 그렇기에 저자는 '전쟁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해답을 드러내기에 앞서, 보다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을 갈고 닦고, (무엇보다) 전쟁에 대한 불함리함과 끔찍함을 더 드러내려 노력하는 '평화 인문학자'에 어울리는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해주려고 노력한다.

이처럼 저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뜻은 위와 같은 경고의 메시지가 아닐까? 솔직히 나 스스로 또한 전쟁이 가져온 수 많은 가치를 떠올리면, 순간 가슴이 벅차오른다. 아무리 그 본질이 사람을 효율적으로 또 예술적?으로 소모하는 끔직한 것이라 할지라도, 전락&전술론과 전쟁론이라는 그럴듯한 이름과, 그 매력은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포부를 드러냈던 많은 영웅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평화야 말로 이상주의의 영역에 속한 순간의 달콤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친다. 그러고보면, 예전 어느 소설에서 접한 것과 같이, 결국 인류라는 존재는 순간 몇십년, 몇백년의 평화를 구가하기 위하여 발버둥치는 안타까운 존재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과연 인간과 국가 스스로가 제국, 영광, 번영, 경쟁, 우월의 가치를 내려놓을수 있을까? 아니... 역시 생각해보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고로 세상에 전쟁이 사라지는 일 또한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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