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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단상 동문선 현대신서 178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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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은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흔히 남녀 간의 사랑이라면 서로 사랑하는 그 둘의 합일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너를 욕망할 때 너는 다른 곳을 보고 내가 너를 잊었을 때 너는 내게 다가온다. 나는 너를 가질 수 없고 둘은 서로 만날 수 없다. 어쩌면 이 불가능성을 은폐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인지 모르겠다.  

나는 타자로서 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소유하고 지배하려고 한다.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 폭력. 롤랑 바르트는 이런 사랑 놀음에 일침을 가한다. 텔레비젼에서 광고에서 만들어진 '사랑', 규격화된 '사랑'에서 벗어나 보자.  

기다리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너와 상관없이 나의 상상 속에서 모든 일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너에게 예속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나는 더이상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자유로워지고 싶다. 이제 너를 놓아주련다. 롤랑 바르트는 여기서 타자로서의 상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고 말한다.  

사랑의 구조란 묘한 것이다. 사랑의 구조 그 중심에는 필연적 결핍이 있다. 영원히 서로 맞물리지 않는 텅 빈 공간이 있다.  

나는 나 자신을 그 사람에게 선물로 준다. 다시말해 투자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을 기다린다. 보상이 돌아오지 않을 때 나는 그를 증오한다.  

이번에는 나 자신을 그 사람에게 바친다. 나를 낭비한다. 나는 이제 무엇인가를 돌려받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렇게 헌정될 수 있을 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반자본주의적이다. 교환될 수 없고 서로 더 많이 주는 것이다.  

우리가 쟁취해야 하는 것은 독창적인 관계다. 대부분의 상처는 상투적인 것에서 온다. 모든 사람들처럼 사랑해야 하고, 질투해야 하고, 버림 받아야 하고, 또 욕구 불만을 느껴야 하고 등등. 그러나 독창적인 관계일 때에는 상투적인 것은 모두 흔들리며 철수되고 초월된다. 

그리하여  이를테면 질투 같은 것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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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 정신분석 테크닉
브루스 핑크 지음, 김종주 옮김 / 하나의학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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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핑크, 라캉 정신분석 서평

2011/03/30 15:01 수정 삭제



복사 http://blog.naver.com/ahxkvjavm/10106043592







 




정신병에서 언어와 말은 상상화 된다. ‘아버지’의 은유가 빠져 있는 것이다. 억압과 금지가 없을 때 정신병이 발병한다. 어쩌면 우리 인간은 억압을 필요로 하는 것도 같다. 우리는 그동안 억압 기제로부터 해방을 주장하고 자율적 주체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이런 주체들로 구성된 사회는 점점 고립적이고 야만적이 되어 가고 있다. 그들에게 보편적 규범이나 진리는 억압적인 것이어서 타파해야 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 주체는 자신의 텅빈 존재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을 존재론적 일관성으로 채우려고 한다. 여기에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작용한다. 이 이데올로기적 작업은 상징계의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주체는 자신을 실제 자신보다 더한 무엇(대상a-잉여)이라고 정의하며 그 환상 속에서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주체는 자신의 곤경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환상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율적 주체는 결코 상징계를 벗어날 수 없다.




주체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며 타자를 매개로 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 주체가 되고자 하는 것, 닮고자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 모두가 원하는 것이다. 이것을 욕망함으로써 주체는 존재하는 것이다.




라캉에 의하면 슬픔과 우울증은 무의식의 거부로 나간다. 오늘날과 같이 개개인이 고립되어 있고 원자화된 사회에서 타자와의 인간적 관계는 불가능하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인간은 모든 질적 차이가 무시된 채 교환 가능할 뿐이며 그 속에서 주체는 더욱 소외되고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자살 국가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이제 우리는 단순히 타자성, 객관성, 상징체계를 억압적이라고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같이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라캉의 정신분석을 통해서 바로 이러한 우리 시대의 문제들을 상기시키고 함께 공유하기를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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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없다 무의식의 저널 Umbr(a)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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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미국과 이스라엘에서 사회와 정치의 군사화는 '아버지'의 지배가 끝났다면서도 '진정한' 아버지를 투사함으로써 아버지의 권위를 유지하는 페티시적인 정치를 세운다. 조르쥬 아감벤이 주장하듯 이런 정치는 예외를 규범으로 바꿔치기 하고 권력의 모든 과잉들을 정당화하는 영구적인 위급 상황을 만든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금지의 중지 속에서 즐기는 한편 감시와 통제의 훨씬 더 정교한 체계에 구속된다. 자유주의와 정치의 군사화가 보여주는 금욕주의는 결국 동전의 양면이다. 라캉에 의하면 진정한 자율성의 위치는 '내가 모든 것에 책임을 진다'가 아니라 '나는 전부를 책임지지 않는다'이다. 제젝은 자율적인 칸트적 주체를 비판하면서 대타자가 기능하지 않는다면 이웃이 괴물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상상적 이자 관계를 넘어서 제 3항, 객관성, 보편성, 상징계의 필요를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거세된 주체는 향락을 포기하면서 금지와 억압이 없다면 향락이 가능할 것이라는 환영을 유지한다. 이 환상은 금지에 대한 위반을 발생시킨다. 하지만 주체의 욕망(향락)은 도달 불가능한 것으로서 상징적 법과 질서는 단지 불가능한 것을 금지할 수 있을 뿐이다. 불가능한 것을 금지하는 속임수를 씀으로써 위반을 조장하고 유발한다. 이 위반을 통해서 상징적 제도는 공고해지는데 이 위반의 과정에서 상징적 제도 자체는 이제 분열되거나 틈새를 가진 것이 아니라 완전체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애초에 불가능한 것을 주체가 인식한다면 위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주체는 자신의 불가능성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환상을 만들어 그 안에 안주하고자 한다. 이  위반을 통해 주체는 향락(불가능한 것을 완전한 무엇으로 만듦으로써, 이때 동원되는 것이 라깡의 대상a이다-대상a는 그 자신 보다 더한 무엇, 잉여이다)을 얻을 수 있고, 상징계는 그러한 위반과 저항으로써만 완전해지기 때문에 위반을 필요로 한다.   
 

지젝은 우리가 말하는 '주체' 자체를 불가능한 것으로 본다. 상징적 질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이 불가능성, 부정성을 은폐하고 회피하는 대신 그 부정성과 함께 머물 것을 주장한다. 진정한 유물론은 물질의 공백(우연성, 부정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캉은 코페르니쿠스보다 케플러가 더 혁명적이라고 보았다. 중심을 옮겨 놓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심의 공백을 주장하는 것이 더 혁신적이라고 본 것이다.

 

지젝은 상징적 질서, 억압적 법과 제도를 폐기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 자체의 부정성,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면서 분명히 제 3항, 상징계가 필요하다고 본다. 문제는 이 상징계의 '불완전성'을 드러내고 '완전한 무엇'이라고 상상하는 것과 단절하는 것이다. 상징계가 부재한 채 상상적 관계만 있는 사회에는 정치는 없고 전쟁만 존재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의자 뺏기'게임은 끊임없이 승자를 만들어 내고 승자 독식 사회를 창출한다. 그 게임에서 탈락한 자는 루저가 되고 잉여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 전쟁 상태, 야만 상태를 이제 우리는 거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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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 이후 프런티어21 13
테리 이글턴 지음, 이재원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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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육체는 굉장히 인기 있는 얘깃 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 육체는 더이상 배고픔에 굶주린 육체가 아니라 에로틱한 육체일 뿐이다. 거기에는 노동하는 육체에 대한 관심이 없다.

 

 테리 이글턴은 오늘날 유행하는 자유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한다. 자본주의는 모든 감각에 탐닉하라고, 가능한 한 뻔뻔스럽게 오감을 만족시키라고 우리를 재촉한다. 이렇게 하다 보면 더 많은 재화를 소비하게 될 뿐이다. 자유주의자들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순응주의에 반대하며 본질주의에 반대한다.

 

그들에게 진리는 없으며 총체로서의 사회도 없다. 그들은 객관적인 것도 부정하며 규범을 공격한다. 이제 우리 사회에 정치는 없고 문화만이 남아 있다. 규범이 늘 우리를 구속한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게 믿는 것 자체가 낭만적 망상일 뿐이다.

 

살해범이 처벌 받고 교통 신호를 지켜야하는 규범을 무시한다면 우리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2차 대전 이래로 문화이론이 느닷없이 등장했다. 소비 사회가 번성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대중 매체, 대중 문화, 하위 문화, 젊음에 대한 숭배가 사회적 힘으로 여겨지게 된 시기였다. 자유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시기 활발하게 널리 퍼졌다.

 

문화적 상대주의, 다양성, 다원주의 등은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회피하는 설명 방식이다. 그들은 '차이'를 존중했다. 그러나 테리 이글턴은 이 책에서 보편성과 객관성에 대한 요구가 시급하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정치적 좌파들은 '이론'이 늘 직접적으로 '실천'과 맞물려야 한다는 실용주의를 갖고 있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반위계적인 것이  왜 위계적인 것보다 바람직한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

 

이는 칸트주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칸트에게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단지 다른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칸트는 이런 목적-자체임을 행복이나 성취에서 떼어 놓는 식으로만 자신의 생각을 정식화 했다. 좀더 고전적인 도덕적인 사유는 오히려 이 둘을 결합해 이해하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 그리고 마르크스의 계보에서 테리 이글턴의 사유를 따라가는 재미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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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관계는 없다 - 성적 차이에 관한 라캉주의적 탐구 바리에테 3
브루스 핑크 외 지음, 신형철 외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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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관계는 없다>

지젝-‘코기토와 성적 차이’

지젝에 의하면 라캉은 성차란 살아 있는 존재의 궁지(상징계에 진입함으로써 발생하는 궁지)가 그 존재에게 가하는 작용의 결과하고 주장했다.  

 알튀세르적 호명 주체는 주체의 곤궁(욕망의 불가능성)을 피해서 타자가 무엇을 원하는지(케보이?)에 대한 불확실성을 피한다. 
‘당신은 내 아내야’를 통해서 나는 당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나의 근본적 불확실성을 회피한다.

상징적 질서의 공백, 불일치, 불완전함은 대상 a를 필요로 한다. 대상 a는 틈을 채워 넣는 환상. 도시 문명의 불완전함은 스스로 농촌이라는 대립물을 구성함으로써 즉 상실한, 우리가 잃어버린 대상(a)을 참조함으로써 완전해진다. 주체가 자유롭게 농촌을 욕망하는 순간 주체는 바로 그 행위를 통해서 농촌을 단념한다. 우리는 이미 농촌의 상실을 인정하고 완성해 버린 것이다. 결국 도시 문명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그 문명 자체의 불완전함을 감추고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 놓는다.

-‘성적 차이의 실재’
부르주아 대 노동계급으로 구분하는 순간 하나의 잉여, 이 대립에 맞지 ‘않는’ 제 3의 요소가 존재하게 된다.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예가 그렇다. 마찬가지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순간 ‘성도착’이라는 잉여가 존재하게 된다.
민족이라는 근대적 개념은 직접적 가족이나 전통적 유대관계가 해체되면서 출현한 텅빈 기표이다. 민족적 정체성은 자연적인 것(전근대적인 것)으로서 인공적인 것과 대립된다. 제도가 사회적 인공물로 지각된 순간(근대에 들어 오직 인간 관계가 계약관계에 들어섰을 때) 중립적인 공통 토대의 역할을 하게 될 무언가(계약을 공고하게 할)가 필요했다. 근대는 전근대적인 무엇인가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라캉에 의하면 상징적 질서의 아버지, 법은 상징적 구조의 비일관성을 은폐하는 하나의 속임수, 가상이다.
포스트모던이 다양성을 들여오는 순간 근본적 적대는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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