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인의 탄생 -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나의 고전 읽기 18
막스 베버 원저, 김성은 지음, 김태권 그림 / 미래엔아이세움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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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자본주의의 은밀한 관계

우리 모두는 부유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놀지 말고 일하자. 저마다 분주하다. 하지만 아무도 묻지 않는다. 왜 부자가 되어야 하는지. 이것이 근대인이다.

자본주의를 하부구조 즉 물질적, 경제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베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종교적 측면에서 자본주의를 작동하게 하는 방식이 있었다. 그것이 프로테스탄트 윤리였다.

베버는 서양의 근대에 등장한 자본주의가 역사상 매우 독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쟁을 통한 약탈이나 투기, 도박 같은 모험이 아니라 '합리성'을 지닌 기업을 통해서 끊임없이 지속되는 이윤과 수익성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이것은 오로지 18~19세기 서양에서만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 '합리성'이 서양을 특징 짓는다.

동양에도 세련된 지식과 관찰이 존재했지만 합리적인 추론과 실험을 거쳐 결론을 내리는 과학은 서양에만 있었다. 음악의 예를 들면, 나라마다 다양한 음악이 발전했지만 서양에서만 합리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음계와 연주법, 작곡법이 등장했다. 

근대에는 합리적으로 돈을 벌 수 있다. 노동자는 이제 과거 노예나 농노처럼 강제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신분 상태에서 스스로 노동을 자본가에게 팔았다. 그럴수 밖에 없었지만 겉으로 그들의 신분은 자유로웠다. 

과거에는 돈을 벌어서 유용하게 쓰는 것이 덕목이었다. 그러나 이제 돈을 벙어서 '축적' 하는 것이 덕목이이 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도착이다. 합리성을 이야기하며 그 이면에는 온갖 불합리가 득실거렸다. 

서구 근대 자본주의가 등장하는 데는 쾌락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열심히 돈을 벌기만 하는 독특한 정신적 태도가 큰 역할을 했다. 베버는 이러한 정신적 태도를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불렀다.

루터는 최초로 직업에 '신으로부터 받은 의무'라는 종교적 표현을 부여했다.

그 의무에 충실해야 하고 사치하거나 향락을 위해 재산을 쓰는 것은 비합리적 낭비였다. 그리고 그것은 신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합리적인 사용일까. 필요한 곳에 유용하게 쓰는 것, 즉 재산을 더욱 불리는 일에 다시 투자하는 것이다. 돈을 쓰지 않는 세속적 금욕주의. 이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였다.

인생의 목적을 부를 쌓는데 두고 산다면 그것은 종교적으로 죄악이다. 그러나 성실하게 직업 노동을 수행한 사람이 부를 획득한다면 그것은 신의 축복이다. 칼뱅주의를 발전시킨 영국의 청교도주의에서는 이러한 발상의 전환이 일어났다. 직업 노동을 가장 좋은 금욕적 수단으로 보고 이로 인한 부의 획득을 신의 축복이자 구원의 증표로 봄으로써 청교도들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새로운 에토스의 형성과 발달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물질주의자들은 프로테스탄티즘의 특수한 교리 또한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 결과로 파악했다. 그러나 베버는 물질과 정신 사이의 선후 관계를 칼로 무 자르듯 구분하기는 어려우며 프로테스탄티즘의 독특한 교리가 부에 대한 태도 변화에 기여했다는 점은 반박하기 힘든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이데올로기적 잣대가 아니라 사실 관계가 그에겐 더 중요했다.

이 책은 지은이가 베버의 사상을 알기 쉽게 이야기해주고 있어서 청소년부터 어른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접하기 전에는 베버를 단순히 보수적인 사상가로만 여기고 그의 책을 읽으려 하지 않았다. 선입견과 편견이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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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인문학 - 괴테에서 데리다까지 뉴아카이브 총서 2
이마무라 히토시 지음, 이성혁.이혜진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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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와 인문학, 대체 어떤 관련이 있을까

화폐가 없이도 우리는 살 수 있을까. 지멜의 <화폐의 철학>은 1900년 간행 되었다. 그 당시 사회주의 세력 특히 독일 사회 민주당은 근대 부르주아 사회의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화폐 없는' 사회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멜이 보기에 자유 확립의 사회적 근거가 되는 것은 화폐이기 때문에 만약 화폐가 폐기된다면 인격의 자유 또한 소멸할 것이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사회 체제의 매개 형식, 즉 화폐, 제도, 법 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들이 억압적 장애물이라 여기고 상상적으로 폐기하려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삶 자체를 폐기하자는 것과 같다.

인간이 사회적 관계를 폐기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삶일까, 야만의 삶일까. 저자는 후자라고 대답한다. 지드의 소설 <위폐범들>은 매개로서의 아버지 혹은 부권(억압, 장애물)에 대한 폐기가 결국 혼돈을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더이상 무엇이 진실인지 가짜인지도 구별할 수 없다. 매개의 소멸, 그것은 곧 카오스의 도래다. 더이상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은 결정불가능하다. 선과 악은 하나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결정 불가능성이 진실에 가깝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외부적 매개 형식이 억압이고 장애물이라면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그것을 제거할 수 있다고 몽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매개 형식 자체의 불가능성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펼쳐 보이는 것이다. 

이 책은 화폐를 단순히 경제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철학적으로 깊이 있게 들여다 보고 있다. 

동물에게는 무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화폐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무덤(매개)이 있다. 삶은 죽음을 장례, 무덤 으로 외부화하고 제도화 했다. 삶은 죽음의 공포를 능동적으로 반복한 것이다. 이렇게 인류 문명은 발전해 왔다. 마찬가지로 이질적인 두 물체는 화폐라는 매개를 통해 교환된다. 둘 사이의 간극을 제도화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삶을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이와 같은 형식을 해결하지 않고 단순히 화폐를 경제적으로만 연구하는 데에는 한계가 따른다. 

자칫 어려운 내용을 저자는 알기 쉽게 쉬운 말로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루소를 통해 문자와 화폐의 관계를 규명한 대목도 재미있다. 루소는 문자를 두려워했다. 18세기 이후 경제학자들은 화폐를 두려워하고 혐오했다. 루소는 매개자 없는 투명한 공동체를 이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근대의 비극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근대적 주체(존재)의 자기 투명성, 직접성은 매개로 인해 분열되고 불투명해진다. 근대는 이를 참지 못했다. 근대는 투명성, 순수함을 추구하고 불투명한 것은(문자나 화폐 같은 매개) 배제해야 했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인간 관계 안에 매개 형식을 둠으로써 직접적인 폭력적 충돌을 피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순수한 자신의 목소리를 자기 촉발적이라고 상상하지만 사실 그것은 물질(공기)이라는 외부적 매체 없이는 '들을 수 없'다. 

저자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화폐라는 매개 형식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이다. 자칫 보수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특정 이데올로기보다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매개자가 사라지면 인간 관계는 혼란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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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1
최정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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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체 아님'에 대한 사유
 

지은이는 작곡가이자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글은 문체와 사유 방식이 새롭다. 리듬 있는 문체라고 할까. 다소 문법 파괴적인 측면도 보인다. 그의 문장은 무엇을 지시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것이 그에게 근원적인 기의들이란 없다. 지은이의 진단에 따르면 우리 시대는 우울의 세기이다. 즉 주어진 쾌락 속에서 우울하고, 강요된 안정 속에서 불안하다. 사유가 중단된 시대. 우리는 사유를 소환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낡은 유물론을 소환하자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탈근대적인 사유 방식을 고집하자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 그의 사유의 새로움이 돋보인다.

 

근대, 그 합리적 이성의 억압으로부터 우리는 탈근대적 사유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하지만 일찍이 바타유가 말했듯이 억압과 금지에 대한 위반은 저항이 아니라 그것을 공고하게 한다. 이것은 일종의 해방 논리에 대한 반발이다.

 

우리는 그동안 지독히도 해방을 갈구해왔다. 사회적 제도의 억압으로부터, 남성 지배로부터.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여성 해방을 우리 모두 거의 모두는 추구하고 욕망했다. 그것은 민주화의 이름으로 정당화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 잘못됐단 말일까.  

 

그는 지젝을 공부했다. 헤겔과 라캉(바타유와 동시대)을 경유한 지젝은 벤야민을 따라 상징적 질서, 체제를 무효화자고 말한다. 이것은 랑시에르적 의미의 무위, 즉 행동하지 않기 이다. 해방을 향한 행위로서 위반과 저항까지도 하지 않기이다. 다시 말해서 문제는 위반과 저항이 기존 체제를 완전한 무엇으로 전제하고 그에 대해 저항한다는 데 있다. 기존의 체제, 사회적, 상징적 체계는 정말 빈틈 없이 완전무결한 완전체인가. 아니다. 상징적 질서, 법 체계는 최초에 폭력적으로 세워졌다. 그 기원을 은폐하기 위해 법은 범죄와 위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금지와 위반의 관계이다. 왜냐하면 위반이란 금지를 하나의 완전한 억압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로 인해 틈과 결여로 구성된 금지의 체계는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상호 보완적 시스템을 이해해야 한다.

 

지은이는 바타유의 관점을 통해 이 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글쓰기는 새로울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단순히 탈근대주의자는 관점도 아니고 반체제주의, 반순응주의자의 관점도 아니다. 이러한 사유 방식은 이미  또 다른 고정된 관점, 다른 중심을 가정하고 있을 뿐이다.

 

중심에 대해 주변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데리다가 그랬듯이, 라캉이 그랬듯이 중심을 무효화 하는 것이 중요하다. 포스트모던한 사유 방식은 억압적 동일성의 논리보다 비동일성을 좋아했고 이성보다 신체, 하나의 진리보다 다원적, 그리고 복수의 것들을 주장했다.  하지만 지젝이 우려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다원주의, 혹은 상대주의로 결국 우리 모두가 주권자인 이 현대 사회가 보다 중요한 문제, 자본주의의 근본적 갈등과 모순을 은폐해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에 대해 항변했던 소크라테스의 철학과 닮아 있다고 할까.

 

지은이의 책읽기는 까다롭다. 어떤 문제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독자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새로운 문제들을 던지기. 이 자체가 바로 그의 사유의 힘이다. 출판사들이 앞다퉈 찍어내는 세계문학 전집은 무엇인가. 대체 무엇을 보고 세계문학이라고 하는 것일까. 그들의 광고가 일단 불편하다. '문학'이라는 아주 작은 영역이 왜 인류 전체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규정짓는 문화사적 보편 개념이 되는지 지은이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과연 이 전집들만 완전히 독파한다면 전 인류의 보편적 사유를 곧바로 체득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지만 이것은 무슨 광기란 말인가.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세계문학인가. 한국문학인가. 세계문학이 되고 싶은 것인가. 그것은 국내용인가. 대내용인가. 그는 끊임없이 질문한다.

 

제도적으로든 무엇으로든 '문학'이 생업인 사람들은 감히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없다. 낮에는 사교육 현장에 있으면서 밤에는 사교육 현장에서 일하는 내게 서점에 떡 올라온 <대한민국 사교육에 속고 있다>란 책은 금지되어야 할 책이다. 백번 그 저자의 뜻을 알지만 문득 문득 두려워진다. 과외하는 아이 엄마가 이 책을 보게 된다면. 그 두려움이란.

 

베버가 그랬다고 했나. 그는 한 학교에 머물지 않았고 한 학문에 매어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라는 대작을 집필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이 젊은 비평가의 미래가 기대된다.

 

서평을 쓰고 책을 읽는 일을 업으로 하기 때문에 나는 나름대로 내 일에 재미도 의미도 가지고 있다. 며칠 전이었나. 요즘 젊은이들 책을 읽지 않는다고 그것이 문제라고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한숨을 쉬는 내게 선배가 왜 모두가 나처럼 책을 읽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지은이처럼 질문하기 좋아하는 선배였는데 순간 아, 나의 사유 방식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그들을 내게 맞추려고 내게 동일시하려고 잠재적으로 폭력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물론 나는 독서가 사유의 폭을 넓히고 깊어지게 할 수 있다는 데는 물러설 의도는 없다. 하지만 '전체는 아닌' 그것을 '실재'로 부르든 '우연'으로 부르든 타자를 내가 통제하려고 했던 것은 어리석억다.

 

그날 밤 집에 와서 이 책을 보기 시작한 것 같다. 며칠 동안 전혀 새로운 방식의 생각하는 법을 배웠고 문학의 사상의, 음악의 세상을 여행했다.

 

근대적 주체의 문제에서부터 정치적 문제까지 종횡무진 그의 독서이력은 남다르다. 열살때 군주론을 읽었다니 과연 그의  방대한 독서량도 짐작이 된다.  

 

그는 세밀하게 알튀세르의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읽는다. 자서전이란 무엇인가. 그것도 아내를 죽인 정신 착란자에게.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이 자서전을 읽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는 자서전을 쓸 수 없는 사람, 말하자면 정신병자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지은이는 알튀세르가 진정한 자서전적 글쓰기를 감행할 수 있었다고 독해한다. 정상인의 자서전이란 하나의 허구이다. 자신의 삶을 그렇게 완전하게 하나의 통일되고 유기적인 것으로 빈틈 없이 구성하기란 가능하지 않다. 알튀세르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철저하게 이름부터 타자에 의해 지어졌고 모든 것이 타자에 의해 위치지어 졌다. 이 자기 자신 되기의 불가능성. 어쩌면 이것이 알튀세르의 자서전을 가능하게 한 건 아닐까.

 

이 불가능성이 단순히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의 조건으로 발상을 전환해 보자. 상징 계 안에 균열, 불가능성, 우연성 등. 이 모든 것들을 부정적으로 보고 은폐하려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자. 불완전함을 드러내고 보여주자. 그리고 그것과 함께 머물자. 이것이 바로 과감하고 도전적인 새로운 사유다.  바로 이 상징계의 분열, 간극, 불완전함 그리고 우연성.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전체 아님'으로 실현된다. 지은이는 라캉적 의미에서 실재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는 정체성 정치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정체성을 강요하고 하나의 사회적 정체성을 갖지 않은 주체들, 이를테면 성 소수자들이나 빈민들을 배제한다. 근대적인 너무나 모던하고 근대적인 교양인의 도시, 서울 한 복판에서 벌어진 용산참사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나.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일 것 같은 도시에서 일어난 이 집단 학살을 우리는 과연 어떤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히틀러를 보라. 그는 합리적으로 투표로 선출된 사람이다. 


지은이는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줬다.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 권하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동기부여된 책들만 수십권이다. 장바구니에 가득 담아놓고 바라만 보고 있다. 냉큼 일시불로 지를 용기는 없다. 한권씩 품에 안아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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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11-05-01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불가능성이 단순히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의 조건으로 발상을 전환해 보자"는 말씀이 제게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의미하는 바의 소수, 함께하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느낌이랄까요. 몇 가지 핵심적 사유의 지점들을 정치하면서도 담담하게 분석해주신 이 서평에 제가 깊은 감사의 마음을 품게 되는 이유입니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꼼꼼하게 독해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프로이트주의 미하일 바흐찐 대표 저작집 3
미하일 바흐찐 지음, 김윤하 옮김 / 뿔(웅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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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찐은 프로이트주의가 인간에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을 완전히 무시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성, 본능, 생물학적 충동 등은 역사에 대한 공포, 개인적이고 사적인 삶의 가치에 대한 재평가로서 부르주아적 특징을 가진다. 사회적인 것 대신 이제 생철학, 유기제적 과정, 생물학적 의미의 생이 자리한다. 모든 객관적인 사회적, 경제학적 범주를 주관적, 심리학적 혹은 생물학적 범주로 대체하려는 시도. 베르그송의 생의 약동, 본능의 중시 또한 바흐찐은 비판한다.

 

바흐찐은 기본적으로 사회를 떠난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인간은 계급 속에서 그리고 계급을 통해서만 역사적으로 현실적인 것이 되고 문화적으로 생산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계급은 불분명하고 특수한 개인들을 동일화하는 측면도 갖고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르면 인간 심리학은 사회학화되어야 한다.  

 

바흐찐은 프로이트의 이론에 질문을 한다.

과연 유아기 초기의 체험을 되살려 내는 회고적인 방법은 과학적 근거가 있을까. 우리는 오직 현재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 즉 우리가 과거에 대해 회상하는 그 순간에 중요한 것만을 과거 속에서 볼 뿐이다.

 

인간의 동물적이고 비사회적인 영역에 대한 강조는 반사회적일 뿐이다.

 

프로이트주의는 가족 관계를 성적인 것으로 일관되게 취급한다. 자본주의의 기반이자 보루인 가족은 분명 경제적, 사회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점에 대해 바흐찐은 프로이트주의의 결함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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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의 공동체
장 뤽 낭시 지음, 박준상 옮김 / 인간사랑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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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의 공동체>

 

공동체는 비-행동(무위)으로서 가능하다. 비 행동이란 비등가적인 것을 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자유주의적 교환 체계에 대한 대안으로 기능할 수 있다.

 

공동체는 주체들 사이에 어떤 보다 상위의 삶으로 엮이지 않는다. 공동체는 이루어야 할 과제가 아니다. 그것은 조국, 피, 민족, 해방된 인간성, 팔랑스테르, 가족 등으로 변형시키는 과정을 실현시키지 않는다.  공동체는 실행 불가능한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죽음에 의해 질서지워져 있다. 따라서 공도체는 언제나 타인에게 드러난다.

 

공동체는 융합을 위한 계획의 대상이 아니다. 생산이나 실현을 위한 대상도 아니다. 나치 독일은 '아리안 족' 공동체에서 순수한 내재성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자들을 희생시켰다. 그 결과는 독일 민족 자체의 자멸이었다. 그들은 연합의 공동체를 상상했다. 하지만 공동체는 특정 목적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에 탈존, 외존한다. 주체도 마찬가지다. 주체가 주체 안에 있다면 타자와 소통할 수 없다. 주체는 관건이 아니다. 주체 자체가 이미 타자이며 주체는 자기 바깥에 존재한다. 외존한다.

 

서양의 경우 연합은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신성은 외부에 있었고 그래서 공동체의 신성한 본질은 불가능한 것 그 자체였다.

 

교환과 계약의 체계인 근대는 그 무너지기 쉬운 시스템을 보존하기 위해 인간을 공도에로 악착스럽게 묶어 고정시켜 놓았다.

 

바타유는 공산주의가 그 원리에서 인간의 최고 주권을 부정, 인간에게 인간 내재성으로 환원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데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동체, 그리고 주체는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 그 자체 하나의 연합을 이룬다. 공동체라는 단일체, 실체는 없다. 그것은 완성될 수 없고 미완성이다. 미완성만이 그 원리이다. 미완성을 결핍이나 불충분이 아니라 역동성으로 받아들이자. 그 안에서 단수의 주체들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 안에서 자리잡지 않고 움직이기.

 

낭시는 어쩌면 모나드들이 움직이는 그런 유목적 공동체를 상정하고 있는 것 같다. 들뢰즈와 닮아있다고 할까.

 

단수의 주체라는 개념이 그렇다. 중앙에 집중될 필요없는 공동체. 중심에 대한 반발. 그러나 반발에 앞서 그는 중심 자체를 해체하고 있는가. 중심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라면 그에 반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혹시 중심이 가능하다고 전제하고 그에 대해 반발하는 것은 아닌가.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반발할 필요가 없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행동하지 않기'를 들고 나왔다. 중심, 상징적 질서를 무효화 하기. 벤야민, 지젝의 생각도 같다. 행위하지 말자. 제도에 저항하지 말자. 저항한다는 것은 제도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제도  자체가 불가능한 구성이다. 그것을 알아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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