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자적 전환이 초래하는 가장 폭넓은 결과로, 사람은 자신에게 지시를 내리는 권위자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느끼지만, 권위자가 지시한 행동의 내용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도덕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그 초점을 달리한다. 하급자는 권위자가 요구하는 행동을 얼마나 잘 수행했느냐에 따라 수치심이나 자부심을 느낀다.
  언어에는 이런 유형의 도덕성을 지칭하는 용어들이 많다. 즉 충성·의무·규율 등은 도덕적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으며, 한 사람이 권위자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수행한 정도를 언급한다. 이러한 용어는 인간 자체의 '선'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급자가 사회적으로 정의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 정도를 말한다. 권위자의 명령 아래에서 극악한 행동을 한 개인이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변명은 단지 자신의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때 그 사람은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핑곗거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권위자에 대한 복종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심리적 태도를 솔직하게 이야기한 것이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 행동이 '자기'에게서 비롯했다고 인식해야 한다.


<권위에 대한 복종> 211~212쪽, 스탠리 밀그램, 에코리브르

  세상에 대해서 가장 빠르게 무관심해질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 있다. "이것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 하루종일 이 말만 되뇌이며 산다면, 어느 순간 완전히 세상과 동떨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과연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이 있을까? 과거에는 정말로 그런 일이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이제 엄청나게 좁아졌다. 내가 여기서 했던 행동 하나가 지구를 돌고 돌아 방글라데시, 소말리아, 뉴욕, 캘커타, 니스, 툴루즈, 암스테르담, 베로나, 도쿄, 광저우 등에 사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세상 일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 '관심 없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 무책임하다고 스스로 이야기하는 꼴이다. '천라지망'이라는 단어는 이렇게 촘촘하게 이어진 느슨한 인과의 법칙을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일은 나에게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해야 할 수밖에.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을 세계적인 논란의 중심에 밀어넣은 '전기충격 실험'의 보고서인 이 책을 보다가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갑자기 문득 든 생각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권위자 혹은 권력자는 우리들이 세상에 많은 관심을 가지길 원할까? 아니면 세상에 전혀 관심이 없기를 바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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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에그와 같은 디자이너들이 '지속적인 교육'을 삶의 방식으로 포용한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아마도 맡은 일을 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이클 비어루트가 주장한 것처럼 디자인은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다." 디자인의 속성은 디자이너들이 평생 동안 계속해서 배울 것을 요구한다. 최신 기술에 대해서, 사회학적 트렌드에 대해서, 예술·과학·자연·경제에 대해서, 역사와 대중문화에 대해서, 모든 것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서, 또 '심미적 사용성 효과(aesthetic-usability effect, 아름답게 디자인된 물건은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 사용의 편리성이 높다는 효과 - 옮긴이)'나 '피보나치의 나선'과 같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배워 나가야 한다.
  삶에 대해 계속해서 배워 나가야 하는 것이 발생을 위한 디자인의 요소 중 하나라면 디자이너들은 여기에 통달한 것처럼 보인다.(반 알스타인은 발생이 끊임없는 배움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들도 노력해서 이룰 수 있다. 하에그가 언급했듯이 사람들은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일상생활에서 배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교실에서만 '진지한' 배움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또 사람들은 나이가 듦에 따라 학습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도 잘못된 추측이다.


<글리머> 386쪽, 워렌 버거, 세미콜론

  공부는 때가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하기 수월한 때와 조금 번거로운 때는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안 되는 때는 없다. 증자는 죽을 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죽고 나면 드디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공부는 장소가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하기 좋은 장소와 조금 어지러운 장소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안 되는 장소는 없다. 박지원은 주위 풍경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 책을 읽었다."
  공부는 방법이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효율이 좋은 방법과 조금 돌아가는 방법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부가 아닌 방법은 없다. 유하혜는 자신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책망하는 스승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스승님의 행동을 하나하나 보고 익히고 그처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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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상상해 보세요. 그 시대로 돌아가 스페인풍 갈레온을 타고 카리브 해를 항해하고 있는 당신 모습을요." 콜린스가 이야기꾼의 목소리로 말하며 자신이 스케치한 그림을 보여 주었다. "당신은 멀리서 다른 배가 접근하고 있는 걸 깨달아요. 그 배를 더 잘 살펴보기 위해서 망원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깃발이 나부끼는 게 보이죠. 배가 가까이 올수록 그 깃발에 뭐가 그려져 있는지 알게 됩니다. 해골과 X자로 놓인 뼈다귀가 그려진 깃발이죠. 그걸 보자마자 당신에게 닥쳐올 경험이 어떤 건지 정확히 알게 되는 겁니다."
  콜린이 설명했듯이 그 해적 '브랜드'에는 모두가 알고 있는 뒷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기억할 만한 경험에 의해 생겨나고 강화되었다. 이전에 있었던 모든 전설적인 전투는 해적과 다른 배가 맞닥뜨린 상황에서 일어났다. 해적 경험은 킬리가 주장한 경험 프레임워크의 각 단계를 가지고 있고, 대폭발에 이르기까지 단계마다 모든 강도의 속성을 띠고 있다. 그에 대한 모든 것이 해적 로고로 상징된다. 해적 로고는 보는 모든 이에게 확실한 메시지를 보낸다. "그건 브랜드가 나타내는 의미죠. '이제 넌 죽었어.'라는 뜻 말이에요." 콜린스가 말한다.
  해적들은 해적 깃발을 내걸 때마다 권총, 칼, 도끼, 그밖에 무시무시하고 다양한 무기가 총동원된 강렬한 전투가 일어날 것임을 알린다. 전투는 흉터와 이야깃거리를 가득 남기고, 기존의 전설에 더해져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브랜드의 뜻을 굳힌다. 훌륭한 경험 디자이너와 같이 해적들도 과장된 어조의 중요성을 이해했다. 해적들은 자신의 배를 과장되게 꾸미고 때로는 스스로를 그렇게 치장하기도 했다.(블랙비어드는 적들에게 겁을 주려고 모자 밑에 불붙은 도화선을 달고 다녔다.)
  해적들은 경험을 디자인하는 데 매우 능숙했고 자신들의 브랜드가 가진 의미에 부응했다. 콜린스는 해적들이 한 일은 결국 해골 깃발을 흔들어서 다른 배들이 화물을 물속에 던져 버리고 도망가게 만드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해적들은 모든 브랜드 마케터들이 꿈꾸는 일을 해냈다. 바람에 아무런 저항 없이 사람들이 넘어가 주는 것 말이다.


<글리머> 205~206쪽, 워렌 버거, 세미콜론

  디자인은 전문적 훈련을 쌓은 디자이너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일까? 이 이야기를 보면 그렇지는 않은 듯 하다. 해적은 '해골 깃발'로 대표되는 '디자인'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세상에 각인시켰고,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행동을 하도록 유도했으며, 훗날 여러 미디어로도 남게 되었다. 해적들이 해골 깃발을 그리면서 이 모든 것을 의도하며 멋진 디자인을 의뢰했을 리는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행동이며, 행동의 방향이 앞날의 일들을 열어준 셈이다. 나는 여기에서 디자인의 보편성과, 잘 계획된 행동의 힘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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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예전에 누나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면서 왜 누나의 얼굴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걸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왜 나는 여기에 있는 걸까. 왜 여기에 있는 나만이 여기에 있는 누나만을 특별히 생각하는 걸까. 왜 누나의 얼굴이며 뺨을 괴는 방식이며, 빛나는 머릿결이며, 내쉬는 한숨을 계속해서 보고 싶어지는 걸까. 태고의 바다에서 생명이 태어나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시간이 걸려서 인류가 나타나고, 그러고 나서 내가 태어났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가설을 세우고 싶은 것도 아니고, 이론을 만들고 싶은 것도 아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것만이, 내가 진정으로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이다.


<펭귄 하이웨이> 386~387쪽, 모리미 토미히코(모리미 도미히코), 작가정신

  이 책의 중반 이후부터는 잠시도 책장 넘기는 손을 쉴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책의 결말부는 아련하다. 기나긴 말을 할 수 없는 그런 결말이다. 나의 심정을 주인공 아오야마는 더욱 더 절실히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의 결말부는 어디를 인용해도 스포일러가 될 것이다. 그나마 스포일러가 되지 않을 법한(혹은 덜 될 법한) 이 부분을 골랐다. 말로 할 수 없는 이 감정은, 말로 할 수 없다는 것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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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허생의 이야기에 한두 가지 모순되는 점이 있다고 묻자, 노인은 즉시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해설을 하는데 마치 어제의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을 하였다. 노인은 내게,
  "자네가 전에 한창려韓昌黎의 글을 읽었는데, 응당……."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자네가 전에 허생을 위해 전기를 짓겠다고 하더니, 응당 글이 완성되었겠지?"
하고 물었다.
  나는 아직 손을 대지 못했다고 사과를 하였다.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내가 그를 '윤씨 어르신'이라고 불렀더니, 노인은 말했다.
  "나는 성이 신辛가이지, 윤씨가 아닐세. 자네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구먼."
  내가 뜻밖의 대답에 깜짝 놀라서 그의 이름을 물었다.
  "내 이름은 색嗇이라네."
  내가 그에게 따져 물었다.
  "어르신의 성함이 어찌 윤영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지금 무엇 때문에 이름을 신색이라고 바꾸어 말씀하시는 건가요?"
  노인이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자네가 뭔가를 잘못 알아 놓고는 남에게 이름을 바꾸었다고 말하는 겐가?"
  내가 재차 따지려고 했더니, 노인은 더욱 골을 내며 푸른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이 났다. 그제야 나는 노인이 바로 기이한 뜻을 품은 선비라는 것을 깨달았다. 혹 망한 집안의 후손이거나, 유가가 아닌 이단의 몸으로 사람을 피하여 자신의 자취를 숨기려는 무리일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내가 암자의 문을 닫고 나오자, 노인이 안에서 '쯧쯧' 혀를 차면서 말했다.
  "애처롭게 되었구나. 허생의 아내는 필경 또다시 굶주리게 되었을 터이지."


<열하일기 3> 245~246쪽, 박지원, 김혈조 옮김, 돌베개

  이 글은 '허생전'의 뒤에 붙은 글이다. 허생전은 열하일기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허생전 소설 본문만 알고 있지, 허생전이 어떤 맥락에서 열하일기에 등장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윤영 노인(혹은 신색 노인)의 마지막 말이다. 허생의 아내는 또다시 굶주리게 되었을 터이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허생전에서 허생의 아내는 두 번 등장한다. 처음에는 허생이 학문을 그만두고 집을 나서는 계기로, 두번째는 집을 나간 허생을 기다리며 홀로 살고 있더라는 마을 아낙네의 말을 통해서이다. 이야기 전체에서 허생의 아내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왜 여기서 윤영 노인은 허생의 아내를 이야기한 것일까? 왜 박지원은 저 언급을 실은 것일까?
  유가에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이 나왔다. 자신의 몸을 닦고, 그 후 집안(가문)을 꾸려 나가고, 그 후 나라를 다스리며, 그 뒤에야 세상이 평화로워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가의 핵심 도리이기도 하다. 허생은 자신의 재주를 통해서 한 나라의 경제를 들었다놓았다 했으며, 도적떼를 섬으로 데려가 살게 하고 굶주린 왜를 식량으로 구휼함으로 세 나라를 평안하게 했다. 허생은 가히 '치국'을 할 수 있으며 '평천하'도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유가적인 입장에서는 그는 가히 완성된 인물이라고도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윤영 노인의 언급이 끼어들어가자, 전체 맥락이 이상해진다. '치국'과 '평천하'를 할 수 있는 인물이 '제가'를 하지 못한다? 하긴 생각해 보면 허생은 10년 기한의 독서도 7년만에 그만두었다. 자신의 '수신'을 끝마치지도 못한 상황이다. 수신도 하지 못하고 제가도 실패한(아내를 굶주리게 만든) 그러한 사람이 치국과 평천하가 가능하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이는 즉 유가의 가장 기본적인 이념을 뿌리부터 흔드는 이야기가 아닌가? 유가가 여태껏 주장해 온 나라 다스리기의 도리가, 그 뿌리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통렬한 논설은 아닌가?
  열하일기는 청나라를 다녀오면서 박지원이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을 쓴 여행기이다. 이 여행기 속에서 박지원은 조선 선비의 입장을 두둔하는 척 하면서 슬며시 그들의 허례허식을 비난한다. 허생전에서 저 뒤의 언술이 없었다면, 허생은 우리에게 아직도 '아주 능력있는 능력자'로서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저 한 마디가 덧붙으면서 허생은 능력자인지 문제아인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그 미스터리함은 윤영 노인의 그것과도 닮아 있다. 층층이 쌓여 있는 이 글의 의미를 온전히 알게 될 때는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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