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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 승효상의 건축여행
승효상 지음 / 안그라픽스 / 2012년 10월
평점 :
몇 개월 전 유명 향수 광고에 등장한 브래드 피트의 모습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흑백의 화면에서 조용히 퍼지는 그의 목소리, 표정, 그리고 대사의 멋진 감성. 어쩌면 광고가 펼치는 상술에 그대로 넘어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브래드 피트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다른 어떤 멋스러움을 느낀 것은 분명했지요. 그 뒤로 그는 맷 데이먼과 더불어 냉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가 되었습니다.
종종 남자가 가장 멋있는 시기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중년 때이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장과 실패, 가치관과 자아 등 스스로 한 인생의 주인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자신만의 방식이 몸 전체에서 배어나오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냉이가 젊던 브래드 피트에게서 못 보았던 매력을 이제는 나이 50에 이른 그에게서 찾을 수 있었던 이유도 비슷할테지요. (물론 브래드 피트가 잘생긴 측면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만.)
무엇이든 삶의 시간을 담아내게 되면 그 이전과는 다른 아우라를 뿜어내는 듯 보입니다. 브래드 피트같은 배우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책이나 예술도 그렇지요. 건축가 승효상 선생님이 책 <오래된.것들은.다.아름답다>를 통해 여행에서 만난 오래된 건축들과 그 공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요. 여행과 건축은 그 자체로 삶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으니까요.
여행을 통해 만나게 되는 다른 이들의 삶이 이루는 실체적 풍경은 그 전부가 건축설계의 구체적 결과요 주어진 문제의 해결책인 것이다. 15p
책을 통해 승효상 선생님의 건축 철학과 사유들을 읽어나가면서 그동안 건축에 대해 가져왔던 편견에 새로운 생각이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건축에 문외한인 저는 외적인 부분에 많이 집중해왔었지요. 얼마 전 다녀온 뉴욕여행에서만 해도 크라이슬러 빌딩의 모양이 어떻냐에, 간혹 내부에 들어가더라도 그곳을 장식한 겉치장들에만 눈을 반짝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전체와 부분이 만들어내는 조화, 그리고 공간을 채우는 본질인 사람과 삶에 가치를 두는 작가의 태도를 접하면서 이제 발을 딛는 모든 공간이 예사로 보이지 않습니다. 뉴욕여행하며 접했던 수 많은 건축물들도 건축물들이지만 한 달간 묵었던 브루클린의 작은 한인민박과 할아버지께서 손수 지어 올리신 시골집의 공간이 매우 의미 있는 공간으로 다가옵니다. 건축과 삶의 관계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된 것이지요.
사실 삶과 건축의 필수불가결한 관계를 이야기하는 건축가가 승효상 선생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책에 잠깐 등장하는 故 정기용 선생님도 ‘건축은 근사한 형태를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섬세하게 조직하는 일이다’라는 말을 하셨으니까요. 그렇지만 책 속에 담긴 승효상 선생님의 이야기가 조금 더 독특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빈자의 미학’을 중심으로 그야말로 검박한 삶을 살아간 수도자들의 공간과 가치들을 주로 그리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를테면 이언적이 낙향하여 지은 독락당, 잔해만 남은 성주사지 절터, 유가사를 비켜 흐르는 보이지 않는 길, 예루살렘의 묘지로부터 시작되는 죽음의 형식에 관한 이야기 등 동서를 가리지 않고 수도자의 길을 걷는 이들의 공간을 조명하는 식이지요. 그 안에는 우리 옛 건축에 대한 애정이 빠지지 않습니다. 이 밖에도 책은 제주의 역사와 그 ‘풍경’에 대한 이야기, 몽고에서 만난 생명의 신비, 우리 공공건축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 등 다양한 소주제들로 읽는 내내 그야말로 풍성한 작가의 사유를 나눠 읽을 수 있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소쇄해지는 것을 보니 내용뿐만 아니라 군더더기 없는 책의 모양도 무척이나 정갈했던 것 같습니다.
며칠에 걸쳐 이 리뷰를 쓰던 중에 할아버지를 뵈러 다녀왔습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목수이십니다. 마침 오랜만에 탁자를 만드시느라 나무를 만지고 계셨던 할아버지께 슬그머니 여쭤봅니다. “할아버지, 건축가 승효상이라고 아세요?” 아쉽게도 할아버지는 그를 모르셨고 묵묵히 다시 나무를 만지십니다. 대신 ‘느그들 오면 앉아 쉬라’고 마당 한 켠에 놓을 탁자라고 말씀하시네요. 짐짓 조만간 모일 가족들이 탁자 위에서 벌일 이야기들을 상상하고 계신 것만 같았습니다. 문득 승효상 선생님이 말한 삶의 이야기로 채워졌다 비워지는 불확정에 비움의 공간이 오버랩됩니다.
아! 어쩌면 대상이 무엇이든 그에 대한 깊은 애정이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탁자 위에 벌어질 가족의 삶과 마당이라는 공간이 담아 내는 삶에 대한 애정도, 작가님이 소개한 여러 공간들은 그 시대. 그네들 삶과 가치에 대한 애정에서 나왔을텝니다. 그러나 이건 오래되고 아니고의 시간 문제가 아니지요. 그래서인지 오래된 것은 다 아름답다는 제목는 우리 시대를 걱정하는 역설으로 들립니다. 땅의 역사와 스며든 삶의 이야기를 고려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쌓아올려지는 오늘날의 건축들에 대한. 동시에 오래전 진정 조화롭게 세워 올려진 건축들에 대한 경의를 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