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3월 4주

"이 영화는, 어떤 배우가 나오기 때문에 괜찮을 것이다"라는 선호처럼, 때로는 "이 영화는 이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이니까 괜찮을 것이다"라는 선호도 요즘은 꽤 많이 존재합니다. 배우뿐 아니라 감독의 이름도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죠. 수 없이 많은 감독들이 수 없이 많은 영화를 연출하고, 나날히 높아져만 가는 한국문화의 가치 덕분에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자신의 이름만으로 어느 정도 신뢰를 주는 감독들이 늘어가고 있는데요. 이번주 개봉한 영화들 중에서도 바로 그런 영화가 한편 있었습니다. 바로, 장진 감독의 <로맨틱헤븐>!! 저는, 개인적으로 장진 감독 특유의 분위기를 아주 좋아하는 팬이기도 한데요. 언제나 위트있지만, 너무 유치하지도 않은, 감동이 함께 하는 영화들을 만들어내던 장진감독의 로맨틱헤븐을 개봉하자마자 조조 프로그램으로 보고 왔답니다.
 

 

 

택시를 운전하며 치매에 걸려 이제 생을 얼마 남기지 않고 병원에 누워있는 할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돌보는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지욱은 언제나 투덜투덜 불만투성이이지만,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단란한 나름의 가족을 꾸리며 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임종을 앞두고, 가족들은 할아버지의 얼마남지 않은 시간을 퇴원후 집에서 모시기로 하는데요. 할머니와 할아버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욱은 할아버지에게 아주 오랜 시간 그리워하며 살아온 첫사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죠. 지욱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일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낸 병원 안, 이 병원에는,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만큼이나 생의 마지막 경험해야 하는 아픈 이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병 때문에 일년 가까이 이식할 수 있는 골수를 기다리며 병원 생활을 하고 있는 어린 소녀도 있고, 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 하는 이제 막 죽음을 맞딱드린 상처입고 고통스러운 남편도 있죠. 모두가 살기 위해 들어오지만, 또 누군가는 세상을 떠나기도 하는 병원안에서 지욱은 할아버지의 사연도, 소녀와 소녀의 어머니의 삶도, 홀로 남은 남편의 아픔도 스치듯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날, 지욱은 택시 운전 중에 사고를 당해 생각지도 못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로맨틱헤븐>은 우리가 결코 살아서는 경험할 수 없는 삶, 그 이후의 모습을 소재로 삼고 있는 영화입니다. 사람들이 죽고 난 다음 가야 하는 바로 그곳, 누군가는 천국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저승이라 부르는, 바로 그곳과 그곳에 가기 전 우리가 반드시 살아야만 하는 이곳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는 영화이죠. 살아서는 갈 수 없기에, 사람들의 환상속에 늘 존재하는 곳, 누구도 정확하게 그곳을 다녀왔다 말할 수 없기에 언제나 궁금증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바로 그곳과 그 시간들에 대한 장진감독의 상상 속 이야기를 영화를 통해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기독교적 색체를 바탕으로 깔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사랑이라는 관념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로 자리잡고, 하나님의 모습과 천국의 모습들을 소재로 하고 있으니까요. 또,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말씀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보기에 참 좋았더라" 식의 표현을 자연스럽게 넣는 등의 위트도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오로지 기독교 정신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닌데요. 죽고 난 다음 사람들이 가야 하는 그곳에 대해 '그곳은 그렇다더라'가 아니라 '그곳은 그랬으면 좋겠다'라는 상상과 바람을 더 많이 집어넣고 있습니다. 이승에서 죄를 짓고 선한 삶을 살지 못했다고 해서 유황불이 끓는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에서 끝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삶을 후회하는 곳. 장진 감독이 <로맨틱헤븐>에서 그리는 죽고 난 다음의 세상은, 그렇게 이 세상과는 다르지만 결코 이 세상과는 떨어질 수 없는 우리 삶의 또 다른 공간으로 그려집니다. 장진 감독이 꿈꾸는 죽음 이후의 세상.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브루스는 한 지방방송국의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는 방송인입니다. 그리 유명하거나 유망한 인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자신의 일을 즐기며, 언젠가는 앵커자리를 꿰찰 수 있으리라는 꿈도 가지고 있죠. 그리고 그에게는 그를 사랑해주는 여인도 있습니다. 사실, 뭔가 특출나고 위대한 인물은 아니지만, 브루스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리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스는 조금 투정과 불평이 많은 편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누리고 있는 것 보다는 언제나 투정과 불만이 넘쳐났던 브루스, 그는 어느날, 어느 골목 빌딩안에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한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이 인물을 만나고 난 다음 브루스는 하나님처럼 모든 것들을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이 능력을 브루스에게 주고, 자신은 휴가를 떠나버렸다는 것이죠.


브루스 올마이티는 어느날 전지전능한 절대자의 능력을 가지게 된 한 남자가 그 능력을 통해 자신이 평소 꿈꾸던 모든 것들을 얻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평소 그렇게 하고 싶던 앵커 자리도 꿰차고, 비싼 옷도 맘대로 입고, 차도 화려하게 바꾸죠. 하지만 그 모든 것들에는 댓가가 따르는 법, 그는 이런 능력을 가진 대신 하나님의 업무도 함께 해내야 하는데요. 언제나 자신의 소소한 일들만 불평해대던 브루스에게 전 인류가 가지는 고민과 고통은 결코 잘 해낼 수 없는 임파서블한 임무인듯 합니다. 그리고 그가 평소 자신이 원하던 모든 것들을 가지고 여유만만해 하는 동안, 그를 사랑하고 그가 사랑했던 여인은 외로움과 고통으로 그에게서 멀어져만 가죠.

브루스 올마이티는 짐 캐리라는 재능있는 코미디 배우와, 모든 영화에서 자신의 역할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소화해내는 배우 모건 프리먼이 출연하는 영화입니다. 짐 캐리만이 할 수 있는 다양한 코믹 연기와, 다른 영화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모습을 영화의 소재이자 출연진으로 끌어온 몇 안되는 영화이기도 하죠. 특히나 이 영화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하면 떠올리게 되는 백인의 모습이 아니라, 모건 프리먼이라는 흑인배우가 연기하는 흑인 하나님입니다. 여러모로 참 신선한 설정이었죠. 게다가 모건 프리먼이 연기하는 하나님은 매일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며 "보기에 참 좋았더라"만 읇조리시지 않습니다. 언제나 짜증과 불만만 달고 사는 인간에게 본인도 버럭 짜증을 내고, "니가 한번 해봐라"라는 식으로 능력을 위임하고 휴가까지 떠나버리죠. 언제나 위엄있고, 권위를 지키는 신의 모습이기 보다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마치 사람들처럼 말이죠.

브루스 올마이티와 로맨틱헤븐의 공통점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위엄있는 절대자의 이미지를 조금 더 친숙하고 자연스럽게 끌어와 마치 우리와 눈과 어깨를 함께하고,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인간미 넘치는 인물로 묘사한다는 점이죠. 로맨틱헤븐에서 이순재라는 걸출한 원로배우가 연기하는 하나님도, 브루스 올마이티에서 모건 프리먼이 연기하는 하나님도, 바로 이 점에서 절대자라는 권위 보다는 인간을 사랑하는 자애로운 하나님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합니다. 덕분에 이 두 영화를 보고 나면, 우리가 성경을 통해 글로 읽게 되는 뭔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하나님 보다는, 아버지처럼 자상한 두 눈으로 우리를 쓰다듬고 있을 하나님을 연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포근함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던 크리스와 그의 아내 애니는, 어느날, 사고로 얀과 마리를 모두 한꺼번에 잃게 됩니다. 행복했던 가족은 세상을 떠난 아이들과 함께 사라지고, 아내 애니는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모든 것들을 멈추어 버리죠. 그리고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남편 크리스에게 이혼을 해달라 말합니다. 크리스는 아내를 너무도 사랑하지만, 아내의 고통을 잘 알고 있기에 아내의 바람대로 이혼에 합의하죠.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크리스 역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단란하고 행복했던 가족. 이제 그 가족은 모두가 죽음이라는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넘어 애니에게 고통으로 남습니다. 가족을 너무도 사랑했던 크리스, 크리스는 자신이 죽은 후 홀로 남겨진 아내를 떠나지 못하고 그녀의 곁을 맴돌기만 합니다. 그리고 우연히 애니가 그린 그림 속에서 그녀의 천국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개인적으로 제가 너무도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벌써 10여년도 더 전에 개봉했던 영화가 되어버렸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환상적인 영상과 메세지들이 당시의 저에게는 꽤 강렬한 이미지로 남았기 때문인데요. 이 영화 덕분에 그 전까지는 그저 가족영화전문배우 정도로만 생각했던 로빈 윌리암스를 열렬히 좋아하게 되었고, 또 영화 속에 그려지는 죽음 이후의 모습에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도 있다는 점을 알게 해준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천국보다 아름다운>에서 크리스는 그녀가 그린 그녀의 천국 속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죠. 천국이라는 낯선 곳에 떨어진 크리스, 그리고 천국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 크리스는 자신이 천국에 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홀로 남겨진 애니 때문에 천국의 삶을 만끽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천국에서 애니가 자살을 선택하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죠. 크리스 자신은 천국에 있지만 그가 사랑했던 애니는 자살했기 때문에 천국에 올 수 없다는 사실, 그래서 그녀는 죽어서도 지옥에 있습니다. 크리스는 그녀 홀로 지옥에 남겨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녀곁을 지키기 위해 천국에서 만난 몇몇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지옥으로 향하죠. 그리고 그는 애니가 있기에 <천국보다 아름다운> 지옥을 만나게 됩니다.

로맨틱 헤븐은 여러모로 천국보다 아름다운과 비슷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영화입니다. 로맨틱 헤븐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기억하고 싶어하던 순간, 그리고 가장 그리워 했던 순간으로 돌아가 천국의 문턱를 밟게 됩니다. 그래서 택시기사인 지욱은 매일매일 지금만을 생각했던 탓에 죽은 바로 그 순간의 모습으로, 함께 사고로 죽은 할머니는, 할머니가 가장 그리워하고 추억했던 소녀의 모습으로 천국에 들어서죠. 천국보다 아름다운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은 천국에서 자신이 가장 바랬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이죠. 살아있을 때 가장 원했던, 꿈꾸었던 자신의 모습으로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제가 <천국보다 아름다운>을 보며 가장 인상깊었던 점이기도 했는데요. 로맨틱 헤븐에서 바로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사람들이 죽고 난 다음, 자신이 가장 원했던 스스로의 모습으로 살 수 있다면, 다른 그 어떤 것이 없다고 해도 그곳이 바로 천국이 되어주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 죽기전의 삶과 죽은 후의 삶이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죽음 이후의 삶도 이생의 삶이 이어지는 또 다른 공간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천국이 천국일 수 있는 이유는, 또, 사람들이 행복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사랑이라는 바로 이야기도 두 이야기가 서로 닮은 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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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다음의 세상, 누군가는 자신이 사후를 다녀왔다고도 하고, 미리 다녀올 수 있다고도 하지만, 사실 죽음 이후의 시간과 삶은, 정말 죽어보기 전에는, 육신을 완전히 버리고, 영혼으로 남겨지기 전에는 경험할 수 없는 세상일 것입니다. 그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절대자 하나님과 천국의 존재 역시 죽어봐야 비로소 가까이 갈 수 있겠죠. 하지만 영화들은 이렇게 가끔 상상을 해줍니다. 우리가 결코 살아서는 만날 수 없는 하나님과, 우리가 절대 살아서는 갈 수 없는 천국을 말입니다. 언제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는 것이 인간인지라, 죽음이후의 삶도 이렇게 오로지 아름답게만 그리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런 영화들을 보며 꿈꿔봅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만약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곳에서 절대자를 만나게 된다면, 이 영화들 처럼 달콤하고 아름답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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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3월 3주

아카데미상의 시상식을 마친 이후, 최근 극장가에는 아카데미 상의 수상이력과 노미네이트 이력들을 들어 영화홍보를 진행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나탈리포트만의 블랙스완이 그랬고, 이 후 개봉한 크리스찬 베일의 파이터가 그랬죠. 그리고 이번주에는 남우주연상의 영광을 콜린퍼스의 품에 안겨준 킹스스피치가 극장가에 개봉했습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그 세력을 확장하고, 그의 사상과 독일의 존재가 전 세계의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가던 무렵, 영국에서는 국왕 조지5세가 사망을 하게 됩니다. 왕권의 서열순위대로라면 조지5세 이후의 왕좌는 그의 장남인 에드워드8세에게 넘어가게 되지만, 에드워드8세는 이미 이혼경력이 있는 미국의 여인 심슨부인과의 연애에 빠져 있는 상태였죠. 에드워드 8세는 왕좌와 연인을 두고 고민을 거듭하다, 끝내는 왕좌를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하게 됩니다.

에드워드 8세의 왕좌 포기로 인해 영국의 국왕자리는 차남인 조지6세에게 넘어가게 되는데요. 조지6세는 신경성 말더듬 증세로 인해 백성의 대변인이 되어야 하는 왕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중압감에 시달리게 되죠. 그는 이미 왕자시절부터 청중을 상대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야 하는 연설을 말더듬 증세 때문에 잘 해내지 못해왔고, 수 없이 많은 치료에도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해 전전긍긍해오고 있었습니다. 세계2차대전이라는 역사상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 조지6세, 왕으로서 그는 국민들을 독려하고 자신의 의지와 강건함을 알릴 왕의 연설을 준비해야하는데.. 

 

킹스스피치는 실존인물인 조지6세와, 그의 친구이자 언어치료사로서 그와 함께 한 라이오넬 로그와의 숨겨진 뒷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실제로 조지6세는 왕좌에 오를 당시 국민들의 신임을 잘 얻지 못하고 영국국민들의 걱정의 대상이 되었을만큼 심한 말더듬 증세를 겪었다고 하죠. 그는 왕으로서 자신의 위치와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해내기 위해, 국민을 대신해 영국의 목소리를 내어야 하고, 이를 위해 제대로된 왕의 연설을 수행해내기 위해 언어치료사인 로그와 말더듬 증세를 고치기 위한 노력을 끝없이 했어야만 했다고 합니다.

콜린퍼스는 바로 이 영화에서 자신감을 상실하고 왕이 되기 싫었던 왕자 조지6세의 모습을 너무도 현실적으로 잘 그려냅니다. 왕자라고 해서 언제나 근엄하고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압박과 고통에 시달리는 인간 그대로의 모습을 때로는 농담처럼 즐겁게, 때로는 진중하게 그려내죠. 수없이 많은 작품에서 영국인의 다양한 모습을 그려내왔던 콜린퍼스이기에 왕자 혹은 왕이라는 조금은 멀게만 느껴지는 작품속의 배역을 친숙하고도 따스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100% 훌륭하게 느낄 수 있게 해주기도 합니다.  영화는 한 나라의 국왕이기 이전에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상처를 품고 있는 인간이기도 했던 영국의 한 남자의 모습 그대로를 콜린퍼스 속에 잘 녹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콜린퍼스=영국신사 라는 그간의 이미지를 잘 활용함과 동시에 콜린퍼스=인간미 넘치는 배우라는 느낌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나 돌아볼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청년 도리언 그레이, 그는 어느날 헨리워튼 경이라는 다소 쾌락주의적인 삶을 살아가는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헨리워튼은 삶의 모든 것들을 즐기는 것을 중심으로 그려놓은 그다지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없는 사람이죠. 하지만 그 순간까지 상대적으로 순수한 삶을 살아왔던 도리언은 헨리워튼경과 함께한 순간들에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즐거움과 쾌락의 맛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도리언 스스로도 점점 쾌락주의적인 삶에 젖어들게 되죠. 아름다운 도리언을 아끼던 화가 바질은 도리언의 모습을 초상화에 담고, 도리언은 영혼을 팔아 자신이 점점 추하고 늙어가는 모습들은 자신의 몸이 아닌 그 초상화에 덮어쓰게 됩니다. 이제 도리언은 자신대신 늙고 추해가는 초상화 덕에 시간이 흐르고, 어떤 쾌락에 몸을 맡겨도 추해지지 않을 수 있게 된것이죠.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도리언은 어느새 그 스스로도 자신의 초상화를 볼 수 없을만큼 타락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늙지 않고, 추해지지 않는 아름다운 도리언 그레이, 그러나 그의 실체인 그의 초상화는 갈수록 추하고 흉물스러워지고, 이제 그의 초상화는 그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도리언의 가장 은밀하고도 추악한 모습입니다.

도리언 그레이는 오스카 와일들의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저는 어린시절,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중 한권인 행복한 왕자를 아주 인상깊게 읽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요. 때문에 오스카 와일들의 유일한 장편 소설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영화화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작품을 꽤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청년 도리언의 타락해가는 과정. 그리고 자신의 추함과 노쇠함을 감추고 싶어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바람이자 욕망을 영화가 얼마나 강렬하게 그려낼지 궁금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런 기대이외에도 이 작품을 기대하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동안 언제나 젠틀하고 포근했던, 그리고 인간미 넘치는 역할을 주로 해왔던 콜린퍼스가 이 작품에서는 탐미적이고 쾌락주의 적인 삶을 살아가는, 그리고 도리언에게 그런 삶을 알려주는 헨리워튼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뭔가 따스하고 부드러운 이미지가 있는 콜린퍼스가 연기하는 쾌락주의자라니.. 그가 어떤 모습으로 헨리워튼을 만들어낼지 너무 궁금했거든요. 그리고 콜린퍼스에 의해 도리언 그레이 속에서의 헨리워튼은, 지나치게 탐욕주의적이고 쾌락주의 적인 악인에 가까운 헨리워튼이 아닌, 그럼에도 뭔가 멈칫거리고 부족함이 많은, 악인이라기보다는 무언가에 쫓기듯 쾌락속에 자신을 숨긴 상처받거나 혹은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재탄생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동안의 콜린퍼스와는 다른, 그러나 콜린퍼스만이 표현할 수 있는 그런 헨리워튼이 된 것이죠. 젠틀하고 단정한 콜린퍼스가 아닌 또 다른 모습의 콜린퍼스를 만나고 싶다면, 꼭 보아야할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학교수인 조지는 갑작스런 연인 짐의 죽음으로 모든 것들에서 의미를 잃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 얼마전까지 미래를 꿈꾸며 사랑을 확인했던 연인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기력감에 시달리고 있죠. 동성애자였기에, 그들의 사랑을 찬란히 빛낼 수 없었던 조지. 또, 그런 그를 눈치채고 있던 그의 주변인들로 인해, 그는 외로움과 무기력함에 사람들의 의문에 가득한 멸시의 시선까지 견뎌내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은 분명 고통스러운 일이건만 그가 이성애자가 아닌 동성애자라는 사실 때문에 그는 마음 놓고 슬퍼하는 것 조차 쉽지가 않고, 조지에게 그런 세상은 힘겹기만 합니다.

16년간 삶을 함께해온 연인이 교통사고로 죽고, 그토록 사랑했으나 장례식장에도 참여할 수 없는 조지. 단지 이성이 아닌 동성과의 연인관계를 가져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정받는 대학교수라는 사회적 지위를 가졌으나 그 어떤 것도 자유롭지 못했던 그는, 사회에서 그저 영원한 이방인이라는 소외감에 밀려나기만 합니다.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영국인. 그리고 남들이 모두 가진 가족을 가지지 못한채, 연인도 잃어버리고 홀로 버려지듯 살아야 하는 그의 삶은 그래서 결코 행복할 수 없죠. 그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과의 교감과 행복이건만 그저 그가 동성애자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이제 그는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린채 남겨집니다. 막대한 부도, 거대한 권력도 원하지 않았건만, 그저 남들이 원하는 것처럼 자신을 이해하는 단 한명의 연인을 원하는 것 조차도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조지. 싱글맨은 그렇게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던 그 사회안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게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림처럼, 그리고 스틸사진처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콜린퍼스는 이 작품에서 연인을 잃어버린채 그 어떤 것에서도 기쁨을 느낄 수 없는 중년의 남자 조지를 연기하죠. 그간 따스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정갈한 연기를 해내던 그가 동성애자의 모습으로, 차갑고 냉소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세상을 향해 분노에 가까운 냉소적 시선을 내던지는 모습은 그래서 이 사람이 콜린퍼스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생소합니다. 하지만 이 생소함은 그가 이 영화에서 맡은 중년의 동성애자가 세상에서 느끼는 소외감을 더욱 절실하게 느낄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요. 많은 대사도 없고, 역동적인 화면도 없는 이 영화가 많은 수상을 하며 콜린퍼스에게 여러 상의 영광을 안겨준것은 이 영화를 통해 콜린퍼스가 숨소리와 공기마져 연기의 한 요소로 만드는 능력을 갖춘 배우라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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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콜린퍼스는 오만과 편견, 브리짓 존스의 일기, 러브 액추얼리 등에서 조금은 어리숙하지만 젠틀하고 따스한 영국남자의 매력을 대표하는 배역을 많이 해왔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그가 해왔던 역할은 정말 다양하지만 사람들의 뇌리에 가장 강하게 남아있는 모습들이 바로 이런 모습인것이죠. 아마도 관객들은 콜린퍼스의 모습에서 이런 느낌과 감동을 느끼기를 기대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만으로 그동안 스크린을 채워왔다면, 콜린퍼스의 그 많은 수상경력은 아마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콜린퍼스가 관객이 그에게 기대하는 모습을 살짝 벗어났을 때 평단은 그에게 더욱 열광했죠. 킹스스피치나, 도리언 그레이, 싱글맨은 아마도 그런 류의 영화가 될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콜린퍼스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콜린퍼스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모습들을 그려낸 바로 그런 영화들 말입니다. 이 작품들을 보면, 왜 평단이 콜린퍼스에게 상을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지, 왜 수 없이 많은 영화제에서 그를 최고의 배우로 꼽는지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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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언노운> 

보통, 책을 선택할때에는 제목과 추천사를 먼저 보게 된다. 그리고 작가의 이름을 본다. 하지만 이것들보다 더욱 먼저 하는 것은 제목을 보는 일. 언노운은 이미 영화로 개봉한 작품의 원작이라고 한다. 제목을 보면서 영화 포스터 속의 언노운과 책 속의 언노운이 같은 글자임에도 꽤 다른 느낌을 준다고 느꼈다.  

꽤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영화임에도 보지 않고 넘어갔던 이유는, 원작이 있다는 이야길 들어서였다. 원작으로 먼저 만나보고 싶은 이야기였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언젠가부터 이렇게 뭔가를 대표하는 동화를 제목으로 끌어다 쓴 책들은, 어둡고 음침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역시 책의 소개글을 보면, 음모와 비밀, 그리고 아름다운 동화와는 다른 뭔가 숨겨진 사실들이 있는 이야기인듯 하다. 백설공주라는 테마가 어떤 잔혹동화로 뒤바뀌어 있을지..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호기심이 가는 이야기이다. 

 

<빈방> 

은교 이후 박범신 작가의 또 다른 이야기이다. 은교를 읽으면서, 박범신이라는 작가 특유의 문체가 참 인상깊었던 기억이 난다. 스스로에 대해 끝없이 묻고 대답하고 반문하면서 의문을 품고, 뭔가를 갈망하는 인간의 가장 원래적인 욕망에 대해서도 문득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던 것 같다. 빈방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만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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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3월 1주

이맘때 쯤이 되면 많은 극장의 개봉작들이 하나의 시상식을 거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전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영화인들의 상 아카데미 시상식이죠. 늘, 그래왔지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배우는 아마도 여우주연상의 수상자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의 여우주연상은 우리모두가 그 이름을 잘 아는 배우 나탈리 포트먼이었습니다. 영화 '레옹'의 어린 소녀에서 그 얼굴을 알리기 시작해 언제나 연기 잘하는 똑똑한 배우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나탈리 포트먼을 기어이 아카데미 시상식의 여우주연상에 올려놓은 영화, <블랙스완>은 어떤 영화였을까요?  

 

 아름다운 발레리나 니나는, 발레단 내에서 재능있고 아름다운 춤을 잘 구사해내는 촉망받는 솔로이스트입니다. 그녀가 소속된 발레단에는 이미 잘 알려진 유명 발레리나가 있지만, 그 발레리나는 이제 점점 나이가 들어 정점에서 내려와야 하는 위치에 서 있죠. 이제 그녀의 발레단은, 새로운 얼굴을 필요로 합니다. 더 아름답고 더 매혹적인, 그리고 더욱 재능있고 젊은 바로 그런 발레리나말입니다. 한 해의 공연을 시작하는 첫 공연에서 그녀의 극단은 저 유명한 <백조의 호수>를 공연하기로 합니다. 발레단의 새로운 얼굴이 될 주인공, 백조의 여왕은 바로 이 무대를 통해 탄생하게 되죠. 니나는 오랜 시간 이 시간을 기다려왔고, 이제 오디션을 통해 백조의 여왕이 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장은 그녀에게 순백의 백조의 모습은 완벽하지만 매혹적이고 치명적인 흑조의 모습이 없다고 말하죠. 하지만 니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조의 여왕으로 무대에 설 기회를 얻습니다. 순백의 백조의 모습은 있지만 흑조의 치명적 매력이 부족한 니나, 니나는 완벽한 백조의 여왕으로 거듭나기 위해 스스로를 매섭게 혹사시킵니다.
 

 

<블랙스완>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에게 혹독하고 그 꿈에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니나의 모습이 그저 한 인간의 꿈에 대한 집착이라고만은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왜 그토록 완벽한 백조의 여왕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느냐는 것이겠죠. 그녀에게는 오랜 시간, 자신을 위해 꿈을 포기했다 말하며, 그녀에게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투영하고자 하는 신경쇠약의 어머니가 있고, 끝없이 자신의 도발적인 면을 끌어내야 한다고 질책하는 단장이 있습니다. 그녀가 속한 발레리나들의 세상은, 언제나 누군가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올라서려 하는 또 다른 발레리나들이 넘쳐흐르고 있고, 그녀들은 제각각의 아름다운, 그래서 위협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니나는 이 모든 압박들을 이겨내기에는 너무도 유약하고 순수하게만 키워져왔습니다. 바로 그녀의 어머니에 의해서요. 이 모든 공포스런 압박을 견뎌내기 위해 그녀는 꿈을 향해 더욱 커다란 이상을 품고, 현실이 아닌 환상으로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결국, 그녀가 꿈꾸는 백조의 여왕은, 그 모든 것들을 벗어던지고,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단 하나의 도피처가 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블랙스완>은 나탈리 포트먼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이라는 명예를 안겨준 영화답게 그녀의 연기력이 빛을 발하는 작품입니다. 이 영화를 위해 그녀가 얼마나 발레리나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했는지는 영화의 도입부만 보아도 느껴질 정도이고, 영화가 진행되면서 혼돈과 고통속에 자신을 잃어가는 니나의 모습을 연기하는 그녀의 모습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정도이니까요. 마치 나탈리 포트먼이 아니면 안될 것 같은 영화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여기에 또 다른 영화적 재미도 함께 하는데요. 바로 이 영화의 도입부에 그녀의 두려움을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전직 프리마돈나 베티를 연기하는 위노나 라이더입니다. 위노나 라이더는 이 영화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역할이지만, 이 영화의 베티 역할은 그녀에게 마치 그녀의 현실처럼 잔인하게 잘 맞아 떨어지는 역할이기도 한데요. 한때는 전 세계의 미의 여신이었던 그녀가 이제는 새로운 주인공 나탈리 포트먼과 함께 연기하는 모습은 이 영화의 현실감을 더욱 더해주는 요소이기도 했습니다.
 

 

 

범죄자들 중 정신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자들을 선별하여 수용, 치료하는 셔터 아일랜드라는 섬이 있습니다. 어느날 이 셔터 아일랜드에서 한 명의 환자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죠. 테디는 셔터 아일랜드에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보안관으로, 이제 처음 파트너가 된 척과 함께 셔터 아일랜드를 방문합니다. 사면에 모두 바다로 둘러싸인것도 모자라 가파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곳 셔터 아일랜드, 좁고 좁은 감방같은 수용시설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여자 환자. 테디는 이 사건을 수사하며 셔터 아일랜드라는 섬에 대한 의문을 조금씩 가지게 됩니다. 수용시설의 모든 사람들과, 환경이 의심스럽기만한 테디. 이제 테디의 관심은 그저 사라진 여자 환자를 찾아내는 것을 넘어 그 앞에 거대한 미스테리로 다가오는 셔터 아일랜드에 대한 비밀입니다.

<셔터 아일랜드>는 사라진 환자로 시작하는 닫혀진 섬에 대한 진실을 파헤지는 줄거리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영화 속에는 알 수 없는 장치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죠. 뭔가 의문스럽기만한 섬 안에서 주인공인 테디는 자신이 맡은 사건보다는 점점 셔터 아일랜드라는 섬 자체를 의심하게 되고, 이 섬 안에 뭔가 커다란 음모와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화가 종반에 다다르면, 이 모든 사실들을 뒤흔들다 못해 송두리째 바꾸어 버리는 엄청난 반전을 만나게 되죠. 영화의 80%는 셔터 아일랜드의 비밀을 파헤치는 테디의 미스테리 스릴러물로 흘러가지만, 이 마지막 반전으로 인해 이 영화의 성격은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개인적으로는 반전영화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유쥬얼 서스펙트에 맞먹는 작품이라고 생각할만큼 충격적이고, 대단한 반전이기도 한 이 영화의 반전. 하지만 이 영화이 매력은 단순히 이 충격적인 반전 뿐만은 아닙니다. 이 반전마저도 뒤집는 또 하나의 반전이 영화 막바지에 희미하게, 그리고 애잔하게 남기 때문이죠.

반전과 반전을 거듭하는 영화들은 간혹 반전을 위한 반전이라든지, 혹은 너무 뻔한 반전들을 무차별적으로 배치해 영화의 재미를 깎아내리는 부작용을 가지기도 하지만 셔터 아일랜드의 반전들은 이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의미들을 다시 생각하게 할만큼 충격적이기도, 혹은 깊은 연민을 느끼게도 합니다. 누군가가 감당해내지 못한 상처와 아픔이 얼마나 인간을 고통속에 살게 하는지, 그리고 그 고통이 한 사람의 영혼을 어떻게 만들어버리는지를 보여주는 장치가 되어주니까요. 또, 때로는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정상이나, 보통, 평범의 기준이 아닌, 누군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비정상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블랙스완>의 니나가 현실을 이겨내고 환상을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를 망쳐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셔터 아일랜드>는 현실이 고통과 두려움을 잊기 위해 자신만의 세상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의 절실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인 듯도 합니다.
 

 

 사람의 인적이 드문 어느 시골, 아름답고도 평화로운 풍경에 잘 어울리는 집이 있습니다. 언니 수미와 동생 수연은 이 곳에서 새 엄마와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하지만, 그녀들은 어쩐지 그녀들을 반기는 아름다운 새엄마 은주를 달가워 하지 않죠. 아버지는 그런 자매와 새엄마를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은 채 이 가족의 생활이 시작됩니다. 언제나 말이 없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동생 수연, 그리고, 그런 동생을 이제는 엄마처럼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에 언제나 동생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수미, 두 자매는 그녀들만의 유대감으로 뭉쳐있는 사이 좋은 자매이지만, 그럴 수록 새 엄마 은주는 그녀들과 자꾸 어긋나기만 합니다. 신경이 예민할대로 예민해져버린 새 엄마 은주와 동생을 지켜내고자 하는 수미, 그리고 언제나 겁에 질린 동생 수연. 그들의 생활이 삐걱대고 불화가 생길수록 평화로워만 보이는 이 집에는, 그 아름다운 풍경과는 다른 괴이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호러라는 장르답게, 시종일관 미스테리하고 은밀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영화는, 앞서 언급했던 <블랙스완>이나 <셔터 아일랜드>와도 상당히 닮아있는 영화이기도 한데요. <블랙스완>의 니나처럼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지 못하고 끝내는 그 혼돈 속에서 스스로를 고통속에 빠르린 소녀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블랙스완>과의 유사점을, 그리고 현실이 너무도 고통스러웠기에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자신만의 세상을 창조하고 믿어야 했던 인간의 나약함을 그린다는 점에서 <셔터 아일랜드>와의 유사점을 찾을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을 잃은 소녀가, 그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새로운 대상을 만나 경계하고 공포스러워 하는 모습, 그리고 그 공포와 상처들이 그녀를 무너지게 하는 모습은 영화가 끝난 후 꽤 강렬한 여운으로 남기도 하죠.

<장화홍련> 꽤 오래 전의 영화이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의 호러영화중에서는 꽤 좋은 작품성으로 회자되곤 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으로 유명한 김지운 감독을 조금 더 관객과 가깝게 만들어준 작품이기도 하구요. 또 지금 보면, 임수정, 문근영이라는 현재 국내 최고의 여배우들의 어린 모습들을 볼 수 있는 추억이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언제고 생각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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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과 <셔터 아일랜드>, 그리고 <장화, 홍련>은 모두 미스테리 스릴러물의 형태를 띈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스스로의 집착과 욕망, 그리고 고통스러운 상처에서 결코 자유스러울 수 없는, 그래서 스스로를 던져버린 이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깔려 있기도 합니다. 이 영화들은 영화가 상영되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위협적이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렇게 스스로를 버림으로써 현실에서 도망가고자 했던 이들에 대한 아련함을 느끼게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스스로를 옭아매고 압박하는 현실이나 상처, 고통들은, 이 영화들의 주된 분위기처럼 공포스럽고 위협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공포를 이겨내지 못한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었기에, 영화가 끝난 후 "이 영화 무섭다"가 아닌 "주인공에 대한 연민을 우선 느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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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즌 파이어 1 - 눈과 불의 소년
팀 보울러 지음, 서민아 옮김 / 다산책방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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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보울러라는 이름의 작가, 그의 소설 중 내가 처음으로 접했던 작품은 리버보이라는 이름의 소설이었다. 어린 소녀와 그 소녀의 고집센 할아버지, 서로를 너무나 아꼈기에 그 꿈을 대신해 이루어주고 싶었던 작은 소녀의 바람과 할아버지의 꿈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이고 아름다웠던 동화는 그저 읽기 좋은 한편의 동화이기 이전에 오랜 시간을 간직해온 한 남자의 아름다웠던, 그리고 그리웠던 꿈에 관한 이야기였고, 모든 사람들이 죽는 그 순간까지 간직하는 순수한 마음이었던 것 같아 읽고 난 후에도 한참동안을 아련하고 아름다운 꿈에 있는 것 같은 설레임을 주었었다. 팀 보울러라는 이름은 그렇게 아름답고 환상적이지만 단순히 아름다운 것에서 그치지 않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던져주는 이름으로 나에게 기억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 중 두번째로 내가 만나게 된 작품은 바로 이 작품, 프로즌 파이어이다


어느날 갑자기 집을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는 오빠 조쉬. 오빠를 그리워 하는 작고 못생긴 소녀 더스티는 언제나 자신의 한 조각이자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은 조쉬 오빠를 늘 기다리고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오빠의 실종은 신경과민의 엄마가 집을 떠나게 만들었고, 다정다감하지만 언제나 마음이 여렸던 아빠에게 떠난 엄마의 빈자리와 아들의 부재를 떠넘기게 되었다. 아파하고 상처받은 아빠의 곁에서 더스티는 조쉬의 몫까지 아빠를 버텨주어야 하는 강인함을 지녀야했고, 가족은 상처받고 외로워하며 서로를 그리워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살아있는지 죽었는지조차 알려주지 않는 조쉬. 차라리 죽음을 확인했다면 오히려 자유로웠을 더스티와 그녀의 가족들에게 오빠의 확인되지 않는 실종은 살아있으리라는 믿음과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동시에 던져주는 풀리지 않는 숙제이자 조쉬를 떠나보낼 수 없는 미련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있는 모든 시간을 조쉬의 부재에 대해 생각하며 지내는 더스티에게 조쉬의 모습을 보여주는 신비로운 소년이 나타난다.

더스티의 마음을 읽고, 조쉬의 모습을 보여주는 소년. 조쉬만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더스티에게 던지며 끊임없이 그녀의 주변을 맴도는 소년의 존재는, 더스티에게는 조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마지막 단서이자 마지막 열쇠로 느껴진다. 어딘지 모르게 신비롭고 그래서 가끔은 공포의 존재로 다가오는 하얀 소년, 그 누구에게도 자신을 실체로 남기지 않지만 수 없이 많은 소문을 만들어내고 사람들을 공포속에 몰아넣는 소년이지만 어쩐지 더스티에게는 그가 두려움의 존재로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조쉬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는 단 하나의 존재일 뿐이다. 사랑하는 자신의 오빠를 돌려줄지도 모르는, 돌려주지 않는다면 그 존재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줄지도 모르는 하얀 소년. 다른 이들은 모두 두렵다 말하지만 그 두려움을 이겨낸 더스티에게 소년은 만나야할, 그리고 이야기를 들어야할, 존재를 확인해야할 대상일 뿐이다. 더스티는 조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조쉬를 확인하기 위해 소년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그를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 애를 쓸 뿐이다. 그것만이 더스티를 놓아주지 않는, 영원히 그녀 곁을 맴돌것만 같은 조쉬를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임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더스티를 맴돌던 존재, 그 하얀소년의 존재는 그녀가 오빠 조쉬를 잃어버린 그날부터 계속되는 그녀의 그리움과 공포였다. 사일러스 할아버지와 안젤리카가 자신들이 확인하고 해결하려 하지 않았던 바로 그 사연속의 두려움처럼 더스티 역시 조쉬의 실종에 대한,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대면하려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끝없이 오빠의 존재를 그리워하고 어쩌면 세상에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오빠의 죽음을 대면하지 않으려 했던, 인정하지 않으려했던 그녀의 두려움이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수 없이 많은 소문처럼 공포로 변해 그녀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신비로웠던,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의 존재라고 말했던 그 소년을 대면하기로 결정한 순간, 그녀는 이미 알았을지도 모른다. 소년의 입에서 조쉬의 죽음을 듣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더스티가 이겨낸 소년에 대한 두려움은 자신이 대면하게 될 조쉬의 죽음에 대한 가능성, 바로 그 사실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그녀가 그것을 이겨낸 순간 수수께끼를 풀 자격이 주어진 것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가끔 진실을 이미 짐작하며서도 그 사실을 대면했을때 느껴질 슬픔과 아픔이 두려워 진실을 외면하려고 한다. 이미 존재하는 사실을 직접 보면 감당해야할 자신의 아픔. 그 아픔이 두렵고 무섭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런 외면은 아픔을 겪고 나서야 당당해질 수 있는 자신의 삶을 가로막는 장애가 될 뿐이다. 결국 모든 아픔과 슬픔은 그것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이겨내었을때 극복되는 것이니 말이다. 더스티는 아마도 그것을 알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끝없이 맴도는 오빠의 망령을 이겨내어야만 오빠의 모습에 갇힌 자신이 아니라 스스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아픔과 슬픔을 겪어내고 더스티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해 소년을 마주보려 했던 것이다. 더스티가 진정 바란것은 오빠의 죽음에 대한 진실 이상의 것. 바로 오빠의 실종으로 얼어버린 자신의 뜨거운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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