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큐에게 물어라
야마모토 겐이치 지음, 권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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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큐에게 물으라 했다.
리큐가 무엇을 말했노라라고 하지 않고, 리큐에게 물으라 했다.
리큐에게 무엇을 물어야 하는 것일까?
리큐는 답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가 그를 향해 쏟아낼지도 모르는, 아직 그 의미조차 완성되지 않은 수 많은 질문들 앞에서..
리큐는 그저 담담히 답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되었든.. 그에게 물으면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리큐에게 물어라>라는 제목의 꽤 두툼한 한 권의 책을 들고 앉아, 한동안 제목을 꼽씹었다.
과연 나는 리큐에게 물을 질문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리큐에게 무엇인가를 질문하기 위해 질문을 준비했던가 싶어서..
리큐에게 답을 원하는 질문이 없다면, 이 책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망설임이 생겨서 말이다.

나에게 이 책의 첫 장을 넘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리큐에게 간절히 답을 듣기 원하는 나의 질문이었다. 리큐에게 물을 것이 없다면, 어쩌면 그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는 답도 없으니 결국 이 한권의 책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책을 펼치기 전 질문을 찾아야 했다. 리큐에게 물어야할 질문, 단 하나의 질문을.

그리고, 책의 첫 장을 펼치며 조용히 리큐에게 물었다.
"다도는 무엇인가요?'

<리큐에게 물어라>는 일본 문화의 큰 흐름을 주도 하고 있는 다도, 그 다도를 역사속에서 완성했다 평가 받는 센 리큐의 생애를 소설로 풀어낸 이야기이다.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었던 부유한 어물상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 유희에 눈을 떳으나 모든 것에 실증을 느끼고 다도의 세계에 빠져들었던 젊은 시절을 지나, 다도로 대표되는 일본의 미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다두로서의 인생을 살고, 더 나아가 최고의 권력자였던 히데요시의 스승이었으나 결국 그의 분노와 질투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되었던 역사속의 인물 센 리큐. 일본의 대표적인 다두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그의 삶을 통해 작게는 한 인물의 인생과 그의 인생에 진정한 가치, 그리고 그가 그토록 집착하고 몰두 했던 다도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살펴보고 크게는 일본문화의 큰 흐름을 주도 하고 있다는 바로 그 다도가 역사 속에서 어떤 사건과 의미들을 만들어내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이야기를 책 안에 담고 있는 것이다.

사실, <리큐에게 물어라>를 골라 들었던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다도"라 불리우는 일련의 과정. 사람을 초대하고 차를 끓이며 그 차를 나누어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길래 한 나라의 문화를 주도하고 역사속에서 큰 의미로 자리잡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쓰디 쓴 차를 한잔씩 나누어 마실 뿐인 다도가 무엇이길래, 명문이라는 이름으로 한 가문을 일으키고, 다두라는 이름으로 어떤 학자의 위엄보다 더 높은 명예를 선사하는 것일까에 대한 궁금증. 바로 그 궁금증을 바로 이 책 <리큐에게 물어라>를 통해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하지만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센 리큐와, 그 처럼 다도에 몰두하고 그를 질투하거나 존경해온 수 많은 사람들과의 일화속에서도 그 답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리큐에게 물어라>는 다도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을 담은 책이 아니라 다도라는 공동의 관심사를 가졌던 일본의 역사 속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였고, 다도라는 매개를 통해 무섭도록 날이 선 채로 권력을 탐하고 욕심을 채우려했던 권력가들의 쟁투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한때는 스승으로 한때는 질투의 대상으로 존재했던 센 리큐는 날 선 일본의 역사 속에서 또 하나의 욕망인 아름다움에 대해 끝없이 갈망하고 집착하며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자신을 내던진 다두라는 이름의 권력가였다. 권력을 탐하고 힘을 과시하며 생명을 아까워 하지 않는 무인들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면서도 그 자신도 무언가를 끝없이 탐하고 자신의 안목을 과시하며 그것을 위해 치루어지는 어떤 희생을 아까워 하지 않았던 다른 이름의, 그러나 같은 모습을 한 권력가 말이다.

<리큐에게 물어라>에는 그래서 책 속에서 다도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내어놓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가졌던 의문처럼 도대체 다도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수 많은 사람들이 억만금의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고, 그토록 집착하며 몰두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수 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집착하고 몰두하며 그 자신들도 나름의 권위있는 다도인으로 명성을 가졌던 수 많은 사람들. 그들 조차도 알 수 없었던 다도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물음. <리큐에게 물어라>는 어쩌면 일본의 역사와 일본의 문화가, 그리고 당시의 시대와 현재가 센 리큐라는 위대한 다도인에게 묻고 싶은 단 한가지 질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누구도 다도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었기에, 최고의 명인으로 역사에 남은 그에게, 그 답을 듣기 위해 내어놓는 한 마디의 질문 말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뛰어난 심미안을 가지고 언제나 최고의 미만을 추구했던 그라면 혹시나 알지도 모른다는 한가닥 희망을 걸고 그에게 답변의 기회를 던진 것은 아니었을까? 그 누구도 그 답을 알 수 없었기에 그들이 진정한 다인이라 인정했던 리큐라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어놓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말이다.

하지만 책장을 뒤로 넘기면 넘길 수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리큐에게서도 답을 얻을 수 없었을지 모른다고..그 자신도 무언가를 위해 끝없이 갈망하고 원했던 욕망을 가진 뜨거운,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이었으니 말이다.그가 인생을 걸고 끝없이 다도를 탐하고 갈망했던 것은 그 역시 그 답을 얻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다도가 아닌 다도로 표현되는 수 많은 사람들의 욕망과 탐욕, 그리고 인생에 대한 답 말이다.

한 여인을 얻지 못해 인생모두를 그 아련한 그리움을 끌어안고 살아야 했던 인간으로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완전한 것은 없으리라는 어렴풋한 답을 인정하기 위해 그는 그토록 단 하나의 완벽함을 추구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인가를 가지기 위해 끝없이 탐하는 인간이라는 존재. 그 인간의 욕망 앞에 때로는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인간이라는 존재 역시 탐욕의 대상이 되어버림을 경험했던 젊은 시절의 리큐의 기억은, 가장 완벽한 생명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간직하고 있으나 그 아름다움을 미쳐 깨닫지 못하고 그 외의 것들에만 불필요한 가치를 부여하는 인간들에 대한 반감으로, 그리고 그 외에는 어떤 것도 완벽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그의 인생으로 모습을 갖추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다도를 통해 그가 추구했던 최고의 미는, 그 어떤 최고의 아름다움에도 완벽함이란 존재하지 않음. 그 불완전함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비싼 명물과 아름다운 장식으로 꾸며져 있는 다실에 앉아있는 명예와 권력을 갖춘 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삼켜야 하는 것은 누군가의 손에 끓여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언제나 불완전한 쓰디 쓴 차 한잔일테니 말이다. 다도를 통해 그들이 삼키는 것은 어쩌면 책의 한 구절에 나오듯, 쓰고 불완전한 인생이라는 것의 무게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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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리사 제노바 지음, 민승남 옮김 / 세계사 / 2009년 12월
구판절판


어린 시절, 나만의 보물들을 모아두었던 작은 상자를 잃어버렸던 적이 있다. 엄마 몰래 동생과 사서 모았던 예쁜 종이인형, 생일날 친구가 선물해준 작은 머리핀, 그리고 문구점 한쪽 귀퉁이에서 자리 잡고 있던 뽑기 기계에서 뽑았던 플라스틱 반지들이 담겨있었던 그 작은 상자를 잃어버리고 나는 몇 날 며칠을 시무룩해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리 큰일도 아니었었다. 상자를 채우던 종이인형은 더 예쁜 종이인형이 생기면 늘 교체되고 있었고, 생일날 친구에게 받은 머리핀도 예쁘다며 머리에 며칠 달고 다니다가 잃어버리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지금은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그 때 내가 한참을 아까워하며 시무룩해있었던 것은 그 작은 상자 안을 채우고 있던 종이인형과 머리핀, 그리고 작은 플라스틱 반지가 아니라 바로 그 상자 자체였다고……. 상자 안을 채우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든, 내가 그 상자를 아끼고 그리워했던 건, 그 상자가 가리키는 나의 기억과 추억들, 바로 그것이었던 거다. 무엇인가를 채우고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작은 상자는 나에게 바로 지키고 그리워해야할 기억과 추억이 있다는 상징 같은 것이었던 거다. 그래서 내가 그 작은 상자를 잃어버린 순간 나는 동생과 엄마 몰래 종이인형을 사서 자르고 예쁘게 다듬었던 시간을 잃어버리고, 생일날 나를 축하해주던 친구를 잃어버리고, 학교 문구점 구석에서 무엇이 나올까 기대하며 뽑기 기계를 돌리던 그 순간을 내 머릿속에서 잊어버릴까봐 시무룩해졌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기억이란, 단순히 지나온 시간의 나열이 아니다. 기억은 그 사람의 인생전체를 채우는 시간들이고, 사건들이며, 사람들이고, 의미 그 자체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기억에 추억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 돌이켜 생각할만한 의미를 가진 기억들에게 말이다.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는 많은 사람들에게 허락되어진 이 하나의 능력, 지난 일을 기억하고 돌이킬 수 있는 추억이라는 이름의 인생을 빼앗겨버린 한 여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지학분야의 전문가로 전 세계의 엘리트들이 모인다는 하버드라는 이름의 대학에서 종신교수의 직위를 획득한 성공한 커리어의 대학교수 앨리스. 그녀는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학자이며, 자신만큼 성실하고 훌륭한 배우자를 두고 있는 행복한 아내이고, 모두 자신의 마음 같지는 않겠지만 나름대로는 훌륭하게 성장했다고 할 수 있는 아이들을 둔 단란한 가정의 어머니였다. 언제나 거의 모든 것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원하는 만큼의 성과를 내었던 그녀의 인생. 그래서 그녀에게 어느 날 소리없이 찾아든 단 하나의 불행이 가장 속수무책이고 치명적인 이름을 달고 찾아왔을 때, 그녀는 당연히 너무도 무섭고 치욕스럽지 않았을까? 인지학이라는 분야에 권위자로 이름을 널리 알린 그녀가 가장 자신있게 설명하고 말할 수 있었던 인지능력 자체를 위협받아야 하는 상황은, 어쩌면 그녀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가장 잔인한 방법의 고통이자 위협이었을 것이다.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는 그렇게 자신이 가진 가장 중요한 것들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리고, 모든 것들의 중심에서 모든 것들의 가장 소외된 구석으로 내몰리는 한 여성과 그 여성이 속해있던 세상이 점점 작아지는 가장 잔인하고 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가 그리는 알츠하이머는 너무도 혼란스럽다. 자신이 자신이었다가 자신이 아니게 되고, 나의 가족도 나의 가족으로 자리에 앉았다가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되어 이야기를 건넨다. 몇 십년을 걸었던 길임을 알면서도 길을 알 수 없고, 어린 시절의 기억과 현실을 오가며 자신을 뒤흔들어 놓는다. 그렇게 늘 혼란하기만 하면 오히려 좋으련만 다시 자신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스스로를 고통스럽고 자조적으로 만들어놓기도 한다. 신체적인 모든 것들이 정상이지만 단 하나 세상을 보고 인지하는 능력이 정상이지 못하기에 어느 곳에서도 인정받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앨리스. 그래서 모든 것들의 중심에서 모든 것들의 가장 소외 된 구석으로 밀려나 버린 그녀의 모습은 더욱 가슴 아프고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누구보다 뛰어난 지적능력을 가졌던 앨리스에게 그런 알츠하이머는 누구에게보다 더욱 큰 언제나 자신의 존재자체를 위협하는 고통이며 언제고 자신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공포가 아니었을까?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는 아름다운 이야기와 그들만의 행복한 추억 만들기로 치장하기 보다는 알츠하이머라는 적 앞에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며 조금씩 변해가는 사람들의 모습까지도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녀를 사랑했기에 그녀의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던 그녀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도,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통해 새로운 소통의 길을 열게 된 작은 딸에 대한 이야기도, 그리고 모든 것이 희미해가지만 그럼에도 존재하는 가족이라는 끈에 대해서도 말이다.


누구보다도 강한 신념으로 언제나 포르테와 포르티시모만으로 가득 채운 인생을 살던 앨리스에게 남은 단 하나의 기호 피아니시모. 그래서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는 피아니시모만이 남은 그녀의 인생에 마지막으로 남은 포르티시모를 선물한다.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분석적이어야 했던 그녀의 인생의 마지막에는 마음으로 나눌 감정과 감동, 그리고 사랑만을 남겨놓음으로서 말이다. 그녀의 머릿속 기억에는 피아니시모라는 아주 여린 흔적만이 남아있지만 그녀가 가족과 나눈 마지막 시간들은 머리가 아닌 마음에 남은 그 무엇도 지울 수 없는 포르티시모라는 기호로 기록 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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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 - 제2회 중앙 장편문학상 수상작
오수완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품절


책들을 만나다 보면, 때로는 책의 선택에 있어 한 줄 도 채 되지 않는 책의 제목이 엄청난 영향을 미칠 때가 있다. 아주 강렬하게, 그리고 아주 매혹적으로, 그 책의 내용을 함의적으로 담고 있는 제목들, 혹은 마치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아름다운 누군가를 보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이 끌리게 만드는 제목들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이 책도 바로 그런 책 들 중 하나였다.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라니... 책 좀 읽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뭐랄까.. '당신이 책 좀 읽는다면, 나도 읽어야지!'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지 않는가? 뭔가 장난스럽고 위트있게, 하지만 호기심 당기게..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 많은 명사들의 장황한 추천서나, 광고의 화려함보다도 묘한 끌림을 풍기는 한 줄의 제목으로 시선을 끄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라는 제목을 맨 처음 접했을 때 내가 느낀 느낌은 딱 두가지 였다. '도전정신을 불태우게 하는 구나..'와 <은하계를 여행하는 히치 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잘 알려진 또 한권의 책을 연상하게 했던 것.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를 보고 도전 정신을 불태우게 된 것은 앞서 언급한 '나도 책 좀 읽는다고!'라는 생각에서였고, <은하계를 여행하는 히치 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떠올린 것은 OO를 위한 안내서라는 식의 제목의 유사성에서 기인한 것이었으리라.. 그리고 이 두 가지 느낌을 책을 본격적으로 읽으면서 조금씩 변해가거나 혹은 더욱 강해졌다.

먼저,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는 생각보다 난해하다. 단지 책 제목만을 보고 골라들었던 나에게도, 책의 어느 구석에 적혀있던 추천서를 읽고 난 후에는 더더욱 당황스럽게 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제목이 비슷했던 <은하계를 여행하는 히치 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처럼 다소 생경한 장르소설이었다.

차라리, 하루키나 에코처럼 이미 너무도 잘 알려진, 그리고 문학사적으로 큰 획을 그었던 대 작가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면, 이토록 당황스럽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문학의 깊이나 그 풍요로움에 대해 당대의 독자들과 평단의 칭송을 받는 대 작가들의 이름들, 이 이름들을 책을 읽기 전 추천사에서 접한 사람들이라면,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를 통해서도 이 작가들이 보여주었던 풍성하고 다이내믹한 스토리 뿐 아니라 그 이상의 깊이와 무게감까지도 기대하게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책은 오히려 조금은 색다른 소재를 씨앗으로 삼은 일종의 추리소설에 가까웠다. 문학의 깊이와 의미를 찾고자 했던 이들에게는 때문에 조금은 당황스러운 느낌을 주었다는 것. 나만의 느낌을 아닐 것 같다.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는 유일한 책. 책들이 사라지는 세상에서 모든 책의 의미를 포괄하고 있는 절대적인 의미의 책인 <세계의 책>을 찾기 위한 여정과 그 책을 찾기 위한 단계가 되는 다른 책들을 찾는 과정을 통해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는 모험과 추리등의 장르소설의 매력들을 갖추고 스토리를 이끌어간다. 때문에, 이 책을 단순히 장르소설 중 하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였던 독자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요소는 갖추고 있었다 할 수 있으리라.


중앙문학상수상작이라는 책의 타이틀, 그리고 하루키나 에코등, 누구나가 알만하고, 누군가는 존경하는 대작가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면,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는 색다른 소재와 꽤 다양한 그리고 풍성한 모험담, 다양한 에피소드들만으로도 장르소설로서의 매력을 더욱 빛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읽는 이의 관심과 기대가 이미 다른 곳을 향한 상태에서 이 이야기가 전해주는 기대이상 이하고 아닌, 기대에서 벗어난 스토리는, 당황스럽고 곤혹스럽다.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라는 책이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책을 읽기 전 여기저기에서 주웠던 책에 대한 잡담들이 만들어버린 나의 선입견이 이 책을 즐기지 못한 단 하나의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흐른 후 이 책에 대한 선입견이 사라지고, 그저 장르소설의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이 책을 다시 잡는다면, 혹시나 이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읽어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이래저래 책의 내용이 아닌, 다른 부분으로도 책의 흥미와 재미를 반감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버린 다소 씁쓸한 책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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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심장부에서>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라의 심장부에서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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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를 때에는 사람마다 몇가지의 기준이라는 것이 있다. 누군가는 친한 누군가가 좋다고 추천해서 책을 골라들고, 누군가는 어느 책 말미에 적혀 있던 누군가의 추천서가 기억에 남아 선택하기도 하며, 누군가는 책의 수상경력에 눈길을 주고 책을 집어들기도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평소 좋아하는 장르라서 선택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작가의 이름에 끌려 책을 선택하기도 한다. 저마다의 이유는 있겠지만, 그 기준이라는 것은 그 기준에 따라 책을 선택했을때 어느 정도의 재미와 감동을 보장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는데에는 큰 이견이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책, <나라의 심장부에서>를 골라든 사람들은 어떤 기준에서 책을 선택한 것일까? <나라의 심장부에서>를 직접 선택한 나는 이 글을 쓴 작가의 이름에 매혹되어 이 책을 선택했다. 존 쿳시. 그 이름만으로도 뭔가 블랙홀처럼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을 가진 작가의 이름이 아니던가.

내가 쿳시의 책을 접한 것은 사실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최근 접했던 그의 책은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라는 제목의 이야기로, 책의 디자인부터 구성까지 그 어느 하나도 평범한 것이 없었던 정말이지 특이하고도 특이한 책이었는데, 읽고 난 다음 느껴지는 소감이란 것이 ..."이게 뭐지?" 혹은 "응??" 정도로 압축될만큼 묘하고도 의문투성이인 이야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책을 통해 완벽한 하나의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쿳시라는 작가는 인간의 내면에 관심이 많은 작가'라는 결론이었다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는 독일의 어느 출판사에서 '강력한 의견들'이라는 제목의 원고를 청탁받은 노년의 한 작가가 그의 글을 타이핑해주는 아름다운 29의 필리핀 여인 안야와의 원고 작업기간 동안 벌어진 일들을 적어내려간 이야기이다. 또 안야 역시 노년기의 작가와 함께 타이핑일을 하며 겪었던 본인의 심경을 적어내려간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자면,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생각하는 서로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이야기들을 어지럽고 복잡하게, 그러나 다시 보면 일목요연하게 보이는 구성으로 적어내려간 이야기인 것이다.

<나라의 심장부에서> 역시 이런 면에서는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와 어느 정도 유사한 흐름을 가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남아프리카의 어느 시골마을에 살고 있는 마그다라는 여성, 그 여성이 끝없이 내뱉고 읇조리는, 끝이 없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이 책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고, 그 누구에게도 자신을 내보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마그다가 스스로를 확인하기 위해 끝없이 하는 사유와 이야기들, 때로는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의미가 넘쳐보이기도 하는 그 이야기들을 통해, 쿳시가 또 한번,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누군가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 스스로를 다 잡기 위한 개인의 노력을 보여주려 한 듯 하달까?

<나라의 심장부에서>를 따라 이야기를 구성하며 책을 정리하는 것은, 사실 쉽지 않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거의 포기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사람이 그런 것이 아닐까? 마치 마그다의 이야기들 처럼, 그 의미를 알 수 없고, 의미가 없기도 하며, 또 때로는 의미가 넘치기도 하는 말들을 끝없이 내뱉어서라도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몸부림 치는 것. 바로 그 전체가 모두 사람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사는 순간과 평생이 모두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듯이 순간순간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래서 때로는 누군가가 보이게 한 없이 멍청하고 바보스러운 일과 말까지도 하면서 사는 것이 인간의 삶이자, 인간이라는 존재라고 말이다. <나라의 심장부에서>는 바로 그 자체가 인간인, 인간의 존재를 마그다라는 불완전한 한 명의 여성으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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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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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사실 나에게 작가의 이름은 그다지 익숙한 이름이 아니었다. 단지, 2010년 노벨문학상 수상후보자의 이름,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나라 최초로 고은시인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실망으로 바꾸어 버린 수상자의 이름으로 처음 귀에 들려온 이름일 뿐이었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노벨 문학상 수상소식을 전해듣고, 나는 고은시인이 수상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살짝 밀쳐둔채 이런저런 인터넷 공간의 틈바구니에서 그의 작품에 대한 짧은 이야기와 작품 목록등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 중 그의 대표작으로 불리운다는 바로 이 책 염소의 축제에 대한 글들을 짧게나마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그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염소의 축제를 만나게 되었다. 노벨 문학상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무엇인가를 상징하는 상을 받은 작가의 대표작. 염소의 축제는 그 이름과 작가의 수상경력만으로도 뭔지 모를 위엄과 경건함을 함께 보여주는 듯 했다. 도대체 이 안에는 어떤 세계가 담겨 있는 것일까?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세상의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했던 것일까? 노벨 문학상이라는 거대한 상을 수상한 작가의 문학세계, 그 한 토막을 앞에 두고, 나는 기대와 두려움을 한꺼번에 품에 안은채 염소의 축제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의 첫장을 펼쳐들었다.



염소의 축제는 도미니카라는 우리에게는 아주 익숙치도, 그렇다고 너무 생소하지도 않은 나라의 독재정권치하의 격렬하고도 잔인했던 사회상과, 그 시대를 살았던, 혹은 그 시대를 살짝 비켜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야기이다. 우라니아라는 이름의 한 여성이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던 어린시절의 자신의 조국 도미니카의 과거와, 그녀가 경험하고 살아야 했던 시절의 도미니카,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도미니카에 대한 이야기. 누군가가 시작했고, 이룩했으며, 무너져내렸던 한 나라의 시대상을 우라니아, 그녀의 삶으로 보여주고, 그녀의 입으로 전하며, 여기에 그녀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이야기들을 더해 염소와 염소의 시대, 그리고 염소의 축제를 지나 염소에 대한 기억으로 남은 도미니카의 이야기를 전한다.

35년의 시간동안 조국을 떠나 단 한번도 아버지와 사촌들의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았던 우라니아, 독재정권 아래서 수령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던 아버지로 인해, 때로는 남들이 누리지 못한 것들을 누리고, 때로는 혜택을 받았을지 모를 그녀가, 어느날 조국을 떠나 35년이라는 길고도 긴 시간이 흘러 이제는 딸에게 말 한마디 자유롭게 전하지 못하는 아버지 앞에서 차가운 조롱과 독설을 끝없이 뱉어내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그 어떤 소식도 전하지 않은 채로, 마치 조국과 가족을 망각한 듯, 그리고 절대로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을 듯 차갑고 냉정했던 우라니아에게는 그녀의 조국 도미니카의 독재시절이 어떤 상처로 남아 있었던 것일까? 염소의 축제는 우라니아라는 상처입은 여성의 눈과 기억과 입을 통해, 당시를 살아내야 했던 도미니카 사람들의 치욕과 고통, 그리고 절대로 치유되지 않을 지 모르는 상처들을 마치 이제는 지워진 기억의 한 조각일 뿐인 것처럼 때로는 차갑고도 아프게, 때로는 고통스럽게 말하여 그 상처와 고통이 희미해졌을지언정 절대 사라지지 않는 흔적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라니아가 지금 병든 아버지 앞에서 뱉어내는 독설과 조롱 사이로 그녀가 알지 못했을지도 모를, 역사 속에 남은 또 다른 이야기들을 전한다. 독재자 트루히요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운 이들의 이야기와 오랜 시간 권좌에 앉아 스스로를 구원자처럼 여기며 자신이 조국 도미니카를 위해 헌신하며 투쟁한다 여기는 트루히요의 오만과 착각, 그리고 그런 착각 속에서만 가능했을 그의 만행들이 바로 그것이다.

32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권력의 최상층부에 앉아 모든 것들을 좌지우지하며 휘둘렀던 독재자. 권력만으로도 충분히 수 없이 많은 도미니카 국민들을 공포와 좌절속에 떨게 했음에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채, 수 없이 많은 여인들을 농락하고 유린하며 마치 그것마저도 자신의 특권이요. 당연한 권리인것처럼 행사했던 염소라 불리운 독재자 트루히요의 모습과, 그가 스스로 자신을 평가하며 내리는 결론들은, 최후에 독재자를 향해 겨누어진 그의 측근들과 국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당연한 것인지, 그리고 독재의 거대한 권력을 오랜 시간 누리는 자의 뻔뻔함이 얼마나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것인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듯도 하다.

또한, 그러한 독재자 아래 충성을 맹세하고 힘과 부를 얻기 위해 발 밑에 엎드린채 고개를 숙이는 수 없이 많은 자들의 비열함들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게 했던 우라니아의 그 끝을 알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증오의 이유 역시 밝혀지게 된다. 독재자 트루히요의 바람둥이 아들에게 혹여나 딸이 유혹당할까 두려워 그 근처에도 있지 말라했던 당대의 지식인 카브랄은, 독재자가 자신을 버리고, 자신이 가진 것들을 모두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토록 아꼈던 자신의 딸을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충성을 바쳤던 바로 그 독재자에게 마치 자신의 죄를 속해해달라는 구걸의 재물로 바친 것이다. 우라니아는 그녀의 아버지에 의해 독재자에게 처녀를 잃고 자신의 조국과 자신의 가족이 더 이상 자신을 지켜주지 못함은 물론, 그들로 인해 자신이 상처입고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조국과 가족을 떠난다.

염소의 축제처럼, 세상 그 어딘가에서 행해지는, 혹은 행해졌던 독재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야기들은, 사실 적지 않다. 그리고 너무도 슬픈 사실은, 이러한 독재정권 아래에서 고통속에 신음하던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라는 점일 것이다. 사실 이런 독재정권의 고통과 상처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접하게 될 때마다 우리 역시 이런 시대를 지나왔음을 매번 떠올리게 된다. 무엇하나 자유롭지 못했던 시대. 많은 사람들의 피와 고통으로 겨우겨우 검은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피로 물든 시대의 기억과 이야기들은, 언제나 잊고 싶지만, 그럼에도 절대 잊을 수 없는, 또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우리의 가장 어둡고도 깊은 상처이기도 하다. 염소의 축제가 그리고 있는 도미니카의 어두운 시절에 대한 기억은 우리가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바로 그 상처와 놀랍도록 닮은 모양과 깊이의 것이기도 했다.

염소의 축제는 한 나라가 품은 시대의 아픔을 국가라는 거대한 차원의 것으로 이해하고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대가 품었던 그 고통의 흔적들이, 그 시대가 지나간 뒤에도 남은 시간들을 살아가야 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국민들에게 또 다시 어떤 흔적과 상처를 남기는지를 우라니아의 기억과 처절했던 삶을 통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염소는, 악마와 번식력의 상징이라고 한다. 악마와 번식력, 어쩌면 서로 별개의 것이라고 느껴지는 이 두가지의 상징은 염소라는 하나의 매개를 통해 함께 퍼져나간다. 세상에 고통과 상처의 근원이 되는 악마적 본성은 그래서 염소의 번식력처럼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그 뿌리를 길고도 넓게 뻗어 어느 틈엔가 거대한 또 하나의 악마로 모습을 드러내곤 하니까 말이다. 트루히요가 뿌린 도미니카의 독재의 고통 역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트루히요라는 사람은 사라졌을지라도, 그가 남긴 독재의 공포와 잔해들은 여전히 시대를 뛰어넘어 많은 사람들에 고통과 상처의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우라니아처럼, 35년간 조국과 가족을 떠나있었음에도 완전히 씻어내지 못한 좌절과 증오를 통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될 지도 모른다.

완전무결한 역사를 지닌 국가는 없다. 그 어떤 나라라도 역사의 한 조각에는 분명 피로 물든 부분이 여전히 남아있으리라. 하지만 누군가의 절대적이고도 영원한 권력에의 욕심, 그것은 그 개인의 욕심이 아닌, 한 나라의 운명을 흔들고 고통으로 남게 하는 악마의 그것과 다를 것 없다는 사실을, 어쩌면, 지금도 어디선가 살아남아 있을 염소에게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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