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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의 간주곡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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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고통스러운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허기의 간주곡>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라는 식욕, 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느껴야 하는 상실과 좌절, 그리고 고통의 감각 허기. 그 허기를 노래하는 이야기라면,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처절한 고통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으리라. 그리고 그 고통을 통해 허기의 근원을 말하리라. 허기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허기의 처절함에 이야기하며 허기가 가져다 주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달음질을 말할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허기의 간주곡>은 그렇게 채 한줄도 되지 않는 제목만으로, 인간의 처절한 고통과 갈증, 그리고 절대 채워지지 않을 욕망에 대한 경고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첫 장을 펼쳐들기 전,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 이야기 속에 펼쳐질 허기에 대한 고통스러운 노래가 나에게 전염되지 않도록, 하지만, 그 고통과 괴로움을 느낄 수는 있도록, 그렇게 나를 단속해야했다.

<허기의 간주곡>은 이 책의 저자인 클레지오의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라고 한다. 그래서 <허기의 간주곡>은 그의 어머니가 겪었던 시대와 역사의 모순된 모습을 그리고있다. 그리고 그 안에 그 모든 역사의 시간을 온전히 겪어내고, 그 역사를 허기라는 처절한 고통으로 클레지오에게 보여준 한 여성의 모습을 간결하고도 단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시작에는 허기와 전혀 관련이 없었을지도 모를 에텔이라는 여성이 어떻게 삶을 통해 허기를 깨닫고 끝없는 허기를 느껴야 했는가를 보여준다.

부르주아 가정에서 별로 부족할 것 없이 성장하던 에텔, 그녀의 시작은 그녀가 평생을 꿈으로 그리며 살아갈 바로 그곳, 연보랏빛의 아름다운 집에서부터 시작한다. 남부러울 것 없는 부유한 가족, 그녀를 사랑하는 조부, 그녀의 삶은 그 시작에 있어서만큼은 균열없는 깨끗한 도자기 같았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녀에게 물려준 유산들을 빼앗은 그녀의 아버지와,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불화, 가식과 허영으로 삶을 채우고 끝내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음을 내딛는 그녀의 아버지로 인해 그녀의 삶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균열사이로 그녀는 사회의 부조리함과 기성세대의 가식과 타락을 향해 넌덜머리를 내게 된다.



연보라빛 집을 꿈꾸는 그녀의 허기는, 끝없는 고통에서부터 시작해 아름다운 행복을 쟁취한 것이 아닌, 처음부터 아름다운 행복을 소유한 기억을 가지고 있기에, 그 실체가 너무도 뚜렷한, 그래서 더욱 더 절실하고 처절한 허기가 되어가고, 여기에 그녀가 사랑했던 친구와 연인에 대한 절실함까지 더해져 그녀를 끝나지 않을 허기로 이끌어버린다.

에텔은 결국,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회적 사건과, 그녀 가정에 드리워진 수 없이 많은 균열의 틈새로 들어온 불행들로 인해, 따뜻하고도 아름다운 가정의 품에서 곱게 자란 고운 소녀에서 무언가를 향해 끝없이 돌진해야만 하는 여인으로 자라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인생이란 결코 끝나지 않는 허기에 시달리는 과정임을 온 몸으로 처절하게 체득해나가게 된다.

'나는 허기를 잘 알고 있다'

에텔의 허기는 이 책의 시작을 알리는 한 줄의 말로 이어진다. 그녀의 허기는 이제 그녀의 허기로 끝나지 않고, 클레지오에게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군트럭을 쫓아다니며 초콜릿을 얻어 먹고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허기,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면 흰 빵이 먼저 떠오르는 허기. 전쟁이 남긴 허기는 클레지오에게 인생전체를 통해 다시 온전히 겪어야 할 허기의 전초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를 통해 어린시절 느꼈던 허기와 또 다른 의미의 허기를 이어받았을 것이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이들은, 허기에 시달리고 있으리라, 그 이름과 원인은 다르더라도, 그들이 끝없이 달리고 꿈꾸는 이유는, 절대 채워지지 않을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허기는 분명, 고통스럽지만, 또 이런 생각을 해본다. 허기로 인해 우리가 살고 있다고, 그 고통을 피하고 욕망을 채우기 위해 우리가 분주히 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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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결탁>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바보들의 결탁 - 퓰리처상 수상작
존 케네디 툴 지음, 김선형 옮김 / 도마뱀출판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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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든, 혹은 드라마이든, 그것도 아니면, 영화나 전래동화의 주인공이든, 작가라는 창조자에 의해 만들어진 전해지거나 옮겨진 이야기들은 대게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공통점들이 존재한다.

세상은 넓고 할일도 많은 세상이다보니, 만들어지는 이야기도, 천차만별, 점차 다양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허구의 이야기를 전하거나 혹은 만들어내는 창조자들의 그들의 이야기에 누군가의 눈과 귀를 끌어다 앉히게 하기 위해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요소. 그것은 바로 공감이다. 사랑이든, 연민이든, 그것도 아님 동정이나 정의감이라도, 사람들의 눈과 귀에 무언가의 이야기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그 이야기에 동조하고 공감해야만 한다는 것은, 어쩌면 말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사실이리라.



그래서 일까? 작가들은 자신들의 이야기에 공감이라 불리울만한 감정의 동요를 이끌어내기 위해 주인공에게 여러 특성을 부여한다. 인간의 가장 선한 본성이라든지, 혹은 행위의 정당성이라든지, 혹은 그 누구도 비난하지 못할 불우한 환경이나 근거들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책을 읽고 드라마를 보는 동안, 그 주인공이 왜 그렇게 해야했는지, 혹은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하는지를 공감하고 이해하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수록 그 이야기는 성공적이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록 그 이야기는 설득력을 가진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렇다보니, 책이나 드라마의 주인공들에게는 비슷한 공통점들이 한가지쯤은 있다. '그럼에도 그는 선한 일면을 가진 사람이었네..'식의 여지말이다. 바로 그 본질적인 인간의 선한면을 바탕으로 이야기들은 그를 정당한 이유가 있는 악인, 혹은 어떤 상황에도 정의를 쫓는 선인으로 만들어낸다. 최소한, <바보들의 결탁>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바보들의 결탁>은 첫 장을 펼치고 한참 동안을, 바로 이 규칙,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선하다" 따위에는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이 책의 주인공인 이그네이셔스의 행동과 말들을 따라가다보면, 짜증스럽고, 때로는 분노하게 만드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기 까지 하다. 이전의 수 없이 많았던 이야기와 영화, 드라마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이 어이없는 캐릭터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하는 것일까?

이그네이셔스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을 얻지 않은채 홀 어머니에게 빌붙어 사는 백수 중의 백수이다. 꽤 오랜 시간 백수생활을 하고 있으니, 지금쯤이면 주눅이 들어 뭔가 소일거리라도 없나 이리저리 두리번 할 법도 한데, 이그네이셔스는 황당하게도 이 끝날줄 모르는 백수생활에 뭔가 거창하고 장엄한 이유를 가져다 붙이며, 그의 백수생활이 정당하고도 고결한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참 천연덕스럽게도 늘어놓는다. 도대체 뭐라고 쓰고 있는건지도 모를 낙서같은 기록들을 이리저리 끄적이며, 마치 노트들이 인류의 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을 전인류적 과제라도 되는 양 거들먹거리기까지 한다. 자신이 아닌 모든 사람들은 모두 하등한 존재가치를 지니며, 자신은 그들보다 고차원적인 사고를 하고 있기에 세상과 섞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논리. 이그네이셔스의 이 논리들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이노무 자슥, 한 대 확 쥐어박고 싶네'싶은 마음이 당연히 들 듯 하다.

<바보들의 결탁>은 바로 이 문제적 골치덩어리 이그네이셔스와 그의 어머니 라일라,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몇몇 사람들의 일상과 생각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물론, 가장 특이한 인물은 이그네이셔스이지만, 그를 둘러싼 인물들 모두 하나하나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니, 이 이야기가 500페이지가 넘어가는 장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는 듯 하다.

<바보들의 결탁>은 읽어내려가는 초반에는 분명, 굉장히 신경거슬리고, 짜증스럽게 하는 이그네이셔스의 행동과 말투들로 유쾌하지만은 않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가 실존하는 인물이라면, 뭔가 가르쳐야 할것도 같고 혼도 내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 될 수록 이그네이셔스의 이러한 자기방어 방식에 묘한 동정과 측은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녹녹치 않은 세상에 스스로 녹아들어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에 실패한 청년, 그리고, 그안에서 자괴감에 빠져 우울하고 침잠하기보다는 세상을 부정하는 것으로 자신을 보호해야하는 그의 신세가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바보들의 결탁>이 쓰여지던 과거와 지금의 세상사 모두 살아가기 빡빡한 것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기도 하다.

<바보들의 결탁>은 분명 즐겁고 행복한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삐딱하고 냉소적인 이그네이셔스의 말과 행동을 통해 과거와 다를바 없이 현재를 이어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그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수 없이 많은 이그네이셔스들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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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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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가려놓은 장막을 들추고 한 여자 아이가 서 있다. 순수함을 상징하는 흰색의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를 다소곳이 갈라내려놓은 아이. 장막의 바깥에는 밝은 빛이 내리쬐는 세상이요, 장막 안은 어두움이 스며들어 회색만이 남아있는 공간이다. 내리쬐는 태양은 장막의 안이 아닌 장막의 바깥만을 비추고, 그래서 빛을 받지 못한 장막안에는 그 어떤색도 물들지 못한다. 오로지 남은 색이라고는 검고, 흐린 회색과 들춘 장막의 사이로 들어온 한 줄기 빛을 받아 빛나는 여자 아이의 눈부시게 하얀 원피스 자락의 투명함 뿐이다. 빛을 받아 화려한, 총 천연색의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하는 아이는 어두움을 벗어나 이제 빛으로 나가야 하건만 그 전에 신을 먼저 찾아 신는다. 화려한 세상아래 깔린 거칠은 자갈밭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장막의 안에는 백발의 노인이 그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고, 장막의 바깥에는 그보다는 훨씬 젊은 남자가 그녀의 바로 앞에 다가와있다. 그녀는 노인보다는 젊은 남자에게 더욱 가까이 있지만 그녀는 장막의 바깥이 아니라 장막의 안에 있다. 그녀는 노인보다는 젊은 남자에게 더욱 가깝지만 노인의 공간에서는 맨발이어도 안전할 수 있고, 젊은 남자에게 가기 위해선 자신의 발을 보호해줄 신을 찾아 신어야 한다.

그 아이.. 은교는 알았던 것이다.
젊음으로 빛나는 화려한 색만을 인정하는 세상은 사실 그 빛깔처럼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젊음을 가진 남자보다는 젊음을 그리워하는 노인의 곁에서 자신이 더욱 자유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은교가 신을 완전히 신고 세상밖으로 나가지 못해 망설이고 있음은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다시 보니 그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젊은 남자는 그녀를 향해 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노인에게 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노인은 그녀의 뒷모습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젊은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젊은 남자도 그녀처럼 노인의 장막안에 들어서 화려한 색을 내느라 고분분투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회색빛으로 물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신을 벗고 노인의 곁에서 말이다. 노인도 그녀처럼 젊은 남자에게로 가고 싶었는지 모른다. 자신이 잃어버린 한때의 색을 나누어 가지고 뜨거운 태양빛을 받기 위해서 말이다. 두 남자는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저 그들 중간의 문턱에 우연히 서 있었을 뿐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아이.. 은교는 알았던 것이다.
그들이 바라보는 것이 자신이 아니었음을.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것이 자신이 아니었음을.
자신은 그저 우연히 그들 사이의 작은 틈바구니에 존재했던 것일 뿐임을..
그들과 함께 존재하길 원한다면 그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작은 틈을 파고 들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 아이.. 은교는 몰랐다.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그 작은 틈바구니에 그녀가 존재한 순간, 그 틈은 세 사람이 아무도 예측 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갈라져 벌어진 다는 것을.. 한번 갈라지기 시작한 그 날카로운 틈은 결코 다시 모아지지 않는 다는 것을.. 오로지 더 큰 간격으로 서로를 잔인하게 찢어버릴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두 사람의 세상 사이를 가로지르는 좁디좁은 문턱에 그녀가 위태로이 서 있을 수록, 그 두 사람의 갈망도 날카롭게 서로를 겨냥할 뿐이라는 바로 그 사실을 그녀는 미처 몰랐다.


<은교>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 한참동안, <은교>라는 이야기를 감싸고 있는 삽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은교>를 읽기 전에는 그저 삽화에 지나지 않았던 표지의 그림은,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은교>라는 제목의 이 이야기를 단 한창의 그림에 담아,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갈망들을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엇갈림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이야기의 제목은 <은교>였지만, <은교>는 은교가 아닌 두 남자의 이야기였다. 적어도 나에게는.. 내가 <은교>라는 책을 처음으로 열고 마지막으로 덮은 그 순간까지 책장의 글자들을 따라 읽어내려갔던 이야기에 은교는 없었다. 그저 서로를 한 없이 원했고, 서로를 끝없이 갈망했던 두 남자의 이야기가 있었을 뿐이었다. 은교는 그저 그들이 원했던 서로의 모습이 부딪혀 만들어낸 그들의 욕망이 뭉쳐진 단 하나의 존재이자, 서로에게 너무도 다른 의미의 바로 그들 자신이었을 뿐이었다.


평생을 시만 써오며 자신의 일가를 이루었던 시인 이적요. 그리고 그런 그를 통해 세상을 보고, 그런 그를 한없이 존경해 그를 닮고 싶었던, 작가가 되지 못한 작가 서지우가 등장하는 <은교>라는 이야기는 언뜻 보면 은교라는 이름의 한 여자아이를 사이에 둔 사제간의 질투와 분노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이야기 이전에 짙게 깔린 그 두 남자간의 신뢰와 동경, 그리고 사랑과 갈망에 대한 이야기가 솟아 오른 이야기였다. 단 한번의 사랑도 가슴에 남기지 못할만큼 철저하게 자신의 젊음을 유예시키며 살아온 노령의 시인 이적요가 처음으로 자신이 세상을 향해 쌓아올린 벽을 허물게 만든 제자 서지우에 대해 느끼는 질투와 분노는, 그가 서지우를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자신의 사람으로 인정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고, 시인의 재능과 그의 세상을 한없이 사랑해 그 세상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서지우의 무모한 도전과 오기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것만 같은 스승에 대한 서러움과 그만큼 그를 원했던 서지우의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을테니 말이다. 은교라는 이름을 가진 열일곱 여자 아이는, 그저 그들의 이중적이고 복잡한 감정의 실타래는 뭉쳐 얽히고 설킨채 방향을 잃고 하염없이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만드는 기폭제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었으리라.. 은교는 그래서 그들에게 은교자체가 아닌 다만 스승인 노시인과 스승의 세상에 속할수도 없고 그 그늘을 벗어날 수도 없는 멍청한 제자가 가진 서로를 향한 갈망의 결정체였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은교가 아니었더라도 상관없었을지 모른다. 단지 바로 그 자리에 은교가 있었을 뿐. 은교는 그들에게 은교가 아닌 그저 그들의 갈망이 부딪혀 만들어낸 날카로운 칼과 같은 틈의 시작이었을 뿐.


은교를 읽어내려가며 문득 노 시인의 은교를 향한 사랑에 나는 면죄부를 붙여주고 싶었다. 정말이지 누군가는 시인의 사랑을 변태적이라 할지도 모르지만, 시인의 사랑은 열살 소년의 그것이었다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어린시절 그가 어렴풋이 느끼는 것으로 끝내야 했던.. 그래서 열살 이후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떠올렸던 자신을 감싸준 D라는 이름의 누이를 향한 것이었다고 말이다. 열살의 소년의 사랑이 시간이 흘러 그가 청년이 되고 노인이 될때까지 그리움과 복사꽃 향기를 머금은 치즈처럼 숙성되고 굳어져 자극적인 향으로 남은 것이었다고. 그래서 비로소 은교를 만났을때 열살의 소년처럼 D라는 이름의 순결한 처녀를 향해 쏟아내어야 했던 사랑을 내보인 것일 뿐이라고...그래서 그 순결한 처녀를 더럽히고 자신의 순결한 처녀인 작품들을 더럽힌 단 하나의 존재가 자신의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했던 단 한명의 사람인 서지우임을 참아낼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를일이고 말이다.


가끔, 무엇인가를 향한 집요한 욕망이 그것을 갖지 못한 좌절과 그리움을 넘어 그것을 파괴하고자 하는 극단의 마음으로 발전하는 이야기들을 듣곤 한다. 때로는 드라마로, 때로는 영화로 말이다. 무엇인가를 절대적으로 원하는 마음. 그것을 사랑하기에 끝없이 원했던 그 갈망의 마음이, 그것을 얻지 못한 분노와 좌절로 이어졌을때, 인간이라는 나약한 존재는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것을 망치고 스스로를 상처내기도 하는 가 보다. 노 시인과 젊은 제자처럼 말이다. 자신에게 존재했던 유일무이한 순수를 망친 누구보다 사랑했던 제자, 그리고 그럼에도 자신을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은 무모함에 노 시인은 분노를 넘어 좌절과 배신을 느꼈을 것이다. 또한 그토록 원했던 시인의 세상에 발을 내딛기 위한 자신의 노력을 단 한순간도 살갑게 받아주지 않는 무정한 스승에 대한 원망과 그 스승의 퇴폐적이라 말할 수 있는 욕망앞에 그의 세상을 원했던 제자는 자신이 꿈꾸었던 세상을 빼앗긴듯한 좌절을 맛보았으리라. 자신을 따라붙는 제자에 대한 애정과 두려움.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스승에 대한 분노와 보호본능이 공존하며 뒤엉킨 두 사람의 감정은 그래서 단 한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는 너무도 복잡한 것이라 언제나 휘청이며 위태로웠다.

서로를 끝없이 이해하고자 했으나 결코 자신의 세상을 벗어나지 못했던 두 남자. 자신만은 그를 모두 안다 자만하고, 그는 절대 나를 알지 못한다는 오만함이 빚어낸 비극은, 그리하여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를 향해 비수를 꽂는 비극으로 치닫고야 말았다. 그토록 원했던 상대방을 얻지 못한채, 상대를 오해하고 자신을 배반하며 자신을 죽이고 서로를 죽이는 것으로 말이다.


작가는 <은교>의 키워드를 갈망이라고 했다. 무엇인가를 끝없이 원하는 바로 그 마음. 노 시인은 은교를 통해 자신이 지난날 유예시키고 돌아보지 않았던 순수의 감정과 서지우로 대표되는 인간의 마음을 갈망했다. 서지우는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했던 노 시인의 세상과 그의 시를 갈망했다. 은교는 그 두 사람 사이에서 자신에게는 없는 안정과 미래, 그리고 사랑과 평화로움을 갈망했다. 그들 모두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서로를 끝없이 갈망했지만 결국 그 갈망으로 인해 그 누구도 원한 것을 얻지 못하고 상처만을 끌어안은채 잔인한 목마름만을 남겨야 했다. 어쩌면, 그래서 갈망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무언가를 원하는 소망이나 희망, 그리고 욕망이 아닌 갈망 말이다.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처절하게 원하고, 다른 것은 돌아보지 못했기에, 그래서 그 주변의 다른 것들을 돌아보지 못해 그들 주위를 맴돌던 오해와 갈등을 미쳐 돌아보지 못한 아둔함을 불러올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미련함을 갈망이라는 단어 이외에 그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모든 것을 꿈꾸게 만들었으나 모든 것을 잃게 만들었던 <은교>라는 이름의 그들의 갈망을 덮으며 생각해본다. 그들의 갈망은 이제 몰스킨의 한줄 끈으로 남았으니 그들도 이제 그들을 파멸로 이끈 갈망에서 벗어나 그들이 진정 원했던 순수와 시를 향해 한마리 당나귀의 등을 나누어 타고 타박타박 걸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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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발견 - 사라져가는 모든 사물에 대한 미소
장현웅.장희엽 글.사진 / 나무수 / 2010년 1월
품절


사춘기 시절을 표현할때, 종종 낙엽만 굴러가도 웃던 시절이라는 표현을 쓸 때가 있다. 굴러가는 낙엽만 보아도 즐거웠던 사춘기 시절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굴러가는 낙엽에서 무엇을 발견했길래 그 시절에는 그 작고 사소한 모습만을 보고도 친구들과 함께 박장대소를 하며 웃을 수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그건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그 시절 굴러가는 낙엽에도 이름을 붙여주고, 이야기를 더해가며 의미를 만들어 주었던 바로 그 순수하거나 진지했던 작지만 소중했던 사소함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조금은 무덤덤해진 일상에서 작은 의미를 찾다.
<사소한 발견>은 바로 그 굴러가는 낙엽에서도 의미를 찾고 웃음을 찾았던 그래서 박장대소하며 웃었던 소녀시절의 풍부한 감성과 섬세함을 담은 이야기들이다. 아주 작은 일상의 구석구석에서 발견하는 의미들, 혹시 잊어버렸거나 찾으려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바로 그 이야기들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의 이야기는 지극히 사소하지만 공감이 되고,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더욱 솔직하고 꾸밈이 없다. 어쩌면 너무나 사소해서 꾸밀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를 일상의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 속에 담긴 당신만의 사연을 담는 법을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알려주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책상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탁상시계, 내가 매일 사용하고 있는 전화기, 그리고 누구나 책상서랍 한 쪽 구석에 하나씩은 쳐박아 두었을것만 같은 낡은 필름 한통, 사소한 발견은 그렇게 모두가 가지고 있고, 그래서 아무 의미도 없을지 모르는 것들에서 자신의 추억을 꺼내고, 일상을 발견하고, 사람들 간의 이야기들을 끄집어 낸다. 무심코 스쳐지나갔다면 아무것도 아닐 사소한것들, 그들에게 하나씩 이름을 붙이고 추억의 사연들을 매달아놓는 작업을 통해 사소한 발견이 기억의 발견이며, 일상의 창조이자, 자신의 인생을 말하는 모든 그림임을 보여주기에 사소한 발견 그 자체가 사소하지 않는 대단한 발견으로서 탈바꿈하는 이야기. 그리고 당신 역시 그렇게 일상에서 모든 것들의 의미를 발견해보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살며시 제안하는 책. 사소한 발견은 그래서 낡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사진한장처럼 흐리고 매력적이다


모든 것의 의미가 나의 의미가 될 것이다.
<사소한 발견>이라는 제목이 지어진 이 한권의 책은 사실, 한 사람의 작고 사소한 이야기를 관련한 사진과 함께 엮어낸 작은 사진집 겸 에세이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진 이야기들은 누군가의 개인적인 이야기이기도 하고 동시에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모든 것들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들을 발견하는 작가의 사소한 감성과 함께 내가 잊고 있었던 나의 기억을 짧은 토막이나마 떠올리게 하는 정말 사소한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누군가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나의 이야기를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사소한 발견>을 통해 나만의 사소한 발견들이 나만의 특별한 색을 입고 특별한 기억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이제라도 사소한 발견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겠다는 작은 다짐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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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니? 한때 나의 전부였던 사람
공병각 글.그림 / 북스(VOOXS)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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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시작할때, 사랑을 하고 있을 때, 그리고 사랑이 끝났을때.. 사랑을 담은 마음에는 사랑만큼이나 많은 말들이 넘쳐난다. 글을 쓰는 재주가 없어 책 한권에 장황한 연애사를 아름다운 소설 한권으로 만들어내지는 못하지만 순간순간 끝없이 생겨나는 그 짧은 말들. 가끔은 그 짧은 한마디의 말들이 어느 길고 긴 한권의 책보다도 마음에 오래 남는 것은, 아마도 그 말 안에 꾸밀필요 없는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수 많은 미니홈피에 담겨 있는 짧지만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바로 그 말 한마디 처럼 말이다



누구나 경험했던 그 순간의 한마디.
<잘 지내니? 한대, 나의 전부였던 사람>은 아름다운 동화나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소설이 아니다. 누군가가 어느 노트 한 귀퉁이에 끄적였을 법한 작은 메모들의 모음. 바로 그것이 <잘 지내니? 한대, 나의 전부였던 사람>이라는 한권의 책이 되어 만들어졌을 뿐이다. 한 페이지를 읽는데에 10초도 채 걸리지 않을 것 같은 몇 글자 되지 않는 말들.. 하지만 이 책에 담겨 있는 말들이 노트 한 귀퉁이에 버려지지 않고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누구나가 한번쯤은 끄적였을 법한 진실한 마음들이 그 안에 담겨있기 때문이리라. 화려한 치장도 섬세한 설명도 없지만, 마음에서 툭툭 떨어져 내린 것 같은 끄적임들 속에 어쩌면 당신도 어느 때인가의 나를 발견할지도 모르는 추억의 메모장. 그것이 바로 <잘 지내니? 한대, 나의 전부였던 사람>이다


일상과 사랑, 그리고 이별과 그리움
<잘 지내니? 한대, 나의 전부였던 사람>에 담겨있는 메모들은 많은 부분이 사랑에 관한 것들이다.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사랑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사랑의 끝에서 힘겨워하는 이들의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또, 일부분에는 일상에서 문득문득 들었던 짧은 단상들에 대한 끄적임들도 찾아볼 수 있다. 책으로는 쓸 수 없지만 너무나 진솔해 마음을 울리는 한줄의 메모부터, 일기처럼 나를 다독이기 위해 적어내려갔던 푸념들까지..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나만의 힘겨움이 아니라 누군가는 함께 경험하고 있는 보편적인 것들일 뿐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렇기에 나도 잘 이겨낼것이라는 응원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잘 지내니? 한대, 나의 전부였던 사람>의 의미가 아닐까?
짧은 한마디가 전해주는 메세지.
가끔은 옛 성인의 오랜 세월 사랑받아온 명언보다 친구가 전해주는 짧은 응원이 더욱 큰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아니 사실은 매번 그 짧은 한마디가 나를 일어서게 하고 힘을 내게 하고 다시 살아 숨쉬게 한다. 나와 같은 세상에서 나와 같은 호흡을 하는 친구의 한마디가 오랜 시간 나와는 다른 세상을 살았을것만 같은 멀고 먼 성현의 말보다 나를 더 울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잘 지내니? 한대, 나의 전부였던 사람>에서 찾아낼 수 있는 위로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당신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잘 지내니? 한대, 나의 전부였던 사람>안에서 나와 같이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찾아내어 그 행복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을 시작하려 하고 있는가? <잘 지내니? 한대, 나의 전부였던 사람>안에서 용기를 낼 수 있는 응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별에 힘겨워 하고 있는가? <잘 지내니? 한대, 나의 전부였던 사람>에서 그 이별을 이겨낸 이들의 짧은 위로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잘 지내니? 한대, 나의 전부였던 사람>가 전달하고자 하는 마지막 메모는 아마도 '너도 그러니? 나도 그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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