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
카스 R. 선스타인 지음, 이정인 옮김 / 프리뷰 / 2011년 10월
장바구니담기


생각해보면, 사람이 태어나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사회에 속하게 되는 그 순간부터 사람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또 다른 소속집단들을 만들어낸다. 제 아무리 아웃사이더 기질이 강하고 나홀로 주의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자신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이들과 의견을 나누고 사고하며 행동하곤 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속한 집단이란, 나와 비슷한 배경, 나와 비슷한 사고, 나와 비슷한 성향들을 가진 사람들이 뭉친 뭐랄까 나라는 존재의 일종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번 이렇게 형성된 소속집단은, 잘 깨어지거나 와해되지 않는다. 이미 비슷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끼리 우정이나 친밀감을 나누며 형성이 된터라 더욱 더 견고해지며 그 관계가 돈독해지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런 친밀감과 유대감의 형성은 개인으로 하여금 소속감과 더불어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장점이 있다. 누군가가 나를 지지한다는 든든함,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이미 많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장점이 있다면 단점도 반드시 존재하는 법, 이런 소속된 집단안에서는 장점만큼이나 영향이 크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단점 또한 존재한다. 바로 집단사고의 극단화라 이름지어진 이 책의 주요 테마처럼 말이다.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라는 다소 자극적이고도 어쩐지 가슴 한 구석이 찔리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하는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은 바로 그것이다. 집단사고의 극단화 말이다. 극단적인 사고나, 사고의 극단화라는 단어는 자칫 부정적이고, 예외적인 굉장히 특수화된 상황을 일컫는 말처럼 느껴진다. 때문에 사람들은 극단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나, 극단화된 사고의 결과가 가져오는 상상할 수 없는 극단적인 결과에 대해 나와는 동떨어진 세계의 이야기처럼 받아들이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라는 이 책 속에 적혀 있는 우리 속에는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라고 섣불리 단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책의 제목은 분명히 <그들은 왜 극단에 끌리는가>가 아니다.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이다. 그리고 이 안에는 지극히 평범한 사고를 가지고 생활하고 있는 나 역시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는 바로 이렇게 그들이 아닌 우리, 너가 아닌 나 자신이 자연스레 집단에 소속되고, 집단의 사고에 동화되며, 그 집단의 사고가 극단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현상에 대해 이야기 하는 책이다. 또한, 극단화된 집단의 사고가 세계의 역사에서 어떤 상식밖의 결과를 끌어내었는지에 대해 그 예를 들고 설명하면서 집단사고의 극단화에 대해 경고하고 있기도 하다.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인종학살을 자행했던 나치즘을 비롯, 현재까지 인류를 공포속에 몰아넣고 있는 극단적 테러리즘에 이르는 비 상식적 사고와 행동들이, 사실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들이 모인 집단의 사고 극단화 과정을 통해 초래되었음을 보여주는 이 책은, 그래서 몹시도 불편하면서도 몹시도 충격적일 수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인류 역사에 나타난 사고 극단화의 결과처럼 극단적이거나 혹은 비상식적이지는 않다 하더라도, 사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현재, 그리고 이 땅에서도 많은 집단 사고의 극단화 현상들을 경험하게 된다.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서로 당파를 가르고, 정책과 노선에서 양 극으로 치닫는 정계에서도, 또, 서로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못하고, 전도나 포교라는 미명하에 서로를 존중하지 못하는 분쟁을 통해서도 말이다.

집단의 사고가 극단으로 치닫는 모습은, 결국, 불화와 다툼으로 문제점들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도 집단과 집단은 서로 융화나 화해를 하기보다는 서로의 입장차만을 확인하고 불신의 골을 더욱 더 깊게 파가기도 한다. 결국, 집단화된 사고의 극단화는 한 집단이 주변과 융화되지 못하고 폐쇄된 채 교류와 소통을 차단했을때 그 집단이 비정상적이고 참혹한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지도 모르는 독으로 작용하게 됨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극단에 끌리는 것이 아니다. 극단에 끌린다기 보다는, 나와 비슷한 것들에 대한 안정감과 편안함이, 우리를 끌어당기고, 이렇게 모인 개인들이, 더 편안하고 안정화된 소속감을 추구하면서 집단은 점점 극단화되어가는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속한 집단이, 극단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때문에 어느 정도의 불편함과 불안정을 감수해야한다. 그리고 이 불편함과 불안정을 통해 비로소 나와 나의 집단은 균형을 되찾게 된다.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아마도, 안정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때문이라고 대답할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안정이 균형이라면, 극단의 추구는 이미 안정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는 바로 그 점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왕은 사랑한다 세트 - 전3권
김이령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11년 8월
구판절판


역사소설에는 특유의 분위기가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묵직하고 웅장한, 그리고 때로는 위압적인 분위기.. 이는 아마도 역사라는 시간의 무게가 주는 특별함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으리라. 우리가 살아온 우리의 역사는 학창시절에는 교과목의 하나로 대략적인 흐름을 접하고, 교과서를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되어서도 글로, 영화로, 때로는 드라마로 끝없이 그려진다. 그리고 이런 끝없는 반복들을 통해 사람들은 역사에서 많은 것들을 배우기도, 의미를 되새기기도 한다. 단지 시간이 과거일뿐, 한겹을 들춰보면 조금 더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조금 더 많은 것들을 이용하며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역사속의 시대상은 어떤 의미에서건, 우리에게 또 하나의 거울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까? 역사라는 이름을 별칭으로 달고 만들어지는 수 없이 많은 이야기와 영상들은 뭔가 조금 거대하고 부담스럽기도 했었다. 역사적인 의미라는 무거운 가치를 위해 사람들에게 조금 더 익숙하고 편안한 이야기들 보다는, 시대와 사회, 권력과 역사의 흐름등에 집중했으니 말이다

역사소설이라고 해서 꼭 무겁고 거대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일까? 역사소설들은, 그 가치를 알면서도 때로는 쉽게 손에 잡기에는 어쩐지 큰 맘을 먹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을 가지게 하곤 했다. 그리고 이런 의무감은 역사소설을 대하는 것을 조금 더 어렵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왕은 사랑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인상적인 소설이다.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중심으로 다른 이야기들을 양념으로 곁들이기 보다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늘 화두가 되는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를 가장 중심에 놓고, 역사적 배경들을 이야기의 흐름에 영향을 끼치는 또 다른 요소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역사소설 특유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당시의 시대에 대한 전체적인 분위기와 역사적 사건들을 다룸에 있어 소홀함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고 할까? 게다가, 이야기가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세 남녀의 사랑과 각자의 사연들이 모두 설득력있게 들렸음은 물론, 읽는 내내 즐거움까지 느낄 수 있었으니 따지고 보면, 두 마리 토끼가 아니라 세마리 토끼를 모두 잘 잡은 이야기라고 해야할 것 같다

한 여인을 사랑한 남자, 한 여인과 한 동무를 사랑한 왕

<왕은 사랑한다>를 이끌고 있는 주인공은 세명이다. 몽고지배기의 고려의 세자였던, 그리고 훗날 충선왕이라 불리운 역사적 인물이 되었던 남자 원, 그리고 그를 가장 지척에서 지키고 보호하며, 끈끈하고도 진한 우정을 나누었던 린, 여기에, 두 남자에게 각각 남다른 감정을 불러왔던 여인 산. 이 세 사람이 만나 서로를 알아보고 친구라는 돈독한 우정을 나누며, 더 나아가 남다른 남녀의 감정을 깨닫게 되는 과정, 그리고 둘이 아닌 세명의 남녀였기에 빚어진 안타까움들이 이 책의 흐름을 이루고 있다.

왕이지만, 부마국이라는 국가의 한계에 부딪혀 절망과 좌절을 반복하며 힘을 잃어간 아버지의 뒤를 밟지 않기 위해 그 누구보다 강력하고 냉철한 이성을 키워가는 고려의 세자 원, 그의 옆에서 세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함께 하고, 생각도 의견도 모두 함께 나누는 친구이자 충신으로 부족함이 없었던 린은 두 사람 모두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지성을 갖춘 사람들이다. 둘 모두 아름다운 사람이었지만, 각자 다른 분위기만큼이나 조금은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보통의 여자들과는, 아니, 원과 린이 그동안 보아왔던 여자들과는 너무도 다른 여인이 나타난다. 남자만큼이나 저돌적이고 용기가 있는, 그리고 측은지심을 가지고 백성들의 구휼에 앞장서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산이 바로 그녀이다. 하지만, 두 남자와 두 여자의 이야기가 아닌,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미 정해진 것처럼 이 세 사람은 어느날 문득 서로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하게 된다. 산과 린이 먼저 서로를 바라보고, 원도 산을 바라보게 되지만, 원은 산과 린보다는 조금 뒤늦게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다

왕이기 이전에 한 남자였던 원

절대적 권력을 지닌 한 남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자신만이 제외되는 것 같은 소외감을 허락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산과 린을 막아선다. 자신이 가진 힘을 이용해서 말이다. 그것으로는 서로를 향하는 두 사람의 마음을 결코 막지 못하리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그가 두 사람을 모두 잃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그것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세사람의 관계가 애정과 질투라는 감정으로 변화하며 서로를 보는 시선들조차 달라지면서 세 사람의 이야기는 전처럼 따스하고 포근하게 흘러가지 못하게 된다. 질투에 빠진 남자에게 힘이 있기 때문이다.

<왕은 사랑한다>는 이렇게 원 지배기에 있었던 위태로운 국가의 운명보다는, 그 국가 아래에서도 힘을 가지고 있던 세자와, 그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한다. 최고의 지위에 있었기에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던 한 남자가, 가장 원했던 딱 하나, 사랑하는 여인을 가지지 못했기에 느꼈을 좌절감과 상실감. 그로 인한 결정과 선택들이 빚어낸 또 다른 이야기들을 통해, 권력자인 왕이 아니라, 사랑에 빠졌기에 처절하게 치졸하고 유치해질 수 밖에 없었던 한 남자의 모습들을 역사적인 배경과 그들의 지위를 통해 극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길고 길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은 이야기

<왕은 사랑한다>는 총 세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권이 대략 500여 페이지이니, 이 책의 분량은 1600여 페이지에 이른다. 분량으로만 따진다면, 사실, 굉장히 길고 긴 이야기라는 데 굳이 의의를 달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 이 책은 앞서 언급한대로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역사소설이다. 역사소설, 그리고 1600여 페이지의 분량만을 두고 본다면, 이 책은 분명 큰 맘을 먹고 첫장을 펼쳐 들어야 하는 책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길기는 하되 결코 지루하지 않다. 그 만큼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해야할 듯 하다.

게다가 원 간섭기의 위태로운 국가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 동안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충선왕이라는 우리 역사의 한 인물을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을 통해 배경과 함께 설명하고 있음은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당시의 분위기와 시대상들을 잘 표현해두어 자연스레 고려의 당시 모습들을 한번쯤 연상하게 만들었다는 점도, 이 책의 무척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 같다.

고려는 조선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시대가 아니다. 고구려를 본받고자 하였고, 때문에 북진의 의지를 불태웠으나, 주변국들의 끝없는 침입에 시달렸던 나라, 나라의 운명을 한동안은 원이라는 또 다른 나라에 넘겨야 했던 슬픈 역사를 지닌 나라이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던 고려에 대해 이 책을 통해 조금은 관심을 가지게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새 책에 대한 간단 코멘트

장점
역사소설이라는 장르에도 불구하고 결코 지루하거나 거창하지 않다.
고려라는 우리의 역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세 남녀의 이야기를 결코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충선왕에 대한 역사적 가치들을
인간적인 관점을 통해 살짝 엿볼 수 있는 매력적인 소설

단점
역사소설이라는 장르적 특징이 있는 소설이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펼쳐진다.
이야기의 주요 흐름이 세 남녀의 관계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자칫 이 역사적 사건들을
너무 간단하게 지나칠 위험도 있다.

흥미정도
책을 읽고 난 다음, 무척 재미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분량상 긴 소설임에는 분명하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096일 - 유괴, 감금, 노예생활 그리고 8년 만에 되찾은 자유
나타샤 캄푸쉬 지음, 박민숙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9월
절판


거리를 거닐며, 누군가를 기다리며, 우리는 영화나 책들을 통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또 다른 이야기들을 접하곤 한다. 살면서 이런저런 경험들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지만, 한명의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의 삶이란 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일.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를 통해, 책을 통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전해듣고, 공감하며, 그들의 삶에서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무엇이가를 찾아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은, 그것이 순수한 상상을 시작점으로 하는 창작물일때보다, 실제 일어난 일들을 말해주는 것일때 조금 더 진하고 강렬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일까? 최근에는 '실화'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문화 컨텐츠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누군가가 실제로 경험했던 이야기들, 하지만 나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이야기들, 때로는 내가 이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이 아님을 무한히 감사할 수 밖에 없는 사건들, 이렇게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들은 새로운 문화의 장르로 사람들 앞에 이야기를 전하고 이 이야기들의 앞는 이런 수식어가 붙곤 한다. '충격실화'....

3096일 역시 바로 이런 충격실화를 바탕으로 한 책이다. 그것도 다른 누군가가 제3자의 눈으로 보고 듣고 느껴서 정돈한 그런 글들이 아니라, 사건의 당사자가 직접 이야기를 전하는 책. 그래서 더욱 절제될 수 없는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때로는 격하게 때로는 아프게 전달되는 바로 그런 이야기이기도 하다. 3096일이라는 이 책의 제목처럼 3096일이라는 엄청난 시간동안 세상과 단절된채로 다름아닌 세상과 자신을 단절시킨 납치범과 함께해야했던 끔찍한 시간들의 기억들을 고스란히 담아놓은 이 책은, 그래서 읽는 내내 절대로 마음 편할 수 없고, 절대 즐거울 수 없는 책이기도 하다. 세상에 무수히 벌어지는 납치라는 범죄 중 하나, 그러나 그 많은 범죄 중에서도 결코 흔하지 않은 과정을 경험하고 인생의 많은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내며, 앞으로 남은 시간도 절대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은 상처로 얼룩진 3096일의 이야기는 그래서 8년이 넘는 시간이라는 단순한 표기보다 3096일이라는 표시가 더 잘 맞아 떨어지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시간은 단순히 8년이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없을테니까.. 3096일 동안, 그녀가 맞딱드려야 했던 더 많았던 고비와 고통을 표현하기엔, 1년이라는 뭉그뜨려진 단위보다는, 하루하루가 처절했던 길고 긴 시간의 3096일이 더 맞는 표현이 될 테니 말이다.


나타샤 캄푸쉬는 이미 이혼이라는 결코 좋지못한 과정을 경험한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그다지 행복하다고 기억되지 못할 유년을 보낸다. 아빠와 엄마가 함께 다정한 가정을 이루지 못하는 집에서 나타샤는 대인관계를 형성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끝없이 방황하며 엄마와도, 세상과도 섞이지 못한채 서성이는 아이였다. 사랑하는 엄마와 아빠에게서 남부럽지 않은 사랑을 받으며 유복하게 자란 아이가, 어느날 갑자기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전형적인 드라마의 스토리가 아니라, 이미 어린 시절부터 누군가는 당하고 있을지 모르는 유년의 상처를 안은채, 더 깊은 어둠속으로 끌어내려져버리는 아이가 되어버린 나타샤. 세상에 섞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어려워했던 아이는, 세상에 섞여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납치라는 범죄로 인해 완전히 세상과는 단절된 상태에 놓이게 되어버린다. 감금된 채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곤, 자신을 납치한 납치범이 전부인 어둠으로 가득한 곳. 그곳에서 그녀는 3096일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감시당하고 통제당한채로 길고 긴 시간들을 보내며 홀로 살아남는다.

세상에 섞이지 못했던 소녀가, 홀로 세상과 단절된채로 결벽증처럼 그녀를 통제하고 감시하며 함께ㅔ 한 비정상적인 납치범과 함께한 상상할 수 없는 삶 속에서 살아남은 이야기. 이 이야기는, 실화이지만, 말 그대로 세상에서 과연 일어날 수 있는 일일까 싶을만큼 비현실적이기도 한, 그래서 더욱 충격적인 충격실화라는 표현이 아마도 정확하지 않을까?

3096일이라는 길고 긴 시간동안, 세상을 그리고, 세상속에 들어가길 꿈꾸며 언제나 벽 뒤의 세상을 상상했던 이야기는, 나타샤가 탈출에 성공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말 그대로 일단락일뿐, 그녀는 세상에 갓 처음 나온 아이와도 같은 두려움으로 세상을 마주해야만 한다. 그녀는 분명 납치라는 범죄로 희생된 길고 긴 시간의 상처를 안은 피해자이지만, 그 상처로 인해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더욱 힘든 존재가 되었고, 세상은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는 보지만, 사랑스럽고 온화한 눈동자만으로는 감싸주지 않는다. 그녀는 여전히 고통스러울것이고, 남은 시간을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평생 그 고통을 떠안은채로 그녀 삶의 전체가 상처로 남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어느 정도는 세상에 발을 내딛은 것 같다. 상처를 전하고, 상처를 타인에게 보여줄만큼, 담대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담대함 속에 이 책 3096일이 탄생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최소한 그녀는 이제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통해, 누군가가 자신처럼 상처받고 고통으로 가득한 삶에 처하게 놓이도록 가만히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그런 그녀의 목소리를 3096일을 통해 듣고 기억할지도 모른다. 나타샤 캄푸쉬가 자신의 고통을 이토록 고통스럽게 떠오릴며 이 이야기를 책으로 남긴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가 그 고통을 알아주기를, 그리고 그 고통으로 가득한 삶이 또 생기는 것을 막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좋은 시나리오의 법칙 - 좋은 영화, 그저 그런 영화, 나쁜 영화에서 배우는
톰 스템플 지음, 김병철.이우석 옮김 / 시공아트 / 2011년 8월
절판


나는 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매주 한편 이상의 영화를 보는 편이고, 장르구분없이 호기심 가는대로 꾸준히 영화를 보는 편이기도 하다.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참 다양하지만, 생각해보면, 나에게 있어 영화는 책과 거의 비슷한 의미인것 같다. 단지 책은 종이 위의 텍스트들을 통해 그 이야기들을 전하지만, 영화는 영상과 대사들을 통해 이야기들을 전한다는 차이가 있달까?

덕분에 영화는 책보다 수월하게, 또 짧은 시간안에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역할을 하고, 관객으로서 스크린 앞에 앉은 나는, 책보다는 조금 덜 공을 들여 내가 살지 못한 인생들과 내가 알지 못한 이야기들을 전달받는다.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아마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 그리고 내가 살아가지 못한 세상의 이야기들을 내 눈 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 마냥 보여주고 간접적이나마 그 공간을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 말이다.

거의 매주 한 두편의 영화를 즐겨보면서, 가끔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들에 놀라기도 하고, 가끔은 내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잊고 있었던, 혹은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래서 사실은 모르고 있었던 이야기들에 당황하거나 의미를 되새기기도 하는 과정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모두가 사랑하는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영화라는 매체라고 해도, 언제나 극장 안에 앉아 스크린을 보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영화라는 건, 행복하고 감동스러울 수 있기도 하지만, 재미없고 따분하며, 지루할 수도 있는 것이니 말이다.

물론, 영화의 장르에 따라, 굳이 영화가 전달하는 이야기가 깊고 진중한 의미를 담아야 할 필요가 없을 때도 있다. 가끔은 즐겁게 한번 웃고 싶어서 극장을 찾아가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지루하고 따분하고, 재미없는 것도 봐주어야 하는 것일까? 지루하고 따분하게 두시간여의 시간을 극장안에서 보내기 위해 극장을 찾는 관객은 없을텐데 말이다.

같은 종류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분명 영화들은 차이를 보이는 때가 있다. 비슷한 소재, 비슷한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들 중에서도 한 영화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선물하는 반면, 다른 영화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경우들도 있으니 말이다. 극장에서 영화를 자주 보는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때로 이런 영화들을 맞딱드릴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같은 이야기라도 꼭 저렇게 재미없게 해야하나?' 혹은 '같은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는 왜 괜히 더 재미있고 신나지?' 바로 이런 생각들 말이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저게 흔히들 말하는 구성의 힘. 바로 시나리오의 힘은 아닐까?'

영화를 만드는 가장 구체적이고도 기초가 되는 골격, 화면에 영상을 입히기 전, 영화의 매 장면과 구성을 다듬고 보여주는 작업. 시나리오는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캔버스에 데생이라는 작업을 치밀하고 섬세하게 하듯, 그리고 그 데생이 견고하고 잘 갖추어져 있을수록 완성된 그림이 조금 더 균형잡히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완성이 되듯 시나리오 역시 영화에서는 바로 그 데생의 역할을 하는 요소라고 할까? <좋은 시나리오의 법칙>은 바로 이렇게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골격구조의 역할을 하는 시나리오에 대해 설명하는 책이다. 좋은 시나리오가 영화를 얼마나 풍성하게 만드는지, 또, 시나리오의 구조가 탄탄할 수록 얼마나 좋은 이야기가 얼마나 즐겁게 흘러나올 수 있는지를 40여편의 영화를 통해 실제 예를 들어 비교 설명하면서 좋은 시나리오가 어떤 것인지를 친절하게 설명하는 책 말이다.

<좋은 시나리오의 법칙> 속에서는 실제로 우리가 친숙하게 들을 수 있는 명작들의 이름이 꽤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비록 영화관에서 흥행을 일으켰지만, 시나리오 구성면에서는 다소 부족하다 싶은 영화들이 왜 아쉬운지에 대해서도 요목조목 설명하며 좋은 시나리오를 통해 세상에 태어난 영화와 그렇지 못한 영화의 차이를 보여주는데 집중하고 있다. 영화의 이야기뿐 아니라, 영화를 구성하는 화면과 음악에 이르기까지 한편이 영화를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구성요소들이 모두 시나리오의 한 성분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시나리오가 단순히 영화의 이야기를 이끄는 흐름 뿐 아니라 영화 전체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임도 알려준다.

<좋은 시나리오의 법칙>은 사실, 읽기에 아주 수월한 책은 아니다. 나름대로 영화를 꽤 보았다고 자부하는 나에게도 다소 생소하거나 아직 보지 못한 영화들이 예로 들어있고, 사실 이 영화들을 직접 보지 못했다면 <좋은 시나리오의 법칙>이 설명하는 시나리오의 좋은 점과 나쁜점들을 이해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시나리오의 법칙>이 언급하고 있는 많은 영화들 중 자신이 직접 본 영화들이 있다면, 그 영화를 상기하며 이 책을 읽었을때 그 영화를 이해하고 시나리오의 좋은 점과 나쁜점을 이해하기에는 무척이나 도움이 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가지 팁이라면, 기왕 <좋은 시나리오의 법칙>을 통해 좋은 시나리오에 대해서 잘 알아보기를 원한다면, 이 책이 설명하고 있는 많은 영화들을, 책을 읽어보기 전에 미리 보고, 영화를 본 다음, 해당 영화의 챕터를 읽어본다면 더욱 더 이해가 쉽고 빠를 것이라는 점을 들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존 러스킨의 드로잉
존 러스킨 지음, 전용희 옮김 / 오브제 / 2011년 8월
장바구니담기


미술을 전공하거나, 미술학원에서 직접 연필이나 붓을 잡아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미술이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들 중 하나일 때가 많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면 되는 것이라고 말들하지만, 그 안에서 논해지는 전문적인 이야기나, 평단의 평가는 물론, 시시때때로 들려오는 고가의 미술품에 대한 단편적인 뉴스들은, 미술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특수한 집단의 특권이나 또 다른 방식의 금전적 가치를 지닌 재산증식 방식으로만 느껴진달까? 그래서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이들에게, 혹은 미술에 대한 전반적이거나 혹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미술이란, 궁금은 하지만, 감히 범접하기에는 다소 어색한, 그런 존재가 되어있는것이다.

생각해보면, 살짝 억울할 수도 있는 일인것 같다. 어린시절, 학교에서 크레파스나 연필자루를 손에 뒤고, 그림한번 끄적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유명화가의 기법과, 미술평론에 대한 지식은 없을지라도, 누구나 한번쯤 그림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그림을 통해 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무언가 전문적인 기술과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면 그림에 대해서는 논하거나 공감할 자격이 없다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는 지금의 모습들이 말이다.

존 러스킨의 드로잉은, 그래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책이다. 화려한 색채와 뛰어난 기법들을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연필 한자루를 가지고 사물을 표현해내는 드로잉. 때로는 단순하게, 때로는 정밀하게, 때로는 보이는 것 이상의 것들을, 때로는 보이는 것 그대로의 모습들을 표현해내는 드로잉이라면, 나처럼 미술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고, 미술에 대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림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림이란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인지를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존 러스킨의 드로잉은 내가 상상하던 드로잉 교본과는 조금 다른 책이었다. 단순히 따라하면 다 되는 드로잉 교재가 아니라, 드로잉에 여러가지 기법와 함께 드로잉이라는 장르의 그림들을 대할때 가져야하는 매 순간의 마음가짐과 존 러스킨 자신이 드로잉을 통해 느꼈던 그림 이상의 것들에 대해 기록해놓은 그만의 그림철학이 담긴 한권의 강의노트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달까? 때문에 이 책은 단순히 눈으로 보고 따라하는 것이 아닌, 그림을 대하는 태도와 준비에 필요한 모든 과정들에 대한 총체적인 이야기를 드로잉이라는 장르를 통해 전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드로잉을 어떻게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드로잉이라는 미술의 한 부분을 통해 미술을 전체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그림철학을 드로잉을 통해 보여준다고 할까? 때문에 이 책을 읽고 나면, 드로잉이란 미술의 한가지 기법을 배웠다기보단, 그림이 왜 아름다운지 그 자치를 살짝 엿본 느낌으르 가지게 된다.

존 러스킨의 드로잉은, 그 안에 존 러슽킨의 목소리를 아주 생생하게 담고 있다. 단호하게, 그리고, 무척 섬세하게, 그림을 시작하는 사람들, 혹은 그림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림은 그리는 기술이 아니라 느끼고 공감하는 감성이라는 것을 전달한다. 그리고 때문에 그림에는 그리는 사람이 사물을 보는 눈과 마음이 그대로 담기게 되고, 그림을 보는 사람은 단지 장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안에 담긴 시선을 공감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살짝 들려준다. 그래서 존 러스킨의 드로잉은, 드로잉이라는 장르를 통해 그림에 접근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꼭 한번은 들어야 할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그림에 담고 싶은 것들에 다가가는 작가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들을, 그리고 그림을 보는 눈을 가지고자하는 이들에게는 그림을 볼 때 진정 그 그림의 가치를 느끼기 위해 가져야 할 자세를 들려주는 존 러스킨 선생님의 친절하고도 매우 자세한 강의가 될 것이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