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
최윤필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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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나 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휴일에, 나는 주말을 틈타 집에 들렀었다. 어린시절부터 딸들과 아들과 함께 어딘가를 여행하기를 좋아하셨던 아버는, 그날 오랜만에 집에 온 나를 그냥 보내시기 싫으셨던지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 전 어딘가로 드라이브를 가자고 하셨다. 원래부터 우리집에서 늘 이루어졌던 큰 딸과 아버지의 드라이브는 이렇게 무계획적이었다. 그냥 갑자기 어딘가를 가고 싶으면 "큰딸! 우리 내일 어디 놀러갈까?"로 계획을 삼으셨고, 그러면 나는 이곳저곳을 떠올리며 내일 아빠와 함께 놀러갈 어딘가를 기다리곤 했다. 그날의 그 드라이브도 대충 그런 식으로 준비되었던, 늘 있어왔던 무계획이 계획인 여행이었다. 한동안 집에 들르지 않아 그리웠던 딸과, 한동안 집에 가지 못해 그리웠던 아버지의 충동적 드라이브 말이다.

그날 어디에 갔었는지 목적지는 기억이 정확하게 나지 않지만, 그 때의 그 여행이 오랫동안 내 머리에 남아있는 이유는 그날 아버지가 하신 차 안에서의 짧은 한 마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원하게 뻥뻥 뚫린 고속도로를 마다하고 굽이굽이 한치앞도 시원하게 달릴 수 없는 국도를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그날도 어느 시골의 논과 밭, 그리고 언덕배기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국도를 선택하셨더랬다. 그리고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절대 고속도로에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그 풍경을 잔뜩 누리고 계셨다. 그리고 나에게 한마디를 전하셨다.

"꼭 다른 사람들이 가는 길이 아니라도, 길 밖에도 길은 있단다."라고...

<어느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는 한동안 내가 잊고 지냈던 아버지의 그 한마디를 떠오르게 하는 책이었다. 시원하게 뻗은 길을 빠른 속도로 달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기만을 위해 달려야 하는 그런 길이 아니라 굽이굽이 굽어져 있어 속도를 낼 수도 없고, 드넓은 공간으로 자유를 주지도 못하지만 그래서 더욱 천천히 갈 수 밖에 없어 또 다른 가치를 찾을 수 있었던 그 국도변 어느 곳에서 길 밖에도 길은 있다는 것을, 그 길 밖의 길이 아니라면 절대 누릴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길 안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길밖의 삶도 삶이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던 그날의 아버지의 짧은 한마디를 들을 수 있었던 그 여행길의 의미를 말이다.

<어느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는 그래서 나에게 어딘지 모르게 특별함을 가지게 하는 책이기도 했다. 길 밖의 삶. 책에서는 바깥이라 말하고 있는 그 곳에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는 것만으로 언젠가 아버지와 나누었던 그 짧은 대화를 떠올리게 했고, 그 말 한마디를 자꾸만 곱씹고 되새김질했던 그 순간의 특별함을 다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책이었다고 하면 조금 더 정확한 설명이 될까? 아버지가 스치듯 말씀하셨던 그 길밖에 존재하는 또 다른 길의 의미를 이 책 <어느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를 통해서 조금 더 자세히, 그리고 조금 더 아름답게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 그 기대가 나를 설레이게 하는 그런 책이기도 했다.


<어느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에는 스물여섯가지의 각자 다른 바깥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때로는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때로는 동물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때로는 사물의 이야기이기도 한 바깥의 삶은, 말 그대로 남들이 모두 원하는 안락한 "안쪽"의 삶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잊어버리기 쉽고, 돌아보지 않는 그런 외로운 삶이기도 하다. 모두가 바라는 삶의 바깥에 있는 것들. 그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어느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에서는 그곳의 삶도 아름다움을 담고 있음을, 그곳의 삶도 가치있음을, 그리고 그 바깥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도 결국은 "안쪽"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 모든 존재들처럼 행복을 갈망하고 행복을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그들을 아웃사이더라 말하고, 누군가는 그들을 사회부적응자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생의 의미를 모두 소진하고 이제는 지긋히 나이를 먹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회의 잉여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어느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안에 담겨 있는 누군가의, 그리고 무엇인가의 삶들은 그렇게 언뜻보면 초라하고 낡았으며 힘없이 내려앉은 허름한 초가집 같은 모습이었다. 모두가 높고 높은 고층건물을 갈망하는 세상에서 세상의 기준점 바깥에 존재하는 낡고 허름한 초가집. 그 초가집 안을 들여다 보는 일을 <어느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가 하고 있는 것이다.

꿈을 쫓았으나 꿈을 쫓는 힘겨움에 지쳐 잠시 현실을 마주하기로 한 중견배우 택배기사도, 타인의 미래를 들여다보아주며 그들이 자신들에게 매이지 않기를 바라는 나이든 무속인도, 언제나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료 옆에서 그 빛에 가려 그늘만 차지하고 있는 수영선수도, 경주마로서의 생을 마치고 이제는 느긋히 자신의 이름을 이어받을 자손들을 만들어내는데에만 신경쓰면 되는 경주마도, 그리고 절판되어 폐지가 되어버린 한 권의 책도, 그렇게 평범한 시선을 빌려보자면 낡고 허름한 초가집처럼 볼 것 없고 그릴 것 없는 세상밖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주변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누군가의 주목을 받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주인공이 되어야만 행복한 것이 사람의 삶이고 누군가의, 혹은 무엇인가의 가치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른 것은 돌아보지 못한째 목적지만을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고속도로위의 여행과, 굽이진 길을 가느라 속도 한번 제대로 내지 못하지만 길가에 핀 작은 들꽃, 계절을 알리는 푸르름까지 모두 놓치지 않고 돌아볼 수 있는 한적한 국도위의 여행 중 반드시 고속도로 위의 여행이 좋은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인생의 행복과 무엇인가의 가치는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측정되는 것은 아닐것이다. 길 위에 있지 않더라도 또 다른 길을 찾아 행복으로 향하는 방법은 과정이 정해진 수학공식은 아니니까 말이다. 고층 빌딩위의 사장님보다 초가집 안의 단란한 가족이 더 행복하지 못하다 할 수 없는 것처럼, "안쪽"의 삶이 바깥의 삶보다 무작정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리라.

<어느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를 통해 만나는 스물 여섯의 바깥의 이야기들은 인생을 바라보는 당신의 시야에 대한, 아니 행복을 꿈꾸는 당신의 꿈에 대한 바로 그 질문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비록 바깥에 있어 춥고 배고플지라도, 바깥에도 행복과 가치가 있음을, 혹은 바깥이 아니면 누리지 못할 또 다른 행복도 있음을 <어느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을 통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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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보내는 편지
마야 안젤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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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단어는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이제 겨우 30년을 살았을 뿐이지만, 30년의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내가 인생이라는 단어에 대해 배운 것이라고는, 이 짧고도 명료한 두 글자의 단어는 절대 나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다는 것 뿐이니 말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을때,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껴질때, 그 순간을 이겨내기 위해 애를 쓰고 고민하며 가슴앓이를 할때, 그런 나를 조금은 일어서게 하고 힘을 내게 했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앞으로 살아가야할 인생의 남은 시간들에 또 다시 쉽지 않고 힘에 겨운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어디서 살아갈 힘을 다시 얻어야 하는 걸까? 나는 그동안 그 일들을 이겨내는 힘을 어디서 얻었을까? <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의 책을 읽으며 나는 그 힘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이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내가 가장 필요로 한 순간에 어김없이 나를 부축해준 그것이 담겨 있었다. 아무런 말없이 나의 뒤에서 나를 지켜준 누군가의 눈빛, 아무것도 없다며 주저 앉았을때 나를 지탱해준 따뜻한 흙처럼 보드랍고 든든했던, 그래서 혼자였더라도 절대 혼자가 아닐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바로 그 존재,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말이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 그리고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여성방송인 오프라 윈프리의 멘토라고 불리우는 여성지도자 마야 안젤루의 에세이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자녀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과 자녀들에게 남기고 싶은 인생을 먼저 살아낸 선배로서의 지혜들을 담아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는 슬하에 딸을 두지 않았다는 그녀. 아들 하나를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아이의 아버지로, 한 여자의 남편으로 잘 성장시킨 그녀가, 정작 그녀에게는 없다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어떤 이야기들을 담고자 했던 것일까? 왜 굳이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자신의 인생에 가까운 제목을 선택하지 않고, 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을 선택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딸로서 어머니에게 받았던 그 지혜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그 누군가의 딸이자 누군가의 어머니인 수 많은 여성들에게, 자신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한번 더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렇게 세상을 치열하게 살아왔던 한 여성에게, 그리고 누군가의 아내에게, 누군가의 어머니에게, 그녀들도 누군가의 무한한 사랑을 받을만한 대상이었던 사랑하는 딸이었음을 상기시켜준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던 소중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더욱 소중히 여기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그녀 역시 누군가의 딸이었음도 담고 있다. 인생의 커다란 거울이 되어준 외할머니와 그녀가 곧게 성장하도록, 당당히 세상앞에 나서도록 등 뒤에서 그녀를 지켜보아준 어머니의 딸. 마야 안젤루 자신도 그런 누군가의 딸이었음을 기억하며 자신의 인생을 담아낸 이야기이기도 한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그리고 그녀가 그녀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하다.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그녀의 삶 속에서 그녀가 이겨냈던 수 없이 많은 장애와 고통들. 그 순간들을 기억하며 지금껏 잘해왔다 말하는 그녀 자신을 위한 기도. 그리고 지금도 그녀처럼 어느 곳에서 힘겹게 사투를 벌이며 고통의 순간들과 대면하고 있을 수 많은 딸들을 위한 응원.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그녀가 있고, 그녀의 어머니가 있고, 그녀의 외할머니가 있으며, 수 많은 세상의 딸들과 세상의 여성들이 담겨 있기도 하다.

마야 안젤루는 분명 사회적 약자였을테다. 차별이 유독 심한 곳으로 알려진 아칸소출신의 흑인 여자아이. 공평한 것들보다는 공평하지 못한 것들이 더욱 많았던 그녀의 세상에서 그녀는 흑인이었고, 여성이었으며,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 시절을 지나 성장했고,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었으며 이제는 세상을 아우르는 사회 지도층 누군가의 멘토로 불리우는 삶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아주 작은 흑인 소녀를 그토록 위대하고 큰 사람으로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녀의 고난으로 가득찬 인생에서 그녀가 지금껏 똑바로 세상을 보고 살아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그녀가 누군가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던 소중한 딸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흑인이라도, 여자라도, 어린 아이라도.. 누구나 사랑받을 권리가 있으며 누구에겐가는 한 없이 소중한, 그래서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켜내야할 존재일 수 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바로 그런 소중한 존재임을 스스로 기억하며 살았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사랑으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 담고 싶었던 그녀의 진짜 인생이야기는, 어쩌면 바로 당신 역시 그렇게 세상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아낌없이 사랑받도록 만들어야 하는 그런 소중한 존재임을, 바로 그런 누군가의 딸임을 세상의 모든 딸들이 기억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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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지 - The Crazie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어느날, 어느 소도시의 야구장에 총을 들고 주민하나가 난입고 그 주민은 보안관 데이빗에 의해 사살된다. 이것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이상한 증상들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모든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이고,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기 시작한다. 모든 사람들이 살인자가 되어버린 곳. 사람들의 이상증세의 원인은 비행기 추락으로 인해 오염된 물의 바이러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주민들은 모두 점점 미쳐가고, 그 광기로 인해 무차별적인 살인을 저지르는 등 마을 전체가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진다. 정부는 이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의 원인이 자신들에게 있었음을 덮기 위해 마을사람들을 불태워 죽이고 마을까지도 소각한다는 계획을 세운체 마을에 군인들을 투입하고, 마을 안에 살아남아있던 단 4명이 생존자들은 군인들과 바이러스에 감염된 마을 사람들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크레이지>는 사실 여러모로 기존의 여러 영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바이러스로 인해 도시 하나가 광기에 뒤덮여 폐허로 남게 된다는 설정은 이미 28일후와 눈먼자들의 도시등의 영화들에서 보아왔던 설정, 그리고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의 모습은 수없이 많았던 좀비영화들의 그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레이지가 조금 특별한 이유는 그 이면에 인간들이 저지른 잘못과 그 잘못을 덮어버리고자 하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데에 있다. 바이러스 감염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정부임에도 마을과 마을의 사람들까지 모두 태어죽임으로서 그 문제를 덮어버리려는 정부의 음모와 그리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을 마치 정당하다는 듯이 생각하는 우리의 잘못된 생각등을 지적하는 차이를 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인간의 극악한 본성과 광기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먼저 개봉해 많은 사랑을 받았던 28일후나 눈먼자들의 도시와 비교해 본다면 더욱 재미있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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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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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단 두 글자일 뿐이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
그 안에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애절함, 감동과 상처를 모두 담아낼 수 있는, 세상 단 하나뿐인 은신처. 가족은 그렇게 누구에게나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단어이지만 그렇기에 한 없이 깊고 한없이 넓은 망망대대의 바다처럼 끝도 알 수 없고 깊이도 알 수 없는 무한의 존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쁜 일이 생겼을때에도, 슬픈일이 생겼을때에도, 즐겁고 유쾌할 때에도, 아프고 상처받았을때에도, 성공해서 잘 나갈때에도, 실패해 세상에서 소외당할때에도 늘 가족을 떠올린다.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들을 모두 내보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가족이기 때문에.. 나의 행복을 가장 기뻐해주고, 상처받고 아파하는 나를 가장 가엾어 해줄 존재도 바로 가족이기 때문에 말이다. 가족은 그렇게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든든한 보호막이자 은신처이며 끝없이 나에게 살아갈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곳이다. 세상이 끝나 피붙이 하나 없이 외로이 홀로 떨어져 죽어가는 존재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런 순간에도 가슴속에 남아 마지막까지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존재가 가족이다.

<고령화 가족>은 바로 그 절대적이다시피한 의미의 가족에 대한 새로운 질문들을 퍼붓는 이야기이다. <고령화 가족>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평균나이 49세의 이 평범하지 못한 가족들을 통해서 말이다. <고령화 가족>의 구성원들은 모두 사회에서는 패배자라 불리울만한 이들을 모아놓다시피했다. 나이 50이 넘어서도 아직 일흔넘은 어머니에게 빌붙어 살며 120kg의 거구를 겨우 놀리는 일정도도 하지 않는 한량, 게다가 이미 교도소를 제 집 드나들듯 했던 전과가 무려 5범이나 되는 형 한모와 한 때는 잘 나가는 영화감독을 꿈꾸었으나 단 한편의 영화로 이제는 영화판에서 축출되다시피하여 바람난 아내와 이혼하고 술로 하루하루를 살던 반폐인의 전직영화감독 오인모, 그리고 두번째 결혼에서 남편몰래 바람피우다 이혼당하고 어린 딸 민경과 함께 들어와 살게 된 여동생 미경. 여기에 일흔이 넘는 나이에 집 밖으로 나갔다가 인생의 실패자라는 낙오가 찍혀 돌아온 자식들을 다시 거두어 먹이게 된 어머니까지 총 5명으로 구성된 <고령화 가족>은 누가 보아도 콩가루 집안이요. 어딜 봐도 답 안나오는 답답한 집안인 것이다. 게다가 가족들끼리의 유대감도 제로, 서로 못잡아먹어 칼 부림 안나는게 다행인 형제에, 어린 시절부터 어디서 뭘 하는지 관심조차 가지지 않고 방치했던 여동생, 삼촌들 보기를 옆집 개보다 못하게 보는 조카까지.. 아무리 뜯어보아도 가족관계라고 하기엔 불협화음이 너무도 심하기만한 <고령화 가족>은 그래서 시작부터 콩가루 집안임을 천명하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인생의 실패자들로 다시 돌아온 자식들, 그리고 이제 노년기에 접어든지도 한참이 지나 황혼녁의 노을이나 보며 남은 인생을 편안하게 살아도 시간이 짧을 어머니는 그렇게 한 집에서 <고령화 가족>으로서의 한집 살림을 시작한다. 다들 제각각의 인생을 살아왔고, 그 인생에서 제각각 실패하여 돌아온 이들이 만들어낸 평균 나이 49세의 <고령화 가족>이 제대로 굴러가길 바라는 것은 당연히 무리. 그래서 이 이야기는 정서적 유대감이 상실된 가족이자 가족보다 못한 이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서로를 감싸주고 무한한 애정으로 보듬어주는 가족이 아니라 자신의 밥 한그듯을 빼앗아 먹고 내 인생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짐덩이로서만 존재하는 가족들. <고령화 가족>의 가족들은 어찌보면 가끔 우리가 뉴스를 통해 보듯, 혹은 푸념하듯 말하는 의미가 상실된 현대의 가족이 가지는 상실된 그 무엇에 대한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하지만 <고령화 가족>은 한 집에서 살아가는 동안 그들은 그들이 풀지 못한채 잊어버렸거나 잊어버렸다고 믿었던 자신들의 가족에 대해 부딪히게 된다. 각자 자신들의 삶을 살아갈때에는 애써 무시했거나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가족으로서의 문제에 대해 평균 나이 49세의 <고령화 가족>이 되어서야 비로소 문제를 직면해야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새삼스레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고 가족을 사랑하자는 다짐을 하기도 궁색하기 짝이 없는 나이의 콩가루 가족. 모두 자신의 삶을 잃어버리고 단지 엄마가 있는 집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갈 곳이 없어 돌아온 그 빌라의 좁디좁은 공간안에서 이미 아주 오래전에 되새기고 품었어야 할 가족이라는 단어를 맞딱드리게 된 것이다.

정서적 유대감만이 결핍된 가족이 아니었던 <고령화 가족>, 알고 보니 매일 자신을 무식하게 패대기만 했던 형은 이복형제였고, 두번째 결혼을 실패해 아이를 데리고 들어온 미연은 인모와 아버지가 다른 남매였다. 미연과 한모는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고, 동시에 가장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엄마와도 남일 뿐이다. 오로지 자신만이 정상적인 부부관계안에서 태어난 존재라는 것을 나이 오십이 되어서야 알게된 인모와 결국 모두 한다리 걸친 이음매로 위태롭게 이어져왔을 뿐인 <고령화 가족>, <고령화 가족>은 말 그대로 정서적 유대감과 동시에 물리적 유대감에도 결함투성이인 극단적인 콩가루 집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가족의 혈연관계에 대한 비밀들이 수면위로 드러나면서 <고령화 가족>은 공중분해될 위기에 놓인다. 동시에 그 때까지의 가족이라는 이름뿐인 껍데기를 버리고 새로운 가족으로서 태어날 기회도 맞이한다. 가족의 가장 큰 골치거리인 오함마가 나서주는 덕에 말이다.

처음부터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던 <고령화 가족>은 그들만의 방법으로 위기를 넘기고 조금씩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간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어느날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사회에 나가 대박을 터트렸다는 비현실적인 성공스토리를 풀어놓지는 못하지만 그 역시도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조금씩 세상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무어라 이야기하든, 이제 그들에게는 위태롭기 짝이 없었던 <고령화 가족>이 아닌 딸을 구해준 삼촌과 삼촌과의 의리를 지킨 조카, 그리고 가족들을 위해 자신의 젊은 날을 써야했던 여동생과 평생을 자식들 밥해주느라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없었던 엄마가 있으니 말이다.

<고령화 가족>에는 분명 정상적이지 않은 가족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정서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하나가 아니었던 가족, 하지만 그럼에도 오랜 시간을 가족이라는 이름안에 묶여 있었으며, 평균나이 49세가 되어 실패한 인생이 되어서도 한 지붕 아래 살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이유, 가족말이다. <고령화 가족> 사랑이 넘치는 가족도 아니고, 언제나 즐거운 나의 집도 아니지만 더욱 가족이라는 단어를 되새기게 한다. 단지 희미한 끈처럼 이어져 있을 단 하나의 이름뿐이라도, 가족이기에 언제고 돌아갈 수 있음을, 그리고 그곳이기에 다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엄마의 밥을 먹을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이 잡은 물고기를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노인도, 그 물고기를 빼앗기 위해 몰려드는 상어도 될 수 없었던 인생의 낙오자, 그저 낚시바늘에 입이 꿰어 물 밖으로 끌려나오고,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다 끝내는 죽어가야 했던 물고기만이 자신의 모습이라 스스로 자괴하며 포기해야했던 단 한명의 실패한 인생도 가족안에서는 아들이요, 오빠요, 동생이요, 삼촌이 될 수 있는... 그래서 결국 그에게 다시 바다로 나가 낚시줄을 던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가족임을 <고령화 가족>은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족의 의미를 논하기에는 어쩌면 한 명의 사람은 너무도 부족하고 어리석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한명의 사람의 인생을 완성해주는 단 하나의 영양분이 바로 가족이라는 사실이다. 한때는 허울뿐이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던, 너덜너덜 찢어지고 거적대기마냥 나풀거렸던 힘없는 <고령화 가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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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맞추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 맞추다
김용택 지음,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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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어딘가에 있다던 학교에서 오랜 시간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온 사람. 자연을 동무삼아, 아이들을 친구삼아, 세상이 번잡스러움보다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구름같은 시간을 더욱 좋아할것만 같은 사람. 모두가 디지털과 더 빠르게 더 편리하게를 외치는 세상에서 홀로 아날로그식 삶을 즐기며 더 느리게 더 불편하게 사는 것이 진짜 삶이라고 가르쳐줄것만 같은 어린 시절 나의 초등학교 선생님 같은 모습을 가진 사람. 김용택시인의 모습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이런것들이 떠오르곤 했다.

시인이라는 거창한 타이들보다 아이들과 손을 잡고 오랜 시간 교단에 서서 아이들의 그 맑은 웃음을 그대로 배워버린 시골 어느 구석의 천상 선생님의 모습이 말이다. 김용택시인의 책 <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 맞추다>는, 그래서 그 제목부터가 너무도 김용택시인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 책에서 만큼은 그가 시인 김용택을 벗어버리고 섬진강 선생님 김용택으로 서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을 향해 사랑이 가득한 눈을 거둘지 모르고, 아이들이 살아가야할 세상이기에 더욱 좋은 세상이 되길 바라는 한명의 선생님으로서 말이다. <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 맞추다>안의 김용택은 책 표지의 그림처럼 붉은 정열과 뜨거운 마음을, 그리고 그것으로 지켜내야할 세상의 중심에 아이들을 두고 있는 천상 선생님이었다.

<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 맞추다>에는 많은 글들이 담겨 있다. 시인 김용택이라는 저자의 약력을 감안한다면 분명히 시일텐데.. 이 글들은 형식도 없고 일관된 이야기도 없고, 그저 김용택 자신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 맞추다>를 읽는 내내 이 책에 담겨진 이야기들이 소설인지, 수필인지, 시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김용택이라는 사람이 무심코 끄적인 메모들인지 단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머리와 마음에 담긴 짧막한 이야기들을 통해 시인 김용택을, 그리고 시인 김용택의 눈에 비친 세상을, 섬진강 선생님이 아이들을 보는 마음과 눈을, 그 경외에 찬 시선과 고마움을 느꼈을 뿐이다. <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 맞추다>는 그저 김용택이라는 사람의 수많은 마음에 담은 말을 적어내려간 일기장같았다.


<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 맞추다>에는 또 글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삽화들이 있다. 때로는 화려하게 때로는 역동적으로 그려져 있지만 그럼에도 어딘지 모르게 서정적인 감성을 담고 있는 느낌의 그림들, 화려한 색채와 잘 맞아 떨어지는 선들로 이루어진 디지털문화가 아닌 조금은 의도하지 않는 선이 생기고 조금은 불완전 한듯 하지만 그것마저도 아름다워 보이는 자연스러움을 담은 아름다운 삽화들 말이다. 글의 분위기를 너무도 잘 담아낸 이러한 삽화들과 함께 시인 김용택과 섬진강 선생님 김용택이 바라는 자연 그대로의 세상을 함께 감상하는 것도 <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 맞추다>의 마음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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