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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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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차페크. 작가의 이름은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
도롱뇽... 소재 역시 나와는 그다지 친하지 않은 것 같다.

꽤 묵직해보이는 볼륨감을 자랑하며, 소설이라는 장르를 담고 있다고 하기에는 다소 유치하고 깜찍하기까지한 표지를 옷으로 삼아 나타난 책. 책의 옆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여느 책들처럼 그저 하얀, 혹은 약간의 미색을 띄고 있는 종이들로만 구성된 책도 아닌 모양이다. 주황색, 노랑색, 녹색등의 형형색색의 색지들이 책장의 갈피들을 확연하게 구분하고 있다. 게다가 책 장을 살짝 떠들어보니, 이건 뭐 글자들이 빼곡하다 못해 넘칠만큼 꽉꽉 들어차 있다. 도대체 뭘까? 이 알 수 없는 책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특이하다 못해 당황스럽게 책을 구성한 것일까?

<도롱뇽과의 전쟁>을 굳이 문학의 장르로 구분지어야 한다면 아마도 이 책은 SF소설의 장르로 구분될 것이다. 분명 작가의 상상력과 창의력들이 한데 어울린 범인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독특한 소재를 재료삼아 그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깔린 배경을 살짝 살펴본다면 이 이야기는 그저 단순히 상상력에 기인한 작가의 재기넘치는 공상과학소설이라고만은 할 수 없게 된다. 당시의 세계가 놓인 현실과 상황들을 도롱뇽과의 전쟁이라는 독특한 재료를 써 비판하고 그려낸 너무도 정확하게 현실을 적용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작가 역시 이 책이 단순히 소설이 아닌 현실을 반영한 또 하나의 현실비판적 이야기로 읽혀가기를 바랬던 듯 하다. 책에 대해 너무도 분명히 이 책이 미래에 대한 추측이 아닌 지금 우리 앞에 존재하는 현실을 반영하는 이야기라고 밝혀두었으니 말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던 당시의 현실이 놓인 위기와 위험요소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도롱뇽이라는 다소 황당하기까지한 소재를 가지고 그가 말하고자 하는 현실이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도롱뇽과의 전쟁>을 읽기 위해서는 바로 이런 의문과 시대에 대한 고민이 분명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도롱뇽과의 전쟁> 안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발단은, 사람들이 도롱뇽의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내면서부터 시작된다. 사람처럼 언어를 사용하고 지능을 갖춘, 그러나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지는 않는 순응적인 도롱뇽의 재발견, 사람들은 그저 자신들의 입장에서 이들을 이용해 경제적인 가치를 창출할 수단으로도 도롱뇽을 관찰하고 이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된 도롱뇽 이용하기는, 시간이 흐를 수록 생활의 구석구석으로 침투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어느날, 이 도롱뇽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제 자신들이 살아야 할 곳이 필요하니 당신들이 살고 있는 육지를 희생시켜서라도 해안선을 높여야겠다는, 인간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이름 그대로의 <도롱뇽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인간으로부터 그 이용이 시작되었으나 주객이 전도되고만 상황, 그래서 인간들은 종국에는 자신들의 경제적 혹은 정치, 사회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 했던 도롱뇽들에 의해 전면적인 도전을 받게 되는 상황. 도롱뇽이라는 이야기의 소재를 제외하면 어쩐지 우리가 직면한 지금의 현실과, 현실에서 조금 떨어진, 그러나 멀지 않은 미래에 전개될 것으로 우려되는 상황들과 너무도 닮아있는 이야기를 <도롱뇽과의 전쟁>라는 제목으로 이 오래된 책이 하고 있는 것이다.


<도롱뇽과의 전쟁>은 확실히 상상력이 넘치고 그 창의력이 빛나는 소설이다. 하지만 그 소설 안에 담고자 했던 작가의 시대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눈은, 그 창의력과 상상력 이상의 빛을 발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꽤 오래 전에 씌여진 이 이야기가, 그 시대의 현실뿐 아니라, 지금의 현실까지도 정확하게 반영하며,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커다란 위기를 가져오는지를 경고한다는 점은, 카렐 차페크라는 조금은 생소한 이름의 이 작가가 가진 남다른 통찰력에 대해 감탄을 하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도롱뇽과의 전쟁>속에서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해 인간들을 향해 반란을 일으켰던 도롱뇽들은 멸종한다. 하지만, 이 책이 보여주고자 했던 인간들에 대한 경고의 말은, 이야기 속에서 멸종한 도롱뇽과 함께 끝을 맺은 것이 아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존재하는 위험이며, 여전히 우리에게 존재하는 인간의 이기심이기 때문이다. 현실에는 도롱뇽이 반란을 일으켜 인간에게 생존의 위협을 가하진 않겠지만, 인간이 여전히 모든 것들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도구만으로 생각하는 이상. 세상에는 언제고 도롱뇽의 위협이 다시 출현하게 될 지 모를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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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서 1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4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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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란 무엇일까?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글에서 글로, 때로는 노래와 영화, 연극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재창조되는 이야기. 그래서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무르고 있지만 언제나 변화하고 새로이 태어나며 움직이기도 한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읽고, 즐기면서 살아가지만.. 그리고 그런 사람들 속에 나 또한 포함되어 있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내내 우리와 함께 하는 이야기라는 존재에 대해, 진지한 의문과 고민을 해본 적이 있었을까? 다른 이들은 그런 적이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적어도 나에게는 이 이야기라는 존재에 대한 고민과 의문을 품었던 순간이 없었던 것 같다. 적어도, 이 책 <영웅의 서>를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영웅의 서>라는 이름을 가진 이 이야기는 분명, 판타지 소설의 장르에 속하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책의 첫장에서부터 일본 미스터리의 여왕이라는 홍보문구를 달고 있기까지 하다. 그래서 였을까? <영웅의 서>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저 <영웅의 서>라는 이 이야기가 단순히 킬링타임용으로 즐기며 시간을 때워줄 흔하고 가벼운 읽을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냥 평범한 장르소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기대하지 않은 상태에서 펼쳐들었던 <영웅의 서>의 첫 장. 하지만 <영웅의 서>가 담고 있는 이 이야기는 그저 즐거이 시간을 채워주는 장르소설의 그것 뿐은 아니었다. 분명, 장르소설의 구성과 흐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 장르소설의 매력들을 끌어안은 이야기라는 느낌. <영웅의 서>는 그렇게 내가 기대했던 모든 것과 함께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그 이상의 무언가를 전달하는 이야기였다

아직 어린 초등학교 소녀 유리코에게는 언제나 자랑스러운 오빠 히로키가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인기있는 오빠. 가족들과 동생에게는 물론, 어디에서나 자랑스러운 사람으로 여겨지는 오빠 히로키는 늘 의지가 되고 든든한 유리코의 단 하나뿐인 오빠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수업중인 유리코에게 선생님이 뭔가 불안한 이야기를 전하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집에 도착한 유리코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언제나 든든하고 자랑스러웠던 그녀의 오빠 히로키가 학교의 동급생들을 칼로 찌르고 사라졌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 뿐, 히로키에게 찔린 동급생 중 한명은 사망하고, 한명은 병원에 있은 채, 그들을 칼로 찌른 히로키는 행적을 감추고 사라져버렸다. 언제나 자랑스러웠던 오빠가 저질렀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사건. 하지만 분명, 이 사건의 범인은 그녀의 오빠라고 이야기한다. 유리코의 가족은 히로키가 저지른 사건과, 사라져버린 히로키로 인해 공황상태에 빠진다. 가족이었기에, 히로키가 왜 사건을 저질렀는지보다는 지금 그들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히로키가 걱정될 뿐이다. 가족은 히로키가 저지른 사건과 그의 부재로 인해 점차 무너져 내린다. 유리코 또한 학교에 나가지 못한채 오빠를 기다릴 뿐이다. 단 하나뿐인 오빠를 그리워하는 마음만으로..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지나가던 어느 날, 유리코는 우연히 여전히 오빠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오빠의 방으로 들어선다. 평소에는 엄마가 늘 눈물을 흘리던 곳. 어쩌면 작은 소녀인 유리코에게는 오빠의 부재를 더욱 확실하게 보여주는 공간일 뿐인 오빠의 방. 그 곳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말을 거는 한 권의 책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책을 시작으로, 유리코는 오빠를 찾기 위해 그동안의 자신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미지의 땅과 공간속으로의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영웅의 서>는, 어느 날 갑자기 동급생을 칼로 찌르고 사라져 버린 열네살의 소년의 사연에서부터 그 이야기를 풀어간다. 하지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사건을 저지른 히로키가 아닌, 그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그를 찾기 위해 결말을 알 수 없는 모험을 선택하는 아직 어린 유리코라는 이름의 소녀이다. 아무런 힘도 없는 그러나 사랑하는 오빠를 찾고자 하는 마음만을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절실한, 아직은 때묻지 않은 소녀말이다. 그리고 그녀가 오빠를 찾기 위해 방문해야 하는 곳은 바로 세상에 존재하는 수 없이 많은 "이야기"가 흘러오고 흘러나가는 "이름없는 땅"이라는 알 수 없는 곳이다.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이름을 가지지 않은 곳, 그래서 "이름없는 땅"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 그 곳에서 그녀는 "이야기"라는 단 한번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대상의 비밀과 맞딱드린다. 사람들이 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지,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가고 이어지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왜 이야기를 끝없이 원하는지에 대한 비밀. 아직 어린 유리코에게는 이해하기에 너무도 추상적인 이야기들이지만, 어린 유리코는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그녀의 오빠도, 그 어떤 "이야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이야기를 얻고, 그 이야기를 꿈꾸고, 그 이야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결국, 그 이야기에 살기 위해 선과 악이 공존하는 "영웅"의 사악한 면인 "황의를 입은 왕"까지도 스스로 선택했다는 외면할 수 없는 사실들을..

그녀는 이제 모험을 통해 "황의를 입은 왕"의 최후의 그릇이 되어버린 오빠를 구해야만 한다. 스스로 가늠할 수 없는 수 없이 많은 위험과 고난들이 그 모험속에 포함되어 있겠지만, 아마도 유리코를 버티게 해주는 것은 사랑하는 오빠를 구해야한다는 그 일념 뿐이었을 것이다. 세상이 아닌 또 다른 세상 속에서, 유리코는 유리라는 이름으로 그녀가 속하지 않았던 세상 속의 수 많은 일면들을 돌아보게 되고, 그녀는 그 경험을 통해 세상과 세상에 존재하는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에 대해 고민하고 갈등하며 스스로를 다잡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유리는 모험을 끝내고 "이름없는 땅"에 돌아와 "이름없는 땅"의 하늘에 "하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다시 유리코로 돌아온다.

<영웅의 서>는 판타지 소설이지만, 그저 흥미와 재미를 목적으로 쓰여진 판타지소설보다는 조금 더 넓고 깊은 주제를 담고 있다. 히로키가 동급생을 칼로 찌르고 사라진 사건을 통해서는 권력과 권력의 비호를 받는 수족들의 비겁함과 잔인함을 말하기도 하고, 히로키가 학교의 영웅에서 배척을 당하는 반란자의 오명을 쓰기까지의 과정에서는 우리사회에서도 만날 수 있는 교내폭력과 왕따등의 사회문제등을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영웅의 서> 안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이야기"라는 존재에 대한 의문이었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원하고 꿈꾸기에, 혹은 후회하거나 그리워하기에 쓰여지는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지어낸 것이라는 사실, 그래서 "이야기"의 본질은 어찌보면 "거짓"이라는 당연하지만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사실에 대한 의문, 그 의문을 <영웅의 서>를 통해 처음 떠올려본 것이다.

분명, 이야기의 실체는 거짓일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를 짓는 작가들이 지어내는 "이야기"란, 그가 꿈꾸는 환상이자, 그가 바라는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이자, 그가 하지 못했던 과거에 대한 후회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 또 때로는 많은 사람들이 원했던 이상이기도, 누군가의 작은 바람이기도 한 것이 바로 이야기의 실체 그 자체일테니까.. 이야기가 쓰여진 수 많은 책과 이야기를 말하는 수 없이 많은 노래와 영화, 연극들을 통해 얻으려 하는 것은. 그렇게 자신이 원했던 무언가를 그것들을 통해 상상하고 꿈꾸는 바로 그 자체일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그렇게 자신과 세계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현실의 나와 세상을 위로받고자 하는 마음이 이야기를 자아내는 근본이자 시작이니까..

현실에는 없는 환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인간의 나약한 마음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야기"라는 이름을 얻은 거짓이 사람들을 현혹하고 그 덩치를 불려, 때로는 사람들을 악을 행하게 하더라도,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름없는 땅"에서 그 거짓에 현혹되어 악을 선택한 죄로 "죄업의 대륜"을 끝없이 돌려야 하는 형벌을 받을지라도, 그 이야기의 시작에는 사람들의 아주 작은, 그리고 가장 진실한 바람이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진짜 진실이 아닐까? 세상에 존재하는 그 수많은 이야기가, 사실은 거짓일지라도, 사람들이 그 이야기들을 원하는 이유는, 그 이야기 속에 자신이 진짜로 바래왔던 단 하나의 꿈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많은 이야기들이 모두 거짓일지라도, 인간이 인간으로서 스스로의 삶을 통해 자아내는 인생이라는 "이야기"만은 진짜임을, 스스로 이끌고 만들어가는, 그래서 때로는 좌절하고 실패하여 얼룩덜룩 상처입은 불완전한 바로 당신의 삶은 그 어떤 죄업도 만들지 않을 거짓아닌 진실한 이야기임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너무도 아름답고 완벽해 거짓이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환상의 집보다는, 작고 누추하지만 따스한 정이 흐르는 나의 집이 더욱 행복한 것처럼, 거짓으로 이루어진, 그래서 결국은 죄업의 대륜을 짊어져야 하는 "이야기" 속이 영웅의 삶보다는, 영웅이 되지 못했지만, 그 자체만으로 진실인 나의 화려하지 않는 삶이 내가 지켜야할 단 하나의 진실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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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랩소디>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토마토 랩소디
애덤 셸 지음, 문영혜 옮김 / 문예중앙 / 2010년 10월
품절


랩소디란 형식이나 내용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서사적인 형태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듯 부르는 시의 한 종류이다. 서사라는 단어가 주는 뭔지 모를 무게감처럼, 그래서 랩소디는 때로는 누군가의 인생을 기리기 위한 찬미가가 되기도 하고, 어느 시절에 존재했다 사라진 나라의 전설이 되기도 하며, 그 누군가가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아주 작은 마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의 인생의 한 소설이 될 수도 있는 형식의 노래들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의 대부분에 공통점을 찾으라고 한다면, 아마 그 모든 이야기에 누군가의 시대와 인생들이 녹아 절대 잊혀지지 않을 의미를 담은 노래가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토마토 랩소디는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인 것일까? 누군가의 이름도, 어느 사건의 제목도, 마을이나 나라의 이름도 붙지 않은, 그저 떠올리면 향긋하게 베시시 웃음짓게 만드는 채소를 제목으로 가진 랩소디. 제목만으로는 누구의 인생인지, 어느 마을의 사연인지, 어느 나라의 전설인지 도저히 감도 잡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이름으로 노래가 되어, 또는 책이 되어 남은 한 편의 시.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이 역시도 누군가의 역사를 담은 대서사시일것이 확실한 이 이야기. 그리고 랩소디라고 불리울 만큼 은근하고 진하게 전해져 내려올, 절대 사라지지 않은 전설을 담은 그런 이야기라는 점을 것이다. 토마토라는 야채의 이름으로 대변되는 누군가의 삶과 어느 지역의 사람들과, 어느 나라의 전설을 담은 토마토 랩소디는 그렇게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향기를 폴폴 풍기고 있었다. 마치 사랑의 열매라 불리웠던 토마토의 붉은 향기처럼 말이다.


토마토 랩소디는 앞서 살짝 기대했던대로 토마토를 키우며 살아가는 유대인 논노와 다비도를 시작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자나깨나 토마토를 정성스럽게 키우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던 이탈리아 한 지방의 청년, 하지만 다비도는 논노의 주선으로 피렌체에 살고 있는 한 여인과 결혼을 준비해야하는 처지에 놓인다. 토마토 말고는 관심도 없는데, 더군다나 맘에 들지도 않는 여인과의 결혼이라니.. 모든 것들이 불만투성이인 다비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노의 주선을 거절하지 못하고 어부지리로 결혼의 단계에 돌입한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다비도는 올리브 농장의 여인 마리와 사랑에 빠지고야 만다.

토마토 랩소디는 이렇게 다비도와 마리를 중심에 놓고 이들을 둘러싼 마을의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각자의 개성과 욕망들을 부여해 이야기를 끌고 가기 시작한다. 또한 이야기의 시작은 다비도와 마리의 사랑이었을지 모르나, 단지 이들의 사랑은 이야기 전체를 깔고 있는 종교적 갈등이나 사회의 화합등을 문제로 이끌어내기 위한 작은 실마리로 이용될 뿐이기도 하다. 누구나 공감하고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젊은 남녀의 막을 수 없는 사랑과 그 사랑의 해결점을 통해 당시 시대를 관통하는 사회적인 문제를 정면으로 혹은 우회적으로 이끌어내 한편의 로맨스이자 한편의 서사시를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토마토라는 매혹적으로 열정적인 열매의 색을 입혀 다양한 음식과 그 재료들을 곁들인 환상의 한 접시를 만들어낸다.


토마토 랩소디라는 이름처럼 이 책은 토마토라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야채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려 한다. 때로는 종교적인 갈등을, 때로는 젊은이들의 사랑을, 그리고 그 수많은 문제들을 헤쳐내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루어내야 하는 화합과 용서, 그리고 화해라는 이상향까지를 말이다.

그래서 토마토 랩소디는 어찌보면 참으로 영악한 책이기도 하다. 영원히 우리가 지향하는 이상 중 하나를, 그래서 한 없이 무겁고 지루하기까지한 추상적인 문제를,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음식의 재료와 젊은이들의 로맨스로 이끌어내고, 시종일관 유쾌하고 즐겁게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토마토 랩소디를 읽는 내내 이야기의 중압감이나 진지함에 짓눌려 책장을 덮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사실은 아마도 이 책의 그런 영리함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 장을 모두 덮은 후 토마토 랩소디는 단지 음식의 유래나 젊은이들의 로맨스를 보여주고자 하는 단순한 소설이 아니다. 토마토 랩소디가 전하고자 하는 진짜 이야기가 책 장 아래 책을 모두 읽은 직후 다시 우리 머릿속에서 시작되니 말이다.

너무 무겁지 않게, 그러나 너무 경박하지 않게, 토마토 랩소디가 전하는 붉고 향긋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한 시대를 넘어 여전히 내려오는 우리의 이상향 한접시를 만나게 될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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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도 색깔이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검정도 색깔이다
그리젤리디스 레알 지음, 김효나 옮김 / 새움 / 2010년 9월
품절


검정도 색깔이다..제목 속에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누군가가 보았다면 엄청나게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라 상상했을 제목. 하지만 이 제목조차 그녀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라 그저 편집자의 생각이었을 뿐이라고 쿨하게 웃었다던 작가.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그대로의 벌거벗은 자신으로 세상을 향해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저돌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했다는 그녀의 이름은 그리젤리디스 레알이라고 한다.

화가로서, 작가로서 인생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삶을 내려놓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묘비 위에서도 정작 집착스러우리만치 놓지 않았다던 창녀라는 이름을 들고 삶을 마무리한 이 책의 작가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변변한 직업이라 생각하지 않을 일을 자신의 평생이라 주장하는 여자. 모두가 잊어버리거나 외면하기를 바랄것 같은 일을 그녀 자신이라 말하면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그리젤리디스 레알의 검정도 색깔이다는, 그런 그녀의 삶을 담은 그녀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한다.

책 속에 글자로 담겨져 있는 그녀의 인생은 거칠었다. 그리고 그 거칠은 인생을 표현해낸 문장과 단어, 글자의 획 하나하나까지도 거칠었다. 그녀는 그녀의 인생을 꾸미거나 다듬고자 하지 않는것 같았다. 그저 그녀가 경험했던 것들 그대로, 그 순간 그녀가 느꼈던 감정 그대로를 곱씹으로 적어내려간 듯한 느낌이 더욱 강했을 뿐이다. 지독한 가난과, 가난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했던 도망과 도망, 그리고 또 도망.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감정을 다듬어낼 힘이나 시간따윈 없었던 그녀의 삶 그대로를 담아내기 위해 그녀는 그렇게 거칠고도 거칠은, 그래서 그 잔인함이 더욱 처절하게 드러나는 이야기들을 그대로 이 책속에 담담히 전하고 있었다.

매춘을 일러, 인류 최초의 직업이라고도 하고, 바퀴벌레처럼 세상이 존재하는 한 절대 사라지지 않을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모습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매춘을 가장 본능적인 행위로 보지 않는다. 그저 경멸가득한 시선을 담아 인생의 가장 나락에서야 피할 수 없이 맞딱드려야 하는 생존의 본능 정도로 밖에 치부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는다. 경멸하고 무시하며 눈 아래로 바라볼 뿐이다. 그런 모습으로 인생을 겨우겨우 연명해온 그녀의 인생을 담은 글이기에 이 글은 절대로 아름답게 치장될 수 없었으리라


그녀는 분명, 일생의 어느 한 조각에서 남들이 모두 멸시하는 일을 하며 생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후 그녀는 화가로서, 또는 작가로서의 삶 역시도 살아갈 수 있었다.

작가, 화가, 창녀...
창녀라는 단어를 그녀의 인생에서 조금 가장자리로 밀어낼 수 있었음에도 그녀는 왜 그 이름을 묘지까지 끌어안고 갔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녀의 인생전체가 창녀로서 살아야 했던 인생의 한 토막에 의해 가장 크게 변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창녀로 살았고, 창녀로서의 글을 써내려갔다. 창녀로서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자신들의 권리와 희망을 부르짖었고,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창녀로 대중앞에 내세우며 창녀로 살았던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창녀들을 위해 살았으니, 비록 그녀가 인생의 아주 짧은 순간을 창녀로 지냈다고 해도, 그녀는 온전히 온 인생을 창녀로 살았음과 다를 바 없었으리라. 그리고 바로 그런 그녀의 인생이 바로 이 책을 채워나가고 있다. 어떤 색을 덧칠해도 그냥 그대로 검정으로 남는 검정색깔처럼. 진하고 강하게, 그리고 지울수도 없게 말이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도덕교과서에 나오는 말과는 다르게 분명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는 직업에 귀천을 묻는다. 적어도 세상 사람들이 눈 아래로 보는 아랫등급의 직업은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이 글을 쓴 작가 그리젤리디스 레알은 분명 세상 어느 곳에서도 가장 밑바닥이라 멸시받을 만한 일을 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는 바닥으로 바닥으로, 그리고 그 아래로 그 아래로 숨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을 향해 자신들 역시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달라고 외치며 생을 보냈다. 그리고 누군가는 한 없이 부끄러워하거나 경멸을 보낼 자신의 삶을 어떠한 꾸밈도 없이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나는, 그런 그녀처럼 혁명적인 사고를 하는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세상사람들이 하는 그녀들을 향한 손가락질 사이에 몰래 숨어 나 역시도 그녀들을 향해 존중이 아닌 무시와 멸시를 보내는 쪽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주장하는 만큼 매춘이 혁명적이고 예술적인 행위라는 생각도 단 한번 해본적이 없다. 찬성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잠시 해본다. 세상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그렇게 세상을 향해 처절하게 외치고 절규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어쩌면 스스로가 살아숨쉬는 인간임을 놓치고 살았을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우리도 인간이다라고 그렇게 처절하게 외침이, 그녀 자신이 인간임을 잊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그렇게 고통속에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울부짖음을 했던 것이라고..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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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ys200 2013-05-17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알라딘서점에서 제목이 독특해서 샀는데...단숨에 다읽고난후 .. 약간의 충격.. 그리고 검은빛 슬픔..작가에대한 존경심이듭니다
 
<육식이야기>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육식 이야기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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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이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유명한 누군가는 상상력이 인간이 가진 최고의 축복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인간들이 이룩해낸 대단한 발명의 대부분은 바로 이 상상력이 시작이 되어 완성까지 이루어진 것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둥그런 바퀴를 달아 조금 더 쉽고 빠르게 먼 거리를 이동하는 자동차를 만들었고, 새처럼 하늘을 날아 다니는 비행기를 만들어 국가와 국가를 이동하게 만들어주기도 했으며, 먼 곳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언제도 목소리로 서로의 안부를 전할 수 있게 하는 전화기도, 해가 져서 어둠이 지배하는 한밤에도 대낮처럼 밝은 빛을 만들어내는 전구와 전기도. 바로 그 모든 것들이 인간이 상상했던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도구들이었고, 이제는 그것들이 실현되어 모두가 그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가끔은 정말 쓰잘데기 없거나 혹은 허무맹랑한 희망사항으로 들리는 상상력에 기반한 수 많은 생각들, 당시에는 그것이 정말 허무맹랑하고 꿈 속에서나 나올법한 말도 안되는 상상들에 지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시간이 흘러 우리의 모습들을 가장 크게 바꾸어 낸 것은 바로 그 말도 안되는 상상력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본다면, 인간이 받은 가장 큰 축복이 상상력이라는 그 누군가의 말은, 정말 틀리지 않은 말인듯 하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꼭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인문학적 과학적 영역에서만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곳에나 존재하고, 어느 곳에서나 강한 힘을 발휘할 잠재력을 가진 상상력. 그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또 다른 영역은 바로 문학일 것이다. 무엇을 만들어내거나 이룩하지 않아도, 글로써 모든 것들을 완성할 수 있는 문학이라는 장르야 말로, 어쩌면 상상력이 발휘되기 정말 좋은 최적지가 아닐까?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그 허무맹랑함과 꿈같은 이야기들을 귀기울여 들어줄 수 있는 곳이기도 할테고 말이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글을 통해 상상을 접하고, 함께 상상하며, 또 다른 상상을 할 수 있게 될 기회를 얻을 수 있고, 어쩌면 그 누군가의 글을 읽은 또 다른 누군가의 상상은 발전과 노력을 통해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이끌지도 모를 노릇이다.

그래서 일까? 사람들은 문학적 상상력에 유난히 호의적이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만의 세계들을 구축하고 때로는 황당하고 때로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보여주며, 사람들은 미처 자신이 상상하지 못했던 그들의 세상을 향해 환호하고 즐거워 한다. 대표적인 작가를 들라고 한다면 아마도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대표적인 예가 될 듯하다.


조금은 익숙하지 않은 이름 베르나르 키리니의 육식이야기는, 바로 이런 상상력의 모음집이라 할 수 있다. 14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육식이야기는, 한명의 인물로 보이는 서술자가 자신이 살면서 경험했던 온갖 희안하고도 말도 안되는 경험들을 독자들을 향해 고백하는 형식으로 담고 있는데, 그 이야기들이라는 것이 참 허무맹랑하고도 희안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들이다. 말 그대로 상상력 이상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베르나르 키리니만의 독특한 세상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온몸이 오렌지 껍질로 뒤덮인 여인이 자신의 껍질을 벗겨달라 말하고, 다음날 메말라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고, 아주아주 먼곳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자신에 관련된 이야기는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능력자가 있기도 하다. 정신은 하나인데 몸은 두개인 신부도 있고, 대재앙에 비견될만큼 커다란 사건인 기름유출 사건을 즐거운 유희나 위대한 예술작품을 감상하듯 열광하며 바라보는 집단이 출연하기도 하는 이야기들, 다른사람들과는 조금 다르거나 약간 이상한 것이 아니라, 뭔가 근본적으로 인간과는 다른 것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마치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인생 속의 약간 특이한 기억처럼 쏟아내는 이 이야기들은, 그래서 읽는 내내 이 주인공이 이토록 많은 희안한 일을 겪었다면 나도 그런 일들 중 하나는 살면서 겪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알수없는 기대마져도 품게 할 정도이다. 자~ 이정도라면, 베르나르 키리니라는 이름의 이 작가가 구축한 자신만의 상상의 세계가 어느 정도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육식이야기의 여러 이야기들은, 분명 표면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그려내고 있다. 세상 어디에서 온 몸이 오렌지 껍질로 뒤덮인 여인을 만나고, 기름유출사고를 보면서 집단적으로 열광하는 이상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겠는가. 아마 만에 하나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이 그저 재미있는 상상력이기만 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육식 이야기에 담긴 모든 이야기와 그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어느 면에서는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인간들 누구에게나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은밀한 욕구나 본성들을 그저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니 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무언가를 끝없이 갈망하는 욕망이 있고, 숨기고 싶은 자신만의 비밀이 있으며, 누구에게도 떳떳하지 못한 은밀한 소망을 품고 있을 수 있다. 육식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주인공들은, 그저 누구나 가지고 있을 자신만의 이야기 한자락을 끝없이 추구하고 내보이는 이들일뿐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베르나르 키리니는, 육식이야기 속 14편의 이야기 속에서 인간들이 감추고자 했던 가장 현실적이고 본래적인 모습들을, 가장 비현실적이고 황당한 이야기들로 풀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쩐지 이 책을 쓰고 난 후 베르나르 키리니가 독자들을 향해 '당신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잖아?'라고 되묻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입가에 살짝 비웃음같은 미소를 품은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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