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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서 1 ㅣ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4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이야기란 무엇일까?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글에서 글로, 때로는 노래와 영화, 연극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재창조되는 이야기. 그래서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무르고 있지만 언제나 변화하고 새로이 태어나며 움직이기도 한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읽고, 즐기면서 살아가지만.. 그리고 그런 사람들 속에 나 또한 포함되어 있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내내 우리와 함께 하는 이야기라는 존재에 대해, 진지한 의문과 고민을 해본 적이 있었을까? 다른 이들은 그런 적이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적어도 나에게는 이 이야기라는 존재에 대한 고민과 의문을 품었던 순간이 없었던 것 같다. 적어도, 이 책 <영웅의 서>를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영웅의 서>라는 이름을 가진 이 이야기는 분명, 판타지 소설의 장르에 속하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책의 첫장에서부터 일본 미스터리의 여왕이라는 홍보문구를 달고 있기까지 하다. 그래서 였을까? <영웅의 서>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저 <영웅의 서>라는 이 이야기가 단순히 킬링타임용으로 즐기며 시간을 때워줄 흔하고 가벼운 읽을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냥 평범한 장르소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기대하지 않은 상태에서 펼쳐들었던 <영웅의 서>의 첫 장. 하지만 <영웅의 서>가 담고 있는 이 이야기는 그저 즐거이 시간을 채워주는 장르소설의 그것 뿐은 아니었다. 분명, 장르소설의 구성과 흐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 장르소설의 매력들을 끌어안은 이야기라는 느낌. <영웅의 서>는 그렇게 내가 기대했던 모든 것과 함께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그 이상의 무언가를 전달하는 이야기였다
아직 어린 초등학교 소녀 유리코에게는 언제나 자랑스러운 오빠 히로키가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인기있는 오빠. 가족들과 동생에게는 물론, 어디에서나 자랑스러운 사람으로 여겨지는 오빠 히로키는 늘 의지가 되고 든든한 유리코의 단 하나뿐인 오빠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수업중인 유리코에게 선생님이 뭔가 불안한 이야기를 전하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집에 도착한 유리코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언제나 든든하고 자랑스러웠던 그녀의 오빠 히로키가 학교의 동급생들을 칼로 찌르고 사라졌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 뿐, 히로키에게 찔린 동급생 중 한명은 사망하고, 한명은 병원에 있은 채, 그들을 칼로 찌른 히로키는 행적을 감추고 사라져버렸다. 언제나 자랑스러웠던 오빠가 저질렀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사건. 하지만 분명, 이 사건의 범인은 그녀의 오빠라고 이야기한다. 유리코의 가족은 히로키가 저지른 사건과, 사라져버린 히로키로 인해 공황상태에 빠진다. 가족이었기에, 히로키가 왜 사건을 저질렀는지보다는 지금 그들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히로키가 걱정될 뿐이다. 가족은 히로키가 저지른 사건과 그의 부재로 인해 점차 무너져 내린다. 유리코 또한 학교에 나가지 못한채 오빠를 기다릴 뿐이다. 단 하나뿐인 오빠를 그리워하는 마음만으로..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지나가던 어느 날, 유리코는 우연히 여전히 오빠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오빠의 방으로 들어선다. 평소에는 엄마가 늘 눈물을 흘리던 곳. 어쩌면 작은 소녀인 유리코에게는 오빠의 부재를 더욱 확실하게 보여주는 공간일 뿐인 오빠의 방. 그 곳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말을 거는 한 권의 책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책을 시작으로, 유리코는 오빠를 찾기 위해 그동안의 자신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미지의 땅과 공간속으로의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영웅의 서>는, 어느 날 갑자기 동급생을 칼로 찌르고 사라져 버린 열네살의 소년의 사연에서부터 그 이야기를 풀어간다. 하지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사건을 저지른 히로키가 아닌, 그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그를 찾기 위해 결말을 알 수 없는 모험을 선택하는 아직 어린 유리코라는 이름의 소녀이다. 아무런 힘도 없는 그러나 사랑하는 오빠를 찾고자 하는 마음만을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절실한, 아직은 때묻지 않은 소녀말이다. 그리고 그녀가 오빠를 찾기 위해 방문해야 하는 곳은 바로 세상에 존재하는 수 없이 많은 "이야기"가 흘러오고 흘러나가는 "이름없는 땅"이라는 알 수 없는 곳이다.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이름을 가지지 않은 곳, 그래서 "이름없는 땅"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 그 곳에서 그녀는 "이야기"라는 단 한번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대상의 비밀과 맞딱드린다. 사람들이 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지,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가고 이어지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왜 이야기를 끝없이 원하는지에 대한 비밀. 아직 어린 유리코에게는 이해하기에 너무도 추상적인 이야기들이지만, 어린 유리코는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그녀의 오빠도, 그 어떤 "이야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이야기를 얻고, 그 이야기를 꿈꾸고, 그 이야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결국, 그 이야기에 살기 위해 선과 악이 공존하는 "영웅"의 사악한 면인 "황의를 입은 왕"까지도 스스로 선택했다는 외면할 수 없는 사실들을..
그녀는 이제 모험을 통해 "황의를 입은 왕"의 최후의 그릇이 되어버린 오빠를 구해야만 한다. 스스로 가늠할 수 없는 수 없이 많은 위험과 고난들이 그 모험속에 포함되어 있겠지만, 아마도 유리코를 버티게 해주는 것은 사랑하는 오빠를 구해야한다는 그 일념 뿐이었을 것이다. 세상이 아닌 또 다른 세상 속에서, 유리코는 유리라는 이름으로 그녀가 속하지 않았던 세상 속의 수 많은 일면들을 돌아보게 되고, 그녀는 그 경험을 통해 세상과 세상에 존재하는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에 대해 고민하고 갈등하며 스스로를 다잡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유리는 모험을 끝내고 "이름없는 땅"에 돌아와 "이름없는 땅"의 하늘에 "하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다시 유리코로 돌아온다.
<영웅의 서>는 판타지 소설이지만, 그저 흥미와 재미를 목적으로 쓰여진 판타지소설보다는 조금 더 넓고 깊은 주제를 담고 있다. 히로키가 동급생을 칼로 찌르고 사라진 사건을 통해서는 권력과 권력의 비호를 받는 수족들의 비겁함과 잔인함을 말하기도 하고, 히로키가 학교의 영웅에서 배척을 당하는 반란자의 오명을 쓰기까지의 과정에서는 우리사회에서도 만날 수 있는 교내폭력과 왕따등의 사회문제등을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영웅의 서> 안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이야기"라는 존재에 대한 의문이었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원하고 꿈꾸기에, 혹은 후회하거나 그리워하기에 쓰여지는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지어낸 것이라는 사실, 그래서 "이야기"의 본질은 어찌보면 "거짓"이라는 당연하지만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사실에 대한 의문, 그 의문을 <영웅의 서>를 통해 처음 떠올려본 것이다.
분명, 이야기의 실체는 거짓일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를 짓는 작가들이 지어내는 "이야기"란, 그가 꿈꾸는 환상이자, 그가 바라는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이자, 그가 하지 못했던 과거에 대한 후회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 또 때로는 많은 사람들이 원했던 이상이기도, 누군가의 작은 바람이기도 한 것이 바로 이야기의 실체 그 자체일테니까.. 이야기가 쓰여진 수 많은 책과 이야기를 말하는 수 없이 많은 노래와 영화, 연극들을 통해 얻으려 하는 것은. 그렇게 자신이 원했던 무언가를 그것들을 통해 상상하고 꿈꾸는 바로 그 자체일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그렇게 자신과 세계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현실의 나와 세상을 위로받고자 하는 마음이 이야기를 자아내는 근본이자 시작이니까..
현실에는 없는 환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인간의 나약한 마음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야기"라는 이름을 얻은 거짓이 사람들을 현혹하고 그 덩치를 불려, 때로는 사람들을 악을 행하게 하더라도,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름없는 땅"에서 그 거짓에 현혹되어 악을 선택한 죄로 "죄업의 대륜"을 끝없이 돌려야 하는 형벌을 받을지라도, 그 이야기의 시작에는 사람들의 아주 작은, 그리고 가장 진실한 바람이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진짜 진실이 아닐까? 세상에 존재하는 그 수많은 이야기가, 사실은 거짓일지라도, 사람들이 그 이야기들을 원하는 이유는, 그 이야기 속에 자신이 진짜로 바래왔던 단 하나의 꿈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많은 이야기들이 모두 거짓일지라도, 인간이 인간으로서 스스로의 삶을 통해 자아내는 인생이라는 "이야기"만은 진짜임을, 스스로 이끌고 만들어가는, 그래서 때로는 좌절하고 실패하여 얼룩덜룩 상처입은 불완전한 바로 당신의 삶은 그 어떤 죄업도 만들지 않을 거짓아닌 진실한 이야기임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너무도 아름답고 완벽해 거짓이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환상의 집보다는, 작고 누추하지만 따스한 정이 흐르는 나의 집이 더욱 행복한 것처럼, 거짓으로 이루어진, 그래서 결국은 죄업의 대륜을 짊어져야 하는 "이야기" 속이 영웅의 삶보다는, 영웅이 되지 못했지만, 그 자체만으로 진실인 나의 화려하지 않는 삶이 내가 지켜야할 단 하나의 진실일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