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의 전문분야인 중국의 고전에서 외연을 넓혀 최근에는 서양고전까지 종횡무진 넘나들며 저작물을 부지런히 생산해내는 저자의 근면성실한 열정에는 감탄할 뿐이다. 요즘엔 동양학자가 서양학으로, 서양학자는 또 그 역으로 자기 영토의 경계 밖으로 탈주하는 양상이 대세인 양 느껴진다. 그렇게 월경하지 않고 자기 전공분야에만 천착하는 학자는 지식인 취급받기도 힘든 세상이 됐다는 탄식이 나올 법하다. 그러나 신동준선생의 글을 읽다보면 왠지 불편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는 기본적으로 구한말 부국강병을 추구했던 계몽사상가의 시선으로 지금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는 지금이 팍스 아메리카나에서 팍스 시니카로 넘어가는 G2시대임을 전제하고 이런 강대국의 힘겨루기질서에서 통일한국을 이루고 문화대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인문학의 저변 확대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결국 인문학은 국력의 배양(상위목적)과 이를 위한 개개인의 실력배양(하위목적)이라는 중층의 목적을 위한 수단적 지위로 전락하고 만다. 힘의 논리를 내재화한 인문학이 이 책에서 말하는 인문학의 민낯이다. 당연히 그의 글을 읽는 독자는 선생님께 깨우침을 강요당하는 우매한 학생처럼 왜소해지는 자신과 만나게 되거나 경쟁에서 승자로 살아남기 위해 고민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의 글에는 시대의 모순과 불의한 패권논리에 저항하는 불온함이 없다. 인문학의 핵심인 불온성이 거세된 인문학은 화려하게 포장되어 백화점쇼핑백에 담아나오는 유행과 소비의 대상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말하는 인문학은 저자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는 듯하지만 오로지 일상의 공허함을 채워줄 고상한 무언가를 찾는 유한계급을 위한 인문학일 뿐이요 인문학으로 무장하여 상위1%의 주류계급에 편입하고자 하는 성공주의자들을 위한 우승열패의 인문학에 머물러 있다. 즉 그의 인문학은 사회과학과 분리되어 있다. 이는 저자가 기업CEO들이나 사회지도층이라 불리는 자들을 위한 초청강연에 강연자로 자주 초빙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인문학이 성공을 위한 자기계발수단이나 리더십 함양, 나아가 지배계급의 가치관을 강화하는 데 소비되는 현상을 신동준선생에게서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나는 신동준선생의 글을 읽을 때마다 뒷맛은 항상 개운치 않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