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ttalgi002님의 서재 (ttalgi002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95331236</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un, 01 Nov 2026 02:01:11 +0900</lastBuildDate><image><title>ttalgi002</title><url>https://image.ala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95331236</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ttalgi002</description></image><item><author>ttalgi002</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숨은신을 읽고 각자 나름의 숨은 신을 경험하기를! - [숨은신 - 전래된 한국의 미의식]</title><link>https://blog.aladin.co.kr/795331236/17488192</link><pubDate>Wed, 02 Sep 2026 01:1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95331236/1748819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02130922&TPaperId=1748819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99/1/coveroff/k90213092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02130922&TPaperId=1748819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숨은신 - 전래된 한국의 미의식</a><br/>강병우 외 지음 / 히스테리안 / 2026년 07월<br/></td></tr></table><br/>「숨은 신」은 아주 의미 있는 공동 연구 서적이다. 분야가 다른 사람들이 모여 공동의 과제로 연구하고 결과물을 내는 일은 쉽지 않다. 단절, 갈등, 미끄러짐이 자주 발생하기 마련이다. 완전한 실재는 없다. 반복되는 미끄러짐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일도 감사할 따름이다. 그런 점에서 「숨은 신」은 상당히 의미 있는 공동 연구 결과물이며 한국적인 것을 찾아간다는 관점에서 시작하여 발견한 시대불문의 다양한 현상학과 경험과 담론이 해석학으로 응집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글은 연구서, 어떤 글은 소설, 어떤 글은 기록문 같기도 하였으나 공통적으로 다양한 글들이 응집하는 지점은 하나였다. 이 책을 접하기 전에는 한국에서 듣도 보도 못한 신들과 그들에 대한 거대담론을 접할 줄 알았다. 그러나 책을 마지막으로 덮는 순간, 절차탁마. 무릎을 치고 말았다. 각 개인의 서사는 공동의 서사이며 한국적이다라는 것은 지리적 특수성에서 발생한 서사인 동시에 세계적인 보편성을 갖는다는 것을. 각각의 연구자들이 자연현상에서 발견한 오감으로 느낀 신명을 통해 신을 사유하고 곧 그것은 이론적으로 해석하여 한국적인 요소로 응집된다. ‘신을 사유하는 다양한 방식’을 연구자들의 경험과 연결하여 담론화하고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한국적인 것과 믿음과 신은 단박에 이론적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진행 중인 현상학이다. 이 책을 읽은 모든 독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 나름의 한국적인 미를 향유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주체적으로 인식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각자 나름의 숨은 신을 경험하면서 동시에 모두 각자 나름대로 한국적인 요소를 축적하고 있다고 믿기를 바란다. 간절히.&nbsp;#숨은신#숨은신전래된한국의미의식#히스테리안#히스테리안출판사#한국미<br>신이 사라진 자리로부터 –손혜림손혜림에게 한국은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자를 향해 기울며 때로는 서로 치환되는 가변적인 위치성으로 읽힌다. 한 사람이 발한 어둠이 다른 사람을 투과해 빛으로, 어둠으로 스며드는 심연이자 구멍. 그 구명은 시작과 끝을 알리지 않는다. 대체어의 자리로서 사어가 활어로, 활어가 사어로 이어지는 교차의 공극. 그 상이에 영사되고 있는 다른 속도의 순간들을 감히 헤아려 볼 수 없어도 그러모으려는, 그 아름다움,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 일을 두고 타인을 위해 울어주는 마음은 대륙을 횡단한다. ...각 개인 안에 깃든 또 다른 구멍들이 지탱해줄 장면들을 기워볼 수 있다면, 그러므로 손혜림에게 신은 존재한다.&nbsp;<br>손혜림의 글을 읽으며 든 생각-인간은 양가감정을 지닌 존재이다. 모순되고 아이러니한 존재이다. 인간은 소속을 갈망하면서도 소속 밖으로 나가 독립된 존재이길 원한다. 내 안에 양가감정을 가진 존재, 모순된 존재를 인간과 인간 밖 사이에서의 경계인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경계인은 외부로 떨어져 나간 존재, 결핍의 존재가 아니다. 중성자에서 전자가 떨어져 나간 형태로 무엇이 될 수 있다. 이는 긍정적 경계인이다. 경계인은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안다. 축제에 도취되지 않는다. 경계인의 입장에서 사건과 상황을 바라보면 보다 현상학적으로 본질을 객관적 관점으로 보고 태도를 유지하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손혜림은 경계인이다. 경계인이 되어 돌아보는 자는 모두 신을 믿는 자이다.&nbsp;<br>2025 삼일운동 – 이연화&nbsp;이연화는 수 없이 많은 한국의 감각들을 마주하면서 우리가 한국이라 부르는 감각이 무엇인지 탐구한다. 2024년 12월 3일밤 10시 27분 대한민국 비상계엄 선포이후 2025년은 윤석열 탄핵 반대 집회가 열리는 광장에서 동시대를 살아도 나와 다른 감각으로 세계를 살아온 사람들을 이해하는 일, 같은 도시에서 서로 다른 한국이 동시에 불리는 장면을 판단하지 않고 몸으로 통과하며 이해하려는 마음. 2025년 을사년 광장에서, 1905년 을사년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조약한 체결의 해의 사건은 제각각이다. 그러나 감각을 통해 시간을 직선이 아니라 중첩으로 이해한다.&nbsp;이연화의 글을 읽으며 든 생각-감각 또한 믿음. 신의 일이다. 신을 믿는 일은 감각에서 시작한다. 오감을 통해 전해오는 신호는 곧 사유로 이어지고 사건을 응집한다. 제 각각 시대와 공간이 다른 사건이지만 하나로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예전에 읽었던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lt;시간은 흐르지 않는다&gt; 책이 떠오른다. 시간의 양자. 시간과 사건은 중첩되어 있다. 발견하기 전까지.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관측하기 전까지 상자 속 고양이는 다양한 꼴과 상태로 있듯이. 이처럼 비상계엄, 을사년의 밤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들은 누군가의 오감과 발견에서 연결된다. 발견은 곧 믿음이다. 믿음은 결국 신으로 연결된다. 우리 모두 민간의 신을 발견하며 의미를 모아간다.&nbsp; &nbsp;<br>이름 없는 민중, 동학을 다시 읽다.-강정아어떤 결핍은 창의력을 발생시킨다는 말처럼 조선시대 뛰어난 인재들은 신분제의 억압으로 삶의 창의성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없었다. 믿음의 영역도 마찬가지.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또한 서자로 사회에서 차별받는 대우에 자아의 붕괴, 한계를 느꼈다. 그는 자기 내부의 목소리 ‘상제’를 통해 우리 안에 상제를 발현하고, 내 마음이 네 마음, 사람의 마음이 하늘이다는 사유를 알렸고, 이는 동학농민운동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nbsp;강정아는 동학이 창시된 과정과 동학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사례를 지적하며 동학이 주체적으로 활동하고 믿음으로서 자유가 보장되기보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수단으로 쓰였다고 한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고, 나라를 잃은 자들이 바다를 건너 목숨을 잃고, 가장 약하디 약한 존재들이 가장 먼저 죽어가는 그 비국의 서사는 여전히 쓰이고 또 팔린다. 유일한 인간의 몸과 이야기를 안고 살아가는 것에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 연약한 힘을 알고자 한다.’강정아의 글을 읽으며 든 생각-오래전부터 믿음은 권력의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태초에 좋은 의도로 탄생했으나 인간의 불순한 욕망으로 인해 본질을 벗어난 의도로 활용됐다. 동학도 좋은 의도로 시작되었다. 그로인해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졌지만 권력자에 의해 억압받았다. 중요한 것은 피동적인 삶이 아니라 자동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믿음이 그 시대에도 범운동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이다. 사회나 권력자나 체제에 따르는 수동적인 자아를 주체적인 자아로 깨어나는 과정에서 역사적 사건과 사유와 철학이 활동했다고 생각한다. 바로 개인의 믿음에서 신도 발생한다. 민간인에게 신이란 그렇게 발생한다.&nbsp;<br>회절하고 저항하는 미디어-동학농민운동과 식민지 근대 여성의 문예운동을 중심으로-손혜림한을 주축으로 형성된 미디어의 양상들을 검토하고 비가시적이면서 상시 침잠한 하부미디어를 쫓는다. 상부미디어는 통문, 신문, 참요 로 정동이 물질적 형식과 결합해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나지만 하부미디어는 가시화 되지 못한 정동의 층위와 사유들이다. 그 중 ‘한’의 정서가 상부미디어로 드러난 부분으로 동학농민운동과 식민지 근대 여성들의 문예운동이나 작품을 예로 들며 상부미디어로 드러나지 않은 하부미디어에는 여성, 어린이, 천민 등 소외된 이들이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대안과 저항이 침잠되어 있다고 본다.&nbsp;손혜림이 ‘한’의 정서로 본 상부미디어와 하부미디어는 꽤 유익하고 의미 있는 분석이다. 한국적의 요소의 ‘한’에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정의한 비애미와 다른 한국의 풍토아래 형성된 다층적인 정서가 담겨 있기에 ‘한은’ 비애로 그치지 않고, 풍자, 해학, 조롱, 역설, 비판 등 다양한 정서를 담고 있다고 본다. 대학생때 비평수업에서 비평교수님이 조선의 개밥그릇을 보고도 스고이를 외치며 감탄했던 일본인들의 이야기, 야나기 무네요시의 비애미, 끌려간 수많은 도공들. 그 안에서 문학이 해야 할 일과 비평적 사유에 대해 이야기를 한 수업이 기억난다. 우리안에 스며든 일본정서가 꼭 일본의 조선인 교육에 길들어지거나 개정된 것으로 볼 수 없는 부분도 있다. 특수성이 아닌 범인류적 보편성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정서. 한은 특히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나 약자나 피지배받았던 계층에서 드러난다. 중요한 건 그들조차 그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한’으로 승화하는 부분도 있다. ‘한’은 퉁치고 말하기 쉬운 상부 미디어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의미를 가지 하부 미디어이다. &nbsp;<br>걷는 모양 신-이인현&nbsp;이인현이 말하는 우둔한자 방싯은 전국 곳곳을 떠돌며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구멍이 있고 그 구멍에 신이 운동하여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는다고 본다. 방싯은 강원도 평창 돌문화체험관에서 아름답다, 수석이라 불리는 돌의 조건을 나열하며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 사이에서 아름다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를, 강원도 홍천에서는 나라꽃이라는 과잉된 이데올로기의 껍질, 애국, 국화의 상징인 무궁화에 대한 새로운 진실, 경상북도 의성에서는 2025년 산불로 까맣게 그을린 수피에 화마의 흔적은 남긴 고운사와 운람사에서 목격한 이질적인 사건들, 경기도 동두천에 미군 부대가 주변 지역 주민에게 미치는 영향, 사유지를 공유지로, 개인의 목소리가 모여 완성된 돌탑을, 충청남도 서산에 전승된 판소리에 얽힌 정서가 심수봉의 백만송의 장미에 얽힌 정서에서 라트비아의 역사, 학살, 민족, 신화로 확장한다. 충청남도 부여에서 일어난 임진왜란 민심의 고난을 돌보고자 주동자로 나선 이몽학의 위령제를 방문하면서 이전의 일과 이후의 일들이 지금, 한꺼번에 듣는다. 이로서 방싯이 우둔한자라는 역설로 뒤집어 놓는다.&nbsp;이인현의 글을 읽고 든 생각.&nbsp;우둔하다는 지혜롭지 못하고 어리석으며 둔한 행동을 말한다. 말이 언어가 폭력적일 때가 있는데 하나의 의미로 호명되는 순간 주홍글씨처럼 평생 부차적인 의미가 뒤따른다. 우둔한 사람은 무지해서 어리석은 행동을 할 때도 있지만 지식인이어도 우둔한 행동을 할 때가 있다. 때론 알고 있어도 양보의 미덕으로 우둔하게 행동하는 사람도 있다. 먼저 취하려 하지 않고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는 자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인간을 우둔하게 보지 않고 성숙한 인간으로 본다. 그러나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처럼 보이는 것만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하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러한 사람을 우둔하게 보기 마련이다. 아는 자의 눈에는 보이지만 모르는 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그것이 전부이다고 한다면 다소 억울하지 않을까. 이인현이 말하는 우둔한 자는 바로 방싯이 아니지 싶다. 그렇다면 방식은 우둔한 자가 아니라 성숙한 인간일 것이다.&nbsp;<br>칠드런 오브 뉴클리어-김수환김수환의 바람은 하나였다. 바다를 보고 싶다. 그것도 극동아시아의 바다. 그곳에 무엇이 있으려나. 드넓은 태평양으로 연결되는 물길을 따라가면서 뭔지 모를 이끌림의 세계를 알고 싶어 갈망하면서도 막상 경험해보면 모르겠다고 한다. 아직은 공부를 좀 더 해야 할 것 같다고. 그러면서 그 땅을 밟고 나서도 갈망하는 것이 해소되지 않는다. 아직은 공부를 조금 더 해야 할 것 같아... 작가의 글처럼 의도를 갖지 않았으나 의도하지 않게 마주하는 것에서 진정 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순간이야말로 신과 접선하는 영역이 아닐까 싶다. 김수환은 해무, 가랑비, 차도의 가장자리, 혼자라는 두려움, 알 수 없는 언어와 같은 장소와 얽힌 불특정의 불안에서 동물적인 공포에 휩싸인다. 불안정한 정보 속에서 의도하지 않게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평소 잘 보려고 노력했을 땐 잘 안 보이더니. 일본 ‘우리들의 전승관’에서 마주한 우크라이나 작가가 참여한 작품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거쳐 일본까지 온 자신의 낯선 풍경과 불안 속에서 이전에 방문했다던 한국 작가들의 소식, 이 모든 일은 제국과 식민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로 이어졌고 이는 단순한 호기심이나 관광이 아니라 그간 보이지 않았으나 보려고 했던 지표였다. 그리하여 결론에 이른다. 그는 아버지가 원자력 발전소를 짓는 관계자의 자녀로 자란 뉴클리어머니 칠드런이라는 것을. 원자력 발전소의 폭발 위험성을 알면서도 안전한 보금자리에서 산 모순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사회를 살펴보고 세상을 헤아려보았다는 것을, 절대로 미안하다고 안 하는 민족과 연대 목적으로 교류하지만 속마음은 제대로 용서받고싶다는 것을. 후쿠시마의 땅을 밟았으면서도 끝내 가지 않았다고. 이 모든 건 거짓말이야라고 사실을 거짓으로 덮어버린다. 그러나 강강약강을 아는가. 강조의 강조에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것을.&nbsp;최근 신문 만들기 수업에서는 생태교육을 하면서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성을 수업했다. 당시 관계자는 어려운 내용을 수업한다며 탐탁치 않아 했다. 그럼에도 학교에서는 아이들과 &lt;핵폭발이후 최후의 아이들&gt; 책과 &lt;반딧불의 묘&gt; 영화를 보고 꾸준히 수업을 해왔다. 세계2차대전에서 일본은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원자력발전소 증설은 옳은가? 핵무기 보유국은 지속적으로 보유해도 괜찮은가에 대한 토론을 했다. 핵무기와 원자력과 어떤 연결도 없는 2000년 이후 태어난 아이들에게 책과 영화를 소개하면서 아이들은 공부를 하면서도 저 선생은 왜 이걸 보여주는 거지. 나는 왜 이것을 공부하는 것이지라고 속으로 되물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주제의 교육은 필요하다고 본다. 돌아보지 않는 역사는 미래를 예측하고 사건을 예방할 수 없다. 한반도에 원자력 발전소가 얼마나 많은지. 그곳이 터진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우리는 알면서도 모른 채 살아간다. 보장된 안전은 없다. 준비된 안전은 있을지언정. 그런 의미에서 김수환이 돌아본 아비투스는 의미 있고 현재진행 중이어야 한다. &nbsp;&nbsp; &nbsp;신명 말과 소리 사이, 각설이 품바, 강병우강병우는 ‘신명’에 집중한다. 신명은 동북아시아에서 신을 사유하는 한 방법으로 소환된다. 무한히 생성하고 변화하는 자연의 역능이 명명백백하게 구현되고 드러나는 순간을 ‘신명’이라고 한다. 신명은 자연의 현상처럼 나타난다는 측면에서 현상학적이고, 보편과 특수가 얽혀 있다는 측면에서 범례적이다. 강병우는 신명이 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얽히고 폭발하는 공명이 순간 드러나기에 인간이 신명을 지녔다는 것은 인간은 천지만물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그는 각설이 품바야 말로 신명이 발현된 한국미라고 한다. 펌포머의 행위가 공동체와 연대되는 행위이다. “한국미를 다시 말한다는 것은 무엇이 한국적인가를 규정하는 일이 아니다. .. 한국미는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으로 우리 앞에 소환된다”는 이연화의 말처럼 이 책의 연구자들은 각자 개인이 관계하는 사람이나 현상 속에서 ‘신명’을 발견하고 ‘한국미’를 찾아간다. 이 글이 책의 서두에 있었다면 어떻게 받아졌을까 라는 생각도 들면서 마지막에 자리 잡은 이유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편집자의 유의미한 의도가 분명 있을 것이다. &nbsp; &nbsp; &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99/1/cover150/k90213092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8990110</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