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 그들은 왜 칼 대신 책을 들었나 서가명강 시리즈 14
박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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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은 제목에서처럼 메이지유신으로 가는 길을 연 4명의 사무라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이 4명이 모두 메이지유신을 직접 이끈 것은 아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이는 5부의 오쿠보 도시미치 한 명 뿐이다. 2부의 요시다 쇼인은 혁명으로 가는 불씨를 지폈으며, 3부의 사카모토 료마는 메이지유신으로 가는 길을 활짝 연 극적인 인물이다. 4부의 사이고 다카모리는 유신으로 가는 길에는 동참했지만 결정적 순간에 다른 길을 택함으로써 전설로 남은 마지막 사무라이를 상징하는 인물이다.(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바로 그 장군) 이 책은 이렇게 4명의 인물을 통해 일본의 메이지유신이 어떤 과정을 통해 촉발되었는지 재밌게 설명해준다. 역사학자의 글이지만 대중 독자들을 위해서 쓴 글이니만큼 내용도 친절하고 학술 용어들을 쉽게 풀어 써서 친근하게 다가온다. 근대 일본이 어떻게 성립되었으며 메이지유신이 어떤 경로를 통해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한 이들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다만 메이지유신 그 자체에 대한 내용은 소략하다.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는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의 후속편 같은 느낌이다. 즉 후자가 메이지유신으로의 길을 연 사무라이들을 소개한다면 전자는 어떻게 그들이 메이지유신을 성공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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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서울대 인문 강의 시리즈 6
박훈 지음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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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는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의 후속편 같은 느낌이다. 즉 후자가 메이지유신으로의 길을 연 사무라이들을 소개한다면 전자는 어떻게 그들이 메이지유신을 성공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기존의 연구들은 일본이 위기 속에서 급속한 서구화를 통해 근대화에 성공했다고 평하지만 박훈 교수는 다른 답을 내놓는다. 그의 오랜 연구 주제이기도 한 메이지유신은 중국과 조선에서 유행하던 유학의 영향을 받은 사무라이들이 ‘사화(士化)‘함으로써 성공의 길을 열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한 가지 요인만 중요했다고 평하지는 않는다. 18~9세기를 거치면서 일본 사회에 유학이 확산되고 사대부적 정치 문화가 형성됨으로써 사무라이들이 ‘학적(學的) 네트워크’를 결성한다거나 상서(上書) 문화를 활성화시키는 등의 노력이 이어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무라이들은 군주의 친정을 요구한다거나 좀 더 넓은 세계관 등을 형성하게 되었는 데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메이지유신이라는 놀라운(?) 혁명을 성공하게 되었다. 이런 주장은 기존의 개설서나 교과서에는 전혀 실리지 않은 새로운 내용이어서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 메이지유신을 추동하고 설계한 이들이 사무라이들이었으며 이들이 유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런데 왜 유학이 부흥한 중국과 조선은 식민지의 길을, 일본은 제국주의의 길을 걸었을까? 앞 두 나라는 유학에 얽매여 사회는 보수화되고 쇄국이라는 극단의 길을 반면, 일본에서의 유학은 일종의 도구여서 거기에 모든 것을 걸고 극단화하지 않았다. 즉 일본은 유학에서 배운 바대로만 살지 않았며 이를 서구화에도 적용하였고 또한 주체적으로 나아갈 바를 체득하여 근대화에 성공한 것이다. 메이지유신을 모두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그 속에도 부정적 요소는 있었다. 하지만 이후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게 된 배경만큼은 우리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조선의 많은 근대 지식인들이 그렇게 부러워하고 배우고 싶어했던 메이지유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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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사유의 시선 - 우리가 꿈꾸는 시대를 위한 철학의 힘
최진석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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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전직 철학과 교수가 쓴 책이지만 철학 이론서가 아니라 ‘철학하기‘를 다루고 있다. 그것도 아래의 서문에 핵심이 녹아 있다. 장담컨데 이 글만 가슴에 녹인다면 다음 장을 넘기지 않아도 된다. 그만큼 주제가 이 문단에 녹아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철학 수입국으로 살았다. ‘보통 수준의 생각‘은 우리끼리 잘하며 살았지만, ‘높은 수준의 생각‘은 수입해서 산 것이다. 다른 사람이 한 사유의 결과를 숙지하고 내면화하면서도 스스로 ‘생각한다‘고 착각해왔다. 수입된 생각으로 사는 한, 독립적일 수 없다. 당연히 산업이든 정치든 문화든 종속적이다. 이런 삶을 벗어나고 싶다. 훈고에 갇힌 삶을 창의 삶으로 비약시기코 싶다. 종속섣을 벗어나 독립적인 삶을 함께 누리다 가고 싶다. 남들이 벌여놓은 판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그물 틈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일은 이제 지겹다. 우리는 정말 우리 나름대로의 판을 벌여보는 전략적인 시도를 할 수 없을까?(17쪽)

왜 우리는 경제만이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선진국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걸까? 현실 한국 사회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렇다고 이 책이 여기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대신 저자는 우리만의 시선, 눈높이, 철학을 가지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즉 미국, 중국,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이 선진국인 이유는 단순히 경제력과 군사력만 강해서가 아니다. 사회, 문화, 정치, 철학적으로 한 단계 높은 사유의 시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당연히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이 있다. 그럼 우리는? 우리는 중진국 단계에서 넘어가지 못하고 현재 제자리 걸음 중이라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이점에 나는 동의한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철학자답게 다소 추상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예민하고 독립적이며 과거의 나를 버리고 창의적으로 살라고 한다. 그렇다고 책이 허황되기 보이지 않는다. 무릎을 치게 만드는 탁견이 녹아 있다. 그래서 이 책을 타인에게 권하는 것이다. 국가 발전의 기본은 철학적 시선을 갖추는 일이라는 문장은 핵심중의 핵심이다.

아쉬운 점은 ‘철학하기‘를 강조하다보니 동어반복이 많다. 철학을 해야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는 점이 무한 반복된다. 또한 ‘선진화‘가 우리의 도착지인가 의문이 든다. 왜 우리가 그런 국가들을 따라야 하는가. 우리만의 길을 모색할 수는 없는가. 꼭 <공부머리 독서법>이 즐거운 독서를 강조하기보다 독서를 통한 성적 올리기를 주장하는 것처럼, 이 책은 잘못 읽으면 철학적 생활보다 선진국 되는 법이 강조되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좋은 책이다.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비전이 잘 녹아 있다. 철학이 저 멀리 있는 엉뚱한 학자들의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철학적 사유를 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고등학생 시절 열심이 외운 철학사는 그냥 지식일뿐이지 철학이 아니었음을 절절히 깨닫는다. 다시 한 번 우리 교육에 속았음을 알았다. 겉만 번지르르한 교육에 나는 성장하지 못했고 지식만 퇴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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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아이들이 잃은 것들 - 우리가 놓치고 있던 아이들 마음 보고서
김현수 지음 / 덴스토리(Denstory)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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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교육은 늘 ‘어른들‘의 관점에서 주도되고 실행된다. 많은 교육정책들 가운데 학생들의 목소리를 반영한 것이 있을지 의문이다. 그만큼 우리는 늘 ‘어린‘ 학생들을 위한다는 목표 아래 마음대로 교육정책들을 주물러 왔다. 여기에 나 역시도 교육자로, 학부모로 한몫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어떤 부끄러움이나 문제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내가 교육의 주체이며 현장 책임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상황이 지속되며 교육부에서 엄청나게 많은 교육정책들을 쏟아냈다. 온라인수업이라는 미명 아래 새로운 수업 방식들이 논의되었고 교사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했다. 현장의 상황은 멘붕 그 자체였다. 일부 적극 상황에 대처하여 빠른 시간 안에 정상(?)을 찾은 학교도 있지만 대부분의 학교들은 처음 접하는 상황에 우왕좌와 그 자체였다. 생경하고 낯선 것에 대한 거부감이랄까? 쌍방향수업과 단방향수업(콘텐츠중심수업)이라는 개념이 교사들에게 주입되었다. 거부할 수 없는 강요이자 의무였다.

이때부터 교사들은 생존과 학생들을 위한 의무감에 ZOOM, 구글 클래스룸, MS팀즈, 온라인클래스, e학습터, 위두랑 등의 프로그램과 학습플랫폼을 집중적으로 익히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영상편집과 유튜브 활용 같은 분야로 영역을 확장하는 교사들도 생겨났다. 관련 연수가 지원되었고 스스로 유튜브 선생님을 통해 학습하는 분들도 생겨났다. 교육부-도교육청-교육지원청을 통해서 일방적으로 내려오는 공문들에 교사들은 거부할 수 없었다. 시대적 요청이자 요구이기에 받아들여야만 했다. 교육정책들에 교사단체들이 조언하기는 했지만 그들 대표와 교육부장관의 일회성 만남들이 대부분이었다. 현장의 목소리가 얼마나 반영되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렇게 장황하게 글을 쓴 것은 교육관련 부서나 사람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교사들의 목소리를 교육정책에 반영해야하자는 것도 아니다. 지옥과도 같은 작년의 혼란의 거쳐오면서 우리가 놓치고 있던 것이 있다. 그것은 이 글의 앞부분에 간접적으로 언급했던 ‘어린‘ 학생들의 목소리가 없다는 점이다. 과연 현실에서는 교육관료들의 하향식 정책과 여기에 반발하는 현장의 목소리만 있었다. 일부 학부모 단체의 주장도 있었으나 그리 크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래도 학생들의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어른들이 무조건 그들의 의견을 대변해줄 따름이었다.

《코로나로 아이들이 잃은 것들》은 위와 같은 피해망상적 생각에 빠져 있던 나를 쎄게 때렸다. 어른들이 판단하고 어른들이 결정내린 것들은 아이들은 그대로 따라야만 했다. 코로나19 시대에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어른들은 학생들의 ‘학력‘을 무척이나 걱정했다. 교육부도, 교사도, 학부모도 오로지 학력저하만을 걱정하며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에 집중했다. 학교에서 수립한 각종 계획서들도 결국 수업을 어떻게 하나하는 문제와 연결될 뿐이었다.

과연 초, 중, 고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학력일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코로나19를 통해 학력의 문제가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큰 위험이 있다. 그것은 ‘관계‘의 실종이다. 10대 청소년들에게 학교는 수업만 하는 곳이 아니라 다양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만남을 통해 학습력이 증대되고 효과도 개선된다. 우리는 이를 이미 많은 실험과 교육개론서들을 통해 알고 있다. 그런데 학생이 가장 아파하는 관계의 문제를 우리를 놓치고 그들에게 학력의 문제만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어른들은 어린 학생들의 가려운 곳은 못 보고 엉뚱만 곳만 긁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이는 교육관계자 모두가 반성해야 할 대목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이 잃어버릴까 봐 두려한 것은 학습이 아니라 관계였습니다.(71쪽)˝

그렇다고 관계를 친구와의 만남만으로 한정할 수 없다. 학교나 지역사회의 행사 취소는 관계 단절을 넘어 세대의 단절을 불러올 수 있다. 선후배 간의 교감, 지역 이해를 돕는 행사들이 취소됨으로써 관계의 단절은 심화되었다. 아울러 취약계층 및 특수학급의 아동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역시 줄으든 것 역시 사실이다.

책에는 위의 너절한 주장들을 이렇게 간단히 정리한다. 첫째, 어른들끼리만 이야기하고 결정했다(성인 중심 담론). 둘째, 어른들의 걱정은 오로지 학력 뿐인가?( 학력 중심 담론). 셋째, 학생들은 통제의 대상이기만 한가?(통제 중심 담론). 넷째, 돌봄은 부담인가(부담 중심 담론). 이 시대의 교육의 문제를 잘 지적했다고 본다. 교육의 중심에 있는 이들을 우리는 외면하고 있었다. 분명 2021년도 교육정책에는 반영이 필요한 대목들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정답‘을 주진 않는다. 다만 우리가 더 나은 정책을 수립할 때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일러준다. 그점이 이 책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 아닐까 싶다. 상위기관도 학교도 학생들의 입장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저자 김현수의 시선은 참 따뜻하다. 그 어디를 비난하거나 욕하지 않는다. 그동안 우리가 놓치고 있던 것들을 차분히 일러주고 문제 상황들을 다방면에서 접근하여 이해를 돕고자 한다. 이런 그의 마음 씀씀이가 부럽다. 교육자보다 더 교육자같은 의사 선생님에게 감동한다. 아니 그의 언행을 통해 보건데, 그는 교육자의 교육자요 학생들의 위로자임에 틀림없다. 그의 저작들이 한결같이 이를 증명한다.

아래는 책의 한 대목이지만 우리집 분위기와 묘하게 비슷하다.

˝침대에 누워 있으면 앉으라고 하고
앉아 있으면 스마트폰 보지 말라고 하고
스마트폰 보지 않고 있으면 멍때리면서 
뭐 하냐고 하고
책을 꺼내 보면 잠시 뒤에 와서 보고는
아까 보던 페이지를 지금 30분째 보고 있는 거 
아니냐고 해서
제발 관심 좀 끊으라고 하면
부모가 어떻게 관심을 끊냐고 소리치고,
결국 빡쳐서 소리 지르고
산책이라도 하러 나가려고 하면
이런 잔소리를 부모가 아니면 누가 하냐고  하면서
이렇게 살아서 어떻게 할 거냐고
어딜 나가냐고
하는 생활의 반복이 정말 고역이에요.
정말 이러다 코로나가 사람 죽일 것 같아요.
학교가 이렇게 고마운 조직인 줄 몰랐네요.
사람을 살리는 곳이 학교네요.˝
(47~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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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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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는 2014년에 발행된 심리학 내지 자기계발과 관계되는 책이다. 그런 책을 6년가량 지나서야 읽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대중에게 지나친 인기를 끌거나 읽을 시기를 살짝 놓친 책은 아무리 베스트나 스터디셀러라 해도 눈길을 주기 힘들다. 그렇게 묵힌 책이지만 더는 미룰 수 없는 시점에 이르러 외부 자극에 의해 힘겹게! 책장을 넘겼다.

뭐랄까... 이 책은 내게 약간은 반전으로 다가왔다. 인간관계에서 원인-결과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듯한 저자의 주장은 ‘뭐야 이 자식은?‘하는 반발심마저 불러일으켰다. 대체 저자는 왜 일상에 녹아 있는 인과관계에 의한 분석(원인론)을 왜 거부하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해 그는 목적론에 입각한 아들러 심리학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와 융을 비롯한 저명한 심리학자들은 원인과 결과에 따라 인간을 분석하고 거기에 맞는 처방을 해왔다. 반면 그들과 동시대 인물인 아들러는 인간 행위를 목적에 따라 이해했다. 즉 현재 누군가 하고 있는 행위는 과거 어떤 일의 결과가 아니라 그가 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가령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현재 어려움을 겪는 이가 있다면 우리들은 그가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 원인을 분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적절한 진단을 해준다. 이것이 프로이트와 융을 비롯한 우리들의 일반 상식이다. 그런데 아들러는 그게 아니라 그가 지금 하는 행위는 과거와 관계가 없으며 현재 그가 가진 목적을 위해 트라우마를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처음 이런 주장을 읽거나 듣게 된다면 누구나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우리는 인과 법칙에 잘 적응돼 있기 때문이다.

책의 1장(첫 번째 밤)까지는 기존의 상식을 깨지 못한 데서 오는 반발감이 강했다. 하지만 2장에 들어서면서부터 조금씩 이해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그것은 저자가 인간관계와 자기 자신을 보는 새로운(?) 방안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을 아닐 것이다. 다만 조금은 색다른 주장이기에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기시미는 ‘인생(혹은 개인)의 과제‘라는 것을 제시한다. 이것은 쉽게 말해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삶의 과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지 이를 두고 주변인들과 경쟁을 할 필요가 없다. 내 친구와 동료는 든든한 도반이지 경쟁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적을 위해 승진을 위해 경쟁을 벌일 필요가 없으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열심히 가면 되는 것이다. 충격적인 것은 가족이나 친구 간에 이를 적용하는 부분에서이다. 나는 지금 힘들고 어려운데 그들을 위해 억지로 웃음 짓고 잘 보일 필요가 없다고 한다. 나의 과제를 다했음에도 상대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 과제를 하도록 버려두고 나는 내 길을 갈 것을 권고한다. 즉 ‘타인의 과제를 버리라‘라고. 그렇다고 기시미는 절대 극단을 강조하지 않는다. 마음을 읽어보자.


행동 목표
1. 자립할 것
2.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

우리 행동을 뒷받침하는 심리적 목표
1. 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가질 것
2. 사람들은 내 친구라는 의식을 가질 것

126쪽

삐딱한 시선으로 읽으면 기시미의 주장은 분열을 조장하는 무책임의 극치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절대 그렇게 주장하지 않다. 그보다는 누구에게도 얾매이지 않는 자립하는 개인이 될 것을 주문한다. 타인과의 관계에 얽매이는 것을 극복하여 자신의 삶을 찾으라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자유를 부추기는 인정욕구 역시 끊으라 한다. 온전한 자신을 회복하라는 의미이다. 이는 다시 말해 자기긍정으로 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의 제목처럼 ‘미움받을 용기‘역시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에 몰입된 사회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꼭 주목해야 할 점은 ‘인간관계의 목표는 공동체 감각을 향한 것‘이라는 것이다. 나를 넘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아들러는 주장한다. 과도한 자의식은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는 자기긍정을 넘어 자기수용을 주장한다. 자신의 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더 나은 개선책을 찾자는 것이다. 자기이해의 출발점은 자기수용에 있다.

개인의 자립을 주장하는 아들러 심리학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타자공헌‘이다. 그렇다고 먼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들러가 말하는 타자공헌이란 아인슈타인이나 데레사 수녀와 같은 이타적 활동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을 읽어 보자.


우리는 자신의 존재나 행동이 공동체에 유익하다고 생각을 했을 때에만, 다시 말해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여겨질 때에만 자신의 가치를 실감할 수 있다고 말했었네. 기억이 나나? 즉 타자공헌이란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인 셈이지.

272쪽

가장 쉬운 타자공헌이 바로 ‘일‘이다. 사회에 나가 일하고 집안일하는 것 모두. 노동은 단순히 돈 버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공헌하고 사회에 헌신하는 수단인 셈이다. 그렇다고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일을 통해 인생의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일중독자들은 일은 핑계로 다른 책임을 회피하려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읽으니 아들러는 단순한 심리학자라기보다 인생의 조언자 같은 느낌마저 든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주는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는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가되, 이 순간부터 행복해지라‘는 점이다.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거나 의존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고 행복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고달파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춰라! 이는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진지하고 빈틈 없이 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호라티우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현재를 잡아라,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

이쯤 되면 처음 이 책을 읽을 당시의 원인론이니 결과론이니 하는 주장은 머릿속에서 잊혀 버린다. 아들러의 주장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나의 결심과 행동을 통해 주변을 통제하고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용기를 주는 글에 나도 모르게 흠뻑 빠져버린 셈이다. 이렇게 되니 자연스레 아들러의 목적론이 이해되 버린다. ㅎㅎ

이 책은 출간 이후 오랜 기간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만큼 공감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이 책을 영향을 받아 변화된 삶을 사는 이들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자극을 통해 나와 주변을 되돌아보고 작은 용기를 얻는 일도 의미 있어 보인다. 재밌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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