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주의 사고의 프런티어 2
고모리 요이치 지음, 배영미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기획 / 푸른역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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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실 혹은 가공의 차이에 일반적.결정적인 가치를 매기는 것으로 이 가치 매김은 고발자가 자신의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해 피해자를 희생시키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하는 것이다.‘

과연 누가 윗글을 읽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바로 찾아낼 수 있을까? 나의 짧은 지식으로는 이 한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읽고 또 읽어야만 했다. 그런데 한국의 사전에서는 좀 더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이 용어에 대해 다음 백과사전에서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개개 인종의 생물학적, 생리학적 특징에 따라 계급이나 민족 사이의 불평등한 억압을 합리화하는 비과학적인 사고방식‘. 이렇게 읽으니 의미가 좀 더 명확해졌다. 이 용어는 책의 제목과 같은 ‘인종차별주의‘를 말한다.

다윈의 진화론부터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거쳐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이 문명과 야만이라는 흑백논리로 제국주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일조한 것이 생물학적 인종차별주의였다. 이 인종차별주의는 20세기 중반까지 맹위를 떨치며 단순한 ‘차이‘를 마치 절대적인 차이인 양 혈통과 유전이라는 숙명적 요인으로 규정해 나갔다. 또한 그 ‘차이‘에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을 긍정하고 타자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인식하게 하였다. 인종차별주의는 나아가 차이를 통해 피차별자를 비인간화시키는 역할에까지 했다.

인종차별주의는 특권이나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을 옹호할 때 주로 나오는 편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힘을 가진 국가 권력이 약소 민족이나 국가의 식민지화에 대해 이는 어떻게든 역사적 필연일 수밖에 없다는 식의 책임회피 논리로 이어졌다. 따라서 그들에 의한 역사수정주의를 비롯한 역사 부정은 반드시 인종차별주의 맞닿아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배자와 제국은 자신의 양심과 이성의 회로가 정상궤도를 벗어나게 되고 자신의 죄를 잊어버린 채 편안함마저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인종차별주의를 프로이트의 심리학,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일본 근대 문학 분석을 통해 심화 설명해준다. 오리엔탈리즘 분석을 통한 인종차별주의 이해는 일반적 연구 경향에 속한다 할 수 있지만, 유아기의 언어 습득을 통해 내면화하게 되는 차별 의식 분석은 조금 특별한 시도로 보였다. 특히 일본근대문학 전문가인 저자의 이력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랬다. 마지막으로 <<악감>>이라는 일본 근대 소설을 통해서 보는 일본식 인종차별주의는 늘 그들 모두를 같은 인종차별주의자라고만 평가해오던 데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게 한다. 프랑스에서 공부한 한 일본인이 같은 일본인을 폄하하고 부끄러워 하는 장면에서 그들의 뒤틀린 심리를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일본인들 안에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인종차별주의가 언어를 구사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뇌의 사고를 정지시키고 동물의 뇌가 선택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며 항상 인간의 폭력성을 선동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깊은 울림을 주는 문장이다. 단순히 피부색으로 차별하는 인종주의만을 떠올려서는 안된다. 그 안에 내재된 폭력성과 차별 역시 감지하고 구분해야 한다. 우리 뇌가 그것들에 의해 압도되지 않도록!

제법 어려운 책이다. 이론서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두 번 읽었다. 그래야만 머리에 녹아 들었다. 물론 이는 분명 내 좋지 못한 머리 탓이다. 다만 읽고 싶은 분야를 확장해주어 의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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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그는 왜 한국을 무너뜨리려 하는가
호사카 유지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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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었다. 과연 이래도 된단 말인가! 이것이 진정 과거에 대해 반성하고 직시하는 자세일까 싶다.

현재일본법에는 전범과 관련된 항목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A급 전범으로 죽은 사람의 유족들은 지금도 일본 정부로부터 연금을받으면서 잘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현재 일본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과거사 인식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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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107
레오 리오니 글 그림, 최순희 옮김 / 시공주니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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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심 파괴자임이 틀림없다. 우리 아이들에게 동화 읽어주며 의아하게 생각한 부분들을 아내에게 들려주니 아내가 내게 붙여준 것이다. 있는 그대로 이해하면 될 것을 왜그리 이상하게 생각하냐며... 그래서일까? 동화책이나 그림책을 읽으면 자꾸 오류라고 생각되는 부분만 눈에 들어온다. 이번에 읽은 책도 그랬다.

남들 일할 때 생쥐 프러드릭은 상상이나 공상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겨울이 오고 가족들은 쌓아둔 식량을 먹으며 지내다 문득 레드릭의 상상이 궁금해 한다. 이에 프레드릭은 신나 그동안 쌓아놓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고 가족들은 그에게 깊이 공감한다.

책의 해설을 읽자니 이것은 예술의 의미를 일러주는 내용이라 한다. <개미와 베짱이>와는 결이 다르다고 설명해준다. 나는 갸웃거려졌다. 동시에 한국의 대표화가 이중섭도 떠올려졌다. 갑자기.

가난한 예술가는 자신도 가족을 굶긴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예술품을 통해 인류에 헌신하고 사회를 풍요롭게 한다. 생산적인 일에 직접 뛰어들진 않지만 예술을 통해 사회와 삶을 풍요롭게 한다. 그러면 가족은? 내 머리에서는 이 주제가 떠나질 않는다. 남에 의해 연명하는 삶이란 인간 존엄에 어떤 의미일까? 특히나 가장이라면? 물론 예술도 중요하지만.

그래서 난 <프러드릭>이 불편했다.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지 못한 것이다. 또 동심을 파괴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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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백승종 지음 / 사우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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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나 베스트셀러는 있다. 사람의 마음을 울리고 감동케하는 책은 생명력이 길어서 언제 펼쳐도 공감이 간다. 다만 시대에 따라 그 길이가 달라지는 것은 명확해 보인다. 책의 유통량이 적었던 전통 시대의 경우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면 꽤 오랜 시간 읽혀졌다. 출간된 책을 만나기 힘들 경우 필사하여 소장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반면 인쇄술이 발달한 요즘에는 베스트셀러의 생명력이 짧다. 그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베스트셀러를 대신할 다른 책들도 많이 출간되는 점도 무시하기 힘들다. 아무튼 좋은 책을 만나 인생이 바뀌게 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축복이다.

조선 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중에 하나가 <중용>이었다는 것은 명확하다. 국가 운영 및 인재 양성의 근본을 제공한 이 책은 조선 시대 내내 큰 저항 없이 꾸준히 읽혔다. 아울러 고매한 형이상학의 형성과 현실에서의 실천을 근간으로 재해석되고 다양한 주석서들이 편찬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초대형 베스트셀러의 등장인 셈이다. 문제는 이런 책들이 하나의 가능성으로써의 위치를 넘어 종교적 절대성을 가지게 될 때 생겨나는 문제점들이다. 또한 그것이 국가나 정권의 절대권력에 의해 휘둘러질 때 소수의견은 무시되고 다른 가능성을 사장되기 십상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점에서 고민되고 불편했다.

시작은 좋았다. 국가 경영의 단초를 제공해주었고 수 많은 논쟁을 통해 지식 확대의 장도 마련되었다. <중용>은 16세기까지는 최고의 순기능을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17세기로 들어서며 사상적 경직화(혹은 보수화) 현상이 심해진 조선에서는 그 경직화의 수단으로써 <중용>이 작용하게 되었다. 이는 순기능을 넘어 악기능으로까지 가는 시작이었다. 사실 <중용> 자체는 문제가 없다. 이를 읽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문제가 있을 뿐. 또한 그 주해서인 주희의 <중용장구집주>도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이를 현실에 적용하면서 자신의 마음대로 곡해한 이들이 문제지.

17세기 조선의 <중용> 신봉은 종교적 근본주의와 닮아 있어 보인다. 혹은 마치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이론에 경도된 것처럼 보인다. 유학이, 공산주의가, 자본주의가 언제 완벽히 증명된 적이 있었던가. 다만 현실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할 뿐이지 않는가. 주희와 그의 <중용장구집주>를 절대화하는 순간, 주희 저작의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다고 선언하는 순간 사고는 굳고 다양성을 파괴되었다. 사문난적의 시비에 얽혔던 이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학문과 정치 권력을 잡은 이들에 의해 해석은 좌우되니까.결국 <중용>도 이용당한 셈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에 의해. 증면된 바 없는 주장들을 사변하여 세상에 강요한 것이다.

조선의 멸망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중용>의 사례에서 보듯이 사상의 보수화 역시 증요한 사례임에 틀림없다.

이 책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중용>이 조선에 들어와 어떻게 정착하고 순기능하였는지 실록을 통해 실례를 보여 준다. 또한 사상 보수화의 너머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며 자신의 길을 간 이익, 정제두, 박중빈의 사례도 제시한다. 결국 <중용>이 조선에서 소화된 역사적 과정을 5단계를 통해 일러 주고 있다. <중용>의 역사성이라 평가할 수도 있겠다. 마지막으로는 저자가 현재 천착하고 있는 생태주의로의 안내까지 이어진다. <중용>에 내재된 우주관을 생태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저자만의 색다른 자세 아닐까 싶다.

책을 읽으며 아쉬운 대목은 저자의 탁월한 한문 실력에 경탄하면서 끝내는 경전 해석의 어려움에 직면했다는 점이다. 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사고가 불가능한데다 한문 이해력이 떨어지지 친절한 설명조차 버겁기까지 했다. 나의 조선 이해가 얼마나 수박 겉핥기 수준이었는지 절감했다. 한문과 유학 공부라는 숙제를 떠안은 느낌이었다. ㅎㅎ

저자의 색다른 시도를 환영하며 다음 책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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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역사가 바뀌다 - 세계사에 새겨진 인류의 결정적 변곡점
주경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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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처럼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맛깔나게 글 쓰는 사람을 좋아한다. 내 즐거움을 배가 시켜줄 있는 사람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ㅎㅎ 이 책을 읽으며 주경철 교수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다.

역사가 죽은 과거의 재료를 이용하는 데 그친다면 그 존재 의미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과거가 살아 있는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미래를 결정짓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도구로서의 과거가 현재를 해석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면, 모든 과거를 더 연구(분석) 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 자체로 과거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야 한다. 해석의 학문인 역사가 어떻게 과거에 접근해야 하는지는 작금의 한일 관계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지나간 과거는 말이 없지만 현재의 역사가는 그런 과거에 해석을 가함으로써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면 죽은 과거는 기적(?)처럼 되살아나 날 다시 보라며 손짓한다. 모든 역사가의 해석이 같다면 국정 역사 교과서 같은 단조로움 속에서 진저리 치겠지만 다행히도 많은 역사가들은 저마다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인간이 가진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의 다양성 속에서 역사는 더 풍부해진다. 이 책을 읽자니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왜일까?

저자는 1492년, 1820년, 1914년, 1945년을 중심으로 이야기(실제로는 강의)를 풀어간다. 바로 그해부터 역사가 바뀌었다는 것이다.1942년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해로, 지구의 변방이랄 수 있는 유럽이 틀을 깨고 대양과 다른 대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하다. 물론 이전에도 문명 간 교류가 있었지만 그것은 육지를 통한 제한적인 것이었다. 콜럼버스는 자신의 신앙과 선원으로서의 경험 등을 바탕으로 스페인 왕실의 지원을 받아 둥근 지구의 저편을 향해 출발했다. 이것은 유럽이 이제 중세를 벗어나 근대로 들어오는 시작이자 유럽 문명의 본격적 대외 진출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두 번째 1820년은 1492년보다 좀 더 극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 해는 유럽이 타 문명을 완전히 압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17,8세기 이전에는 중국이 경제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유럽의 대외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어느 정도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였다. 그런데 1820년쯤이 되면 이는 완전히 역전되어 유럽은 세계를 압도하게 된다. 이를 1820년 대분기라고 부른다. 그 이유야 잘 아는 대로 산업혁명 때문이면 이를 바탕으로 유럽은 제국주의 길을 치닫게 된다.

세 번째는 1914년으로 오해가 있을 듯하다. 그해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른 곳으로 눈길을 준다. 1914년에 미국의 한 동물원에서 나그네비둘기가 죽음으로써 그 종이 멸종했다고. 즉 인간 문명의 발달로 자연 생태계가 파괴되고 환경 위기가 초래되는 과정을 찾았다. 환경 문제는 21세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산업 혁명을 거치며 주요 국가는 물론 지구 전체에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문명화란 숲이 없어지는 것‘이라 주장한다. 문명화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인간의 욕망은 동식물들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이다. 문명화는 이 욕망의 다른 얼굴 아닐까? 파울 크뤼천이라는 네덜란드 화학자의 주장이 새삼 와닿는다. 현재는 ‘인류세‘라는 새로운 지질 시대로 들어섰다는.

마지막으로 1945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인류는 여전히 폭력의 세기에 살고 있다. 학자들에 따라 인구가 적었던 과거의 전쟁이 상대적으로 더 사망자 수가 많았다고 하기도 하고, 무기의 발달에 따라 현대전에서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2차 대전으로 5,500만이 전사했으며 제노사이드와 같은 학살은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종의 차원을 넘어 종교나 민족을 거론하며 자랑스레 ‘청소‘라는 것을 자행하고 있다. 게다가 군사 기술은 과학 기술과 병행하여 발전함으로써 그만큼 인류는 더 위험에 처해 있다. 이것은 문명화의 숨은 얼굴 아닐까? 아니 차라리 야만화라 부를 수 있을 듯하다. 현대로 올수록 개인은 예절과 교육 등을 통해, 사회는 경제 발전을 통해 폭력을 포기하도록 문명화되고 있지만 반면 국가는 그 폭력을 독점하는 양상이 펼쳐지고 있다. 이는 한국의 현대가 증명하고 있다.

역사는 이처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주어진 대로의 삶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고 가꾼 현실을 살아가는 식재료로써 역사는 아주 좋다. 역사의 흐름에 둔감한 내가 이렇게 콕콕 집어주는 과외를 받는다는 것은 축복이다. 과거를 내가 주인공으로써 다듬고 잘 활용한다면 그 과거는 죽지 않은 날 것이 될 수도 있다. 역사는 전공자만의 것이 아니다.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나눠야 할 재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의미가 있다. 인류 사회가 나가야 할 바를 고민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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