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바캉스 에디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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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딱 한 권 읽은 그의 책이 내겐 특별함을 넘어 괴상함으로 다가와 더 이상 그의 글을 읽기 싫어졌다. 그렇게 그와 멀어졌다. 그러다 십 년 넘은 세월이 흘러 그를 티비에서 보게 되었다. 속칭 ‘알쓸신잡‘이라 불리던 그 프로그램은 출연자들이 함께 여행을 떠나 그날 저녁 여행지의 모처에서 토크쇼를 벌이는 형식이었다. 티비를 통해 본 작가 김영하는 의외였다. 편벽된 작가가 아니라 젠틀함을 넘어 박식함과 깊은 이해력, 심지어 나름의 통찰력까지 지닌 사람으로 보였다. 유시민 같은 달변가도 있었지만 프로그램 내에서는 김영하만의 색깔에 다른 이들이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을 구축했다. 책 한 권으로 그를 평가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렇다고 바로 그의 다른 책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티비 프로그램을 통해 그에 대한 편견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여행에 관심이 많다. 여행에 관한한 현재 한국은 춘추전국 시대라 할 만큼 많은 이들이 여행을 떠난다. 다양한 여행의 이유가 있는만큼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여행을 떠난다. 그래서일까 서점에는 여행 관련 도서 코너가 따로 있고 인터넷 블로그에도 여행 정보가 넘친다. 여행과 관련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경로가 다양해진 셈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여행의 의미를 말하라 하면 쉽게 못하겠다. 그것은 여행 자체에만 중심을 두었지 왜 떠나야만 하고 거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등 여행의 이유를 숙고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여행이 주는 유익을 굳이 되새기고 떠올릴 필요는 없다. 다만 누구든 그런 자신의 축적된 경험을 되돌아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하는 나름의 이의 제기일 따름이다. 저자 김영하는 오랜 시간 많은 여행을 통해 느낀 자기 ‘여행의 이유‘를 이 책에 길게 서술했다. 물론 일목요연하게 내 여행의 이유는 이것이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양한 이유와 사연이 있었을 터니 그에 맞게 9장으로 구분했다.

위에서 말했듯이 김영하는 자신의 주전공을 넘어 다양한 분야에 박식함을 자랑한다. 그리고 그 박식의 내용들을 연결해 자신만의 눈으로 세상을 통찰한다. 이 책 역시 그런 점이 눈에 보인다. 나는 그의 이런 점을 좋아한다. 내가 가진 약점을 그를 통해 확인하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인 듯하다.

˝(여행은)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경함한 이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여행이 인생의 원점이 된다. 일상으로 돌아올 때가 아니라 여행을 시작할 때 마음이 더 편해지는 사람이 잇다면 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이번 생은 떠돌면서 살 운명이라는 것. 귀환의 원점 같은 것은 없다는 것. 이제는 그걸 받아 들이기로 한다.˝

이렇게 저자는 자신만의 여행의 의미를 정의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여행은 유의미해지고 내 인생의 중요한 밑천이 된다. 그냥 졸졸 따라다니다 먹고 사진만 찍고 돌아오는 관광과는 차원이 다르다. 발품 팔고 땀을 흘려서 얻은 경험치는 내 안에서 단단한 영역을 구축하고 미래를 위한 힘이 되어준다. 우리는 이것을 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김영하의 여행론은 평범치 않다. 그의 여행 이력은 더욱 독특하다. 그의 어린 날의 경험들이 그를 색다른 여행자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의 글은 묘한 공감을 일으킨다. 아니 그를 넘어 읽는 이를 저 멀리 떠나게끔 강하게 충동질하는 듯하다. 사진이라고는 달에서 찍은 지구 사진 딱 한 장 뿐인 이 여행론은 묘하게 여행 가라고 지그시 떠민다.

이제 자신의 여행을 되새겨 보자. 그리고 우리의 여행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머리에 새겨보자. 그것은 단순히 어느 국가, 어느 도시로 떠나는 여행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 전체를 되돌아보는 경험일 수도 있다. 김영하의 매력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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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그는 왜 한국을 무너뜨리려 하는가
호사카 유지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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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일본인들이 독일처럼 진정한 사과와 반성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한국에 대해 비인도적 행동을 했다는 인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대 보수 정권이 식민 지배와 침략 전쟁의 역사를 은폐.왜곡해 왔기 때문이다.˝(23쪽)

현대 일본의 한국 인식에 대해 저자 호사카 유지 교수는 위와 같이 비판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아베 집권 이전 한때 상당히 우호적인 한일 관계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정치권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불협화음은 지속되고 있다. 특히 아베 집권 이후 그간 이어져오던 정부 간 협상이나 민간교류마저도 끊어져가고 있다. 대체 무엇을 위해 아베의 일본은 극단으로 내달리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저자는 조금 색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통해 철저한 바닥을 경험했던 독일에 비해 일본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본이 제정신을 차리려면 일본처럼 한 번 더 치욕스러운 경험을 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힘들지만 현 아베 정권을 작태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 보상과 동의를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치졸하기 짝이 없는 아베 정권의 처사는 독일식의 불행을 긍정하게 만든다.

한국이 일본의 처사에 불만을 터뜨리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박근혜 정부 당시 맺어진 위안부 합의가 있다. 한국의 많은 언론과 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위안부 합의가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법적 책임이 있는 ‘배상‘이 아니라 ‘합법적‘이라는 ‘보상‘의 개념을 전제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일본이 지불하려는 10억 엔은 위안부 제도가 합법적이었지만 불행을 겪었던 분들을 위로한다는 의미였고 이를 박근혜 정부는 덥석 받아들여 버린 것이다. 양국 정부는 수용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한국의 민간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처사였다. 이점은 1965년의 한일협정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당시 일본이 준 5억 달러는 경제 협력용이었지 배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일본은 본질적으로, 법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저자의 기본 인식이다.

이런 노선을 견지하고 있는 아베 정권은 한술 더 떠서 아예 한국을 굴복시키려 한다. 그런 결과 아베는 한국을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고 수출규제 품목을 지정하여 한국 경제에 타격을 주려 하였다. 게다가 반도체를 비롯한 한국 경제의 부상이 일본 경제에 주는 악영향을 사전에 막고자 이런 조치를 내린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아베가 원하는 대로 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처음 의도가 불순하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한국의 경제 자립을 앞당기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지만 양국의 협력적 경제 관계에 분열을 일으키고, 자유경제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그러면 아베는 왜 이런 짓을 하게 된 걸까? 저자에 따르면 아베는 일본 자민당의 보수 본류가 아닌 극우파 출신으로 2차대전 전의 일본을 미화하며 당시로 돌아가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를 일본회의라고 하는 극우파 단체가 지원하고 있으며 방계에서 각종 혐한 단체들과 협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극우의 기원에는 에도 막부 시기에 꽃 핀 국학이 한몫을 했다. 요시다 쇼인을 필두로 한 극우 세력은 메이지 유신을 성공 시키며 일본에서 권력을 잡았다. 전쟁 후에도 그들은 궤멸되지 않고 소수였지만 명맥을 유지하였고 결국 아베에 이르러 그들 세력의 꽃을 피웠다. 일본의 화려한 부활을 위해 평화 헌법을 개정해 군대를 갖추고 말을 잘 듣지 않는 한국을 손봐줄 필요가 있다고 아베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를 우리는 동북아시아의 동반자로 보기 힘들다. 이렇게 저자는 현 일본 정부를 분석하고 있다.

저자의 말대로 아베는 제2의 히틀러가 될까?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차차 드러나겠지만 지금까지는 아예 틀렸다고 보기 힘들다. 자국의 화려한 과거만 생각하고 지난날의 잘못을 되돌아보지 못하는 것은 분명 더 큰 화를 불러오게 된다. 부디 일본이 독일처럼 두 번의 전쟁 경험을 갖지 않길 바란다.

깊이 있는 책은 아니지만 시의적절한 책이다. 일본의 현정권과 아베에 대한 기본 지식을 익힐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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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한 2020-01-24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일본은 이미 여러 방법으로 32번이나 사과했어요, 우리가 모를 뿐이지.. 아니 총리가 와서 자필로 쓴 편지를 위한부 할머니들에게 전달하며 돌아가실때 까지 책임지겠다고 했는데도 이걸 진정성이 없다느니 헛소리 해대고 천황이 통석의 염이라는 고급단어를 써서 미안함을 표하는데도 진정성이 없다고 할거같으면 대체 어떻게 사과해야 진정성이 있나요? 님께서 진정성 있는 사과가 뭔지 알려주시죠.,

knulp 2020-01-20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접한 글에 친히 댓글까지 달아주시고 감사합니다. 님의 당당한 의견이라면 굳이 비밀글로 다실 필요까진 없을 듯한데요. 님의 의견은 그 자체로 존중합니다. 일본의 주장이 맞다고 생각하시면 그리 사시면 됩니다. 굳이 진정한 사과를 물으시게 답하자면 일본의 사과는 늘 손바닥 뒤집듯 쉽게 뒤집혀 왔습니다. 식민지도 전쟁도 위안부도 징용 문제도. 게다가 진정한 사과엔 횟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피해자는 됐다고 해도 본인은 계속할 수 있어야. 그런 과거와 단절도 해야하구요. 그게 독일과 일본의 차이 아닌가요?

이광한 2020-01-24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쓸때 비밀번호를 쓰면 비밀댓글이 되는건가요? 몰랐네요. 사실과 개인적 생각은 다릅니다. 님께서 제대로 아신 상태에서 개인적 생각이 다른건 당연히 존중해야 겠지만 사실을 잘 모르시거나 잘못아시는 거라면 그것은 존중에 문제가 아니라 그게 아니라고 말을 해줘야 할 문제입니다.
님께서 말씀하신 일본이 뒤집었다? 라고 하신것은 어떤 일본인 개인이 하는 말이지 국가적으로
조약적으로 뒤집은 적은 없습니다. 일본 인구가 1억 2천만인데 별 생각을 다갖고 있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조약적으로 뒤집은 것입니다.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2005년 노무현 정부때 징용과 위안부 피해 보상 위원회를 만들었죠. 그때 위원장이 당시 총리였던 이해찬이었고 그 위원회 위원중에 한사람이 문재인이었습니다. 그때 그 위원회의 결론이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일본의 보상은 끝났으며 따라서 이제 개인보상은 한국정부의 몫이라고 결론을 내렸고 7000억 가까운 돈으로 들여 이미 보상을 했습니다. 그래놓고 문재인 정부에 와서 그걸 대법원 판결로 뒤집은 것입니다. 만약 님이 일본정부라면 이런걸 받아들일 수 있느지요? 그리고 한일 청구권 협정의 협정문 한번 봐보셨나요? 당시 일본정부는 당시 외환보유고의 절반을 보상으로 지불했습니다. 그건 아시는지요? 이 보상문제는 생각보다 아주 복잡한 문제입니다. 그런 원문들과 과거 한국과 일본이 어떻게 지내왔고 일본은 어떤 보상을 했었으며 이러한 역사를 먼저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박근혜 정부때 왜 위안부에 대해 그렇게 합의했는지 그건 아시는지요? 팬엔드마이크나 이승만학당에 가보면 징용과 위안부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님이 어떤 정치성향을 갖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그 자료들도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판단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독일이요? 독일은 이스라엘에 대해서만 사과했습니다. 폴란드나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사과한적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쎄니까 사과한거죠.ㅋㅋ 그리고 그리스 좌파정부가 지금 한국정부가 하는 것처럼 독일에다가 피해보상 청구했다가 독일로부터 단칼에 거절당했습니다. 독일도 무조건 사과하지 않으니 그 부분도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이광한 2020-01-24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일 청구권 협정때 일본정부는 징용이나 위안부 피해자 개인에게 직접 보상하려고 했었죠.
그런데 그 돈으로 포항제철을 짓고 경제발전에 사용하려 했던 한국정부가 반대했었습니다.
일본정부가 한국정부에 보상금을 주면 그 보상금으로 한국정부가 피해자 개인에게 주겠다고
했었습니다. 일본정부는 반신반의 하면서도 합의를 해줬고 당시 일본 외환보유고의 절반을
한국정부에 줬습니다. 그리고 그 협정문에 앞으로 나오는 개인적 보상문제는 한국정부가
책임진다고 하고 최종 합의를 본겁니다. 그래서 윗글에 노무현 정부때 그 위원회가 그렇게
결론 내린겁니다. 님 만약 우리가 베트남에 사과한다고 지금 가지고 있는 외환보유고의 절반을
떼준다면 님은 찬성하실 건가요? 국제관계는 이성적으로 해야 합니다. 감성적으로 할 부분이
아닙니다. 베트남은 미국과 전쟁했음에도 현재 미국과 한편이 됬고 미국도 일본, 독일과
그렇게 처절하게 싸웟음에도 그 전쟁이 끝나고 얼마안되서 자기 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일본은 이미 충분히 사과했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받아주고 미래로 나갈 때가 온겁니다.
제발 이런 저런 제대로된 자료를 찾아 보시길 바랍니다.

knulp 2020-01-27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님과 저의 주장은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네요. 어쩌죠 저는 님의 이런 구구절절한 주장에 동의하기 힘든데요. 특히 이승만학당같은 극우단체의 주장엔 더욱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이승만을 따르는 이들과는 대화하기 힘들죠. 죄송합니다. 저와 대화(?)하시고자 긴 글을 써주셨는데 제가 제대로 응해드리기 힘드네요.

이광한 2020-01-27 18:1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아~~ 네 그러시군요..ㅋㅋ 그니까 님은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는 내 알바아니다..
난 그냥 그렇게 생각한다? 이거시군요.. 님같은 분이 진보니 뭐니 떠드는게 참 보기 그렇네요. 저도 더이상 말은 안하겠습니다만 최소한 극우가 뭔지 단어뜻은 알고 말씀하셔야죠..ㅋㅋ 극우는 히틀러 같은 자들을 말하는겁니다. 그럼 님은 극좌입니까?
물론 저는 우파성향입니다만 경향이나 한겨레가 진실을 말한다면 그것은 진실이라 인정해줍니다. 진영이 다르다고 무조건 거짓은 아닙니다. 제가 제시해드린 논거에 대해서는 한마디 반박이 없으시네요..ㅋㅋㅋ 그럼 이해찬하고 문재인이 당시 배상은 한국책임이라 인정하고 7000억 가까이 들여 보상한건 뭐지요? 이걸 보고도 극우? 님은 진실따윈 I don‘t care네요..ㅋㅋㅋ 제가보기엔 님에겐 문재인과 이해찬 더 나아가 노무현도 극우겠네요..ㅋㅋ 이만 글 마치겠습니다. 대꾸하시든지 마시든지 님 알아서 하세요..^^

knulp 2020-01-27 21:19   좋아요 0 | URL
님은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는 분이시군요.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이리 폄훼하시다니요. 의견대립이 생겨 불편하면 안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님이 이 일본의 정책을 지지하든 이승만학당을 좋아하든 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예의를 갖추시기 바랍니다. 님의 주장엔 반박할 가치를 못느낍니다. 이미 많은 언론에서 말한 걸 제가 재방송해봐야 무슨 의미일까요? 신문 보세요. 참...
 
당신이 옳다 (들꽃 에디션)
정혜신 지음 / 해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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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살면서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과거부터 터부시되던 행동이었다. 상대에게 자신의 수를 들킬 수도 있고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거라는 낙인 효과를 유발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남자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감정보다는 이성이 더 우선시 되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고 가정과 학교에서도 그리 교육되었다.

시대가 변해서일까? 정신의학자 정혜신은 이에 대해 반기를 든다. 아랫글을 읽어보자.

˝한 사람이 제대로 살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스펙이 감정이다. 감정은 존재의 핵심이다. 한 사람의 가치관이나 성향, 취향 등은 그 존재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중요한 구성요소들이지만 그것들은 존재의 주변을 둘러싼 외곽 요소들에 불과하다. 핵심은 감정이다. (중략) 내 감정은 오로지 ‘나‘다. 그래서 감정이 소거된 존재는 나가 아니다. 희로애락이 차단된 삶이란 이미 나에게서 많이 멀어진 삶이다.˝(57쪽)

처음엔 이 글이 와닿지 않았다. 나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는 이성의 판단과 거기에 따른 행동이 중요하니 내부의 감정 따위에 휩쓸리면 에너지 소모만 크고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앞서서다. 읽고 또 읽었다. 세 번을 다시 읽으니 그제사 저자의 생각이 내 마음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감정은 어쩌면 이성을 통제할 수도 있고 내 일상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한국 남자로서 나는 감정 표현에 서툴렀다. 불안해지면 입을 닫았고 주위와 교통을 삼갔다. 그것은 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책을 ‘공감‘이라는 단어 하나로 관통하고 있다. 그것도 우리가 익히 상대방을 배려하고 그들을 이해하는 수준의 공감을 넘어선다. 형식적으로 해주는 공감으로는 아픈 이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고, 몰입이 지나쳤을 때는 내담자의 감정에 빠져들어 눈물을 거두지 못한다. 저자는 이를 공감이라 하지 않는다.

˝공감은 내 생각, 내 마음도 있지만 상대의 생각과 마음도 있지만 상대의 생각과 마음도 있다는 전제 하에서 시작한다. 상대방이 깊숙이 있는 자기 마음을 꺼내기 전에는 그의 생각과 마음을 알 수 없다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관계의 시작이고 공감의 바탕이다.˝(267쪽)

그래서 저자는 상대방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충조평판(충고,조언,평가,판단)하지 말 것을 조언한다. 상대의 마음은 늘 옳다는 전제하에서 시작하라고 한다. 이는 그의 행동까지 승인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아프고 화난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공감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이성적 사고가 끼어들면 위험해진다. 섣부른 도덕적 잣대가 오히려 더 위험하다. 아픈 내담자의 마음을 더 닫게 만들고 상처를 심화시킬 수 있다.

공감은 내담자의 마음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오히려 자신과 만나게 된다. 실제 책을 읽는 내내 나의 과거와 마음을 되돌아보게 되는 경험도 한다. 공감 받지 못한 상담자가 제대로 된 상담을 할리 만무하지 않은가. 내가 회복되고 건강해지면 상대를 이해하는 범주나 받아들이는 크기가 달라진다. 따라서 공감의 시작은 내담자의 마음 수용이면서 동시에 자기 이해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분명 과거나 현재의 자신과 마주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내담자들은 정말 마음이 많이 아픈 사람들이다. 특히 자기 주변과 조화하지 못하고 갈등 상황 속에서 힘들어하는 이들이 주대상이다. 어떻게 그들을 위로하고 공감해야 하는지 친절히 설명해 준다. 사례 중심은 아니지만 적잖은 사례를 통해 이해의 깊이를 더해준다.

좋은 책이다. 그런데 의외로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책을 읽으며 내 마음과 상황을 되돌아보느라 그랬나 보다. 단순히 독서만 하고 넘길 책으로는 아깝다. 가족이나 주위에 저자가 주장하는 공감을 실천할 마음이 강하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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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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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요.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 나오는 게 중요하지 않소.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69쪽)

이수근이나 김희철 같은 연예인들을 보며 많이 느꼈다. 공부가 아닌 것에 저렇게 재능이 많은 이들인데 저들에게 계속 공부만 강요한다면 그들은 지금 어떻게 되어 있을까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주위 사람과 사회와 불화하는 주인공 스트릭랜드를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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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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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태어나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고 그 길을 간다는 것은 여간 큰 행운이 아니다. 실제 주변에서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는 이야기들을 자주 듣는다. 그것은 자신의 성향이나 관심사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고 또한 외부에서 강요된 길을 가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반증이도 하다. 전통사회처럼 신분에 의해, 남녀의 구분에 의해 정해진 길만 가야하는 시대가 저물고 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달과 6펜스》는 내게 의미 있게 다가왔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 쉽게 자신의 기반이 되고 있는 과거와 현실을 끊어내지 못한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는 불안하고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 마흔을 넘어 자기 꿈을 개척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자신의 현재와 결연히 단절하고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선다. 심지어 가족과 자신의 나라마저 등지고. 이런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요.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 나오는 게 중요하지 않소.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69쪽)

런던의 증권 중개인이자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스트릭랜드는 어느 날 갑자기 편지 한 장으로 아내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가정을 버린 채 파리로 떠나 버린다. 파리에서 그는 그림에는 전념하지만 가난한 생활로 인해 쓰러진다. 이때 그의 천재성을 알아 본 스트로브 부부의 헌신적 보살핌으로 되살아난다. 하지만 그는 스트로브 부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스트로브 가정을 풍비박살 낸다. 이후 스트릭랜드는 우연한 기회로 배를 얻어 타고 타히티로 가게 된다. 이곳에서의 3년은 그의 일생 중에 가장 왕성히 작품 활동을 하던 행복한 때였다. 그래서일까? 그는 문둥병에 걸려 고통 받으면서도 그는 필생의 대작을 자신이 살던 오두막의 벽에 남긴다. 비록 그의 유언으로 오두막과 함께 불태워지지만.

이런 스트릭랜드의 행동에는 공감을 얻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가족을 버렸다는 점과 자신을 헌신적으로 보호해준 친구의 가정을 파괴했다는 점은 그의 예술적 재능을 넘어 큰 인간적 흠결로 지적될 수 있겠다. 예술이 인간의 존엄을 넘어설 수는 없지 않은가! 반면 저자 서머싯 몸은 이 책에서 인간성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화자를 통해 그 점을 언급하지만 결론부로 가면 스트릭랜드의 예술성에 감화되는 것으로 끝맺는다. 타이티에서의 성취는 역사적 예술품으로 인정받지만 그의 인간적 이력은 거기에 묻히고 만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읽으며 이 지점에서 독자로서의 내적 갈등에 시달렸다. 나 역시도 책의 말미에 스트릭랜드의 엄청난 예술홈에 감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땅의 근대소설가 김동인은 《광화사》, 《광염소나타》를 통해 극단적 예술지상주의를 드러냈다. 주인공 솔거와 백성수는 자신들의 예술 세계를 위해 폭력과 살인 같은 행위를 마다하지 않는다. 예술을 위한 이런 광기를 우리는 수용할 수 있을까? 개인의 의지와 도덕성이 대결하고 현실과 예술성이 마주치는 《달과 6펜스》를 읽자니 내내 김동인이 머리를 맴돌았다. 지역은 다르지만 동시대를 살았던 작가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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