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김훈 世設, 첫 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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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훈의 글에 절대공감한다. 언론의 사명은 지금 현실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일이다. 이를 숨기는 것은 현실 외면이다. 언론의 사명을 저버린 일이다. 또한 숨겨둔 것을 나중에 흘리는 일 역시 비열한 상술이다. 이땅의 메이저 언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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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7-09-04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7년-그들이 없는 언론‘ ‘공범자들‘을 봤어요
이 글이 절절하게 받아들여지네요

knulp 2017-09-06 07:22   좋아요 0 | URL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충분히 알 것 같습니다. 이땅의 언론 부역자들의 행태에 대해.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역사 속에 살아 있는 인간 탐구 15
한영우 지음 / 지식산업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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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 정도전 전문가인 한영우 명예교수의 저작이다. 저자는 스스로 전기라고 하였지만 정확히 말하면 전기적 성격을 지닌 정도전 개설서 정도 되겠다. 글을 읽다보면 저자가 얼마나 정도전을 존경하는지 용어 선택에서 알 수 있다. 그를 향한 미사여구가 남다르다.

독서가들에게는 책의 1장을 추천한다. 이 부분이 전기다운 부분이며 정도전의 일생에 대한 저자의 판단이 잘 녹아 있다. 특히 그와 관련된 답사를 하고픈 이에게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으로 본다. 2장부터는 정치, 사회, 경제, 철학에 대한 부분이라 정도전의 사상에 대해 관심 있는 이들에게만 추천한다.

학문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분의 글이라 그런지... 일반인을 상대로한 글로써는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다. 문체가 딱딱하고 역사전문용어가 지나치게 많이 나온다.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역시 많이 아는 것과 그것을 알기 쉬운 글로 정리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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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근동의 신화와 종교 살림지식총서 218
강성열 지음 / 살림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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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이후 서양 학자들에 의해 발견된(!) 고대 근동 세계는 오늘날의 고대 그리스 문명을 뛰어넘는 찬란한 문명을 일구었다. 하지만 발견된 이상 그것을 발견한 이들의 시선을 뛰어넘기 힘들다. 에드워드 사이드에 의해 명명된 ‘오리엔탈리즘‘은 그런 불편하고 왜곡된 의도를 폭로한다.

역사학의 경우 우리의 시선으로 고대 근동을 보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다. 전공자도 손에 꼽을 정도로 소수이다. 그러니 왜곡된 시선으로 본 서양의 자료를 이용해야만 했다. 우리 학문이 가진 한계다. 대학에서 동양사를 가르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아시아사의 확장판이지 본격적 아시아사 연구는 아니다. 즉 중국사와 일본사를 넘어서는 학문 연구는 힘든 실정이다. 여기에 고대 근동 역시 예외가 아니다. 국내에서는 일반대학의 종교학과와 신학대학의 신학과를 중심으로 고대 근동 세계를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지만, 역사학에서의 고대 근동은 아직 요원한 분야이다. 그럼에도 경제적, 종교적, 학문적 관심이 점점 커지면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중심으로 하는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작은 문고본은 그런 관심의 작은 증거물이다.

고대 근동 세계의 거주민들은 제각기 자기들의 삶의 자리에 적합한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삶의 안전과 평화 및 풍요를 보증받기 위해 다양한 신들을 섬겼다. 그리고 그 신들을 섬기는 데 필요한 여러 종류의 신화와 제의를 개발하였다. 아울러 그들은 신들의 뜻을 알기 위한 방편으로 신탁과 점술 및 주술을 널리 사용하였다. 특히 죽음-부활 의식을 포함하는 다양하 사후 세계 개념을 발전시킴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것들은 지역별로 다소간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 예외가 없는 현상들이었다. 시공을 넓혀 보면 명멸한 세계의 많은 종교들도 그러한 전철을 겪었다.

그런데 이들 종교 중에서도 출애굽 해방 이후 광야에서의 유랑 생활을 거쳐 팔레스타인 지역(성경에 나오는 ‘가나안‘ 지역)에 집단 이주한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와 문화는 주변 세계와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유대교는)다른 신들의 존재를 배척하는 야웨 유일신 신앙을 확립하였다. 주변 민족들이 여러 신들을 섬기며 성적 표현을 통해 풍요와 다산을 기원했다면 이스라엘인들은 야웨를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을 영위하였다.

둘째, 종교생활의 규범과 표준이 되는 성경을 확정하여 성경 밖의 다른 문서들이나 자료들롭터 비롯되는 위험을 차단하였다. 여타 종교들은 왕권(혹은 국가)과 결탁하여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많이 생성해냈지만 종교생활을 유지해나가기 위한 바탕으로서의 경전을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스라엘인들은 경전을 만들어 신앙생활의 기본으로 삼았다.

셋째, 풍요와 안정의 추구보다는 야웨 하나님의 구원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성격을 갖는 제의 개념을 강조하였다. 즉 성경의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나오는 것처럼, 제의가 본질적으로 출애굽 구원의 은총에 대한 반대급부로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약소국이었던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사이에서 문화적, 경제적 교류와 전쟁을 통한 강압이 있었음에도 자신만의 고유한 종교적 전통을 지켜내고 오히려 강화해 나갔다. 분명 독특한 문화 현상이다. 이점은 여진이나 거란처럼 중국화되지 않고 주체성을 지켜온 우리 문화를 이해하는 비교 자료로 수용할만 하다.

이 책은 90쪽이 조금 넘는 아주 얇은 책이다. 본문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악카드, 앗수르), 이집트, 시리아-팔레스타인(가나안) 그리고 이스라엘까지 고대 근동의 문화를 종교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분량은 적지만 제법 다양한 신들이 출현하여 결국 내용을 제대로 소화해내기가 쉽지 않다. 솔직히 나는 신들 이름의 대부분을 잊어버렸다. 기억력이 떨어지는 나를 어쩌겠는가. 책의 제일 뒷 장이 이스라엘과 성경에 대한 내용이란 점은 이를 좀 더 강조하고픈 신학 전공인 저자의 의도로 보인다. 즉 기독교가 핵심이란 것이다. 고대 근동 세계에 관심을 가진 이라면 가볍게 읽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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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들어 겨우 하루키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 를 읽었을 뿐이다. 더위에 심신이 늘어지니 일상이 영 불만스럽다. 이젠 밤도 힘들다.

이런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일과가 일찍 끝난 오늘 인근 시립도서관을 찾았다. 그런데...헐~~~ 앉을 자리가 없다. 세상에.... 분명 평일 한낮인데 대부분 남녀 성인들이 자리 차지하고 있다. 물론 개인열람실이 없어진 탓에 공부하는 이들도 있지만 피서를 위해 이곳을 찾은 부모와 아이들이도 한몫한다. 아...... 나는 어딜 가야 하나. 2층 인문학 열람실을 쭈욱 돌았지만 자리가 없다. 결국 리모델링한 도서관 내부와 책 구경만 하다 나왔다. 여기에도 내가 있을 곳은 없었다.

결국 뜨거운 뙤약볕만이 나를 반긴다. 땀흘리며 집에 돌아오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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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8-08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도서관에 가면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은 구석진 자리를 찾습니다. 그곳에서 책을 읽으면 마음이 편해져요. ^^

knulp 2017-08-09 00:41   좋아요 0 | URL
네 공감합니다. 저도 구석진 곳을 좋아하는 편이거든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곳^^
 
생태주의 역사강의 - 근대와 국가를 다시 묻는다 한티재 교양문고 1
백승종 지음 / 한티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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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과거의 것만 연구하는 데 그친다면 그 역사는 반쪽짜리 의미밖에 구하기 힘들다. 과거에 매몰되어 그 속에서 허우적 거린다면 내가 밟고 서 있는 이땅에서의 존재 의미가 사라진다. 비록 과거를 연구하만 역사 연구는 현재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어떤 연구자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할 때 역사학의 의미가 생겨나지 않을까?

그렇다고 모든 역사 연구에서 현재적 의미를 찾기란 쉽지 않다. 나같은 일반 독자에겐 적잖이 부담스런 일이다. 그러니 그런 준비가 된 책을 골라 읽는 일이 독자들에게는 좋을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우선 한국 사학계에서 생소하기 짝이 없는 ‘생태주의‘ 역사학이란 용어가 등장했다. 여전히 한국 사학계는 대부분의 연구 주제는 대체로 한정되어 있다. 포스트모던의 영향으로 일부 다르게 보기를 시도하는 소장학자들도 있지만 주류는 여전히 정치사다. 여기에 저자 백승종은 반기를 든다. 물론 정치의 영역이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는 현재의 관점에서 한국과 세계의 위기는 과잉 자본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하며 시야를 돌리기를 주문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생태주의 역사학이 등장하게 된다. 즉 녹색의 관점에서 역사학을 다시 쓰자는 것이다. 주류에 대한 반발이라기 보다 완전히 다른 흐름의 개척인 셈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동학농민운동과 박정희 시대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다. 왜 박정희 시대가 비판받아야 하는지, 동학농민운동은 다시 조명받아야 한는지 그는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생태적 시각은 이명박 정권 최악의 선택인 4대강사업과 일본의 후쿠시마 비극에 까지 이른다. 결국 자본주의의 과잉은 자연 생태계에 씻기 힘든 생채기를 남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 인류적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서 자연스레 탈핵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생태적 시각에서 봤을 때 인간의 넘치는 욕망이 불러온 참사는 수용하기 힘든 일이다.

독자인 내게 신선하게 다가온 부분은 책의 7, 8강이다. 저자는 한국사에게 뚜렷한 족적을 남긴 학자이지만 그의 시야는 한국을 넘어 있다. 그가 비록 독일에 유학한 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한국 역사가의 입장에서 그리고 생태주의자 입장에서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서구중심적 시각을 비판한다. 이것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 문제의 연장 선상이다. 저자의 시각이 지나치게 좌편향적이라 비판할 수 있겠으나 이는 옳지 못한 지적이다. 저자의 관점은 분명 인간 중심이요 환경 중심이다.

한국사학자가 한국인의 시각으로 세계사를 본다는 점은 매력적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서구의 관점에서 서구를 바라보는 시각에 익숙해 있었다. 자세히 보면 언론 역시도 서구의 시각을 소개하는 데 그칠 뿐이다. 나아가 한국의 많은 서양사학자들도 이런 일에는 게으르지 않았나 생각된다. 물론 학문 연구에 치중하느라 이런 일에 소홀했을 수도 있겠으나 서구를 잘 아는 전문가로서 역사학에 바탕을 둔 그들의 특화된 시각을 독자들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소개해야 하지 않나 싶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의미가 있다.

어쩌면 일반 독자들에게 이 책은 생경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에 물든 우리는 생태주의를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는 데다 어려운 역사학까지 붙여 놓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용은 그렇게 고리타분하거나 현학적이지 않다. 오히려 저자의 일관된 입장을 따라가다보면 새로운 세계관이나 역사관을 가지는 데 적잖이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을 읽으면 이를 이해할 것이다.

˝객관적이고 중립저긴 태도를 견지하며 인간의 역사를 순수 학문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을까? 이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굴절과 오욕으로 점철된 역사 앞에서 중립적이란 존재할 수 없다. 부족하나마 자신의 관점과 의지를 따라 역사를 서술하는 것, 이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실천이며 행동이다.˝(10쪽)

이 책을 읽으며 내내 머리에 맴돈 것이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이란성 쌍생아 아닐까 하는 점이다. 서로 다른 듯하지만 닮은. 둘 다 경제중심적이고 물질만능을 추구하며 비환경적 이론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생태적 전환은 당면 과제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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