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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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같은 일을 겪었다 해도 어떤 사람이 글로 남긴 기록은 지겹고 지루한 반면 어떤 사람이 쓴 것은 잘 읽히고 재미있다. 이 얼마나 잘 읽히고 재미있게 쓸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능력치를 소위 말하는 글빨이라고 정의한다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글빨이 엄청나게 뛰어난 작가님이다. 특히 에세이를 쓸 때의 글빨은 가히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딱히 뭔가를 과장하거나 무리해서 강조하지 않고 담담하게 쓰는데도 그냥 글이 재미있다. 별 내용 없이 오늘 아침에 일어났는데 갑자기 장어가 먹고 싶어 져서 장어 먹고 왔어요같은 글 조차 몹시 재미있게 읽히도록 쓴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냥 엄청 쉽게 술술 읽히고 재미있다.


하지만 에세이 신작을 낼 때마다 내용이 점점 더 아무말 대잔치화 되어가는 경향이 있었다. 재미있게 읽긴 하지만 읽고 나서 이 정도로 아무말 대잔치여도 정말 괜찮은 건가…’ 하는 허탈함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 신작 에세이 고양이를 버리다가 출간되었는데 아무말 대잔치를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몹시 진중한 작품이었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 근대사의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작가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난징 대학살을 언급했다가 자국 내에서 엄청난 비판과 불이익을 받았다. ‘고양이를 버리다는 그런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본 제국 시대에 현역 군인으로 복무했던 본인은 아버지에 대해서 쓴 글이다. 그것도 20년간 절연하고 살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아버지에 관한 객관적인 기록들을 조사하고 더듬어 올라가며 쓴 글이다.


아버지의 행적에 대해서는 년도와 날짜까지 조사해가며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내심 아버지가 난징 대학살에 참가했던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다 입영일이 난징 대학살 1년 후인 걸 확인하고 안도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작가 본인과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거의 없고 그냥 사이가 나쁘다가 결국 절연하게 되었다 정도로 요약되어 있다. 감정을 극도로 절제하고 마치 제 3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듯 시종일관 담담한 태도를 유지한다. 읽는 이에게 그 어떤 날카로운 감정도 전이 시키지 않는다. 그렇기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은 이번에도 어딘가에 걸리는 부분 없이 쉽게 잘 읽힌다. 하지만 읽고 난 후 아무말 대잔치 스타일의 에세이 보다 훨씬 더 진중하고 무거운 감정이 남는다. 요동치는 감정을 절제하고 절제해서 담아낸 농도 높은 진심이 담겨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쓰려고 결심하고 나서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고민했다고 한다. 하지만 문득 어렸을 적 아버지와 고양이를 버리러 갔다 온 일화를 떠 올리고 그 부분을 먼저 쓰기 시작하자 그 뒤로는 막힘없이 한권이 술술 써졌다고 한다. 본문에 아버지와 작가 본인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의도로 절제한 듯 거의 없지만 결국 아버지와의 일화로 글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이것이 어째서 화해의 이야기인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라면 놓쳐서는 안되는 작품이다.


PS) 책이 엄청나게 예쁘게 나왔다. 책도 얇아서 무게 부담도 없으니 절대 이북으로 사지 말고 종이책으로 사길 권한다. 사진으로 보면 잘 모르겠지만 실제로 책을 손에 쥐어 보면 고도로 절제된 고급스러움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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