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혁명의 러시아 1891~1991
올랜도 파이지스 지음, 조준래 옮김 / 어크로스 / 2017년 11월
평점 :
[서평] 혁명의 러시아 1891-1991
OOO로 돌아가자! 라는 구호에는 항상 모종의 리스크가 따른다. 초기 교회로 돌아가자는 교구의 외침에, 프로이트에게 돌아가자는 라깡의 선언에, 맑스에게로 돌아가자는 수많은 좌파 인사들의 주장에는 모두 이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사실 굳이 멀리서 예를 찾을 필요도 없다. 우리는 연애 초기의 설렘으로 돌아가자는 연인들에게서, 2002년으로 되돌아가자는 국민의 함성 속에서도 비슷한 부담의 하중을 경험한다. 그러나 동일한 것을 반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언제나 실패하는 법. ’동일한 것의 반복‘이 필연적으로 실패일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들뢰즈를 참조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러한 반복을 몸소 체험하고 있고, 그러한 반복의 천명이 예고하는 실패와 좌절, 그리고 위험을 이미 삶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혁명의 러시아 1891-1991>는 이러한 반복에 대한 하나의 사례집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러시아의 반복‘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 역사적 사실로서의 이야기다. 스탈린, 후르쇼프, 푸틴 모두 저마다의 방식대로 '레닌에게 돌아가기'를 꾀한다. 러시아의 근대사는 레닌에게 복귀하고자 하는, 레닌을 반복하고자 하는 몸부림으로서의 역사다. 필자는 책을 읽는 내내 이것이 한 국가의 역사라기보다는 한 가문의 역사같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었다. 굳이 예를 들자면, 마치 영화 <대부>에서 돈 꼴레오네를 반복하는 마이클 콜레오네의 모습을, 그리고 그러한 반복 속에서 실패의 굴레 속으로 점차 침잠해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분명 역사서이고, 따라서 사건들을 나열하며 서술되어 있다. 그렇지만 필자는 책의 내용을 파악할 때 특정한 개인들을 중심으로 계열을 형성하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많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 사실 책은 은연 중에 독자로 하여금 그렇게 특정한 개인들, 즉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흐루쇼프 (독자에 따라 이 계열을 형성하는 개인들은 다소 다르게 선별될 수도 있을 테지만)를 따라 내용을 계열화시킬 수 있게 인도한다. 만약 역사서가 성공적인지 여부를 그것이 독자로 하여금 저마다 용이하게 계열을 형성할 수 있게, 하나의 지도를 그릴 수 있게 해주는 지의 여부에 따라 판단한다면, 이 책은 분명 성공적인 역사서라고 볼 수 있다. 필자의 계열화에 따르면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었다. 첫 번째는 레닌의 시기에 대한 이야기이며 두 번째는 스탈린의 시기, 세 번째는 스탈린 이후의 시기에 대한 내용이다.
’레닌의 시기‘는 1891년 대기근에서부터 시작한다. 러시아의 봉건주의가 최후의 단계로 치닫게 되면서 로마노프 황실의 무능함이 드러난다. 그러한 무능함은 1905년의 ’피의 일요일‘에서 극한에 다다른다. 레닌은 이 ’피의 일요일‘에서부터 시작된 일련의 저항과 봉기를 ’1차 혁명‘이라 간주하면서 그 혁명의 정신을 끝까지 밀고 나가고자 한다. 1917년 10월 혁명을 기점으로 레닌을 중심으로 한 소련체제가 구축되기 시작한다. 레닌은 지도자들 중에서도 다소 강경하고 극단적인 편에 속했다. 그는 소수의 무장한 볼셰비키 당원을 중심으로 한 혁명을 주장했다. ’무장화‘, ’다른 당의 배제‘는 그의 통치 방식의 중심을 이룬다. 레닌에 의한 소비에트 권력의 확립 과정에서 “자주 뒤따랐던 것은 ‘부르주아’ 소유 재산의 몰수였다. 레닌은 지역의 볼셰비키 지도자들로 하여금 일종의 복수에 의한 사회정의 실현의 형태로서 ‘약탈자들에 대한 약탈’을 조직하도록 독려했다.”(155p) 이런 과정에서 ‘쿨라크’라는, 볼셰비키가 만들어낸 ‘자본주의적 농민’이라는 유령같은 계급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허수아비에 대한 공격과 억압을 통해 레닌은 자신의 통치 기반을 강화했는데, 스탈린은 훗날 이런 전략을 받아들여 그 유명한 ‘대숙청’을 진행시키기에 이른다.
‘스탈린의 시기’는 1924년 레닌의 사망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강체추방시키고 지도자의 위치에 오른다. 그리고 그에 이어 러시아에는 피비랜내 나는 살육의 역사와 모든 자유 및 인권에 대한 탄압의 대서사시가 펼쳐진다. 필자는 세계사에 대한 지식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라 사실 스탈린에 대해서도 애매모호하게만 알고 있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느끼게 된 건... 그는 정말이지 ‘무자비한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앞서 스탈린이 레닌의 공포통치의 전략을 받아들여 대숙청을 일으켰다고 묘사한 바 있다. 그런데 저자는 레닌의 가혹함을 설명하면서도 레닌과 스탈린 사이에 분명한 구분을 짓는다. 그는 레닌의 통치에 대해 말하면서, 첫째로 보다 적은 인명이 희생됐다는 것, 둘째로 당 내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했다는 것, 셋째로 당 동료들을 정치적 견해로 살해하는 일은 없었다는 것, 넷째로 농민에 대한 정책 수립시 보다 농민 친화적이고 관용적이었다는 것을 근거로 스탈린이 분명 더 가혹한 인물이었음을 강조한다. 저자는 스탈린 통치 시기 대체 얼마나 많은 인명이 강제노동소로 추방되고, 살해되었는지 파악하는 것이 어려울 지경이라고 말한다.
사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스탈린의 시기’, 혹은 다른 말로 ‘대숙청의 시기’에 집중이 잘 됐다. 아마도 정신과 의사 특유의 호기심이 스탈린의 광기와 편집증Paranoia에의 이끌림을 야기한 게 아닌가 싶다. 도대체 그것들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이 질문은 사실 히틀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절대다수의 민중이 어떻게 한 개인의 광기를 그런 지경까지 방관하고, 또 유지하게끔 만들 수 있었던 것인가? 책의 저자는 나름의 이유에 대해 책의 이곳 저곳에서 그 이유들을 분석하고 있다. 필자가 사견을 조금 붙여 그 원인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앞서 말한 대숙청, 그리고 그로부터 연원하는 민중들의 ‘공포심’으로 일련의 결과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스탈린의 통치 시기 그 누구도 자신의 소리를 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숙청 시기 “매일 평균 1500명 가량이 총살당했”(283p)으며, “스탈린은 한 명의 첩자를 잡기 위해 수천 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체포”(286p)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밀고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이웃을, 가족을, 심지어 연인을 먼저 밀고하기에 급급했다. “대숙청이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동료, 이웃, 친구에 대해 밀고했”(292p)고,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시민으로서 본연의 책무를 하고 있다는 진정한 확신에 불타 맹렬한 고발장을 써댔다. ... 사람들은 남들이 자기를 비난하기 전에 먼저 그들을 비난하려고 서둘렀다.”(293p) 이 ‘공포’는 심지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적국들에 대항해 소련의 단합을 야기하는 기능을 보이기도 했다. 스탈린은 국민들이 전쟁에 나서지 않을 경우 그들을 체포하거나 강제수용소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지부조화에 의한 것이다. 인지부조화란 인간 심리가 ‘자신이 부정되어야 할’ 어떤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자기 스스로를 부정하고 개선되기보다는 차라리 해당 사건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변화시키는 편을 택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가령 흡연자는 폐암 환자의 사진이 걸린 담배갑을 보고 금연에 이르기보다는 차라리 ‘나는 폐암에 걸릴 리가 없다’며 태도를 수정하기에 이른다. 저자에 따르면 러시아의 민중들은 스탈린의 통치 내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고, 자신의 의혹을 억누르거나 소련 체제에 대한 믿음의 기본적인 틀을 유지하기 위해 그런 의심을 합리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297p)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의 틀을 유지하고자’했다는 것인데,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인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러시아인들 특유의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 정신’을 반복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봉건시대의 차르는 러시아인들에게 일종의 아버지와 같은 것이었다. 레닌과 스탈린은 이러한 ‘우상화’를 이용했고, 더 강화시켰으며, 그런 전략이 실제로 성공했다. 쉽게 말해 러시아인들은 그들의 역사 내내 ‘아버지는 언제나 옳아야만 한다’는 무의식적 압박을 받으며 성장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망상의 발전’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스탈린의 심리적 기제를 설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많은 정신분석학자들은 전통적으로 ‘미숙한 단계’의 정신구조일수록 ‘투사Projection’의 방어기제를 주로 사용하며, 따라서 타인에 대해 편집증적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게다가 개인은 성숙한 정신 구조에 이르렀다가도 크나큰 트라우마를 겪게 되는 경우 일시적으로, 또는 굉장히 오랫동안 편집증적인 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책을 통해 스탈린이 특히나 더욱 더 편집적이 되는 시점들을 마주치게 되는데, 그런 시점들의 공통점은 모두 ‘스탈린이 외부로부터 위협을 느끼거나 국가가 위태로울 때’라는 것이다. 어찌보면 스탈린은 그 스스로의 정신 상태 자체가 매우 취약했던 것이 아닌가, 따라서 굉장히 쉽게 편집증적 상태로 전환되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런 편집증적 상태는 사람들 사이에 매우 쉽게 전염될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진다. 편집증을 보이는 가장의 자녀가 종종 동일하게 편집증을 보이는 것에 대해 ‘유전이다’라고 한 마디로 결정내리는 것만큼 바보같은 짓도 없다. 한 가정의 부모의 영향력이 그러할진대, 한 국가의 지도자가 편집증적일 경우는 도대체 어떨 것인가. 게다가 여기에 덧붙여 ‘망상의 표면화’라는 측면도 있다. 국가 지도자가 적절한 규범을 제시하는 경우 망상체계는 표면화되지 않고 음지로 숨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경우 대부분의 망상 환자들은 병원이나 치료시설에로 수렴한다. 그러나 망상이 ‘정치적으로 허용’되는 상황에서는 이것들이 ‘정정당당하게’ 자신의 발언권을 얻으면서 표면화된다. 가령 자신들 안의 모든 부정적인 찌꺼기를 ‘흑인’과 ‘멕시코인’이라는 외부의 대상들에게로 투사하기에 급급한 현재 미국인들의 정신구조를, 트럼프라는 보호자의 승인 아래 자신들의 망상을 정정당당하게 설파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행태를 보라. 우리는 이를 통해 당시 러시아인들 내부에 자리잡았던 근거없는 공포와 편집증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스탈린의 시기’에 뒤이어 ‘스탈린 이후의 시기’를 기술하며 책을 끝맺는다. 스탈린이 갑자기 뇌졸중으로 사망하게 되면서 소련체제의 지도부는 스탈린이 저지른 만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한다. 고심 끝에 지도자 흐루쇼프는 모든 사실을 폭로하고 당의 신뢰를 회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폭로는 신뢰의 회복을 야기하기는커녕 오히려 소련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만 키운다. 이후 소련체제는 갑자기 몰락의 길을 걷는다. 이후 책에서는 고르바초프와 옐친 등을 거쳐 푸틴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러시아 통치자들에 대한 간략한 역사가 서술된다.
여기서 필자는 소련체제 붕괴 이후 러시아의 대처에 대한 부분이 많이 와닿았다. 이상주의자인데다가 민주적이기까지 했던 고르바초프의 통치방식에 이의를 제기했던 볼셰비키 강경론자들이 쿠데타를 감행하지만 실패하고, 이 틈을 타 민중의 세력에 힘입은 옐친이 등장한다. 그는 “러시아 내 소련공산당의 활동을 중지하는 법령을 발표”(419p)하고, 1992년 7월, ‘러시아판 뉘른베르크’ 심리가 열리게 된다. 과거 소련 공산주의자들이 법정 앞으로 불려오게 되고, 스탈린 통치 아래 그들이 휘둘렀던 만행과 범행들이 낯낯이 고해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1945년의 나치에 대한 재판과 달리, 범죄 행위로 기소된 피고가 한 명도”(425p) 나오지 않는다. “13명의 판사들 가운데 12명이 과거에 공산주의자들이었”(426p)기 때문이다. 대체 누가 누구를 처벌한다는 것인가? 자신들의 과거를 더럽힌 범법자들에 대한 안일한 대처는 결국 러시아 스스로 자신들의 역사를 엄밀하게 평가할 기회를 박탈하고 만다.
이에 대해 저자는 독일과 러시아의 처지를 비교하면서, 독일과 달리 1세기의 3/4가량을 소비에트 체제의 지도 하에 있었던 그들의 상황 상 엄밀한 자기비판이 불가능했음을 보인다. 소련에게 공산당이라는 것은 단순한 당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심지어 많은 “국민들은 ... 공산주의의 상실에 대해 ... 도덕적 공백을 느”(431p)끼기 했다. 이렇게 정리되지 않은 역사가 현대에까지 내려오면서 푸틴과 같은 정치가가 당선되기에 이른다. 푸틴은 “조국의 소비에트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오래된 세대에게서 인생의 의미를 빼앗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432) 말하며, “소련 시기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표현했다고 판단되는 교과서”(433p)들을 퇴출시키기에 이른다. 2007년 3개도시(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 울리야노프스크)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스탈린 치하의 집단 탄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반면에, ... 이들 응답자 중 3분의 2는 스탈린이 조국에 긍정적이었다고 여전히 믿고 있”었다. (434p)
과거사에 대한 러시아의 대처를 보면서 묘하게 대한민국의 역사가 겹쳐지는 것을 느낀다. 해방 당시 우리의 태도는 어땠는가? 우리는 정말 제대로, 일본으로부터 해방됐던 것일까? 또 한편으로는 소비에트 체제로부터 ‘도덕적 기준’을 부여받았던 러시아인들의 역사를 보면서, 현재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 겹쳐지기도 했다. 위대한 수령님의 미세한 동작 하나 하나의 변화에도 지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 세뇌된 북한 국민들에게서 그들의 ‘도덕적 기준’이 박탈되는 그날이 찾아온다면 어떤 일이 벌이질 것인가? 훗날 북한의 붕괴 이후 북한의 역사에 대해 이런 책이 발간될 날이 온다면, 그 책 속에서 김정은은 어떻게 평가되고 있을까. 필자는 책을 덮으면서 이런 여러 가지 질문들이 떠올랐다.